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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 소박한 여행을 의미 있는 곳으로 떠났다. 오늘의 여행지는 강릉 선교장이다.
남편의 업(業)이 풍수지리 전문가이다 보니, 여행해도 좋은 터를 방문하곤 한다. 잠을 잘 때나 음식을 사 먹을 때도 명당을 찾아가서 먹곤 한다.
그게 우리 부부가 늦게 맛본 인생의 또 다른 풍류의 멋이 아닌가 한다.
팬데믹(세계 대유행)이 장기간 지속되다 보니 이 변종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어쩌면 우리 인류와 함께 갈 것 같다는 나쁜 예감도 없지 않다.
지구온난화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걱정과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그에 따라 우리가 사는 현재 주거 공간이 한층 더 중요하고 절실한 시절이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이 어디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1위로 꼽힌 곳이 선교장이라고 한다.
선교장은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으며, 9대 240여 년간 명문을 유지해 온 고택(古宅)이다. 또한, 한국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면서도 아름다운 전통가옥이다.
이곳은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11대 손인 이내번(李乃藩)이 영조 때(1703년)에 건립한 것으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으로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에 지어진 고택이다.
또한, 선교장은 ‘대궐 밖 조선에서 제일 큰 집’으로 만석꾼의 부호일 뿐 아니라 손님 접대가 후하기로 소문나 있고, 소작인들과 ‘상생의 원칙’을 지키며 살던 훌륭한 집안의 본(本)이 되는 터전이 아닌가 한다.
경주 최부잣집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나눔의 가문과 같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철학이 깃든 가문 중 하나로 여겨진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더 넓었을 때는 '배를 타고 건넌다.'라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었는데, 선교장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
이곳은 국가 민속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조선 시대 사대부가로서, 그 시대의 주거 형태와 생활 모습 그리고 오블리주 오블리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우리나라 몇 안 되는, 귀감이 되는 왕족 집안의 후손이라는 데 더욱 의미가 있는 듯했다.
이내번은 충주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어머니와 함께 외가인 강릉 경포대 부근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어느 정도 재산이 불어나면서 좀 더 넓은 집을 물색하던 중, 한 떼의 족제비가 나타나 무리를 지어 북쪽으로 이동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신기하게 여겨 따라와 보니, 현재 이곳에 이르러 모두 숲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하여 이내번은 이곳이 명당이라 여기며, 집을 지어 가솔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풍수 전문가의 조언에 따르면, 정말 신기하게도 이곳이 대명당 터라고 하니 참으로 놀랍지 아니한가.
본능적으로 명당을 아는 동물이 몇몇 종류가 있다. 그는 다름 아닌 족제비, 벌, 비둘기, 까치, 노루 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천부적인 감각으로 명당을 알아보고 집 짓거나 즐겨 찾는 명풍수들이라고 남편은 말한다
안채는 1703년 선교장 건물 중 최초로 건립된 건물로써, 이 씨 가의 큰살림을 맡은 여인들의 거처였다.
부엌 앞마당에는 며느리가 살림살이를 사들일 때 시어머니가 볼 수 있도록, 서로 존중과 배려의 품이 슴베여 있는 곳이었다. 또한, 모든 것은 다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소통과 화합의 미덕이 함께하던 열린 장소가 아닌가 싶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1815년(순조 15)에 오은 처사 이후(李厚)가 건립하였고, 정자인 활래정(活來亭)은 1816년(순조 16)에 이근우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안채‧사랑채‧동별당‧서별당‧사당‧정자‧행랑채를 골고루 갖춘 큰집으로, 조선 시대 상류 사회의 주택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한 예라 하겠다.
집의 배치는 간좌곤향으로 남서향을 하고 있다. 전면에는 줄행랑이 서 있고 그 가운데 솟을대문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 간 행랑이 나오고 서쪽으로 가면 사랑 마당에 이르게 된다.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친인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기쁘게 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라 한다.
오르간이 있는 이곳은 선교장 문화예술의 장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선 출판과 문무의 중심 무대이기도 하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크기로 거의 일자형 평면이었다.
그 구성은 대청‧사랑방‧침방‧누마루로 되어 있고, 대청 앞에 반 칸 너비의 툇마루가 붙어 있었다.
