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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펜타곤 페이퍼’ 보도와 베트남전 실상
“1964년 8월 북베트남의 어뢰정이 미국 구축함을 먼저 공격해 베트남전쟁이 촉발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게 사실이 아니라니….” 또한 “미국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베트남에 대량의 폭탄을 떨어뜨린 것으
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니….”
1971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를 펼쳐 든 미국인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1945년부터 1968년까지 23년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기만과 속임수의 실상을 그대로 까발린 이날 기사의 1면 제목은 ‘펜타곤 페이퍼로 본 미국의 군사 개입 확대과정 30년’이었다.
기사는 오랫동안 비밀의 장막에 갇혀 있던 전혀 새로운 사실을 미국인들에게 알려주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베트남 내전의 개입에 반대하는 군 상층부의 경고
를 무시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남베트남 고 딘 디엠 정권의 전복을 승인했으며, 존슨 대통령은 1964년 8월 통킹만 폭격을 결정하기 전 예상되는 대량의 민간인 사상자에 관한 보고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모두 6면에 걸쳐 보도된 이 엄청난 고발은 대니얼 엘스버그(1931~)라는 군사전문가의 고뇌와 용기의 산물이었다.1967년 그는 1961년부터 7년 동안 베트남
전쟁을 지휘한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요청으로 1945년부터 1968년까지 베트남에서 행해진 미국의 의사결정에 관한 1급 비밀을 한데 모아 맥나마라 보고서 이른바 ‘펜타곤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에 관여했다.
맥나마라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된 전쟁에 의문을 품고 1967년 6월 베트남 전쟁사를 재검토하는 프로젝트에 엘스버그를 합류시킨 것이다.
폭로 기사는 1971년 6월 13일의 첫날 보도에 이어 10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닉슨 행정부가 “미국 국방상의 이익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다”며 보도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이 3회분 기사가 실린 후 신청을 받아들여 연재는 중단되었다. 시리즈가 중단되자 이번에는 엘스버그로부터 4,000쪽 분량의 보고
서를 입수한 워싱턴포스트가 6월 17일 기사화했다.
전국적으로 많은 신문이 진실보도 억압에 항의하면서 국가안보에 무해하다는 정당성과 논리를 앞세워 닉슨에 도전하는 가운데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닉슨과 측근은 ‘배관과’라는 별칭이 붙은 특별 부서를 설치해 엘스버그의 집을 도청하고 병원치료 기록을 빼내는 등 그를 인격적으로 파멸시키기 위한 공작을 폈다. 하지만 ‘배관공’들은 엘스버그를 곤란하게 할 어떤 의료기록도 찾아내지 못했다.
문제는 의료기록을 찾고 못 찾고가 아니었다. 이러한 범법행위로 무감각해진 닉슨 정부의 도덕성이 1년 뒤 정적의 선거자료를 찾아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하는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키는 데 아무런 고민 없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움직임 속에 1971년 6월 30일 미 연방대법원의 역사적인 판결이 있었다. 6대3으로 대법원이 언론자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국가 기밀이란 이유로 수정헌법 1조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긴 역사적 판결이 되었다. ‘펜타곤 페이퍼’는 내부 폭로자 시대를 연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2015년공수부대 중사 출신 최원창씨, 인터플로라 월드컵 1위 수상
👉🏿 6월 13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의 한 경기장. 마이크를 든 사회자가 외쳤다. “2015 인터플로라 월드컵 1위 수상자는 한국에서 온 알렉스 최(본명 최원창·45)입니다.”
구석에 있던 최원창이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그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꽃다발과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인터플로라 월드컵은 세계 최고의 플로리스트를 가리는 대회다. 4년에 한 번 열리며 올해가 14회째다. 국가당 한 명이 출전하는데, 이번에는 미국·영국·독일·덴마크·한국·일본·중국 등 26개국에서 참가했다. 우리나라에선 예선을 거쳐 최씨가 뽑혔다.
