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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명 | 권수 | 저술년도 |
권수정혜결사문 | 1권 | 33세(1190년) |
수심결 | 1권 | 미상(41세 이후) |
진심직설 | 1권 | 미상 |
계초심학인문 | 1권 | 48세(1205년) |
육조법보단경발 | 1편 | 50세(1207년) |
화엄론절요 | 3권 | 50세(1207년) |
원돈성불론 | 1권 | 미상(50세 이후작, 입적 후 유고 발견) |
간화결의론 | 1권 | 미상(만년작, 입적 후 유고발견) |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 1권 | 52세(1209년)기술 |
이 가운데 육조법보단경발문과 화엄론절요를 제외한 7종의 선서에 인용된 문헌과 인명은 총 115항목에 이르며, 그 인용 회수는 518회이다. 경전류에는 화엄경이 18회, 논소류에는 이통현의 화엄론이 57회가 인용되고 있다. 이를 보아 지눌의 선사상에는 선교가 중시되고 있으며, 교 가운데는 화엄을 으뜸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눌이 느끼기에 당시 불교계가 갖는 주요 위기는 선종내의 분파적 성격이라기보다 선을 교학, 특히 화엄에서 분리시키는 상호 적대감과 불신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눌은 화엄을 가장 많이 인용하였으며, 당시 화엄가가 이해한 법계연기의 입장을 여래출현의 성기(性起)로 대치하여 선교가 둘이 아님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지눌은 종밀이 선원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서 도서를 지었다고 한 것에 비해, 교에 의해서 마음을 깨달으려는 사람을 위한 관행(觀行)의 귀감을 삼고자 절요를 저술했다. 지눌이 선교일치를 확신한 것은 화엄경「여래출현품」과 신화엄경론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선교일치를 선언한 것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선문의 가르침과 ‘중생이 무명으로 분별하는 마음이 곧 모든 부처님의 근본보광명지’라고 하는 교문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단 종밀이 교와 선을 동등하게 다루면서 교선일치를 주장했다면, 지눌은 선3종을 회통하는데 교를 도입하여 선교겸수를 주장하였다.
지눌은 당시의 수행병폐를 광혜의 교학과 참선자의 치선이라고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수행자가 선정이나 지혜, 선이나 교에 치우쳐 서로를 비방한다고 혹평하면서 선교를 회통하려 하였다. 그는 수행의 방법에 대해서는 수심결에 돈오점수, 곧 선오후수를 주장하였다. 또한 정혜결사를 통해서는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 경절문 등으로 수행케 하여 선교 융섭의 뜻을 펼치게 되었다.
지눌의 저술에서 경절문인 간화선이 언급된 것은 절요•원돈성불론•간화결의론 등이다. 지눌이 절요 말미에 굳이 경절문 언구를 첨부하고 있는 이유는, 말을 의지해서 알음알이를 내고 몸을 바꾸는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수행해도 마음을 쉴 때가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몸 벗어나는 길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절문 수행 도중 ‘무자’화두 참구법에서 생기는 열 가지 병을 밝히고 있다. 즉 경절문은 지눌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정견(情見)의 장애를 없애고 안락을 체험하였던 수행문이며, 만년의 저술에서 강조했던 사상이므로 그의 교육적인 선사상의 귀결처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데 지눌의 이와 같은 선교화합의 통불교적인 노력에도 종파불교는 좀처럼 지양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력과 지향에 의의를 두는 것은 선교겸수의 종풍이 우리나라에서 그에 의해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그의 사상이 조선불교의 승가교육과 법풍 진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는 불조의 유훈과 원효· 의상을 비롯한 선지식의 종지를 인용해서 선교겸수의 종풍을 실참•실수(實修)•실증(實證)에 의해서 선양하였다.
이와 같이 지눌의 선·교 겸수의 전통은 그의 수행과 저술을 통하여 후대로 계승되어졌다.
Ⅲ. 조선불교에 있어서 지눌 사상의 수용과 계승
지눌의 사상은 주지하는 것과 같이 조선불교의 승가교육 체제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교육체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달리 조선시대 불교의 사상적 동향에도 그만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는 조선불교가 지눌의 사상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를 정리해보기로 한다.
