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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먼 옛날 전욱제는 남정 중重에게는 천문에 관한 일을 맡겼고, 북정 려黎에게는 지리에 관한 일을 맡도록 했다.
(전욱은 고양씨로 창의의 아들이고 황제의 손자이다.『좌전』에서 중重은 소호씨의 아들로 나오고, 려는 전욱의 아들로 나온다.)
주 선왕 때에 와서 려의 후손들은 그 관직을 잃고 사마씨가 되었다.
아..아..잘못 들어오신것 아닙니다.
밑에 알렉산드리아 글 있습니다.
먼저 꼽싸리로 이것좀 올릴려고요...밑에다 배치하려고 했는데.그렇게 하면 안 보실까봐..앞에다 놨습니다.
먼저 편의를 위해 이 책에 대해 설명 좀 하겠습니다.
혹시 이책을 한번 읽어 볼까 한다면 전 말리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책은 저에게 너무 음 뭐라고 해야 하나 단순 비하적이면 좀 그런데..저급,저하..아무튼 낮은....아이 그냥 막말로 수준이 너무 낮습니다.
왜 그런지 하나씩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자인..음... 좋습니다.
매 페이지 마다 칼라 테두리도 되어 있고..무뇌도 있나?.
아 쪽수는 600여쪽..전 두꺼운게 좋던데.;.
지도도 있고..
표도 있고.(아싸)
근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 즉, 내용
사실 저 중국역사 관련 코너에서 몇번이나 사기나 사마천님에 대한 책을 봤지만..빌리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전 춘추전국시대는 예전에 고사성어나..단편 지식으로 기억해서인지 몰라도..이상하게 별로 읽고 싶진 않더라구요..물론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나 제후국들에 대해 알고는 싶은데..이상하게도 사마천이나 사기로는 그것에 도달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그것을 책을 보지..
그리고 전 환빠나..민족빠는 아니지만 황제나..소호 금천씨 혹 중국 신화..전설에 대해 알고 싶은데...이것도 ...사마천이나 사기보다는 그냥 이것 전문 책을 보는게 낫고..
그래서 안빌리고 있다가 빌린게 바로 이 책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었는데...점점 읽어가면서 고조되고 감정을 북바쳐 오르고 아무튼 이번에 중국고대사 지식 충전 많이 하겠구나 했는데...고조되다가..저하되고...그렇게 안올라가고..
전 지식이 많다고 자랑하는 것은 아니다...그렇게 새로운 내용이나..저에게 필요한 부분도 적었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괜챦습니다.
저자의 자질문제이...
잘은 모르지만 마르크스 주의 역사를 이렇게 까지 저하 시킬다니...
계급이란 말이나 봉건이니(북한에서 조선왕조 관련 이렇게 봉건통치배니 뭐 하죠)
그리고 사마천에 대한 평가절하가 반고(역시 위대한 역사가, 한서를 집필했음.)때문이라면서 그 이후부터..좀 나쁘게 평하는데...그것은 위대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사마천사조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대청왕조의 청사고등도 기전체 체제인걸요..아무튼 엄청 드럽게 영향을 끼친 분이긴 하죠. 기전체는 본기의 기자와 열전의 전자를 합쳐서....본기와 열전이 있는 사서라구요..서書나 표票도 있고요..
이건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낡았다가 아니라..이 저자 수준이 낮은것 같습니다.
또 반복 되는 부분도 많아요. 그리고 동북공정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나.했는데.없고.물론 없어도 됩니다. 위만,조선 언급 부분도 그냥 서너줄인가 나오고...
근대 공산당 얘기도 좀 많이 나오고..
중국의 정식국호가 바뀌었나..갑자기 중화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하고..
이 사람이 무슨 중국사마천협회의 회원인데..원래 이 협회가 중국인이 아니면 가입을 안시킨다고 합니다. 근데 이 사람이 처음으로 가입했다고 하네요.
뭐 전 사마천님을 아주 훌륭하고 위대한 분이라고 여기지만 이 저자께서 이 협회에게 사마천조사의 고향을 무슨 유네스코인가 아무튼 문화유산 등록하라고도 했다네요..
뭐...전 동북공정때문에..중국에 감정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글을 보면..고구려 사랑하시는 분들을 화가 날지도 모릅니다.
너무 사마천에 대해 존경한나머지 태사공에 대해 비판도 없습니다. 보통 장단점이라고 하지만 사마천에 대해 워낙 본인이 당한 경험등도 있기에 단점이라고 하기보다는...(주변 민족은 모두다 황제의 후손이라고 한 것이나 사실 .화이사상 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단점이라고 볼수는 없죠. 중화사상도 엄밀히 말하면 당시의 세계관 이니까요) 아무튼
이렇게 학문적 수준이 낮은 것은 지배선의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평전 이후 오래만 입니다. (지배선님은 거슬린정도로 사마광을 비난했습니다. 아무리 동북공정도 그렇지)
그럼 이만..
다시 이책 속으로.....
조나라라 간 일족 중에는 검법을 잘 전수하여 이름을 날린 자도 있는데 괴외가 그 후손이다.
괴외의 현손 사마앙은 진 말기 농민 봉기군의 선봉장 진섭 밑에서 장군을 지냈던 무신군(지방 이름)의 부장이었다. 그는 기원전 206년 8월 초패왕이 18명의 제후왕을 봉할 때 은왕에 봉해졌다. 봉지는 조가(하남성 홍현 동북 옛 은나라 도읍지)였다. 이어 기원전 205년 한왕 유방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투항했고, 그 땅은 하내군에 편입되었다.(이 책에는 이부분에서 진나라 선제 사마의가 사마 앙의 후손이라고 나온다. 내가 아래에 적은 것과 틀림.)
사마천의 조상의 형제 후손 중에는 위나라 중산국의 재상이 된 사마 희(중산국 재상 사마 저가 사마 희의 후손처럼 보이게 표시 됐는데 사마 희와 사마 저가 동명인인것처럼 읽혀진다)도 있다.