이 대회에서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인이 1위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최씨는 경북 김천의 산골 출신이다. 고교를 졸업하고 입대해 4년 6개월간 공수부대에서 복무하고 중사로 전역했다. 운동을 좋아해 스키·수영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긴다.
어찌 보면 꽃꽂이와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상남자다. 그런 그가 꽃과 인연을 맺은 건 여덟 살 위 친형이 운영하는 꽃집에서 일하면서부터였다.
화환과 조화를 만들고 영안실 제단 장식도 직접 했는데 부케처럼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은 외부에 맡기는 것이 싫었다.
“부케 같은 꽃 장식을 배우려고 반년간 학원에 다녔어요. 소질이 있다더군요. 아예 제대로 배워 대회에 나가보기로 했죠. 2002년 처음 나간 대회에서 1등
했어요.” 이후 2008년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받는 등 각종 대회에서 수상했다.
그는 “그렇지만 꽃으로 뭔가를 더 표현하고 싶은데 끌어내지 못해 답답함이 심했다”고 했다. 실력 있는 선생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수소문 끝에 전문가를 소개
받았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인터플로라 월드컵에 출전했던 플로리스트다. 그의 도움을 받아 독일 플로리스트 마이스터 자격을 땄고, 함께 일도 했다. 서울의 몇몇 유명 백화점 꽃 장식을 맡았고,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꽃꽂이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해외 대회 참가 횟수도 늘었다. 꽃 장식을 선보이기 위해 간 나라가 10개국이 넘는다.
가장 자신 있는 스타일은 독일식. 이유는 “영국·미국으로 대표되는 웨스턴 스타일 꽃꽂이보다 덜 인공적이고 자연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느낌이어서”라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꽃이 난(蘭)인 것도 정갈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미가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새로운 시도를 즐긴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과일이나 커피콩 등을 이용해 천연 염색한 재료들을 풀·못 등을 쓰지 않고 작품으로 완성시켜 높게 평가받았다. 그런가 하면 용접기로 배경 틀이나 받침을 직접 만들고, 톱으로 나무를 잘라 대는 막노동도 불사한다. “꽃꽂이가 꼭 여성적인 건 아닙니다. 창의적인 시도를 계속하려면 체력도 어느 정도 뒷받침돼야 해요.”
➡️2015년영국서 사상 최고령 신혼부부 탄생
➡️2010년 일본의 우주탐사선 하야부사호가 60억km를 비행하고 7년 만에 귀환.
➡️2009년 중국, 진시황 병마용 발굴 중단 24년 만에 재개.
➡️2009년 서태지(37), 서울 공연서 8집 신곡 첫 공개. '더 뫼비우스(The Mobius)'라는 타이틀로 전국투어.
➡️2006년한국 축구대표팀, 토고 꺾고 월드컵 사상 첫 원정 승리
👉🏿 한국 축구대표팀이 2006년 6월 13일 프랑크푸르트 월드컵스타디움에서 열린 토고와의 2006독일월드컵 G조 첫 경기에서 이천수와 안정환의 연속골로 2대1 역전승을 거뒀다. 이날 승리는 한국이 해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거둔 사상 첫 승리였다.
한국은 2002년 이전까지 4무 10패로 단 1승도 올리지 못했다. 이로써 통산 7번째 월드컵에 진출한 한국은 월드컵 역대 전적 22전 4승 6무 12패를 기록했다.
한국은 경기 초반 박지성·조재진·이천수를 최전방에 포진시킨 3-4-3 포메이션을 구사했다. 하지만, 전반 31분 토고의 카데르에 어이없는 선제골을 허용했다.
