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불교조각대전 -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展 인디아에서 신라로 부는 불도의 바람 2015. 9. 25(금) ~ 2015.11.15(일), 기획전시실 뜨거웠던 여름이 가고, 시원한 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가을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가을을 맞는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용산 이전 10주년을 기념해 특별전으로 “고대불교 조각대전 - 불상,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를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국내적인 의미에 주목해오던 불교관련 그동안의 전시와 달리 인도, 중국, 베트남, 일본과의 교류 관계 속에서 한국 불교조각의 전통을 조명하는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이는 세계 주요 문명과 다채로운 문화를 국내에 알리고 세계 박물관과 교류를 확대하고자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방향과 관련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인도 간다라 불교가 신라로 건너가는 과정과 그 영향들을 불교조각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 1] 전시 티켓매표소
이번 특별전시의 티켓매표소 모습입니다. 불교라는 보편적인 주제로 전시를 기획하였지만, 인도부터 신라까지 전해지는 불상형식 및 영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사진 2] 스투파의 구조
전시실 내부로 들어가면 가장 눈에 띠는 것이 바로 이 ‘스투파’입니다. 스투파는 유골을 매장한 인도의 화장묘(火葬墓)인데, 인도의 사리 숭배의 성행과 무불상시대를 이해하는데 가장 핵심이 됩니다. 인도의 초기불교도들은 부처의 유골인 사리를 보는 것이 부처를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투파 숭배가 점차 확대되면서 스투파라는 건축물이 부처의 존재를 상징하게 되었으며 때때로 사리의 안치가 생략되기도 하였습니다.
[사진 3] 사리기
원래 인도에서 불교가 발흥(發興)했을 당시의 초기불교는 약 400여년이 지나도록 불상(佛像) 제작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앞서 말했듯 스투파나 사리숭배가 행해졌는데, 간다라 사리기 중에는 사리를 보관하기 위해 별도로 만든 것도 있지만 이 사리기처럼 일상 용기를 재사용한 것도 있었습니다. 원래는 화장품, 향수, 향신료, 보석 등을 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리기 안에 금박으로 만든 잎사귀 모양의 장식, 금 등이 담겨 있었는데 이처럼 사리기에 유골뿐만 아니라 다양한 색의 보석과 준보석을 넣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사진 4] 육계에 홈이 있는 부처
사리 숭배가 행해지는 가운데, 불상은 기원후 1세기 무렵 처음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석가모니를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오랜 전통이 깨지게 된 데에는 인체의 미를 구현하는데 적극적이었던 헬레니즘 조각의 자극과 인도 본토에서 고조된 신에 대한 애정 어린 헌신의 경향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제작된 이 불상은 간다라의 중심지인 페사와르 지역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목구비는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머리카락은 물결모양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우르나는 미간 사이의 하얀 터럭, 백호(白毫)를 뜻하는데 이는 둥근 점으로 표시한 점이 특징입니다.
[사진 5] 간다라 부처 기원 후 1세기경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거의 동시에 불상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두 지역의 불상은 외형적 특징과 문화적 배경뿐만 아니라 전개 과정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불상의 제작 초기에 마투라에서는 상이 지니는 위력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이 있었던 반면, 간다라에서는 상이 지닌 위력이 약하다고 인식되어 사리의 권위에 기대 신성함을 보강하려고 했다. 위 불상은 간다라의 불상인데, 간다라 불상은 앞에서 볼 때 매우 입체적인 느낌을 주지만, 옆에서 보면 다소 얇은 판에 새긴 고부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상은 스투파 주변에 줄지어 세워진 감실에 각각 봉안되었습니다. 배치 구조로 보아 사리를 모신 스투파에 비해 불상이 지닌 위력이 약하다고 인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 6] 마투라 부처
마투라의 초기 불상 중에는 이 상처럼 소라 모양의 육계가 있고 ‘보살(bodhisattva)'이라는 글귀를 지닌 것들이 있습니다. 보살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있는 수행자를 부르는 말이죠. 장신구를 전혀 걸치지 않아 부처로 보이지만, 아직 보살이었을 때의 석가모니를 표현하려 했다고 생각됩니다. 부처를 인간 모습의 상으로 만드는 것을 꺼렸던 당시의 관습으로 인해 마투라에서는 불상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에 앞서 이 같은 보살상을 만들면서 서서히 조상 활동을 정당화 해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 7] 금동으로 만든 부처
불교는 후한(後漢) 시대에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중국 북서부로 통하는 실크로드와 베트남 북부, 중국 남부 광저우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주요 전파 경로였죠. 불교와 함께 불사오 전래되었습니다. 이 불상은 금동으로 만든 부처로, 현재까지 알려진 중국 초기 금동불 중 가장 큰 상입니다. 쿠샨 시대 간다라 지역의 불상을 원형으로 한 4세기의 중국 불상과 달리, 이 상은 신체에 옷이 밀착되면서 옷주름을 끈처럼 가는 돋을선으로 표현하는 굽타 시대 불상의 특징을 지닙니다. 한편 옆쪽과 양 허벅지에 두드러지는 수직선처럼 인도불상에는 보이지 않는 요소도 나타납니다.