사마천의 8대조인 사마조는 장의와 설전을 벌여 진秦이 한 漢이 아니고 촉을 치게 한 인물이고, 6대조인 사마근은 백기의 부하로서 장편 전투를 이끌었다.
사마천의 딸 사마영은 승상 양평후 양창의 아내가 되어 뒤에 양운을 낳게 된다.
사마천의 아들 사마임의 후손중에는 신 왕망때 자작에 봉해진 사마사통이 있고..후한말 제갈량의 스승인 사마휘가 있다.
그리고 사마천의 다른 아들 사마관의 후손중에는 매우 유명한 인물이 있으니 누구냐 하면 바로사마의 이다. (즉 사마천은 진晉나라의 황실의 선조이다.) 또 그리고 거기서 시대를 한참 내려오면 송나라의 대역사학자 사마광을 만나게 된다. 사마광도 알고보면 사마천을 조상을 둔 사람이다.
그리고 사마천의 외손자인 양운의 후손중에는 양진(누군지 잘 떠오르지 않음..삼국시대 인물인가?)이라는 인물도 있다.
(참고로..전한 이전 몇몇 기억나는 사마씨중에는 사마천 집안과 관계없는 인물도 있으니..유의 바란다. 사마 천보다 앞선 인물이었던 사마 상여는 사마 천 집안과 관계가 없다.)
현재 사마천의 고향에서 사마 천의 후손들로 보여지는 사람들 중에 성姓이 司성, 馬성, 馮성, 同성이 있는데... 이들 족보 등에 의하면 사마휘(앞서 말한 제갈량의 스승)의 후손들이다.
소량少梁이 서주 시대 한후의 봉지였기 때문에 ‘한혁도韓奕道’라 불렀다. 여기서 혁奕은 크다는 뜻이다.
기원전 645년 진晉과 진秦 두나라는 한원에서 싸웠고, 晉이 패하여 하서 땅을 진에게 바침으로써 진에 소속된다.
기원전 641년 진秦이 梁(약간의 시기에 따라 梁伯國이라도 함)을 멸망시키면서 이름을 소량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기원전 637년 진晉이 진秦을 정벌하면서 소량을 얻었다.
기원전 617년에 晉이 다시 秦이 정벌하여 소량을 취함으로써 다시 진에 소속되어 소량으로 부릴게 된다.
기원전 461년부터 기원전 330년에 이르기까지 秦이 소량 가까이에 계속 읍을 설치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소량은 위나라에 소속됨.
기원전 419년 秦 소량에서 위와 전투를 벌임.
기원전 362년 秦과 위가 소량에서 전투를 벌임. 이 전투에서 秦은 위의 장공 손좌를 포로로 잡고 소량의 인근 지역인 방龐땅을 손에 넣는다.
기원전 354년에는 진이 마침내 위의 소량을 빼앗는다.
기원전 330년 진은 지금의 한선 전 지역을 포함하는 하서(그 전까지는 晉에 속해 있었음)지역을 영토에 완전 편입시킨다.
기원전 327년 진은 이름을 소량에서 하양으로 바꿈.
진시황릉의 경우, 그가 즉위하던 기원전 247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기원전 210년 그가 죽은 뒤로도 계속되어 기원전 208년에 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본다. 전후 38년이 걸렸다. 한 무제의 무릉은 축조 기간이란 점에서는 진시황릉을 능가한다. 무제는 즉위한 이듬해인 기원전 139년부터 자신의 능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직접 터를 고르고 국가 세금 수입의 3분의 1일 쏟아 부어 기원전 87년까지 장장 53년 동안 공사를 거듭했다.
사마천은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 외동향 고문촌(용문채)에서 태어났다.
사마천은 1차 여행에서 회음(지금의 강소성 우이현 회음시)에서 회수를 거너서 동해를 따라 북상하여 문수(강이름)를 건너 제나라의 수도 임치(지금의 산동성 치박시)를 먼저 방문한 다음 태산에 오르고, 다시 문수와 사수를 건너 노나라의 수도 곡부를 찾았던 것 같다.
황하에서 갈라져 나온 제수의 지류인 문수는 태산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문수는 제나라 수도 임치를 남쪽으로 휘감아 돌아 동북쪽으로 선회한다.
한나라 무제는 오늘날 안휘성 잠산현의 天柱를 남악으로, 하북성 곡양현의 大茂山을 북악이라 했다. 동악, 서악 북악 남악 아시죠?
통일 후 진시황은 각지를 순행하며 문무대신 및 유생 박사 70인을 거느리고 태산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했다. 봉선에 앞서 유생들은 그 방식과 절차 등에 관해 한바탕 논쟁을 벌였고, 참다못한 진시홍은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자기 방식대로 의식을 거행했다.
무제는 54년의 재위 기간 동안 약 30차례 이상 지방 순시에 나섰다. 이밖에 사냥 등 가벼운 출행을 합친다면 횟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참고로 무제는 기원전 138년 19세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미행에 나서 종남산(지금의 섬서성 서안 동남) 아래에서 사냥을 하다가 농민들의 농토를 망치는 바람에 욕을 먹는 등 봉변을 당한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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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44년 태형으로 목숨을 보전하는 사람이 없자 태형의 양도 줄이고 태형 도구와 방법 등에서도 완화 조치를 내림.
기원전 133년 6월에 신성新星이 나타남(신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
기원전 130년에 진 황후가 무고로 폐위되고 300여명이 연루되어 죽는 사건이 벌어진다.
기원전 127년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 박사가 됨.
기원전 118년 한나라, 간의대부를 둠. 말馬이 귀해지자 백성들에게 말 기르기르 장려하기 위해 수말 값을 한 마리에 20만 전으로 조정함.
기원전 102년 거연택(지금의 감숙성 제납기 동남)에 처음으로 성을 쌓았다(여기에서 한나라 시대의 기록인 거연한간이 출토되고 있다).