한국은 후반 들어 안정환을 공격형 미드필드로 투입하고, 4-3-3 포메이션을 구사했다. 활기를 되찾은 한국은 후반 7분 박지성이 상대 미드필드를 돌파하며 토고
아발로의 퇴장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천수의 환상적인 프리킥 동점골이 이어졌다. 후반 9분 이천수가 아크 서클에서 감아 찬 공은 상대 골키퍼가 전혀 손 쓸 수 없는 빈틈을 향해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주도권을 잡은 한국은 파상공세를 펼쳤고, 후반 27분 안정환이 역전골을 뽑아냈다. 안정환은 미드필드에서 연결한 공을 이어 받아 페널티 지역 바깥 오른쪽에서 통렬한 중거리 슛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2006년‘DJ 가택연금’ 19년만에 유죄, 당시 마포서장에 집유 2년
👉🏿 2006년 6월 13일 대법원3부(주심 박재윤 대법관)는 1987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던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을 가택연금한 혐의를 받고 있는 당시 서울 마포경찰서장 김모(72)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김씨의 불법감금 행위는 상급기관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 여부를 불문하고 위법성이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1987년 4~6월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 전 대통령의 집 주위에 경찰관 수백명을 배치해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김 전 대통령의 외출에 비서나 가족이 동행하지 못하게 한 혐의다.
➡️2004년영화계 대표적 감초배우 김일우씨 별세
👉🏿 우리 영화계의 대표적인 감초 배우이자 연극배우인 김일우(金一宇·51)씨가 13일 오전 1시47분 위암으로 별세했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한 김씨는 1976년 연극 ‘춘풍의 처’로 데뷔한 후 ‘그 섬에 가고 싶다’ ‘투캅스3’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엽기적인 그녀’ ‘목포는 항구다’ 등
5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감칠맛 나는 조연으로 각광을 받았다.
김씨는 지난 2월 개봉한 영화 ‘목포는 항구다’에 출연할 당시 위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으나 열정적으로 영화 촬영을 계속했으며, 항암치료를 받으며 8월 개봉할
‘신부수업’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연극 ‘선택’ ‘바리공주’, 영화 ‘스물일곱송이 장미’를 제작했으며, 1996년 영화 ‘학생부군신위’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극단 미추 배우인
부인 이용이(李龍伊)씨와 1남1녀가 있다.
➡️ 2002년 태양계와 유사 새 행성군 발견.
➡️2002년 중국, 한국 영사관 진입한 탈북자 강제연행. 이를 제지하는 한국외교관 폭행
👉🏿 중국 공안이 13일 베이징(北京)주재 한국 총영사관에 무단진입해 앞서 진입한 탈북자를 강제로 연행했고, 나중에 탈북자를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과정에서 이를 제지하는 한국 외교관 등을 집단폭행, 한·중(韓·中) 간 심각한 외교문제를 일으켰다.
베이징 공안국 소속 경찰들은 이날 오후 4시(현지시각)쯤, 앞서 한국 총영사관 안에서 끌려나와 정문 앞의 중국측 경비초소에서 중국 경찰의 조사를 받던 탈북자
원모(56)씨를 연행하면서, 이를 저지하는 한국 영사와 서기관, 영사부 직원, 한국 기자 등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집단폭행을 가했다. 이 때문에 한국 대사관 직원 등 5명이 다리와 어깨·머리 등에 상처를 입었다.
폭행에 가담한 중국 경찰 10여명 중 일부는 만취한 듯 짙은 술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한국 대사관(대사 김하중·金夏中)은 즉각 중국 외교부에 대해 공관 불가침권과 외교관 신체불가침권의 침해를 강력히 항의하고 원씨를 한국측에 되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중국 경찰에 연행된 원씨는 이날 아들(15)과 함께 택시를 타고 오전 11시(한국시각 낮 12시)쯤 한국 총영사관 부근에 온 뒤 영사관 민원인 출입구 반대편의 차량
출입구를 거쳐 영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직후 중국 보안요원 2명이 허락 없이 영사관 안으로 쫓아들어와 원씨를 강제로 끌고 나갔다. 원씨의 아들은 이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직원 사무실까지 뛰어들어가 연행을 피할 수 있었다.
