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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주 뒤크로. 최미경 (역).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 눈빛. 2001.
_원제| Pauvre et douce Corée. 가련하고 다정한 꼬레. Georges Ducrocq - Poor and Sweet Korea
어느날 한 프랑스 시인이 중국 일본과는 전혀 다른 조선만의 독특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1901년 조르주 뒤크로는 조선을 여행하며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들의 눈빛은 꿈꾸는 듯했고 얼굴에는 온화함이 가득했습니다. 집은 대부분 초가였지만 사람들은 여유로웠고 바람이 고요히 부는 평화로운 나라였다. 또한 그들은 가난하지만 결코 비참하지 않았습니다. 친절하고 우아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민족 , 이들에게 악한 점을 찾을 수 없다. 그가 본 조선은 수천 번의 전쟁을 겪고도 여전히 욕심이 없고 남을 해치지 않는 민족이었다. 당시 세계가 전쟁과 제국주의로 불타던 시기, 그는 조선에서 세상에 잃어버린 마지막 평화를 보았다. 책제목을 이렇게 남겼다.「가련하고 정다운 나라조선」
70_ {…} 조선의 가옥에서 벽의 역할은 서양의 경우와 다르다. 조선의 가옥에서 벽은 집의 지주라기보다는 추위를 막기 위한 완충물이며, {…}. 가난한 사람들의 집의 경우, 벽은 단지 수숫대와 종이로 되어 있다. 이런 벽들이 자주 내려앉곤 하는데, 추위가 고개를 들면 그제서야 다시 벽을 바를 생각을 한다.
70_ 볕이 드는 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만 북풍이 불어오는 쪽은 급경사를 이룬다. 초가지붕은 새끼와 돌로 고정되어 있으며, {…}.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중국식 청기와를 얹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일부 양반에게나 가능한 사치이며, {…}.
73-74_ 한민족의 얼굴은 황인종 특유의 찌푸린 인상이 아니다. {…} 남자들은 원기가 넘치며, 매우 튼튼한 골격의 당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다. 튀어나온 이마는 훤하게 드러나 있어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며, 켈트족의 이마와도 유사하다. 얼굴은 사할린 섬의 아이누인처럼 덥수룩한 수염으로 덮여서 이 점으로도 이웃나라 사람들과 조선인을 구별해낼 수 있을 듯하다.
74_ 조선 여성들은 키가 크고 늘씬하며 단단한 체격으로 {…}.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는 종종 인상적인 근엄한 표정과 진지하면서도 부드러운 표정이 깃들어 있어 남성들의 태평한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74-75_ 흑단처럼 검게 빛나는 숱 많은 머리채는 부드러운 데다가 기름을 발라서 윤기가 흐른다. 조선 여인네가 이런 머리채를 잘라서 중국인 가발상에게 근으로 달아 팔 때에는 정말 가난에 찌들어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을 때뿐이다. {…}. 성인 남자들은 상투를 틀어서 그 끝을 산호조각 같은 것으로 묶으며, {…}. 평민 아낙들은 머리를 왕관 모양으로 쪽을 지어 물건을 일 때 또아리를 대신하기도 하며, 세련된 여인들은 딴 머리를 이마 위로 돌려, 목덜미에 은비녀로 쪽을 진다.
78_ 고국을 떠나 아무리 먼 나라로 이주해도 한민족은 항상 흰옷차림을 하고 있다. 헤이룽 강가에 채소밭이라도 하나 보이고, 밀가루라도 뒤집어 쓴 듯이 흰옷을 입은 농부를 보게 되면, 그 사람은 틀림없는 조선인이다.
78_ 색깔이 있는 옷은 젊은이⋅부녀자,아이 들이 주로 입으며, 조선 남자들은 하늘색⋅연분홍⋅담회색⋅패랭이색⋅연보라색을 선호한다. 진한 색상의 의복을 입는 경우에는 시골사람들이 대담함을 가질 때인데, 시골에서는 경쾌한 색깔, 푸른 사과색이라든가 빨강 복숭아⋅버찌⋅살구색에 가까운 옷을 입는다.
