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 서탑 도문로 거리. 중국발음으로 씨이타라 하는 곳, 혼자 길을 잃으면 되돌아갈 비책으로 외워둔 이름이다. 택시를 타고 민박집을 향할 때 우리는 대번 그곳임을 알아봤다. 높이 솟은 서탑 때문이 아니다. 아니 그런 높은 탑은 없었다. 하지만 너무도 확연한 그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모습들이 순식간에 드러나 우리를 반겼다. 이국땅에서 보는 한글 간판은 묘한 기쁨을 안긴다. ‘현풍 할매 곰탕’이 우리를 반겼다. 서탑 도문로는 땅만 중국 땅이지 거리는 서울 여느 구석진 서민 동네와 다를 바 없었다. 거리 양옆으로 도열한 한글 간판들, 꾸역꾸역 몰려든 사람들은 모두 한국인이 아닌가. 같은 말을 쓴다는 사실 하나로 우리는 우리임을 안다. 말의 동질성은 참 무섭고 질기고 존엄하다. 체코가 천년 넘게 나라를 잃다시피 살았지만 결국 그들은 프라하의 봄을 만들어냈다. 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풍할매)
물론 그들도 귀족 가문들은 옆 나라 독일 말을 쓰고 행세를 하고 다녔다지만. 프라하의 봄을 이끈 사람들은 그들 말을 제일 사랑하는 시인들이었다. 알렉산데르 두부체크, 어릴 적이지만 나는 그를 기억한다. 두부란 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공산당 제1서기장이었는데 소련에서 그를 세워놓으니까 엉뚱하게 언론자유를 말하였다. 그 바람에 놀란 소련은 피로 광장을 물들였고 그를 끌고 갔다. 나는 정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어릴 적 기억으로 그 후 그가 어찌되었을까가 무척 궁금했다.
끌려갔지만 죽은 것은 아니다. 그 후 1989년 연방 의회 의장으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1992년 1월 교통사고로 크게 부상을 당해 3번이나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그것이 KGB소행이 아닌가하는 엉뚱한 생각도 한다. 그가 당시 끌려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그의 교통사고가 순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왜 일까. 나 역시도 어느 이데올로기에 갇혀 그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식으로 세상을 살다 이런 곳에 오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정말 도문로 거리는 없는 게 없다. 이데올로기도 행세를 못하고 한낱 간판으로 뻘쭘해 서있는 것만 같다. 인공기 내걸린 간판이 너무 흔하다. 70~80년대식 카바레에 역전 식당식 간판이 요란한 서탑 거리에는 경쟁이라도 하듯 한복 곱게 차려 입고 문 앞에 서서 이념의 쌍곡선을 그리며 이질적 충동을 유발한다. 고구려 땅이었다가 발해도 되고 요나라도 되고 거란도 되고 청나라도 되고 독립군 활동이 뜨겁던 봉천(奉川)이었다가 이제는 중국인 조선족 거리에 북한사람과 탈북자까지 뒤섞인 한국 교민의 거리가 바로 도문로 거리다.
역사라면 역사 맛이라면 맛 도문로는 없는 게 없다. 백제원, 신라성, 고려원, 이조가든. 수천 년 세월이 이웃인 양 동시에 나붙은 거리, 북한의 모란각, 평양관, 동묘향관등 섬뜩한 시선이 나란히 선 거리, 거기에 신사임당. 가야원 떡집, 남원추어탕, 전주집도 모자라 서울가마솥, 수원갈비, 황해노래방, 부산사우나까지 알만한 걸출한 가게는 모두 모여 영웅호걸을 자처한다.
다 알만하면서 중국인인 척, 한국인인 척, 조선족인 척, 북한인도 모른 척 아닌 척 하는 낯익고 낯선 거리로 경계를 두고 사는 삶. 어깨를 스치다가도 된장국 한 그릇에 코가 벌름 거리고 마음을 여는 거리이건만 서로 모른 체 다른 나라 말을 쓰며 제 모습이 아닌 양 거드름을 피운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고구려 거리고 한민족의 거리다. 그러기에 그 거리의 한글 간판은 이름 하나하나 세종대왕 후손으로서 하나임을 말하는 상징어로 존재한다.