1. 벽송지엄과 청허휴정의 선교회통
지눌 이전의 선종 승려들은 달마대사와 혜능의 영향으로 금강경과 능엄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았다. 이 외 중국 선종승려의 저술인 치문•서장(대혜종고)•선요(고봉원묘) 등도 선종의 독습 자료였다. 그리고 지눌이 정혜결사를 조직하고 돈오점수의 학설을 주장한 후로부터 절요•도서•계초심문이 선종 승려에게 독습되었다. 그 후 고려 말에 이르러 나옹혜근(懶翁惠勤, 1262~1342)의 제자 야운의 저술인 자경문 또한 선종의 학습 자료가 되었다. 지눌의 사법제자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은 지눌의 간화경절문을 크게 선양하고 있다. 그는 간화결의론을 출간하는 발문을 쓰면서 선교의 기본구조를 불립문자와 불외문자(不外文字)의 관계로 정리하였다. 즉 선은 마음이고 교는 언설이니, 교망(敎網)으로 선을 건지고 선망(禪網)으로 교를 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눌의 선교관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다. 반면 혜심만의 독특한 선관을 볼 수 있는데, 그는 임제종 대혜종고의 선지(禪旨)를 다분히 수용하면서 선교회통의 방향에서 간화선을 통한 선지의 본연성을 찾는데 주력했던 면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태종과 세종을 거치면서 11종이 다시 7종으로, 다시 선·교 양종으로 강제 통폐합되었다. 성종· 연산군· 중종· 명종 시대를 지나면서 이마저 폐지와 부활을 반복하게 된다. 명종 21(1566)년에 유교 군신의 공격으로 선교 양종과 승과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전국의 사찰이 많이 황폐해져 승려교육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환경조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으로는 조선 중기의 불교교육이 선교겸학으로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지눌이 주장했던 선교통합의 사상과 교육정신은 벽송지엄(碧松智嚴,1464~1534)과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으로 전해져 많은 발전을 이룬다. 휴정이 사조(師祖)라고 소개했던 지엄은 오도과정이 지눌과 매우 흡사했으며, 초학자를 제접하는 방법에는 지눌의 선사상이 짙게 깔려있다. 「삼노행적(三老行蹟)」의 내용 가운데, “어떤 때는 교설을(敎舌)을, 어떤 때는 선검(禪檢)을 활용하여”라는 기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승가교육에 있어 특히 교과과정 편제(編制)에 획기적인 조처를 취하였는데, 먼저 도서와 절요를 교육하고 뒤에 선요를 가르치는 것으로 차제를 정하였다. 즉, 종밀의 저술인 도서와 지눌이 지은 절요로써 진실한 지견을 세우게 하고, 다음에 선요로써 지해의 병을 씻게 하였다. 이것은 바로 교학을 통해 지해(知解)를 얻은 후 ‘조사경절문’으로 나갈 것을 촉구하는 교육이었다. 이러한 교육관은 선교겸수와 간화선풍의 지향이라는 휴정의 기풍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지엄 대까지도 선교 각종이 서로 각자의 종파를 다투어 선양하는 데 힘썼던 시기였다. 따라서 선종에서 화엄경이나 법화경을 학과로 정하여 학습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경전은 훨씬 뒤의 17세기에 강원교육의 정식 이력과목(履歷科目)으로 채택되는데, 강원의 교과과정을 이력과목이라고 불렀던 것은 조선불교통사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지엄의 법손인 청허휴정은 선•교종판사를 겸직하게 되면서 종풍을 크게 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그는 지엄을 통한 가풍을 이어받아 승가교육에 힘을 쏟았으며, 선가귀감 등 많은 저술을 하였다. 이때의 사원 교육은 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교겸학시대를 맞이하면서 발달하게 된다. 휴정의 불교관은 선•교 회통의 사상이며 지눌의 입장에서 교육을 했는데, 선에 앞서 교가 선행된 후에 사교입선 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곧 선교를 겸수하되 교를 선의 예비문으로 삼는 것이며, 이러한 학풍은 조선말까지 계속되었다. 휴정의 교육관이 사교입선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는 그의 저술 선가귀감에서 지눌의 절요에서 인용된 내용이 주원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내용은 휴정의 교육관과 수행관의 기본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특히 가운데 방하교의(放下敎義)· 참상선지(叅詳禪旨)라는 내용을 사교입선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사료된다.
2. 17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선교겸학의 학풍
휴정의 문하에는 1,000여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사명유정(泗溟惟政, 1544~1610)•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소요태능(逍遙太能,1562~1649)•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은 4대파를 이루었다. 사명파에는 송월응상(松月應祥,1572~1645)•허백명소(虛白明昭, 1593~1661)•춘파쌍언(春波雙彦, 1591~1658) 이 나와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사명파와 정관파는 18세기 이후 약화되었고 소요파는 호남지역에서 19세기 말까지 유지되었다.