원씨를 끌고 나간 보안원들은 중국 외교부 인원복무국 산하 외교아파트 임대·관리회사인 ‘방옥공사(房屋公司)’ 소속 직원들로, 준(準)공무원 신분이다.
➡️2002년미군장갑차에 치여 여중생 2명 사망
👉🏿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45분쯤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에서 친구 생일을 축하하러 가기 위해 갓길을 걷고 있던 이 마을 신효순, 심미선양 등 2명이 미군의 가교 운반용 장갑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러나 미군측은 6월 19일 사고조사 결과 발표에서 “선임 탑승자가 피해 여중생들을 30m 전방에서 발견, 운전병에게 경고하려고 했지만 소음이 심해 제때에 경고할 수 없어 발생한 고의성 없는 사고” 라고 말했다. 미군은 적법한 작전수행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에 미군측의 과실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정부경찰서가 미군으로부터 넘겨받은 사고 차량 운전병의 진술서에 따르면 운전병이 선행하던 중대장과 무전교신을 하고 있어 선임 탑승자의 경고를 못
들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경찰조사 결과 탑승자들의 헬멧에 장착된 무전교신기가 동시에 두 곳과는 교신이 불가능, 유사한 사고의 발생 위험성이 높다는 점도 드러나게 됐다.
법무부는 미군 당국을 상대로 장갑차 탑승 군인에 대한 1차 재판권포기를 요청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월 20일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이 무죄 평결을 받은 데 이어 20일에는 운전병 마크 워커 병장도 무죄 평결을 받아 파문이 확산됐다.
이후 국내에서 촛불시위를 비롯해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있었다. 파문이 점차 확산되자 부시 미국 대통령은 토머스 하버드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해 사과를 표명하기도 했으나 반미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12월 13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로 직접 사과했다.
불평등한 소파(SOFA)협정 개정에 관한 전 국민의 관심이 뜨거운 사건이었다.
➡️2002년6·13 지방선거 한나라당 압승, 민주·자민련 참패
👉🏿 2002년 6월 13일 실시된 제3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는 한나라당 압승, 민주당·자민련의 참패로 나타났다. 한나라당은 16개 시·도지사 중 11곳에서 당선한 반면, 민주당은 4곳, 자민련은 1곳에서만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쳤다.
한나라당은 특히 서울시장에 이명박, 경기지사에 손학규, 인천시장에 안상수 후보가 당선되는 등 수도권 3곳을 석권했다. 한나라당 세력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하고, 수도권 3곳을 모두 이긴 것은 1995년부터 치러진 세 번의 광역단체장 선거 중 처음이다. 한나라당이 대전시장, 충북지사, 강원지사를 비롯, 부산시장, 대구시장, 울산시장, 경북지사, 경남지사 등 영남 5개 시·도 전부를 휩쓸었던데 반해 민주당은 광주시장, 전남지사, 전북지사 등 호남지역 3곳과 제주지사 등 4곳에서 승리했다.
자민련은 충남지사 1명만 당선돼 충청권 3곳 중 2곳을 잃었다. 전국 232명의 시장·군수·구청장을 새로 뽑은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대약진한 반면, 민주당은 참패했다. 한나라당은 140명, 민주당은 44명, 자민련은 16명을 당선시켰다.
이번 선거에서 처음 도입된 정당투표에서도 한나라당이 압도했다. 73명의 비례대표 의원 배분은 한나라당 36명, 민주당 22명, 민노당 9명, 자민련 4명 순이었다. 민노당은 이번 선거에서 구청장 2명과 시도의원 11명을 배출해 선거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비례대표 73명을 포함한 682명의 시·도의원을 뽑는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467명, 민주당이 143명, 자민련이 33명을 당선시켰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48.9%로 전국단위의 선거로선 최저기록이었다.
➡️2001년 대한항공 노사협상 타결.
➡️200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일단 휴전.