누구에게든 꿈에 그리는 조국은 있다. 설령 나라는 달라도 조국은 하나다. 말 그대로 어머니의 품이기 때문이다. 조국을 말하는 도문로의 한글 간판이나 된장국과 순대국 냄새가 주는 풍광은 여느 도시 설치는 풍경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오늘도 도문로에선 절로 애국애족을 부르는 양 뜨겁고 마냥 정겹다. 곳에서 굳이 인공기를 내 걸고 태극기를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곳에선 한민족임을 확인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서탑에 사람이 몰려든 것은 언제부터일까. 물론 중국과 국교가 수립된 1992년 이후에 활성화가 되었겠지만 예로부터 심양에는 조선인들이 꽤 많이 살았다. 민박 아줌마만 해도 평북에서 건너온 3세대라고 했다. 병자호란 때 심양에 끌려온 30만 조선인 중에는 돈 주고 속환이 이루어진 사람도 있지만 노예로 팔려간 사람도 있고 그곳에 눌러 앉아 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637년 한해 심양에 인구가 십 수만 부쩍 늘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고 그때가 조선인이 처음 심양에 발을 들이민 것은 또 아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요동인구 30%가 고려인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할 중요한 역사적인 자료가 있다.
(경회루의 태극기)
<표해록(漂海錄)>이란 문서는 조선 성종때 추쇄경차관(도망한 노비를 잡아들이는 관직)으로 제주에 간 최부(崔溥, 1454~1504) 선생이 부친상을 당해 배를 타고 육지로 나오다 표류한 기록을 담은 글이다. 최부선생은 보름 남짓 바다 위를 떠돌다가 지금의 절강성 태주(台州) 인근에 닿아 소흥과 항주, 소주, 북경, 산해관을 거쳐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귀환했다. 나는 이 글 집을 만들며 34살의 조선선비가 어떤 사람들인지 정말 새롭게 인식했고 탄복을 했다. 그 글 후기에 해당하는 견문잡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해주(海州)ㆍ요동(遼東) 등지에는 중국사람, 우리나라 사람, 여진 사람이 고루 섞여 있다. 석문령(石門嶺)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관과 의복, 말씨와 여자의 수식이 거의 우리와 같다.>해주는 지금의 랴오닝(遼寧)성 해성(海城)시로 영구(營口)와 안산(鞍山) 사이에 있고, 요동은 현재의 요양(遼陽)을 얘기한다. 석문령은 심양(沈陽) 인근의 무순(撫順)에 있다. 무순은 광개토대왕이 무척 사랑한 곳이다. 철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즉 압록강에서 심양 인근까지는 조선 사람들이 이주해 살고 있고, 심양을 지나 서쪽으로도 중국, 조선, 여진 사람이 섞여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1488년의 기록이다. 지금부터 500년 전 조선 지식인이 직접 눈으로 보고 적은 글이다. 이 책에는 최부선생이 요양에서 계면(戒勉)이란 현지 승려를 만나 그와 나눈 얘기도 기록하고 있으며, 그는 우리말이 능했다고 적고 있다.<소승은 본디 조선 사람인데, 소승의 조부가 도망해 이곳에 온 지 벌써 3대째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위치가 본국(本國 조선)의 경계에 가까운 까닭으로 본국 사람이 와서 거주하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중국 사람은 겁이 많고 용맹이 없으므로, 도적을 만나도 모두 창을 던지고 도망해 숨어 버립니다. 또 활을 잘 쏘는 사람도 없으므로, 반드시 본국 사람 가운데 귀화한 사람을 뽑아서 정예병으로 선봉을 삼으니, 우리 본국의 한 사람이 중국사람 10명, 100명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현지의 조선인들은 중국에 귀화해서 일당백의 병사가 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당시 요동지역에 ‘이민’ 온 조선인들의 모습을 승려는 이렇게 얘기한다.<우리 고구려의 끼친 풍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서, 고려사당을 세워 근본으로 삼고, 공경하여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는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여우는 죽을 때 살던 굴로 머리를 돌린다(鳥飛返故鄕 狐死必首丘)’는 옛말처럼 우리도 본국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본국에서 도리어 우리들을 중국 사람으로 인정해 중국으로 돌려보낸다면, 우리들은 외국으로 도망한 죄를 받아서 몸뚱이와 머리가 따로 있게 될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가고 싶지만, 발은 머뭇거릴 뿐입니다.>