편양파는 문손이 번창하였으며 전국적으로 활동하였다. 편양파 주류는 18세기에 호남 등 남방에 진출하였으며, 소요파의 공조를 얻어 대둔사 전통을 세웠다. 그곳은 화엄교학의 전수도량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선수행은 물론 교종의 기본경전인 화엄경· 법화경의 간경과 강학을 하여 선교겸학의 학풍을 이루었다.
휴정의 4세 법손이 되는 월담설제(月潭雪霽, 1632~1704)에 이르러서 천태나 화엄종 등이 소멸되고 선종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선종의 승려로서도 화엄경과 법화경 등을 자유롭게 강의하게 되었다. 특히 편양언기의 후손으로 월저도안(月渚道安,1638~1715)이 있었는데 화엄강사로 유명하다. 그는 대규모의 화엄대회(華嚴大會)를 열었으며, 당시 교학의 최고 단계인 화엄 원교(圓敎)는 선과 대등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때에는 선교겸수의 틀 속에서 오히려 화엄교학이 중심이 되었으며, 강학과 주석서인 사기(私記) 성행 등 교학이 중시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사기나 과문(科文)의 간행이 많이 나왔던 이유는, 17세기 말 징관(澄觀)의 화엄소·초(華嚴疏·鈔)의 간행에 의한 유통과 보급 때문이었다. 이 결과로 강학과 주석의 활성화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와 같이 선과 교가 공존하는 전통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조선후기의 私記들은 휴정의 제자 4대 문파 가운데 편양계와 부휴계에 의해 주도되었다. 휴정계 편양파에서는 월저도안•환성지안(1664~1729)•설암추붕(1651~1706)•설파상언(1707~1791)•연담유일(蓮潭有一,1720~1799)•인악의첨(1746~1796) 등이 사기를 편찬하였다. 특히 연담은 ‘사교입선’의 입장을 ‘由敎入禪(유교입선)’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교를 통해서 선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교를 통해서 습득한 내용을 버리거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禪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지눌의 사상에 맥을 이어 온 조선 후기의 선교겸수 법통을 이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휴정의 동문인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문하에 백곡처능(?~1680)•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무용수연(無用秀演, 1651~1719) 등의 불교 강사 및 교육자가 배출되었다. 또한 벽암각성(1575~1660)•모운진언(1622~1703)•묵암최눌(1717~1790)•회암정혜(1685~1741) 등이 강학의 대가들이었다. 묵암최눌은 화엄학의 대가로서 제경회요(諸經會要)를 찬술하였다.
이와 같은 간경과 강학, 그리고 주석서인 사기의 저술을 통한 교학의 발전은 교학적인 토론과 논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조선불교 최초의 논쟁은 대둔사의 12대 종사 연담유일과 묵암최눌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논쟁의 주제는 화엄의 성기론과 연기론, 불심과 중생심이 일원(一元)이냐, 아니면 이원(二元)이냐 하는 문제였다. 즉 제불과 중생의 마음이 각각 원만하되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견해는 묵암의 주장이요, 각각 원만한 것은 동일한 것이니 일원이라는 주장은 연담의 주장이다.
조선 후기의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선과 교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의 문제로 이어져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논쟁의 발단은 편양파인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이 선관계 연구를 발표함으로써 제기되었다. 그는 그의 저술인 선문수경(禪門手鏡)을 통해 교종에 비해 선종의 우월함과 선종 중에서도 임제종이 최상승임을 밝히려 하였다. 그는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으로 보고 의리 교학을 그 아래의 단계에 배치였는데, 이러한 점은 임제종 간화선 우위의 선풍을 지향하였던 휴정의 사교입선을 떠올리게 하는 구상이다. 백파의 의견에 맞서 19세기의 대둔사 승려로서 강사였던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은 사변만어(四辨漫語)를 지어 반박했다. 초의의 입장은 교종을 폄하하는 전통적 선관을 비판하는 것으로써 교종 나름대로의 존재근거를 확인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논쟁은 거의 백년간이나 이어졌는데, 이를 통하여 선종은 선종대로 교종은 교종대로 각기 본질적인 반성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 점도 있기는 하다. 또한 휴정의 ‘禪是佛心 敎是佛語’라고 했던 선교일치 사상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조선후기의 불교계는 벽송지엄과 청허휴정 이래의 종풍을 계승하여 선교겸학의 학풍은 그대로 유지하되, 선과 교의 위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보자면 선의 입장에서 교의 일치와 포섭을 이야기하는 지눌 이래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고 말하기에는 곤란하다고 생각된다.