특히 사랑채에는 차양이 가설되어 있어, 석양의 강한 햇볕과 눈과 비를 가리게 되어 있어 서구 문화의 풍미로 운치를 돋우었다.
열화당은 남자 주인공인 사랑채로서 내번의 손자 후가 순조 15년(1815)에 건립하였으며, 당호인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悅親威之情話)에서 따왔다고 한다.
열화당은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워진 누각 형식의 건물로 아주 고풍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 권의 책, 글, 그림 등이 소장되어 있었다.
동쪽으로는 동별당, 서쪽으로는 중문 간 행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도 오량집의 납도리집 양식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였다.
민도리소로 수장 집으로 처마에는 부연을 달고, 사면에는 모두 띠살 창호 문을 달아 한층 고급스럽고 멋스럽게 보였다.
연못 가운데는 삼신 선산(三神仙山)을 모방한 산을 인공적으로 쌓아 만들었는데, 소나무가 한 그루 심겨 있어 세한도(歲寒圖)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몇십 년 전에 심은 소나무가 병충해를 입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다른 곳의 묘목을 옮겨 심었다고 지나가던 후손이 부연 설명을 해준다.
문밖에는 수백 평의 연못 위에 세워진 활래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연꽃 정원까지 갖춘 완벽한 구조를 보여주었다.
활래정은 선교장 정원에 판 인공 연못 위에 세운 정자로, 순조 16년 (1816) 열화당을 세운 그다음 해에 세웠다.
이 건물은 창덕궁을 본떠서 지었다. 마루가 연못 안으로 들어가 돌기둥으로 받친 누각 형식의 ㄱ자형 건물이 내겐 아주 인상 깊었다.
활래정은 벽면 전부가 분합문의 띠살 문으로 되어 있으며,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는 접객용 다실도 겸하고 있었다.
그 당시 조선의 많은 풍류가들과 시인 ˙묵객들이 머물면서 문화와 예술, 그리고 인생 담론을 나누던 장소가 아닌가 한다.
기타 부속 시설로는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 서재 겸 서고로 사용하던 서별당이 있는데, 소실되었다가 1996년에 다시 복원하였으며 건물의 전면에는 행랑채가 있다.
또한 건물의 측면에는 원래 창고였으나 개화기 때 신학문을 가르치던 동진 학교 터가 현재도 남아 있었다.
매우 특이한 것은 이곳 선교장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자급자족하는 마을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양반 자녀들이 버릇없이 굴 때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집에 잠깐 머물면서, 그들의 수고를 몸으로 체험하는 교육도 병행하였다고 한다.
자녀 교육에 남다른 상생의 철학을 어릴 때부터 가르쳤던 선조 할머니들의 속 깊은 교육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교육 강국으로 만든 탄탄한 저력인 듯하여, 나도 어머니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숙연해진다.
선교장 둘레길은 청룡 길, 백호 길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 길에는 수령 500여 년이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길을 걷는데 솔향 가득한 숲길을 그 당시 선비들의 마음길도 함께하는가. 결코 다른 데서 느낄 수 없는 청아한 공기로 인해 행복한 기분에 잠시 젖어 들었다.
그 소나무들은 마치 선교장을 수호하듯 마을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또한, 내게는 아주 신기하게 느껴졌다.
반대편 산책로인 오솔길도 각양각색의 야생 꽃들이 아기자기하게 피어 있어 나그네의 마음 길을 무척 설레게 했다.
저 멀리 경포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솔향 가득한 선비의 마음, 그리고 넉넉한 부잣집 인심에 부침하며 동고동락하던 그 시절 서민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영상으로 그려진다.
그때는 가난해도 참으로 멋이 있고 운치 있는 삶이었건만, 지금은 시절이 아주 수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개인적으론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다.
조선 사대부의 풍류의 멋을 생각하며 선교장 둘레길을 산책하노라니, 내 마음도 저만치서 가을 단풍과 함께 곱게 물들어 가는 들국화 모습이었다.
걷는 내내 공기가 어쩌면 이리도 가을 찬 서리로 머리를 헹군 듯 상쾌한 공기가 마음의 걱정을 말끔히 씻어버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선비 정신으로 살아야 해!'라며, 흩트려진 마음에 정업(正業)의 예방주사를 놓는다.