81-82_ 아침이면 시골 농부들이 황소 등에 땔감과 야채를 싣고 도시로 팔러 들어온다. 농부들은 길가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종각 부근의 사거리 일대는 순식간에 가축시장이 되어 버린다. {…}. 물건을 다 판 뒤에는 성곽 근처에 있는 주막에 들르는데, 주막에서는 우편마차용 말을 쉬게 하고 여물을 먹일 수 있다. 주막은 원래 마구상가, 밧줄 가게, 징 박은 신을 파는 가게, 대장간에 즐겨 모여 앉는 버릇이 있는 이 시골사람들이 모이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이다. 술을 한 차례 마시고 얘기를 나누다가 채찍이나 고삐를 사고 마부들과 일상적인 욕설을 주고받은 후에야 {…} 시골마을로 되돌아간다.
82-83_ 길에는 설탕장수⋅칼장수⋅안경장수도 보이며, {…} 장님들이 서로 손을 잡은 채 줄지어 다니는데, 제일 앞에 어린아이 한 명이 그들을 인도하곤 한다. {…}. 이 무샅태평한 사람들 사이로 근심어린 표정으로 급히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업신여기는 웃음을 띠고는 길을 내준다. 불행하게도 그는 일을 해야 하는 관리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거지 팔자가 도승지 팔자보다 낫다”라는 속담도 있다.
83-84_ 계집아이들도 사내아이들만큼이나 대담하다. 누군가 서툴게 얼음을 지치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즐거운 폭소가 터진다. {…}.
계집아이들은 제기차기를 하는데, 이 놀이는 놀이채 대신에 발로 제기를 던지고 받는 것으로, 그 발놀림이 아주 우아하다.
86-90_ 신발장수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조선인들이 자주 사 신으며 스스로 칼로 크기를 조절해서 싣는 짚신을 파는 사람, 굵은 못을 박은 굽을 만드는 사람, 비단신 장수 등이 있다. 이 비단신 장수들은 거의 절반이 땅에 묻히고 짚으로 잔뜩 덮인, 담배 연기가 자욱한 따듯한 작업실에 모여 앉아 기름칠을 하고 다듬고 꿰맨다. 또 높은 나무굽의 창이 달린 신을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이 신은 진흙을 막기 위해 뒤축을 댄 것이다. 이 신을 신으면 어쩔 수 없이 백조처럼 천천히 무게있게 걸어다닐 수밖에 없다. 가장 예쁜 신은 아이들 것으로, 유럽의 사육제 때 입는 두건 달린 의상을 연상시키는 연한색이다. 신장수들은 여유부리는 것을 좋아해서 서두르는 법이 없다. “갖바치 내일 모레”라는 속담 하나가 이런 신장수들을 비웃는다. 항상 앉아서 일하는 신장수는 생각할 여유도 있고 창가(唱歌)를 지을 여유도 있다. {…}.
제지공은 가장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제지산업이 조선 제일의 산업이기 때문이다. 종이는 모든 일에 필요하다. 기름을 먹인 것은 포목만큼이나 질기며, 빻았을 때는 돌가루만큼이나 단단하다. 칸막이벽⋅방바닥⋅창문⋅갓을 보관하는 통⋅바구니⋅물바가지 모두가 종이이다. 빗방울이라도 한 방울 떨어지면, 조선사람들은 얼른 주머니에서 종이갓을 꺼내 쓴다. 추위를 막기 위한 가장 좋은 방편도 종이포를 걸치는 것이다. 조선은 오래 전부터 종이 제조에 뛰어났다. 14세기 무렵, 문인왕들이 통치할 적에는 순식간에 삼십만 자의 인쇄용 실록자를 주조하게 했고, 왕조실록 속에 소설과 시조를 박아 넣었다. 오늘날은 이런 정신은 사라졌고, 휼륭한 고급 서적은 드물다. 종이는 여전히 과거 시험에 사용되고, 응시자들의 작문이 적힌 종이는 기름이 먹여져서 비가 올 때 훌륭한 겉옷으로 이용된다. 중국은 항상 조선의 종이를 구입해 간다. 주푸항에는 중국 고관이 사용하는 종이를 잔뜩 싫은 배가 조선으로부터 도착하곤 한다.