Ⅳ. 조선불교의 강원교육 체계의
정착과 지눌의 영향
1. 강원교육 체계 정비의 기본 정신
강원교육이라 하면 ‘조선불교의 강학교육(講學敎育)’이라고 볼 수 있다. 강학교육은 강사•학인•교과과정•교육환경 등의 조건이 갖추어진 일정한 환경과 제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평생교육•일상교육•특수교육이 아닌 ‘제도교육’이다. 교육은 강사•중강(仲講)•조실•법사 등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중강은 학인을 교육할 때 강사스님의 보조역할을 하거나 맨 아랫반의 교육을 담당한다. 지관스님은 고려시대의 승가교육자를 소개하는 가운데 균여대사(均如大師)의 행장 중에서 중강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균여대사가 강의하기 전에 중강인 전업(全業)에게 경서(經序)를 설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제방강원의 발기(發起)와 중강제도의 시초가 아닌가 추정하였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강원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체계 중의 하나가 바로 지눌의 사상이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지눌이 정혜결사를 조직하고 돈오점수의 강설을 주장한 후부터 그의 저술인 절요와 초심 및 종밀의 도서가 강학 과목으로 선택되었다. 지눌의 많은 저술 가운데 정혜결사문이 초기 저술을 대표한다면, 절요는 후기의 작품이다. 이 찬술은 지눌의 저술 중 분량이 가장 많은 역작으로, 종지와 학풍이 총정리된 대표작으로 평가될 만하다. 이 찬술이 강원의 이력과목에 채택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벽송지엄은 최초로 교과 과정을 편성하여 초학을 가르치는데, 먼저 도서와 절요로 여실지견을 세우게 하였다. 즉, 지엄에 의해서 절요가 처음으로 사집과목으로 정리된 것이다. 뒤를 이은 부용영관은 17세기 인조·숙종 때에 학제가 완비되기 전의 사교과·대교과 설치를 위한 기초 작업을 하였다.
지엄이 강원의 교과과목을 제정한 연원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벽송당야노행록(碧松堂埜老行錄)을 들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도서와 절요로서 불교의 이론을 튼튼히 하고 선요와 서장으로 견성의 활로를 연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교를 통하여 여실지견을 세우고, 선을 통하여 출신활로를 열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본인 스스로 선교를 겸수한 지엄은 후학들을 지도하는데 있어서도 선교를 겸한 체계적이고 엄격한 교육을 실시했다. 그 후로 도서는 연담유일•설두유형 등에 의하여 계속 주석되어 왔으며, 강원교육에서 선과 교에 대한 확실한 견해를 세우게 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강원의 설치이유가 바로 선교겸수에 있음을 볼 때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지엄의 교육지침서인 「훈몽요초」에 의하면 초심자들은 ⓵ 기신론의 일심이문 ⓶ 구사론의 삼과(온·처·계) ⓷ 유식론의 팔식·사지(四智) ⓸ 삼보·사륜왕·사주(四洲)·팔풍(八風)·십사(十使)·육도·삼계구지(三界九地)·십이인연 ⓹ 천태사교 ⓺ 현수오교 ⓻ 교외삼처전심 ⓼ 세존출삼륜방편(世尊出三輪方便) 등을 차례로 학습하게 하고 반드시 지키도록 하였다. 이는 구사·유식 등의 교리를 먼저 익힌 다음 교외별전인 삼처전심의 달마선 종지를 접하고 마지막으로 여래의 삼륜방편을 익혀 여래의 실덕을 구현하려는 교육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 후로 부용영관과 청허휴정이 지엄의 뜻을 이어 선교겸수의 학풍을 완비하였다. 특히 휴정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굽히는 것은 교학자의 병이요, 높이는 것은 선학자의 병이다. 뜻을 알아 마음을 닦는 자는 스스로 굽히지도 않고, 높이지도 않는다.”라고 하여 선교학자의 자세를 일깨웠다. 선교겸수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 후기의 강원교육의 체계 정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선교겸수의 학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전의 한국불교에서 선의 입장에서 선교겸수를 주장한 지눌의 사상체계 그리고 실천체계는 조선후기 강원교육체계의 정비에 일종의 효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너무 단순한 설명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고려 말에 유입되어 조선 초기까지 선맥(禪脈)의 주류를 형성한 것이 임제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교육체계의 정비에 있어서는 오히려 지눌의 사상과 실천체계가 기반이 되었다는 점은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단순히 지눌 사상의 실천체계의 우수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선전기 국가에 의한 제 종파의 통합과 정비, 그리고 억압으로 인한 불교의 기본적 교육체계의 망실을 극복하는 과정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선종과 교종의 양대 흐름으로 재편된 상황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이 되었든 교가 되었든 기본적인 교육체계가 절실했던 사정이 반영되었을 것이고, 여기에 선종을 중심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강학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인 사정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선의 입장에서 선교겸수의 수학체계를 갖춘 지눌의 사상체계가 강원교육의 정비과정에서 수용되어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조선 중기 불교의 열악한 현실을 감내하면서 동시에 극복하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적 선택이 필요했고 그것이 교육체계의 정비에 지눌의 수학체계를 적극 활용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논자의 생각이다.