무엇보다도 이곳이 내 마음을 감동케 하는 것은 선교장 일가의 “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의 정신이었다.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남아넘치고, 선을 쌓지 않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넘쳐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 글은 결국 착한 일을 거듭 쌓아서 복(幸福)을 누리라는 것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덕(德)은 언젠가는 복(福)으로 자신에게 돌아오게 마련이다.
내가 남에게 진심으로 베푼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다. 하지만 남에게 던져준 것은 결코 돌아오는 법이 없다는 말은 채근담(采根譚)에도 있지 않은가.
우리 인생은 부모의 본보기로 결국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어릴 적부터 내 부모님은 베풀기를 즐겨 해서인지 몰라도, 우리 집에는 사람들이 늘 끊이지 않았다. 그것이 일상이었다.
시집을 와서도 그런 환경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그렇게 살아야만 되는 줄 알았다. 남편과 결혼 30여 년 차 환갑이 되도록 그것은 내 인생의 텃밭이었다.
돌아온 자취를 반추해 보니 ‘적선지가 필유여경’은 우리 집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어렵고 힘든 일은 모두 나를 키우는 약이었고, 쉼 없이 일어나는 욕심과 어리석음 그리고 무지(無智)는 나를 깨우치기 위한 고통은 성장의 디딤돌로써, 수련의 과정이었음을 훗날 깨닫게 되었다.
남편의 환갑은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기념 여행인 선교장을 돌아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인생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는 주인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 집안의 흥망이 결정되지 않겠는가.
가난한 이웃과 친척들 그리고 지인들과 풍류로 함께하는 삶 속에 우리의 기쁨이 있고, 삶의 맛과 멋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당시 선교장 사랑채에는 그 지방을 지나가는 길손이나 과객들이, 주머닛돈 걱정 없이 묵고 싶은 만큼 쉬었다 가는 곳이었다.
장기 숙식하다가 인사도 없이 떠나야 하는 길손의 염치도 생각해서 만들어놓은 좁은 툇마루가, 가난한 이웃의 마음까지 배려한 주인장의 마음이 가슴 따스하게 했다. 경포 바다의 포용 정신이 이 씨 가문에도 접목되고 있었으니, 어찌 강릉이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고장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인가.
부모가 되어서 책임과 도리로 보낸 반평생! 환갑은 우리 부부에게 기쁨이 충만한 시간이었다.
이곳 선교장을 관광하면서 앞으로 적선지가 필유여경의 철학을 우리 부부는 더 많이 실천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정문 가까이오는 찰나, 이곳 이내번의 후손이자 관리인이 부른다.
남편이 이 터에 대해 조언을 해주자 유유상종을 느꼈는지, 우리를 그의 보물 창고로 안내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곳에는 30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쓰던 갖가지 생활 도구와 장식장 그리고 아녀자들이 애지중지 손때 묻은 꽃무늬 문갑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 당시 생활상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물건은 꽃무늬 문갑인데, 부녀자들의 품격 있는 향기와 서민들의 꾸밈없는 진솔한 삶의 향기가 나와 일체를 이룬 듯 그곳에 눈길이 꽂힌다.
몇 년 있다가 공개하겠다는 주인장의 말을 듣고 있는데, 나는 무엇보다도 효령대군의 후손 즉, 조선 시대 왕족과 담소를 나눴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미련 없이 창고를 나왔다.
강원도는 산세와 바다 물빛만큼 인심도 후할 뿐 아니라, 인생의 풍미를 더 하는 위대한 인물도 많다.
사람도 결국은 자연을 닮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살다가 마음 물기가 마르면, 갈증 난 사람처럼 헐레벌떡 동해안으로 떠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유이다.
나의 타고난 본성대로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 마음의 산소가 필요한 것은 나답게 살기 위한 작은 생존의 몸부림이자, 나비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원천이 바다에 있기 때문이다.
선교장은 현대인이 한 번쯤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생각하며, 내가 현재 사는 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며, 인생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장소로서 손색없는 여행지가 아닌가 한다.
< 강릉 선교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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