즉 명나라 때 이미 요동지역으로 수많은 이민이 이뤄졌으며, 이들은 조선으로 건너가고 싶어도 본국에서 다시 요동으로 환송될 것을 두려워해 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세조 14년(1468년)에는 <건주위(여진) 땅에 포로 또는 도망한 한족과 조선인들이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 사이에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고 있다며, “동녕위(東寧衛, 현재의 요양시 태자하)의 고려인은 명나라 홍무제(1368~1398) 때는 3만 명, 영락제(1403~1424년) 때는 4만여 명이었다. 요동인구 중 고려인이 30%를 차지하며 서쪽은 요양, 동쪽은 개주, 남은 해주에 집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조실록의 요동인구 30%가 고려인이었다는 이 기록은 최부선생의 관찰과 아귀가 맞는다. 이후에도 조선에서 요동으로의 ‘이주’는 끊이지 않았다. 나중에 청나라가 된 후금과 명나라가 싸울 때 명의 요청으로 출병한 강홍립이 이끄는 1만3천명의 조선군은 청에 항복한 후 귀환되지 못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청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공격해 척화파 대신과 그 가속들 및 수만 명의 포로를 데리고 요동으로 돌아갔으며, 조선에서 1만 2천500여 명을 청군으로 징병하기도 했다. ‘심양장계(沈陽狀啓)’라는 문헌에는 “만주 8기 중 고려백성 42개 성씨가 있었는데 선조는 모두 조선의 역주, 평양 등지의 사람으로 청나라초기에 포로가 된 이들”이라고 했다.그들이 그 시대에도 그토록 이 만주 땅을 찾은 연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 이전부터 조상이 산 땅이기 때문 전해지고 전해져 풍토와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앞서 내가 말한 우리는 모두 고구려인이라고 한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묵은 동네를 대표하는 서탑은 청나라 태종 때인 1640년 착공되어 순치제 때인 1645년 완공되었다. 심양은 청나라의 수도였으며 청나라는 수도의 동서남북에 각각 탑을 하나씩 세웠다. 四塔은 사대금강이 사방을 위압하며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호국안민을 상징하는 의미라고 한다. 四塔은 사찰과 함께 건립되었는데 서탑은 옌서수사(연수사)에 세워졌다고 한다. 지금의 서탑은 1968년 철거된 후 1998년 11월에 티베트식 라마탑의 형태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연수사 안에 선 라마식 서탑)
그러니까 곳에 많이 몰려 살지만 서탑과 우리민족과는 별 상관은 없다. 민박 아줌마는 평양관 앞 2층에 KAL사무소에 들르면 3원인가 수수료를 얹어 고속열차 표를 끊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린 심양고궁을 가기 전 고속열차 표부터 예매하기로 했다. 주말을 끼고 있어 표가 있을지도 의문이고 하얼빈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월요일은 휴관한다는 정보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 표 구입이 급했다.
일정이 빠듯한 우린 KAL사무소로 향했다. 창구에는 중국여인이 앉아 있었다. 생각 외로 역관의 소통은 더뎠다. 여러 설정과 조건을 내세워 시간표를 말하려니 능숙하지 않으면 성사기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매표구 중국여자나 우리의 역관 모두 답답하다는 표정이다. 아마 이러다가는 심양고궁도 못보고 하루해가 저물 것만 같다. 그런데 가나만 생각해보니 여기가 어딘가. KAL사무소, 순간 기지를 발휘했다.
KAL예매 창구의 여인에게 단박에 달려갔다. 조선족이었다. 순식간 거래가 성사되었다. 심양에서 다음날 하얼빈 행을 6시 20분에 타고 1시에 다시 하얼빈에서 장춘으로, 장춘에서는 8시20분에 심양으로 되돌아오는 일정. 고속열차 값은 빠른 대신 엄청 났다. 3천1백 위안이니 우리나라 돈 60만원. 2015년 6월13일 6시 20분 향발 심양 북역에서 출발하여 하얼빈 서역에 도착하는 245위안짜리 열차표는 내 이름이 찍혀 있다. 열차표에 이름이 찍히는 것은 처음 본다. 왜 여권까지 확인하고 이름을 새기는지 알지 못하지만 나름 기념이 되기는 한다. 내일 행차까지 준비된 상황, 우리는 서둘러 버스를 타고 심양고궁으로 향했다. 연암이 눈치 보며 빠끔히 들여다 본 바로 그 심양고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