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4일(첫 토요일 성모 신심) 하느님 신뢰 인간은 참 연약하다. 흙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쉽게 부서지고, 팔랑귀인지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창세기 저자들은 인간의 약함을 묵상하며 그 당시 가장 영리하다고 여기는 뱀의 유혹을 생각했던 거 같다. 그리고 남자보다는 여자가 육체적으로 약하니 약한 존재 여자가 먼저 뱀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했던 거 같다.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약함을 통해서 죄가 세상으로 들어왔고, 죄가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여기게 했다. 하느님이 무섭게 변한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여기게 되는 거다. 죄는 하느님을 무서워하게 하고 그분과 나를 분리 한다.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은 이들은 하느님을 피해 숨는다. 하느님은 그들을 부르며 찾으신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숨는다고 숨은 게 고작 나무 뒤다. 그런 그들이 안 보여서 그들을 찾으셨겠나. 하느님이 부르심은 너 자신을 드러내라는 뜻이다. 너의 죄스러움을 감추지 말라는 뜻이다. 알몸인 게 두려운 건(창세 3,10) 하느님에게 맞설 무기와 방패가 없기 때문이었을 거다. 인간이 하느님께 맞설 생각을 하다니, 자식이 부모와 싸울 생각을 하다니,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을 거스르다니, 참으로 비극이다.
창세기 저자는 뱀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말하지 않는다. 선하신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에 왜 악이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악의 근원을 알면 뭐가 달라지나. 병의 근원을 알면 치료가 가능하지만 치료됐다고 다시 그 병에 안 걸리는 게 아니지 않나. 그것을 안다고 지금 여기 내가 죄에 안 떨어지는 게 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유혹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구원되는 거다. 엉성한 두렁이로 가리고 하느님 앞에 선 두 사람, 남자와 여자, 참으로 안쓰럽고 불쌍하다. 그런 모습으로 하느님과 맞서겠다고 생각하다니. 그러니 하느님께는 얼마나 더 불쌍해 보였겠나. 가출했다가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이를 보는 부모의 마음이 그 마음일까.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은 약속하셨다.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하느님은 당신 약속대로 때가 차자 구세주 메시아를 보내주셨다. 그분은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죽음을 쳐 이기셨다. 죽음은 죄의 결과요, 최고의 악이다. 예수님이 그런 순종을 어디서 누구에게 배우셨겠나. 성모님의 피를 받은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그분의 순종과 신뢰도 받으셨다.
이 동화 같은 이야기는 오늘날 이야기다. 오래전에는 어떤 사람이 콘테이너를 성처럼 쌓고 그 뒤에 숨더니 이제는 버스와 사람들을 방패로 내세우고 그 뒤에 숨어 있다. 이제는 화도 안 난다. 헛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그 끝이 보인다. 진실 앞에 거짓은 빛 앞에 어둠과 같다. 옛날에는 아무리 영리해도 인성이 안 좋으면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지식이 무기가 되고 자신을 감추는 방패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식보다 인성이, 기술보다 마음이 먼저다. 우리 믿음은 현재이고 동시에 미래다. 하느님은 지금 여기에 있는 나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돼 있기 때문이다.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야단을 맞은 건 때가 되면 이루어질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20). 반면에 성모님은 남자의 도움 없는 임신 소식에 그런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느냐고 묻는다. 천사의 대답은 한마디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였다. 성모님은 그걸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으셨다. 내 믿음은 이런 것이다. 때가 되면 이루어지고, 불가능해 보이는 게 되는 거다. 그래서 믿음은 기쁨이다. 마치 미래를 내다보며 다 알고 있는 거처럼 말이다.
예수님, 저희는 요즘 비싼 수업료를 내고 좋은 걸 배웁니다. 가장 작은 이에 대한 관심과 약한 이들 사이 연대, 폭력에 평화로, 어둠에 빛으로 맞서는 법을 학습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저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를 넘어 무한을 응시하는 어머니의 눈을 따라 제 마음이 여기서 벌써 영원을 향하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