기원전 99년 사마천의 나이로는 49세에 이릉 사건에서 그를 변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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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랑夜郞, 공邛, 작苲,차란且蘭, 전국滇國 (당시 서남이 라고 불린 지역들)
‘서남이’는 역사적으로 진나라 때 중앙 조정의 통치를 받았으나 진이 망한 뒤 통치가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서한 고후(여태후) 6년인 기원전 182년, 일부 지역에서 시장을 열며 무역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135년 당몽의 건의에 따라 야랑을 이용하여 남월을 정복한 다음 야랑의 우두머리를 복속시키고 한나라 제도에 따라 관리를 두고는 그 아들을 현령으로 삼기로 약속했다. 한 왕조는 야랑 지구에다 건위군을 두는 한편 병사들을 보내 북도(사천성 의빈현 서남쪽 안변진)에서 牂牁江에 이르는 ‘남이도’를 개통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몽이 촉에서 병사들을 대거 징발하고 일부 부락의 수령들을 법대로 죽이는 사건이 벌어져 파촉 지역민들의 원성을 샀다. 이런 상황을 보고 받은 무제는 촉군 성도 출신의 사마상여를 그곳으로 보내 지역민들을 무마시키려 했다.
기원전 111년, 사마천이 서남이에 파견된 그해 한나라는 남월을 격파한 다음 남이를 평정하고 장가군을 설치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서남이의 수령들을 반란 명목으로 제거하고 월수군과 심려군 그리고 무도군을 설치하여 내지와 마찬가지로 군현제를 실행한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기원전 138년에 태사령으로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이당시 사마천은 8세, 기원전 145년 태어났다면)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마담은 태사승으로 입사했고, 그 연대는 기원전 139년이라고 한다. 이 무렵(태사승이 되기전에 발표한것인지 된 후인지는 모름) 발표한「논육가요지」는 당시 황로 사상 신봉자인 무제의 할머니 두태후에게 좋은 느낌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제는 바로 백가를 내쫒고 유가를 뭐더라 존숭 정확한 표현이..아무튼 그것이었으니...사마천의 아버지의 앞날이.... 사실 사마천도..황로쪽에 더 가깦다. 당시 유명한 학자 동중서 등과 다소...찌릿찌릿(그런데 사마천은 동중서및 공자의 후손 공안국등으로부터도 학문을 어떻게 한 관계인듯 하다. 아마..제1차 여향을 갔다오고 난 이후 그가 28세 낭중이 되기전 사이일듯..)
그때까지 한나라는 10월을 한 해의 첫 달로 삼는 진나라의 역법을 계속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초하루와 그름에 달이 보이고 상현과 하현 때 보름달이 나타나는 등 날짜와 천문현상이 맞지 않는 일이 수시로 나타났다.
무제의 폭정으로 마침내 기원전 99년 대제국 서한 내부 곳곳에서 민중 봉기가 터져 나왔다.
한 무제 시기보다 다소 후대이지만 기원후 2년 인구통계를 보면 당시 서한의 인구는 5959만 명으로 되어 있다. 이는 진시황이 통일할 당시 2천만 명에 비해 3배 가까이 늘어난 숫자다.
무제 통치기 대흉노 정책 변화
기원전 140~기원전 134 제1단계 대흉노 반격을 가하기 위한 준비 단계
기원전 133~기원전 127 제2단계 대흉노 전면적 반격의 서막
기원전 126~기원전 117 제3단계 대흉노 전면 공격
기원전 116~기원전 101 제4단계 쌍방 휴전기
기원전 100~기원전 87 제5단계 전투 재개 및 한의 실패
혹 한번쯤 들어봤을 한나라의 명장들
위청, 이광리, 곽거병(위청의 조카), 이광(앞의 이광리와 헷갈리지 마시길..) 그리고 이릉
근데 이중 소인배기질이 넘치는 아니 실제로 능구렁이 겉과 속이 다른 인물들이 있다.
바로 누구냐 하면...
위청
이광리
곽거병이다.
놀라운가?
이들은 모두 흉노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한나라의 명장들이라는 이미지 때문에..근데 알고보면 이들은 간신들이다.
이중 이광(이릉의 할아버지)과 이릉만이 참 인물이다.
근데 왠지 이름이 너무 구수하다. 그러고 보니..당나라 안록산의 난 시기에도 곽자의(곽자흥이 아님. 곽자흥은 주원장의 의부(드라마에서 이렇게 나오던데) 아무튼 상관임.)와 더불어 아무 유명한 이 뭐시기 장군 있는데....
이광의 막내아들인 이감의 딸(즉 이릉의 사촌)이 있는데 태자의 희첩으로 총애를 받았다. 뒤에 창읍왕을 낳게 된다. 이감의 아들 이우 역시 태자의 총애를 받았으나 재물을 좋아했다. 이우 때에 와서 집안이 몰락한다.
위청은 무제의 총애를 받은 위 부인의 동생이었고, 청년장군으로 불리는 곽거병은 위청 다른 누이의 아들이었다.
궁형에 대해 일찍부터 그 잔인성을 의식하여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고, 실제로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시점으로부터 약 70여년 전인 기원전 167년에 궁형을 폐지하라는 조치가 취지기도 했다. 그러다 경제때 다시 부활한다.
궁형은 먼저 성기(고환까지 포함해서)를 끈으로 꽁꽁 묶어 피가 통하지 않게 하여 자연적으로 기능을 상실하게 만드다. 그런다음 날카로운 칼로 성기 전체를 잘라낸다. 그러고는 향회라는 지혈제를 뿌려 지혈한 다음 거위의 깃털로 요도에 박는다. 며칠이 지난 뒤 거위 깃털을 뽑는데, 오줌이 나오면 궁형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다. 궁형을 당한 사람은 일시적으로 어둡고 따뜻한 잠실이란 곳으로 보내져 요양하게 하는데, 이는 궁형을 당한 사람이 찬바람을 쐬면 목숨을 잃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66세의 무제는 꽤 오래전부터 황제 자리를 어린 유불릉(손자)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밝혔다.
『사기』가 참고한 서적을 보면
육경 및 그 주석서가 23종으로 (23%), 제자백가서가 52종으로 (51%), 고금 역사서 및 황실기록이 20종으로(20%) 문학서가 7종(6%)이다.