[사진 8] 중국식 법의를 입은 부처
5세기 후반 북위에서 나타난 중국식의 옷차람을 한 새로운 불상 양식의 시원을 밝히는 문제는 중국 남북조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의 주요 문제였습니다. 이 논의는 근본적으로 불상 양식의 중국화를 이룬 힘이 북조와 남조 중 어느 쪽에 있었느냐의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위 북위 불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중국식 법의를 입은 위 부처는, 부처와 양 협시보살의 삼존 구성에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飛天), 보탑(寶塔)과 여러 겹의 무늬로 장식된 광배를 더해 화려함을 극대화하였습니다. 중앙의 부처가 입은 법의는 가슴을 덮지 않고 아래로 늘어졌다가 왼쪽 팔뚝 위로 걸쳐지며, 이로 인해 노출되는 가슴은 가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내의로 가렸습니다. 이 시기에는 신체의 양감보다는 옷의 실루엣과 주름 등의 장식 효과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사진 9] 신묘년에 만든 일광삼존불
4세기에 시작된 한반도의 불교 전래와 불상 조성의 역사는 중국 남북조와의 밀접한 관계속에서 전개되다가, 6세기부터는 점차 한국적인 불상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형식과 양식 면에서는 빈번한 교류 관계를 맺고 있었던 동시대 중국의 불상이 모델이 되었지만, 새로운 기술의 수용과 발전은 삼국시대 불상만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위 불상은 신묘년(571년)에 만든 삼존불인데, 하나의 광배에 본존불과 협시보살상을 한꺼번에 조각한 ‘일광삼존’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의 난징과 산동지역보다 약 두 배나 많은 수로, 중국에 기원을 둔 이 형식이 삼국시대 한반도에서 하나의 정형을 이루었음을 뜻합니다. 뒷면에는 무량사상을 만들면서 미륵을 만나게 되기를 기원하는 명문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부처의 힘으로 내세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신앙과 현세의 선업(善業)을 쌓아 자신의 힘으로 도솔천에 왕생할 것을 다짐하는 신앙이 혼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 10] 국보 78호, 83호 반가사유상
그리고 이번 전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적 불교의 진미(眞美) 반가사유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반가사유상은 인도에서 생겨난 불상의 영향이 신라로 독특하게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두 반가사유상의 명칭은 모두 반가사유상이지만, 두 반가사유상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 11] 83호 반가사유상
위 반가사유상은 1912년 이왕가 박물관(우리나라 최초의 박물관, 제실박물관)이 일본인 고미술상에 구입한 것입니다. 출토 위치는 명확하게 전하지 않지만, 경주 오릉 부근의 절터, 경주 남산 서쪽 선방사 터 부근으로 추정한 의견이 있습니다. 세 개의 반원을 이어붙인 모양을 한 보살의 보관 형태는 옛 신라 지역의 반가사유상에서만 보이는 것이며, 치장하지 않은 단순한 형태와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에서 중국 북제 불상의 양식이 엿보이기 때문에 7세기 전반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진 12] 78호 반가사유상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함께 삼국시대의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대형 금동상입니다. 이 상은 1912년 조선총독부가 골동품 수집가로부터 입수하여 총독부박물관에 기증한 것입니다. 가냘픈 몸매와 얄팔부터 날렵하게 위를 향한 천의자락과 같은 세부가 중국 동위의 불상양식과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상은 대좌의 모양이 뒤쪽만 둥글고 앞쪽은 평평한 것이 특징입니다.
국보 78호, 83호의 반가사유상의 차이점을 분석해보면, 크게 관, 옷, 손의 형태로 나누어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관(冠)의 경우 78호의 경우 해, 초승달, 날개문양을 가진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나 83호는 반원이 이어진 모양의 단순한 보관을 쓰고 있고 옷의 경우, 78호는 긴 숄 형태의 얇은 천의를 입고 있지만 83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손의 형태의 경우 78호는 뼈와 관절이 없는 듯한 부드럽고 뭉툭한 손가락을 가지고 있으나 83호는 인체의 구조를 반영한 손가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불상을 바라보는 미적 기준은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78호가 6세기 후반 것이고 83호가 7세기 전반의 작품인 것임을 고려할 때, 신라인들은 당시 세공기술은 사회상을 반영하며 좀 더 단순하지만 세밀하게 표현하는 형태의 경향을 띠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도에서 불교가 발흥해 간다라 불교예술로 발전되고, 신라로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이전 10주년 기념 특별전인 만큼 야심차게 구성된 이번 전시는 그 규모만큼이나 체계성이 돋보였는데요. 이번 전시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우리 역사는 세계적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전한다.’라는 것입니다. 한국불교예술사는 물론 모든 역사는 우리만의 역사가 아니라 전 세계와 교류하며 성장했다는 것이죠. 이는 현대의 세계화의 흐름과 같은 맥락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음미하며, 이번 전시를 감상하는 것은 어떨까요?
사진. 글 2015 블로그기자 김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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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원문보기 글쓴이: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