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 2. 28. 화요일.
오후에 서울 송파구 잠실 동사무소에 들러서 내 신분사항에 관한 서류 2종류를 발급신청했다.
3월 초순에 고향에 내려가서 지난해에 토지수용된 보상비를 뒤늦게라도 신청하려고 한다..
조부의 땅이라서 자손들이 숱하게 많기에 내 몫을 꼬딱지만큼이기에 별로 내키지 않아서 시골로 내려가지 않았다.
사촌동생네는 지난해 늦가을철에 모두 수령했다고 한다.
올 3월 8일에 농협조합장 선거가 있다기에 나는 내려가야 한다.
가까운 인척이 조합장으로 첫 출마하기에 내 얼굴이라도 보여주면서 투표를 해야 한다.
컴퓨터에서 아래 글이 눈에 보이기에 퍼서 여기에 올린다.
지금은 봄인데도 아래 글은 가을이다?
뭐라도 올리고 싶어서 여기에 올린다.
가을은 새로운 시작
최윤환
2002. 11. 3. 일요일.
주말을 이용하여 고향인 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곶뿌래(花望)*에 다녀왔다. 추적거리는 가을날의 차가운 비, 일요일의 날씨는 매서웠다.
장항선 單線路 외길. 차창 너머로 보는 들녘은 收穫이 끝난 텅 빈 공간. 벼를 베어낸 밑동, 지푸라기, 검불, 탑새기*가 수북이 쌓여 있는 논 주변이 온통 어지럽혀져 있었다. 알곡을 걷어들인 논바닥은 허전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물씬 품었다. 거무죽죽한 논흙, 어지러운 콤바인 바퀴 자국, 벼 쭉정이 무더기가 한데 어우러져서 더욱 음산했다. 추수가 끝난 들녘에는 풍요로움과 여유로움은 없었다.
텅 빈 들녘의 空間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그 무엇을 찾아내고 싶었다. 벼를 베어낸 논바닥에는 키 작은 새싹이 움트고 있었다. 잡풀은 추위를 마다하지 않고 새싹을 틔웠다.
무성한 나락으로 황금물결 출렁이던 지난 초가을에는 논두렁은 보이지 않았다. 수확이 끝난 늦가을에서야 모습을 내보이는 논두렁은 아름다운 곡선이다. 구부렁거리는 논배미는 한 배미 두 배미의 경계선이 확연히 드러났다. 논두렁에는 지푸라기가 누렇게 변색되어 처연하게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고, 째짝거리는 논물도 차갑게 보였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들녘에는 실상과 허상이 한데 어우러져서 아직도 空間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가을은 休息의 계절이다. 대자연의 순환은 옛사람이 인위적으로 분류한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이다. 그러나 나는 가을부터 계절의 순기를 새로이 가르고 싶다. '가을 겨울 봄 여름’ 순서로 바꾸고 싶다. 가을은 시작의 계절로 보고 싶다. 낙엽과 추수는 끝이 아니라 내년을 준비하는 시작이라고 우기고 싶다. 가을에서야 싹을 틔우는 지면류(보리, 밀, 귀리, 자운영 등 다양한 풀) 식물이 번지지 않는가? 이런저런 이유로 <가을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름철 한때 무성했던 풀잎은 된서리가 내리면 일시에 시들어버린다. 찬서리가 내리는 절기가 되면 식목은 자기 몸무게를 줄이고자 제 육신이었던 잎사귀를 서슴없이 떨어뜨린다. 수액을 거두어서 잔가지를 메마르도록 한다. 굵은 가지에 영양소와 씨눈을 남기는 식물은 냉한기에도 살아남기 위한 성질을 지닌다. 식물의 성질을 지혜로 환언한다면 지혜란 유독 사람만이 가진 것도 아니요, 동물만이 가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식물도 가졌다고 본다.
장항선 기찻길 옆 야산은 서해안 특유의 잡목과 소나무로 뒤덮였다. 늦가을의 땅과 숲은 바람과 햇볕을 받아들였다. 낙엽이 진 벌거벗은 숲은 땅의 본질을 살짝 내보이며 지면을 들어냈다. 땅에는 흙과 바위 그리고 잡다한 낮은 수목과 잡풀이 어울렸고 동물은 숨어 있었다. 땅은 숲을 키우고, 숲은 뿌리와 낙엽으로 땅을 거름지게 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서로를 값지게 살 찌웠다.