『사기』의 관심은 봉건사회에서 천한 직업으로 간주되었던 의사에 대한 전문적 기록을 남긴 데서도 잘 드러난다.
『사기』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대체로 600년에서 604년 사시 일본이 처음으로 수나라에 보낸 사신에 의한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사마천의 죽음에 관해서는 역대로 이런저런 설이 많았다. 정상적인 죽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행방불명이나 자살, 처형설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사망설 중 최근 들어 처형설이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단편적인 기록과 사마천 사후 그 후손들의 행방을 통해서일 것이다.
지천진(芝川鎭)에서 동남으로 2킬로미터 정도 가면 작은 시내가 흐르는 데, 옛날 이름은 도거수 陶渠水였다.
사마천은 중국 경내의 여러 민족들을 크기와 지역에 관계없이 모두 염황의 자손으로 간주했다. 그러면서 민족 대일통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민족관은 공교롭게 금이나 원 통치자의 요구에 맞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사마천을 특별히 존중했고 그의 사당과 무덤에 대해서 특별 대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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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6년 한성 지구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1877년에서 1879년까지 큰 가뭄이 들었다.
갈석산(하북성 창려현 경계), 요서군(하북성 노룡현 동쪽)
于是:‘그리하여’, ‘그리고’, ‘이윽고’,‘그런 다음’등으로 해석
직하稷下학파:稷門부근에 설립.
작책作冊:상나라때 사관.
탁록은 대代의 동북쪽에 있다. 계에서는 서북쪽 방향에 있는데 대에서 보다 거리가 더 멀다. 혹시 이부분을 보고 환빠 느낍 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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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구역
서쪽:라코티스 (이집트인구역)
중앙북쪽:브루케이온(그리스인구역)
동북쪽:유대인구역
마레오티스 호: 알렉산드리아 남부에 위치. 나일강으로부터 끊임없이 강물이 흘러들었던 담수
강수량-이집트에서 가장 많음.(알렉산드리아를 말하는 것임)
상수도-촘촘히 연결돼 있는 빗물통을 통해 전염병이 빠르게 퍼질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어디더라...해안지역인가...아무튼 주로 석회석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구역:대중 집회와 이 집회의 논제를 준비했던 하나의 위원회, 그리고 선툴된 관리, 법원 씨족 공동체는 몇 안 되는 시가만을 포괄했다. 그런 씨족 공동체 12개가 모여 일종의 시구인 데모스로 통합됐고, 다시 그런 시구 12개가 모여 하나의-'시의 행정구역'이라 할 수 있는-부족주를 형성했다.
그리스 알파벳의 첫 다섯 철저-알파,베타,감마,델타,엘타-를 따른 5개의 행정구역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시구역은 델타란 명칭
하위 그룹에 속하는 데모스와 씨족 공동체들은 서수로 표기됐고, 나중에 부족주는신의 이름이나 왕실에 속하는 인물의 이름을 얻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폴리스였으나, 왕의 의지로 부터 결코 자유럽지 못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화폐주조권을 갖지 못하였다.
기원전 3세기 초에 주민 수가 10만 명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늦추 잡아도 기원전 200년이면 알렉산드리아는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된다. 기원전 1세기에 30만 명의 자유인이, 노예를 합치면 50만 명의 이상의 사람이 이 도시에 살았다.
교통망:도로들은 모두 폭이 7미터였고, 서쪽의 '딜문'에서 동쪽의 '태양문'까지 가로지르는 대도로와 포세이도니온에서 남쪽으로 뻗은 대도로는 폭이 14폭에 달했다. 각 도로들 사이의 간격은 대체로 약 280미터였다. 열한 개의 간선 도로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각각 330미터 간격을 두고 뻗어 있었는데 이들 도로의 폭은 동서 도로의 폭과 같았다.
파로스 등대:130미터 이상의 높이로 밤에는 50킬로미터 이상 되는 거리에서도 보임.
등대 가까이에-아마 파로스 섬 위에-이시스 파리아의 신전이 있었다.
파로스 등대는 1303년 혹은 1323년 있었던 대지진때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 해안선의 근처에는 암초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수심이 매우 얕았다.
알렉산드리아 중심지역
로키아스 반도 왼편에는 궁전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하나같이 거대한 녹지 속에 파묻혀 있었는데, 이 노지의 화려함은 그 속에 지어진 건물만큼이나 경탄할 만하다. 이 녹지 속에 어우러진 거대한 궁전 건물군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깊숙히 도시 안으로 침투했다. 처음에는 도시 전체의 5분의 1에 불과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엔 3분의 1이나 됐다. 병영들은 동쪽 도시 끝에 위치했다.
기원전 219년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그들의 왕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기려했는데, 이때 그는 이 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포로돌을 해방시키려던 그의 시도는 허사로 돌아갔고, 본거지에서 개혁자로서 실패한 그는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포세이도니온 반도의 언덕에서부터 카이사레움까지는 "외국인 장터"라 불리는 곳이 있다. 멀리서 온 배들은 이곳에 닻을 내렸다.
북남쪽으로 뻗어 있는 대도로에서도 항구에서와 비슷하게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신분이 높은 상류층 들이다. 거리 양쪽으로 궁전, 관공서, 사원, 그리고 그리스 및 이집트 신의 석주 비문들이 다채롭게 늘어서 있다. 공공 건물들 외에 이젠 알렉산드리아의 대표적인 저택들도 더 자주 나타나며, 그 사이사이에 화려한 꽃과 분수가 어우러진 정원들이 있었다.
중앙의 두 대도로가 만나는 교차하는 곳이 알렉산드리아 광장이고 그곳의 중앙에 성문이 장식되어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서 우리는 아고로를 볼수 있다. 태양을 든,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수호신인 아가토스 다이몬(agathos Daimon)의 사원이 잇었고, 이 사권 근처에는 또 수호 여신이었던 이시스-티케(Isis-Tyche)의 성전인 티카이온(Tychaion)이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는 판 신의 성전이 솟아 있는데 판 신은 영원히 사랑에 빠져 있는 음탕한 숲의 악령이자 염소 떼의 보호자로서 그리스인들에게 평화로운 자연의 상징이 됐다. 그의 신전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하늘 높이 치솟은 이 언덕의 음청난 윤곽은 멀리서도 두드러져 보인다.
