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 황무실 성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탄생시키고 두 분의 선교사가 선종한 내포지방 교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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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의 황무실 교우촌도 역시 오래된 교우촌으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곳이다.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를
자기 집에 모신 적이 있는 순교자 이보현(李步玄, 1773~1800, 프란치스코)은 이곳 황무실 출신이다.
지금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황무실 교우촌의 순교자는 박해 시에 순교한 송 안토니오를 비롯한 9명 외에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무명 순교자로서 내포 지방 산야에 잠들고 있다. 다만 그곳을 사목 중심지로 해서 활동했던 성직자들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만 남아 있다.
알려진 황무실 출신 순교자로는 병인년(1866년) 공주에서 교수형을 당한 송 안토니오를 비롯하여, 병인년 해미에서 순교한 신 베드로(85세),
신 아우구스티노(23세), 정묘년(1867년) 해미에서 순교한 표 안드레아(36세), 무진년(1868년) 5월 30일 해미에서 생매장 당한 방 마리아
(35세)와 역시 해미에서 순교한 그의 시어머니 박 바르바라(74세), 같은 해 공주에서 순교한 조군서 등이 있다.
황무실은 매스트르(Maistre, 李, 1808~1857, 요셉) 신부와 랑드르(Landre, 洪, 1828~1863, 요한) 신부가 전교 도중 1857년 12월 20일과
1863년 9월 15일에 각각 병사하여 뒷산에 나란히 안장되었던 곳이다. 이 매스트르 신부는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최양업(崔良業, 鼎九, 1821~1861,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과출, 1820?~1837, 프란치스코) 신학생의 스승이었다.
1852년 8월에 입국한 매스트르 신부는 다음해(1853년)에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베르뇌 주교가 입국할 때(1856년)까지 임시
감목대리로서 활동하였으며, 베르뇌 주교가 입국한 이후 새로운 사목지인 충청도 해안에서 경상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담당하여 활동
하다가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황무실에 묻혔다.
매스트르 신부가 1857년에 선종하고, 1861년 랑드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하부 내포(충청도 해안) 지역을 담당하게 되고, 랑드르 신부는
이후 황무실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활동하다가 1863년 9월 15일에 선종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다. 황무실에 있던 랑드르 신부의 무덤도 매스
트로 신부의 무덤과 함께 1970년 발굴되었으며, 그 유해는 합덕 성당 구내로 옮겨졌다가 훗날 대전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 이후 성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가 1865년 조선에 파견되어 내포에 머물면서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황무실을 사목 근거지로 하고 전교하였다. 위앵 신부의 1865년 10월 19일(2통), 10월 29일,
12월 12일 서한이 황무실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아 황무실이 위앵 신부의 사목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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