2. 조선후기 강원의 이력과정과 지눌의 영향
강원 이력과정의 형태가 체계적으로 갖추어진 사실을 보여주는 최초의 기록은 17세기 전반 휴정의 제자 영월청학(詠月淸學, 1570~1654)의 「사집사교전등염송화엄(四集四敎傳燈拈頌華嚴)」이다. 사집(四集)이라는 용어는 영월청학의 영월대사문집(詠月大師文集)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영월청학의 사집사교전등염송화엄에서는 선요· 서장·도서·절요 등 아래 표와 같은 순서로 이력과목 내용에 대해 게송으로 요약하였다.
<표 2> 이력과정 체계와 구성(17세기)
과정 | 서명 | 저자 | 내용상의 특징 | 비고 |
사집 | 고봉선요 | (원)고봉원묘 | 간화선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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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서장 | (송)대혜종고 | 〃 |
| |
선원제전집도서 | (당)규봉종밀 | 선교겸수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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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집별행록절요사기 | (당)규봉종밀 (고려)보조지눌 | 〃 | 지눌 사기 | |
사교 | 원각경 |
| 원각, 종밀이 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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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
| 심, 선종에서 중시, 육조혜능 |
| |
능엄경 |
| 심, 선·교종에서 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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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기신론 |
| 일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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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교 | 화엄경 |
| 화엄교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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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전등록 |
| 선종 전등 계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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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염송 | (고려)진각혜심 | 간화선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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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도표의 대교과 교과목 가운데 선문염송과 경덕전등록은 광복 이후에는 학습하지 않고 화엄경만을 수학하고 있다.
그 후 월담설제(月潭雪霽, 1632~1704)가 소위 대회라는 개방적 교육기관을 개설하여 초심·발심·자경·치문 등의 사미과로 시작하는 이력과정을 제정하였다. 즉 영월청학 당시만 해도 이력과목 중에 사미과는 제외되었으며,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신설되었다. 사미과의 교재인 계초심학인문·발심수행장·자경문의 간행도 16세기 후반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점에 대해 고희숙은 16세기 초까지 중종기의 법란으로 사미승의 교육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1550년 선교양종이 재정립되고 승과가 부활되면서 당시 출가하는 스님의 기초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현상이라고 논하고 있다.
그 얼마 후 법화경을 수의과(隨意科)로 정하고 대신 기신론을 삽입시켰으니, 오늘날의 강원교과목은 설제 때에 대부분 편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력과정과 과목이 정식으로 제정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라 할 수 있는데,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그 과정에 대한 몇 가지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인 두 가지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금봉화상(錦峯和尙): “이력의 시초는 과거 승과가 시행되었을 때, 선종은 전등·염송으로 시험을 보고 교종은 화엄으로 시험을 보았다. 이력과목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2) 진응화상(震應和尙):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벽계정심이 선(전등록)은 지엄에게 전하고, 교(화엄경)는 법준에게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서산대사의 행장에 의하면 부용대사에게 전등·염송·화엄·원각·능엄·법화·유마·반야 등 수십본의 경론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사교·대교의 일정한 과목 없이 경우에 따라 이 경, 저 경을 강설하였다. 사교·대교의 과목이 정해진 것은 백암성총 당시로 보고 있다. 백암성총 이전에는 화엄경이 소본(疏本)만 있고 연의초(演義抄)도 없었으며, 기신론 필삭기와 반야경 간정기도 없었기 때문에 사교·대교의 교본이 완전하지 못했다.”