서쪽 어딘가에는 있었던 대형 체육관의 길이는 1스타디온이었고 주랑 홀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근처에 이집트 왕국의 최고 법원과 신성한 작은 숲들이 있었다.
서남쪽 웅장한 시 외벽의 언덕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가장 크고 화려한 신전인 사라페이온(Sarapeion:평균 해면보다 22미터 위에 세워져 있다)이 있는데 여기에 가려면 100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근처에는 순수 그리스적인 경기장이 있었다.
무세이온-플라톤의 전통에 따라-학문 교육의 장소로 뮤즈 여신들을 숭배하는 데 사용됐다. 4세기의 그리스인 작가 리바니우스에 의하면 무세이온은 시의 베타(B) 구역-여기엔 중요한 천문학적 기구가 있는 주랑도 있다-의 티카이온(Tychaion) 옆에 위치했다. 무세이온에서 알렉산드리아 대학이 생겨났다. 바로 이 대학 덕분에 수많은 그리스 문학 작품들이 복원되고 학문 분야의 전성기를 꽃피워 후세에 전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동쪽으로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노푸스에는 가장 중요한 사라피스 신전 외에도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세운 오시리스 신전, 이시스와 아누비스 신전들이 더 있었다.카노푸스는 이집트-그리스 신들의 신성한 영역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최고의 유흥지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숭배되는 네이트(Neith)는 바다의 수호 여신이다.
관세의 십분의 일은 항구 도시 호네(Hone)에서 거두어들여졌다. 10%의 세금이 나우크라티스에서 운송되는 모든 화물에 부과됐는데 이돈도 역시 네이트 신전의 몫이었다.
같은 이름의 호수의 서남쪽에서 나일강까지 벋어있는 마레오티스는 수많은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이다. 서쪽으로 길게 뻗은 마레오티스 호수의 지류는 이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수도까지 편하게 운송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장래문화: 화장은 특히 그리스인들에게 친숙했던 매장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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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년 4월 7일 알렉산드리아가 건설개시.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를 떠나기 전 그곳 관료 체제를 권력 분배 원칙에 따라 조직했다. 그는 세금 징수를 위해 최고 검열과늘 임명했느데 그 검역관은 어느새 포괄적 전권을 지닌 총독으로 승진했다. 그가 바로 이집트-그리스 도시 나우크라티스 출신의 클레오 메네스(Kleomenes) 였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지휘부는 그 외에 총독통치령도 배분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이집트 통치의 초기 몇 십년 동안 두 명의 파라오, 즉 알렉산드로스의 형인 필리포스3세(기원전 323~316)와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기원전 316~304)의 아래에 있었던 총독 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322년 키레네 귀족들의 국부족 권한을 보장해주는 듯 하면서 내정 개입을 하여 결국 합병 해버렸다.
알렉산드로스는 분명 시와 오아시스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던듯 하다. 그가 죽은 뒤 사람들은 시체를 우선 미라로 만들었고 영구차를 만들었다. 이 작업에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뒤 중요한 귀족 기병대의 지휘자였던 페르디카스는 주은 알렉산드로스를 왕들의 옛 묘지인 마케도니아의 아이가이로 가져갈 것을 명령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321년 지중해 해안으로 이동하고 있던 장례식 행렬을 시라에서 붙잡아 산아귀에 넣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시신을 우선 이집트의 옛 수도인 멤피스에 매장하게 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311년 프톨레마이오스는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기게 했다.
기원전 306년 프톨레마이오스를 위시한 몇몇 알렉산드로스 후계자들이 왕의 칭호를 취하게 됀다.
기원전 273년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사절단을 로마에 보냈다. 이는 당시의 헬레니즘 통치권자에겐 흔치 않는 일이었다. 그는 로마인과 카르타고인 사이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고,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기원전 241년에 처음으로 로마 외교 사절단을 자신들의 도시에서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기원전 222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즉위 후, 삼촌과 자신의 친형제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 베레니케 2세를 살해했다. 이 외에에도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해 됐다. 이는 강장 강력한 권세를 휘두르던 소시비오스(Sosibios)의 행위 인듯 했다.
안티오코스 3세가 이집트를 공격했지만 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 이집트가 승리하게 된다. 이번 승리는 처음으로 마케도니아 군대 외에 이지트 본토 병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기원전 205년에 테베에서 하론노프리스의 지휘 아래 반란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204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사망했고 이후 10년간 혼란이 지속된다. 이동안에 외부에 있는 속령들을 대부분 잃게 된다. 그에 발맞추어 경제 위기가 진행됐다. 주화의 재료가 은에서 동으로 대체된 것은 분명한 경제 위기의 신호였다.
기원전 197년은 이집트의 거대 외교 정책의 종말을 고하는 해였다.
기원전 170년 형제간인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3인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때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에 처들어 이집트 군대를 무너뜨렸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안티오코스 왕과 타협하는 동안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주민들이 대거 참여한 상황에서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유일한 왕으로 선포됐다. 안티오코스는 합법적인 왕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지중해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했다.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포위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로마로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지만 그곳으로부터 군사적 원조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위협적인 상황이 오래 지속될수록 시 외벽들이 무척 공고하다는 것과 행정이 부드럽게 잘 돌아간다는 사실이 더 분명히 드러났다. 게다가 주민들은 전력을 다해 적에게 저항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들 스스로 왕의 선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고 느낀 안티오코스는 돌격 명령을 내렸으나 실패한다. 그사이 나일 강 만조가 시작됐고 이것이 안티오코스의 군사 작전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알렉산들리아는 살아남게 된다. 결국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이의 개입 아래 시리아로 퇴가해야 했고 다시금 3인 통치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는 다시 이집트에 진군해서 자신이 이집트의 왕임을 천명했다. 안티오코스 군대가 기원전 168년에 진을 치기 시작하자 첫 공격을 극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두 번째로 장벽 뒤로 피신해야 했다. 희망의 염원이 또다시 로마로 향했고 이번에는 외면당하지 않았다. 한편 이해 6월 22일, 로마인들은 마케도니아의 피드나에서 마테도니아의 왕 페르세우스를 제압했다. 로마의 외교 사절 포필리우스 래나스는 안티오코스 4세에게 이집트에서 물러날 것을 중용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외 지역인 엘레우시스에서 로마의 사절은 안티오코스를 만났다. 왕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그는 로마의 최후 통첩을 전달했다. 이 최후 통첩은 이집트로부터 즉각 퇴각이란 단하나의 항목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티오코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청하자 래나스는 막대기로 그의 둘레에 원을 그린 뒤 "당신이 이 원에서 나가기 전에 나가기 전에 내가 원로원에 무엇을 보고해야 하는지 답하시오!"라고 요구했다. 결국 안티오코스는 그 요구에 굴복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는 다시 살아남게 된다.