➡️2000년김대중 대통령 평양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 첫 회담
👉🏿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월 13일 분단 55년만에 처음으로 직접 만나 두손을 맞잡았다. 김대통령은 전용기로 오전 10시27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고 공항에는 사전예고없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환영나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비행기 승강구에서 내린 김대통령은 트랩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위원장에게 가까이 다가가 역사적 첫 남북정상간 악수를 나눴다.
두 정상이 두손을 맞잡고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나누자 환영행사에 나온 평양시민들은 노도처럼 `결사옹위 김정일` `만세` 등을 외치며 뛰면서 열광했다. 이날
환영나온 인파는 60만으로 남북정상회담에 거는 북한의 기대를 짐작케 했다. 김위원장은 김대통령의 승용차에 함께 타 백화원 영빈관까지 가는 동안 약 50분간 `차중 회담`을 해 눈길을 끌었다.
양 정상은 이날 낮 김대통령의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에서 27분간의 1차 회담을 갖고 남북 정상간 직통전화의 개설 필요성에 대해 의견을 같이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오후에는 만수대 의사당으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예방하고, 만수대 예술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한 뒤, 저녁에는 김영남 위원장이 베푼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1997년미연방배심원, 티모시 맥베이 사형평결
➡️1993년캐나다 총리에 캠블 선출
➡️1991년옐친, 러시아공화국 초대 대통령(직선) 당선
➡️1986년`스윙재즈의 킹` 베니 굿맨 사망
➡️1984년런던서 시크교도 망명정부 칼리스탄국 창설
➡️1982년할리드 사우디국왕 사망
➡️1982년제12회 월드컵 스페인서 개막
➡️1974년중국, 비림(批林).비공(批孔)운동 전개
➡️1974년제10회 월드컵 서독서 개막
➡️1971년뉴욕타임스(NYT)지 베트남전 기밀문서 게재 정치문제화
➡️1968년정부, 가이아나와 국교 수립
➡️1966년`미란다 원칙` 고지 의무화 판결
➡️1961년언커크, 한국의회제도 부활을 촉구
➡️1959년민판수호총연맹, 언론수호대회 서울서 개최
➡️1958년스위스 의회, 부인참정권 가결
➡️1958년일본, 한국에 반환할 문화재목록을 제공
➡️1956년영국군 74년 만에 수에즈운하서 철수
➡️1955년일본-북한 어업협정조인
➡️1953년콜롬비아 육군 유혈쿠데타
➡️1948년미국 뉴욕 양키즈팀, 베이브 루스의 등번호 3번을 영구 결번으로 발표
➡️1938년학교 근로 보국대 실시요항 발표
➡️1938년휘발유 및 중유판매취체령 공포
➡️1938년경성제대 강당에서 육군지원병훈련소 입소식 거행
➡️1918년광화문선 전차 운행 개시
➡️1917년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개교
➡️1915년1938년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미국의 테니스 선수 버지 출생
➡️1903년소련 압록강목재회사 설립
➡️1903년소련,청나라 전선연접 조약 성립
[1890년]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 허가(1890.06.13 음력)
👉🏿조선조 말, 외국인이 숨지면 주로 제물포항 언덕에 묻혔다. 정부가 성내 매장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1890년 헤론이 전염성 이질에 걸려 숨진 것을 계기로 외국인들은 한강변에 가까운 양화진을 공동묘지로 불하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헤론은 1885년 의료선교사로 파견돼 불철주야 한국인을 위해 의료사업을 펼쳐온 사람이었다.
6월13일(음), 정부가 묘지설립을 허가하고 헤론이 이 곳에 처음 묻히면서 이후 양화진은 베델, 언더우드, 아펜젤러, 헐버트 등 면면이 한국인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안식처가 됐다. 묘비도 감동적인 문구로 가득해 베델의 묘비에는 “내가 한국을 위해 싸우는 건 소명”, 헐버트의 묘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적혀있다.
현재 4000여평의 공간에 500여명이 묻혀있다.
https://youtu.be/14VF5EEjc_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