또한 1647년에 간행된 편양당집(鞭羊堂集)에 의하면 “화엄·법화·원각·능엄·반야·범망 등의 경전과 전등·염송·선요·서장·선원별행을 모았다.”라는 기록도 있다. 여기에서도 사집·사교·대교란 용어는 없지만 이미 이력과목에 대한 언급은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이나 견해를 정리하면 사교과목의 연원은 승과 시행당시로, 제정은 백암성총의 시기로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밝혔듯이 영월청학이 이미 사집과 사교에 대한 게송을 읊고 있다. 이때부터 사교과목에 대한 언급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백암성총과 월담설제는 동시대의 인물이며, 그들의 교육에 대한 견해가 동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강원의 교육과정은 백암과 월담 이후에 완전히 제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편성된 이력과목이 구한 말기에 이르러 학제와 수학기간에 따라 자세하게 정리되었다. 그 기록은 조선불교통사에 자세하게 엿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과정 | 10년제 강원 | 11년제 강원 | ||
수학기간 | 이수 교과목 | 수학기간 | 이수 교과목 | |
사미과 (초등과정) | 1년 | ①수십계②조모송주③반야심경⓸초심문⓹발심문⓺자경문 | 3년 | ①수십계②조모송주③반야심경⓸초심문⓹발심문⓺자경문⓻사미율의⓼치문경훈⓽선림보훈 |
사집과 (중등과정) | 2년 | ①선원제전집도서②대혜서장③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⓸고봉선요 | 2년 | ①선원제전집도서②대혜서장③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⓸고봉선요 |
사교과 (고등전문과정) | 4년 | ①수능엄경②대승기신론③금강반야경⓸원각경 | 2년6월 | ⓵수능엄경⓶대승기신론⓷금강반야경⓸원각경 |
대교과 (대학과정) | 3년 | ①화엄경②선문염송③경덕전등록 | 3년6월 | ⓵화엄경⓶선문염송⓷경덕전등록⓸십지론⓹선가구감⓺묘법연화경 |
수의과 (대학원과정) | 대교과를 졸업한 자가 입학하여 4년 이상 전공과목 이수 |
<표 3> 교과목 및 수학기간(구한말, 1897~1910)
도표 가운데 <표2>와 <표3>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표3>가운데에서는 수학기간에 따라 교과목의 수가 더 증가되었다. 또한 <표2>에는 보이지 않던 사미과가 <표3>에 신설되었으며 사교과목이 법화경에서 기신론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학원과정인 수의과가 새로 제정되었다. 치문이 사미과의 이력과목으로 채택된 것은 11년제의 경우뿐이다. 근대 이후 사미(니)과의 가장 중요과목인 치문이 강원교재로 채택 된 것은, 백암성총이 치문집주(緇門集註)를 쓰고 그 서(叙)까지 써서 원문에 삽입하여 간행한 1695년 이후로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강원의 이력과정은 17세기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동안, 지눌의 선교겸수 사상을 바탕으로 교과목과 함께 수학 기간이 점차 체계적으로 정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강원의 이력과정에 지눌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다고 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수 교과목의 특징에 있다. <표2>와 <표3>에서 보는 것처럼, 지눌의 저술들이 사집과정의 이수과목으로 들어가 있는 것은 그 직접적인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기초과정이자 예비과정인 사미과정을 거친 후에 사집과정, 다시 말해서 본격적인 선교 수학의 첫 번째 과정의 이수 교과로 지눌의 저술이 채택되고 있는 것은, 이후의 이력과정을 거침에 있어서 지눌의 관점을 기본적인 관점으로 채용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살펴보면, 사집과정에서는 지눌의 도서와 절요를 통해서 선교겸수의 기본 관점을 제시하고, 선요와 서장을 통해서 간화선의 기본 관점을 익히는 형태로 편제되어 있다. 이것을 단순하게 지눌이 제시하는 선교겸수의 사상 및 수학체계와 간화선체계의 결합이라고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교과와 대교과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수교과 자체가 화엄과 선이라는 양대 흐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선가의 종전과 화엄의 종전들을 수학해가는 형태의 이수과목이 편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지눌 선교겸수 체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선과 상대되는 교에 화엄을 놓는다는 점에 있는데, 강원의 이력과정 전체에 그러한 관점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후기 강원의 이력과정은 전체적으로 지눌의 관점을 채용하는 형태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눌이 정혜쌍수를 세우고 돈오점수를 주장한 이래, 선교겸학시대에 이르러 강원교육이 정착되면서, 강원은 선원의 예비문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즉, 강원 수료자가 선원에 들어가 평생 수행을 하는 예비 교육기관으로의 역할을 한 것이다. 물론 각 사원의 개성과 교육방침에 따라 선원교육이 먼저 실시되기도 하고 강원·선원교육이 동시에 행해지기도 하였다. 조선불교통사 「행해(行解)」편에 의하면, 선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사교·대교과를 수료하여 비구계를 받은 20세 이상이 된 자에게 부여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이력과목이 교종의학(敎宗義學)에 치우쳤고 선문참구에는 역점을 두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견해의 이면에는, 교종에 치우친 강원교육이 이력을 마친 후 선원에서 실수를 하게 하는 상황을 초래한 것이라는 의도가 보인다. 그러나 종범스님은 사미과부터 대교과의 교과목을 열거하면서 ‘이력과목 대부분이 수선수행(修禪修行)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논박하였다. 또한 기신론은 화엄종· 정토종 등 모든 종파의 불전으로 볼 수 있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서는 즉심즉불 유심정토 등의 선지를 선양하는 측면으로 봉독해 왔다. 화엄경의 경우도 기신론과 같은 유심세계를 교설한 경전으로 이해한 경향이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염불정토의 경우는 고려시대에도 자력과 타력 두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지눌은 단지 하근기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타력신앙 차원에서 이해하였으며, 수행방안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휴정은 하근기 중생의 타력적 염불왕생과 상근기의 자력적 염불선 수행을 모두 인정하였다.