이집트의 이 형제 세 왕들은 단독 통치를 위한 싸움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지배자들 사이의 분규는 기원전 163년 잠정적으로 제국의 분배와 함께 끝이 났다.
기원전 145년에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죽은 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6세의 미망인이자 자신의 누이인 크레오파트라 2세와 결혼했고, 142년에는 자신과 클레오파트라 2세 사이에서 난 딸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결혼했다. 이 이중 결혼은 두 여왕과 그녀들의 신하들 사이에 대규모의 군사적 충돌을 불러일으켰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최악의 결과를 몰고 왔다.
기원전 132년부터 그 갈등은 공공연한 내전으로 발전했는데 이 와중에 궁궐이 불타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군인 회의는 프톨레마오스 8세의 직위를 해제한 뒤 그를 수도에서 추방하고 클레오파트라 2세의 단독 통치를 결정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클레오파트라 2세의 아들을 살해해 버렸다. 그는 그 아들의 머리와 두 다리와 두 손을 잘라내게 한 뒤 토막 친 시체를 클레오파트라 2세의 생일 축하연에 보냈다. 클레오파트라 2세는 시체 토막들을 공개적으로 전시해 포톨레마이오스 8세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인들의 증오를 부추겼다. 기원전 126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대규모 소각을 통행 원수를 응징했다.
모녀 지간인 두 여왕이 화해하긴 했지만 수도와 나라의 회복은 더디게 진행됬다. 기원전 116년 클레오파트라 2세가 죽자 클레오파트라 3세가 프톨레마이오스 8세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9세 필로메토르(어미니를 사랑한 자) 소테르 2세와 공동 통치를 했다. 사실 누가 자신과 공동으로 나라를 통치할 것인지 결정하는 사람은 그의 어머니 였다. 그녀가 알렉산드리아에 아들이 자신을 암살할 계획을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백성들을 그를 수도에서 쫓아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 대신에 클레오파트라는 그보다 어린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를 공동토잋자로 선택했다. 그녀의 권력욕은 그녀가-남성 전유물이었던-최고의 사제직, 즉 알렉산드로스-사제직을 떠맡은 데서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기원전 101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자신의 어머니를 살해된다.
기원전 88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이집트를 로마에 상속한다는 유언은 미리 해두었다. 유대인에게 치절한 그의 태도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의 주민과 군대가 봉기를 일으켰고 그는 추방당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이들은 그의 경쟁자인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불러들였다. 같은 해에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죽자 로마는 이집트로 처들어올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원전 80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1세 알렉산드로스 2세가 자신의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4세와 결혼한 지 18일 만에 그녀를 살해하자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그를 궁전에서 질질 끌고 나와 린치를 가했다.
기원전 59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알렉산드리아의 내부 혼란 때문에 이집트에서 도망치고 그의 맏딸 베로니케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다. 그는 로마로 갔다. 로마 군대의 원조를 받아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그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게 많은 바치고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오랜 내정 다툼 끝에 카이사르의 지휘 아래 원로원 및 민중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벌써 오래전부터 계획된 이집트 합병을 포기하고 그 대신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로마인의 친구이자 동맹자로 부르자는 결의였다.
기원전 55년 알렉산드리아는 베로니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가비니우스가 지휘하던 로마인들에 의해 점령된다. 자신의 적들, 그리고 특히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복수가 퀘도를 이탈하지 않았던 것은 가비니우스 덕분이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베로니케를 죽이고 또 긴히 돈이 필요해서 몇몇 부유한 알렉산드리아 사람들도 죽였다. 그는 자신의 정(正)채권자인 로마인 라비리우스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으며 거의 그의 수탁자로서 4년을 더 통치했다.
알렉산드로스-제식은 기원전 290년부터 전국에 걸쳐 행해진 듯하다. 그것의 맨 꼭대기에 있던 사람은 알렉산드로스-사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자신의 부친을 구원의 신으로 승격시켰고 프톨레마이아(Ptolemaia)라는 화려한 축제를 만들었다. 이 축제는 4년마다 개최됐으며 온 세계로부터 방문객들을 알렉산드리아로 끌어들였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누이이자 왕비인 아르노시에 2세는 이집트에서 여신으로 숭배받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는 댚적인 그리스 지식인들을 알렉산드리에서 추방했다.
이집트인들이 전국에서 수백만에 달한 반면 그리스에서 이주해온 이들은 수천에 불과했다.
나우크라티스처럼 그리스인들이 사는 도시에는 폐쇄적인 주택지들이 있었고, 남부 이집트의 엘레판티네에는 민간인과 군인들로 구성된 유대인 집단이 있었다.