농촌의 가을 풍경을 그림과 글로 표현한다면 어느 쪽이 더 쉬울까. 나는 아무래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쉽다고 본다. 여러 색깔의 물감을 혼합하여 색상과 색질을 만들 수 있다. 물감을 묻힌 붓으로 실물을 어렴풋이 그려낼 수 있지만 한정된 글로 실상을 표현하기란 극히 어렵고 애매하다고 본다. 자연현상을 표현할 마땅한 어휘가 없거니와 또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이유이다. 턱없이 부족한 어휘와 상투적인 구(句)로서는 자연의 이미지를 사실대로 나타낼 수 없다고 본다. 음습한 찬바람, 쇠진한 가을빛을 글로 재현하기란 어렵다. 文人이 아닌 나는 글로써 묘사할 재간이 없을뿐더러 설혹 묘사한다고 해도 제삼자가 그 실상(이미지)을 제대로 소화할 것 같지 않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이미지를 상상하여도 그 본래의 참맛을 그려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회화(繪畵)는 어느 정도껏 가능하다고 본다.
가을은 낙엽의 색깔이요, 소채류의 빛깔이다. 붉게 타오르는 낙엽과 누런 풀잎은 따뜻한 느낌을 주지만 묘하게도 채소류는 차가운 느낌을 준다. 또한 가을은 들국화의 계절이다. 들국화는 색깔이 다양해서 정작 어떤 색깔이 들국화의 진짜 빛깔인지 대답하기가 어렵다. 이런 빛깔을 가진 가을은 도대체 무슨 빛깔이며, 왜 억새풀(꽃)은 고즈넉한 외로움을 자아내며, 또 서걱대는 바람소리는 누구에게 속삭이는 것인지를 물어봐야겠다.
고향의 낡은 함석집, 협소한 텃밭. 여름철 비와 벌레의 피해로 어린싹이 자꾸만 죽었다. 매번 씨 뿌리기를 거듭한 탓으로 여든네 살 어머니가 가꾸는 채소는 자잘했다. 김장철이 올 때까지 한 달간 더 커야 될 것 같다. 그런데도 배추 무 파의 잎새는 싱싱하고 시퍼런 녹색의 물결이었으며, 늦가을 추위 속에서도 자라나는 소채류의 색깔은 온통 짙었다. 냉기를 이겨내는 채소류일수록 그 모양새와 크기는 작고 색깔도 짙었다. 메마른 노지에서 자랄수록 겉잎이 두껍고 억세어서 힘살이 강해 보였다.
늙은 어머니는 이빨(치아)이 부실하여 생으로는 먹지도 못할 배추-포기가 실하도록 겉잎사귀를 한데 모아 지푸라기로 둥글게 묶어 놓았다. 냉기를 덜 받으면 배추 속이 야무지게 꽉 찬다고 말씀하셨다. 겉잎을 따주어 양분이 뿌리에 축적되도록 한 무는 한참 더 커야 매콤한 맛이 들 것 같다.
일년 사계절은 해마다 돌아오건만 사람은 한번 떠나가면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다. '가을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처럼 사람도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순환하는 일생을 다시 시작했으면 싶다.
2002. 11. 8.
* 곶뿌래(화망 花望) : 고뿌래, 곶부래, 곶뿌래, 곶바래의 한자식 이름은 花望
* 탑새기 : 솜먼지, 쓰레기의 방언
첫댓글 모처럼 잔잔하고 편안한 글을 대합니다
가을 들녘의 풍경이
단지 세밀한 묘사에 그치지 않는 글이라 여러 생각이 들게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평소 우리말에 관심 많으신 편에 비해서
오늘글에는 한자가 띄엄띄엄 보여 다소 의외라 여겼구요
우리말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문맥을 정확하게 전달키 위해서는 때로 한자가 필요할때도 있는것 같습니다
덧붙이면
본문중 노모의 치아를
이빨로 표현해서 저는 다소 불편했습니다 , 비록 괄호로 (치아) 라 하셨지만~~
댓글 고맙습니다.
우리 토박이말... 때로는 살려서 써야 합니다.
특정한 지방에서는 그게 표준어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 글은 오래 전에 써 둔 일기라서.. 그 당시에는 저도 한자를 제법 많이 썼지요.
지금은 덜 쓰고 있지요.
우주는 항상 그대로인데....잣대 들이대기 좋아하는 우리 인간들이 계절. 년도를 만들엇다고 하더군요.
가을은 새로운 시작. 잘 읽었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님의 견해에 뜻을 같이 합니다.
계절, 년도는 우리 인간이 정한 하나의 약속이지요.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조금은 나을 듯합니다.
'가을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논리는 저한테만 통하겠지요.
늦가을 가을걷이가 다 끝난 텅빈 들판.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데도 시살은 겨울을 이겨나는 풀이 새싹을 내밀지요.
예컨대 보리, 밀, 귀리 등은 늦가을에 싹을 틔워서 겨울을 이겨내지요.
눈과 얼음이 녹아내리는 늦겨울에는 밭에 들어가서 밭흙을 잘근잘근 밟아주어서 살얼음에 식물뿌리가 살짝 뜬 상태를 흙에 묻게끔 밟아주지요.
어제부터 봄철.. 성질 급한 매화는 벌써부터 피어나기 시작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