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 알려진 문학 속의 영웅과 우상을 만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네모(Nemo) 함장을 따라 노틸러스호를 타고 해저 2만리를 여행하는가 하면, 톰소여와 함께 미시시피강을 넘나들며 모험을 하는 공상...아마도 어린 시절에 누구나 한번씩 겪었던 행복한 성장통이었으리라.
그런데 이런 꿈같은 일을 눈앞에 펼쳐 보인 영화가 있었으니, 변종 흡혈귀 영화 블레이드(Blade, 1998)로 유명한 스티븐 노링턴 (Stephen Norrington)감독의 2003년작 '젠틀맨 리그(The 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가 바로 그것이다.
이 영화에는 실로 다양한 문학 속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위에서 언급한 네모 선장과 톰소여 외에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에 등장하는 여자 흡혈귀 미나, 엄청난 힘과 야수성의 상징인 '지킬박사와 하이드', 누구나 꿈꿔 왔던 은밀한 욕망 '투명인간' 등 우리에게 친숙한 캐릭터들이 그들의 리더인 '헌터 알란(인디아나 존스의 모델)' 박사와 함께 악의 화신 '팬텀'에 맞서 지구를 지키며 스크린을 종횡무진한다.
하지만 이런 친숙한 주인공들 중에서도 유독 낯설은 인물이 하나 있으니, 불사신으로 등장하는 영국의 귀족 도리언(Dorian)이다. 영화 속에서는 이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또한 몰라도 영화를 보는데에 있어서 하등의 지장이 없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면 한층 영화적 재미와 흥취를 높일 수 가 있다.
그의 이름은 '도리언 그레이'로서 소설 '행복한 왕자'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의 1891년 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의 주인공이다. 그는 '남자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남자로서 주변의 여자들뿐만 아니라, 같은 남자들까지도 그의 미색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리는 엄청난 외모의 소유자이다.
거기에다가 그의 절친한 친구인 '바질'이 그려준 초상화가 그를 대신해 나이를 먹는 초현상까지 일어나니, 세월을 초탈한 이 미모의 귀족을 사교계에서 가만히 둘리도 없거니와 그 역시 스스로도 달콤한 방탕과 향락에 빠져 그 생활을 그만두기에는 이미 늦어 버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다가 허름한 극장에서 연극을 하던 여배우의 순진한 모습에 반해 그녀에게 구애를 펼치게 되고, 그녀도 도리언에게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이라 믿었던 그것이, 단지 그전까지 접해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호기심 차원임을 깨달은 도리언은 그녀를 가차없이 차 버리게 되고 그녀는 그 충격을 못 이겨 목숨을 끊게 된다.
도리언은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빠져 다른 사람들과 사물에는 가치를 두지 않게 되는 '괴물'이 되어가며, 그를 대신해 늙어 가는 초상화만 추악한 노인으로 변해간다. 몇십년 동안 전혀 늙지 않고 미소년 그대로인 도리언을 보고 사람들은 수근 거리게 되고, 초상화가 대신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는 칼을 들고 초상화 앞에 서게 된다.
이처럼 기괴하고도 그로테스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동성애자'라는 죄목으로 처벌받은 영국의 대문호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쓰여진 슬픈 걸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오컬트 분석]
영화와 소설 속의 불사신 도리언 그레이는, 이미 18세기에 그 모델이 되는 사람의 출현이 있었다. 일명 생 제르맹(Saint Germain)백작이라 불리워 졌던 남자로서, 그는 스스로의 나이를 4000세라 칭하면서 유럽의 고급 사교계를 휩쓸었다고 전해진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그의 이런 주장이 황당하다거나 사기꾼의 소리로 들리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역사적으로 기록된 그의 출몰 연대표를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부지불식간에 하게 만든다.
그의 정확한 출생연도는 전해지지 않지만 사가(史家)들에 따르면 대략 17C후반 정도인 것으로 전해져 온다. 그는 18C초부터 유럽 각지를 누비며 왕족과 귀족들 사이를 오가며 사교계를 풍미했는데, 1760년대에는 루이15세의 보좌관을 맡을 정도로 처세술의 달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쯤 기록을 보면 '폰 게오르그' 백작 부인이라는 70세된 여인은 "반세기전에 그를 처음 만났지만 그때와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는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혁명이 일어날 것임을 경고하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일로 떠났으며, 얼마후 러시아로 건너가 장군이 되는가 하면 인도, 페르시아 등지에서도 수시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후에 마리 앙투와네트는 자신의 일기 속에서 그의 충고를 귀담아 들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하고 있다.
연금술로 금을 만들어 내어 항상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동서양의 고대 신비 지식에도 능통했던 생 제르맹 백작은, 도리언 그레이처럼 세월이 흘러도 그다지 늙어보이지 않는 중년의 모습이었다고 전해지는데, 19세기 후반에 정신적 지도자 구루의 모습으로 현현한 뒤 소식이 뜸하다가 1972년 프랑스 TV 방송에 출연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기록에 관한 의문점이 명쾌히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서 그의 존재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불사신의 존재를 믿으며 영원한 삶을 꿈꾸는 수많은 추종자들이 그의 출현을 계속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구스타프 융'이 UFO의 존재 자체가 '인간들의 염원이 하늘에 투영된 것'이라고 얘기한 것처럼, 어쩌면 생 제르맹 백작도 모든 인간의 공통된 소원인 불로장생에 대한 무의식적 환영일런지 모른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언제 또 그가 불쑥 우리들 앞에 나타날지 자못 궁금해지는 바이다.
[심령과학 웹진 오컬트(occult.co.tv) 운영자 이한우 nexio21@hanmail.net]
*이 글은 스포츠조선/스포츠한국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참고문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황금가지, 2003
오스카 와일드, 페터 풍케, 한길사, 1999
헤르메스의 기둥, 송대방, 문학동네, 1996
세계불가사의백과, 콜린 윌슨, 하서출판사, 1992
미스터리 세계사, 프랜시스 히칭, 가람기획, 1995
2500년간의 수수께끼, 발터 외르크, 글담, 1997
마법사의 책, 그리오 드 지브리, 루비박스,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