기원전 150년 이후의 알렉산드리아 발전사에서 우리는 이탈리아 상인그룹들의 증가를 볼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기원전 320년 이후부터 여러 번 팔레스티나로 출정을 감행했다. 그 결과 아리스테아스의 편지가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해가 지나면서 5000명의 유대인이 이집트로 왔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통치 기간 이래로 왕의 유대인에 대한 저대적 행동이 심해진다는 소문이 쌓여갔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유대인들에게 디오니소스의 표식인 담쟁이덩굴 잎-당시에 유대인들의 신은 이것과 동일시됐다-을 문신으로 새겨 넣으라고 명령해다 한다. 그러다가 많은 유대인들을 이집트로 데려왔던 프톨레마이오스 6세 치하에서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마카베오 반란이 일어나자 많은 유대인들이 이집트로 이주했다. 그중 유명해진 이들은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의 아들(그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다)과 같은 유대인 구족 가문 사람들이었다. 이 오니아스 4세와 함게-그는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적인 것을 좋아했던 듯하다-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궁정에서의 유대인의 영향력을 절정에 달했다. 그는 그의 시종 도시테오스와 함께 왕의 군대를 지휘했다. 도시테오스가 죽은 뒤 오니아스가 프톨레마이오스 7세에 반대하여 클레오파트라 2세 편을 들었을 때 그의 영향력은 더 상승했다. 여왕은 유대인들이 특권을 부여받도록 조처했던 것이다. 그사이에 유대인의 숫자는 엄청나게 증가했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그들에게 형식적 조직체인 폴리테우마(Politeuma)를 허락했다. 유대인들은 함께 살아도 되는 권리를 얻었던 것이다. 처음에 이것은 분명 하나의 영광이었다. 왕도 친히 이 공동체가 잘 지내는지에 관심을 기울였고, 유대인 지식인들은 그에 대한 사례를 했다. 가장 유명한 유대인 대표자중 한 사람인 철학자 아리스토불로스(Aristobulos)는「모세 1경」의 해석을 왕에게 바쳤던 것이다.
폴리테우마는 도시나 국가에 정착한 인종 그룹으로서 특정 권리를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누렸으며, 민족적 요소뿐 아니라 종교적 요소도 지녔다. 하지만 그 공동체의 독립성은 제사와 사회분야에 제한돼 있었고, 정치적 자율성은 결코 그것과 결부돼 있지 않았다. 또한 이집트에는 유대인 폴리테우마가 하나만 있었던 게 아니라 여러 개가 있었고, 이중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것이 가장 컸다.
이 시기 폴리테우마는 귀족적-과두 정치 사회의 특성을 지녔던 듯하다. 요세푸스가 인용하는 스트라보는 그 폴리테우마를 이끌었던 어느 지도자에 대해 언급하면서 순전히 유대인의 문제일 경우 그 공동체는 대체로 독립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법원, 기록 보관소, 자체 내부 행정 기구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폴리테우마의 지도자는 게루시아(Gerusia,장로 회의)의 지지를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통치는 엄청난 결과를 몰고 왔다. 그의 두 왕비 사이에 벌어졌던 분쟁에서 유대인들은 클레오파트라 2세의 편을 들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두 여인이 화해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8세라는 원수를 갖게 됐다.
다시 요세푸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코끼리들을 취하여 유대인드렝게 덤벼들게 했지만, 코끼리들은 오히려 자기편 군이들에게 대들었다 한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매년 그 권의 기적을 축하하는 축제를 거행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유대인과 싸우던 셀레우코스 왕을 군사적으로 원조했던 반면,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유대인 편을 들엇다.
기원전 2세기 초반 로마인들이 그리스 동부 세계에 침입해서 그것에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들의 통치권을 세우고 유대인들을 특별히 보호했는데, 그럼으로 유대인들은 추가적으로 반로마적개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로마가 그들에게 보장했던 내용 중의 하나는 폴리테우마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나중에 이 관해을 중지시킬때까지 자체 사절단을 로마에 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마카베오 제1서」의 저자는 로마의 축복을 찬양하고 로마인들을 은인이라고 찬미한다.
기원전 55년 시리아의 총독이던 가비니우스는 포톨레마이오스 12세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군부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당시 유대인 부대가 이집트의 펠루시움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가비니우스를 지나가게 해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카이사르가 시리아로부터 육로를 통해서 오는군사지원 부대를 절박하게 기다렸을 때였다. 당시 유대인 군사들은 협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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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의 영향력은 모든 이집트 공동체들을 능가했다. 이들 유대인중 많은 이가 그리스어만을 사용했다.유대인 저술가 아르타파노스(Artapanos)는 모세가 동물 숭배의 시조라고 말함으로써 이집트인들과의 연결도 시도했는데, 그것은 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는 가짜라는 것이 확실하다. (이부분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기억이....)
이집트인들은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승리에 취해 떠난 게 아니라 유대인 때문에 전염병이 퍼져서 가지네가 그들으 쫓아냈다고 말했다. "사바트(Sabbat, 안식일)"란 유대인 단어는 사타구니 부근의 종창을 뜻하는 이집트어 사바토시스(sabbatosis)와 비슷하다. 이동 시기에 유대인들은 고통을 참기 위해 이 종양을 눌렀으며 매번 7일째가 되면 종양 때문에 쉴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유대인들은 쉬는 날인 사바트를 갖게 됐다. 이렇게『아에깁티아카Aegyptiaca』에는 아피온(Apion)의 주장이 실려 있었다 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아피온은 유대인 혐오자 이다. 유대인들이 나귀 경배 소문도 아피온이 퍼떠려다고 한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이자 이집트의 사제였던 카에레몬(chaeremon)은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즉위식을 축하라거 갔던 알렉산드리아의 외교 사절과 동일인일지 모른다. 그 역시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파라오 보코리스(기원전 717~711) 때에 이집트에 추방돼 모세의 인도 아래 그들 고향으로 돌아갔던 문둥병 환자들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카이사르에 의하면 갈리아 지방에서 매년 4천만 세스테르티이에 달하는 세금을 거두어들였다고 한다.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 때 이 액수의 약 8배에 달하는 금액을 그들의 통치자에게 갖다 주었다.
곡물과 포도, 과일과 기타 경작물 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들은 모든 방목지에도 과세를 했다.