종범스님의 견해와 같은 내용으로 지관스님의 견해를 들 수 있다. 스님은 논문에서 조선시대 이후 일부 뜻있는 스님들에 의해 강원교육이 염불·간경·참선을 함께 교육하는 체재로 진행되고 있다는 내용을 피력하였다. 이것은 지눌의 성적등지문·원돈신해문·경절직지문의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진허팔개(震虛捌開)의 염불문·원돈문·경절문의 삼문 수학 강조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다. 즉 염불문은 정토왕생, 원돈문은 화엄경이니 교종을 뜻함이며, 경절문은 선종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기두는 1769년에 진허팔관(振虛八關)이 찬술한 삼문직지(三門直指)에 지눌의 삼문을 다음과 같이 변용되게 사용했다고 기록하였다. ① 염불문-염불인유경에 의거함 ② 원돈문-원돈성불론과 청량국사 성기품 중심 ③ 경절문-간화결의론과 대혜종고의 선풍이다.
이상과 같이 선과 교는 서로 대립하거나 우월을 다툴 것이 아니고 함께 나가야 함을 강조하고 가르쳤던 지눌의 선교겸수 사상에 바탕한 교육관은 그 후대까지 조금은 변화를 이루면서 지속되어져 갔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교육관은 조선시대 이후까지의 강원교육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지눌이 주장했던 선교통합의 사상과 교육정신은 벽송지엄과 청허휴정으로 이어지면서 부분적인 변화를 겪기는 하지만, 그 관점의 골간은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Ⅴ.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눌의 선교겸수 사상은 한국불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매우 중시되고 있다. 선교겸수 사상의 탄생은 신라 말기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선사상의 유입에 그 근원을 둘 수 있다. 선사상이 도입되면서 신라말기 이후 고려시대 초에는 선종과 교종이 서로 교리를 내세워 각자의 우수성을 주장하여 다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천은 교와 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교의 입장에서 교선의 융섭을 위해 힘을 모았다. 그는 형식과 이론, 아집과 편견에 치우쳐 그 근본을 잃고 방황과 논쟁을 일삼던 불교계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선이 교를 떠나서 선을 말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리하여 선문의 고승들을 모집하여 능가경과 기신론을 배우도록 권하였다.
뒤를 이어 지눌은 선교대립의 고려불교 병폐를 바로잡고자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융섭하려는 취지로 조계종을 개종하였다. 그는 당시의 수행자가 선정이나 지혜, 선이나 교에 치우쳐 서로를 비방하고 있다고 혹평하면서 선교를 회통하려 하였다. 그가 선교일치를 선언한 것은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선문의 가르침과 ‘중생의 무명으로 분별하는 마음이 곧 모든 부처님의 근본보광명지’라고 하는 교문의 가르침이다. 그의 선교겸수 사상은 조선불교의 승가교육과 법풍진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눌이 주장했던 선교통합의 사상과 교육정신은 벽송지엄·부용영관·청허휴정으로 전해져 많은 발전을 이룬다. 지엄은 지눌이 저술한 절요를 강원의 교과목으로 채택하였으며, 휴정은 임제종 간화선 우위의 사교입선을 주장하였다. 휴정의 문하에는 1,000여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사명유정· 편양언기· 소요태능· 정관일선은 4대파를 이루어 많은 활동을 하였다. 휴정의 4세 법손이 되는 월담설제에 이르러서 천태나 화엄종 등이 소멸되고 선종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선종의 승려로서도 화엄경과 법화경 등을 자유롭게 강의하게 되었다. 특히 편양언기의 후손으로 월저도안이 있었는데, 화엄강설로 유명하다. 그는 대규모의 화엄대회(華嚴大會)를 열었으며, 당시 교학의 최고 단계인 화엄 원교(圓敎)가 선과 대등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때에는 선교겸수의 틀 속에서 오히려 화엄교학이 중심이 되었으며, 선교겸수의 틀 속에서 오히려 강학과 주석서인 사기(私記) 성행 등 교학이 중시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간경과 강학, 그리고 주석서인 사기의 저술을 통한 교학의 발전은 교학적, 혹은 선과의 관계에서 토론과 논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하여, 선종의 우월함을 입증하고 선풍을 지향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급기야 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논쟁의 발단은 편양파인 백파긍선이 선관계 연구를 발표함으로써 제기되었다. 그는 그의 저술인 선문수경을 통해 교종에 비해 선종의 우월함과 선종 중에서도 임제종이 최상승임을 밝히려 하였다. 초의는 그에 맞서 교의 입장에서 교학의 우수성과 교종 나름대로의 존재근거를 확인시키려 했다. 두 입장의 논증은 대를 이어 이어졌으며, 논쟁에 관해서 학문적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지눌이 승가 교육으로 지향했던 선의 입장에서의 선교화합의 통불교적인 사상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 후손들에게 각자의 방법으로 계승되었다. 또한 시대적 상황에 의해 논쟁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저술했던 절요 등의 찬술은 근대 이후까지도 강원교육의 주요 교과목으로 채택 되었으며, 그가 이루어낸 사상은 현재의 불교계에서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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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Jinul’s Thought affecting on Buddhist Monastic Education
Ven. Heecheol(Ha, mi-kyung)
/Education Institute in the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Education Preceptor.