비둘기는 이집트 농업에서 특별하고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둘기는 백성의 식다에서 가장 싼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사치였을 뿐 아니라 엄청난 양으로 만들어 내는 훌륭한 거름 때문에 귀하게 여겨졌다. 비둘기 '수확'의 3분의 1이 왕의 몫이었다. 비둘기 '수확'이란 것은 비둘기와 비둘기 새끼의 수를 측정하고 시장 가격도 고려해서 얻어냈던 듯하다.. 전반적으로 모든 개개인의 가축은 세굼을 징수할 목적으로 행정 관청에 의해 세심하게 등록됐다. 공식적인 가축 수 조사는 예를 들어 나일 강물이 완전히 불었을 때 행해졌다. 이때는 가축이 어쩔 수 없이 제방 위로 전부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는 민간 산업과 민간 영업이 경제 생황을 결정 지었다.
기원전 259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포괄적인 세법에 의한 식물성 기름 전매는 이집트에 가장 많이 퍼져있는 기름들 생산을 통제햇다. 토지 관리에서 포톨레마이오스 왕조 왕들은 대체로 파라오 때의 체제를 수용했다. 파라오 때의 체제는 이집트를 약 40여 개의 행정 구역(nomoi)으로 나누었고, 이 행정 구역은 다시 하부 지역들(topoi)로 나누어졌으며, 하부 지역은 또 마을(komai)로 나뉘었다. 각 부분들은 노마르크(Nomarch), 토파르크(Toparch), 코마르크(Komarch)의 지배 아래 있었다.
행정 구역과 하부 지역별로 식용유 채취용 식물을 분배해야 할 모르겐(Morben:약 2에이커)의 숫자를 확정하는 정확한 파종 계획표를 중앙 행정부터가 매년 제시했다.
농산물 회수와 운반을 위해서는 국가가 부가적으로 개인 사업가를 참여 시켰다. 모든 농부는 정부로부터 필요한 파종 씨앗을 받았고그것을 나중에 다시 갚아야 했다.
경작지의 수확량을 측정하고 그중 4분의 1을 세금으로 공제한 뒤 사업가는 농부에게 이도된 양만큼의 가격을 지불했다. 액수의 높낮이는 왕이 매년 공표했던 정가표에 의해 확정됐다.
사업가는 거둔 수확물을 왕의 창고로 운반하고 다시 도시와 마을에 있는 정부 소속 기름 공장으로 옮겨야 했다. 사설 방앗간은 허용되지 않았는데, 신전 소속 방앗간은 예외였다. 신전은 기름을 짜는 자체 착유기를 갖고 있었으나 그것을 등록해야 했고, 또 사업가와 관리의 감독아래 신전에서 필요한 만큼의 참기름을 만들기 위해 두 달간만 그 착유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외 다른 기간 중에 그 방앗간은 납으로 봉인됐으며, 신전이 피마자 기름이 필요하면 사업가에게서 사들여야 했다. 신전이 어떤 형태로든 기름을 파는 것은 금지됐다.
왕에게 봉사하는 기름 방앗간도 국가 대행 관리인과 사업가의 균등한 감독 아래 놓였다. 기름 방앗간도 명부에 기록됐고, 사용되지 않는 방앗간과 그곳에 잇는 모든 정지된 기계에는 봉인을 붙였다.
독점화된 상품은 소매 상인을 통해 백성들에게 유통됐는데, 이 소매 상인들은 실제로 정부로부터 영업 면허를 얻은 사람들이었다.
이집트 생산품들은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당시 국제 시장엔 이에 대한 수요가 있었다-지금까지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생산되고 시장에 공급돼야 했다. 이것은 화폐 경제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지중해권의 무역 체제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외국인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기 위해 이집트는 결국 그리스적 외형도 갖추어야 했다.
이집트에도 알려지긴 했으나 그때까지 거의 볼 수 없었던 식물들의 재배를 늘리고 특정 덩굴포도 종류와 같은 새로운 식물을 들여와 이집트 풍토에 적응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포도밭은 파라오 시대에도 이집트에 있긴 했지만 이집트 민족의 고유 음료는 맥주였다. 포도주에 대한 그리스인 주민들의 늘어가는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들이 맨 처음 감행한 시도 중 하나는 포도 경작의 확대였다.
헬레니즘 통치자들은 올리브나무를 재배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알렉산드리아를 빙 둘러서 수많은 올리브 동산이 건설됐다.
이집트인들은 땅에 손이나 원시적으로 물을 퍼올리는 장치를 통해 급수하는 것으로 만족했으나 이런 식으로는 훌륭한 토지에 제대로 물을 공급할 수 없었다. 더 나은 기술적 해결이 필요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톱니바퀴와 '끝없는' 밧줄을 결합시켜 가다하고 효과적인 수차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간혹 아르키메데스의 나선 양수기의 원리에 근거한 펌프가 사용됐다.
이전에는 철이 귀해 단지 선발적으로만 사용됐다. 그러다가 프톨레마이오스때에 비로소 이 금속을 충분하게 수입하게 되었다. 나무로 만들었던 대부분의 농기구들을 이제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철로 만들었던 것 같다.
대 플리니우스는 황제 시대인 1세기에 파로스 등대에 관해 말할 때 크니도스 출신의 건축가 소시크라테스(Sosikrates)를 언급하면서 왕이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그 건물 위에 영원히 남기는 것을 허락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서 알게 된 바로는 소시크라테스는 건축가가 아니라 등대 건축을 의뢰하고그 비요을 지불했던 외교관이다.
대 항구라고도 칭해지는 동항구-이 항구는 최근 해저고고학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방파제와 내항들의 혼합체이다-와 나일 강과 연결된 서항구를 말한다. 여기에 지중해로 나가는 이집트의 전 수출품이 집결했다.
-2부에서 계속 -
첫댓글 제가 세어보니 2월달에 올라온 글은 총 17개입니다. 3월달의 경우에 는 총 26개의 글이 입니다.이중 제가 올린것을 보면 제가 3월 20날 3개연달아 올렸고, 바로 다음날인 21일 2개, 4일 쉬었다가..(그동안에 소피님이 1개 올렸음) 26일 4개 올렷습니다. 그리고 이틀 쉬고 28일 2개 올렸고 30일 다시 2개 올리고, 3월 31일을 넘어가서 4월 1일 세벽 2개 올렸습니다. 3월 20일부터 3월 31일 까지 11일간 총 13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