This Paper deals with how National Teacher Bojo Jinul made a role of Korean Buddhist Sangha Education and how his thought has been transmitted in Sangha educational System.
Master Jinul exerted to enlarge Joyge Seon and educate Doctrine and Seon Meditation in whole life until entering into Nirvāna in Suseonsa Temple at the age of fifty three. His educational Thought could see in his nine writings namely Jeolyo, Studies of Ganwhaseon(Ganhwa gyeoruiron) and among these Jeolyo was selected by the Sajib Class’s curriculum in Sangha University.
It was said that he would take the prototype of the established practice for a person who wants to enlighten his mind by Doctrine in relation with the reason written Jeolyo. To the end of this book are attached phrases and sentences of the “Ganhwa gyeongjeolmun(Shortcut approach to observing the hwadu)”. The reason for this should be that he makes someone who don't know the way to exchange his body recognize the way to free from his body after accepting without any place to calm down his mind although his practice, because he relied on speaking and gave rise to discriminating thought.
Futhermore, Jinul pointed out the malady of practice at that time just as Doctrine in bride knowledge and practitioner’s only sitting posture without meaning.
And to remove this malady he asserted to educate Seon and Doctrine without conflict between them. Then he insisted the style of a school of the combined practice of Seon and Doctrine with methods of true contemplation, true practice and true realization by using the style of a school of Seon Master.
His such thought has been transmitted, the style of a school has an great effect on the development of Sangha Education in Joseon Dynasty and Dharma style.
The thought of the Unification between meditative and doctrinal approaches and educational mental insisted by Jinul reached high point to the Master Byeoksong Jieom and Cheongheo Hyujeong. Jieon’ process of Enlightenment was very similar to Jinul’s. His thought based on Jinul’s Seon Thought in the Method to join Beginners directly.
He took significant procedure to establish curriculum in Sangha Education specially. After Doseo, Jeolyo were studied then Seonyo could be taught. This order to educate was established. This is the eduction to urge to progress into“Ganhwa gyeongjeolmun(Shortcut approach to observing the hwadu)” after having attained wisdom through doctrinal study.
Such views on Education are correspond to Hyujeong’s buddhist family style which is known as the combinde practice Seon and Doctrine and the Inclination of the Seon Style of Ganhwa Seon. Such a System of Education is to assert that before Seon Practice, we should enter into Seon after doctrinal approaches have been abandoned.
Hyujeong’s buddhist views are the thought of the interpenetration of Seon and Buddhist Study according to the education by Jinul’s aspect.
Such the Style of a study has been succeed until the end of Joseon Dynasty.
Jinul’s Style of a school had a great effect on Sangha University in Joseon Dynasty. As that result, Jinul’s work, Jeolyo was selected in Sangha University. Until Master Byeoksong Jieom, Buyong Yeonggwan and Cheongheo Hyujeong, the study style of the Practice together with Seon and Buddhist Study has been transmitted according to Jinul’s Idea.
Yongweol Cheonghak, Hyujeong’s pupil systematically organized the form of Curriculum of Sajib Class and Sagyo Class. For the first time, Weoldam Seolje established Curriculum beginning with Sramana Class.
Like this, the Sangha University’s curriculum established by Jinul’s precedents has been progressed concretely according to Educational Rule and Studying period.
* Key-word
Saṅgha Education, combined practice of Seon and Doctrine, consilience of Seon and Doctrine, Curriculum, Sangha University’s Edu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