한양에는 또다른 종류의 흥미를 끄는 직인들이 있다. 예를 들면 연꽃 씨를 가지고 염주를 만드는 장인, 중세공인⋅칠보공예인⋅소규모 금은 세공인들이 그들이다. 청자의 감탄할 만한 신비는 잊혀진 지 오래되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보다 훨씬 앞서서 작고 섬세한 찻잔에 차를 마셨다. 일본의 사추마 지역의 장인들에게 점토를 굽고 식히는 방법을 전수한 것도 조선인들이다. 골동품 상가를 돌아보면 촉감이 부드러우면서도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는 진흙으로 된 완벽한 형태의 세련된 쥐색 혹은 무구한 백색의 균열을 주어 구운 전성기의 사기를 아직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은 이런 미묘한 농담(濃淡)은 잊혀져서 한양에서는 더 이상 가마를 돌리는 일이 없으며, 따라서 사기 굽는 도예가도 없다. 이제는 갈색 흙으로 구운 하찮은 독을 짓는 도기공들이 등에 독을 지고 팔러 한양 거리를 돌아다닌다. 독을 진 끈이 끊어지면 등에 있던 독들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다. 옛날이야기 한 대목에는 “독장수만큼이나 놀라서”라는 대목도 있다.
이 나라에는 또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직종들도 있다. 예를 들면 등바대, 소맷부리를 파는 사람, 베옷 속에 입어서 한여름에 옷과 피부의 접촉을 막고 베옷의 형태를 유지하게 하는 대등거리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장례 의식에 필요한 물건들인 등(燈)⋅상장(喪章)⋅베옷 일체를 비롯하여 성대한 장례식에 필수적인 물품들, 필요하다면 자손들에게 눈물까지도 빌려 주는 곡꾼들을 공급하는 상점들도 있다.
어쨌든 가장 사람이 북적거리는 곳은 갓장수네로, 한양 한복판의 종각 근처 상가에 가서 손님이 얼마나 많은지 또 얼마나 진지한 표정으로 갓을 고르는지를 보아야 한다. 조선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단순한 것을 좋아하지만 모자만은 예외여서 복잡하고 값이 나가는 것을 선호한다. 갓은 유럽의 실크 모자를 연상시키지만 독특한 것은 상투를 넣은 망건 위에 균형있게 얹어 놓는다는 점이다. 갓의 가치는 전적으로 갈기털에 달려 있다. 재산 정도의 지위에 따라 갓이 다르다. 일반인들은 대나무로 만든 것을 쓰며, 양반들은 멧돼지털로 된 것을 쓴다. 조선사람들은 갓을 구별하는 데 실수하는 법이 없다. 갓의 가볍기에 따라, 투명성에 따라, 갓의 광택에 따라 사람을 판단한다. 갓을 쓰지 않은 사람은 하급 인부이거나 상중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삿갓만을 써야 한다. 청년들은 옅은 황토색 같을 쓰며, 성인 남자는 검은 색, 문관들은 말총으로 만든 갓을 쓴다. 조선에 오래 살아 본 후에나 비로소 갓이 나타내는 계급의 표시를 잘 알게 되며, 갓을 제대로 점잖게 쓰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속하는 계급과 그 사람이 받은 교육의 정도를 가늠하게 된다. 길모퉁이에는 갓을 수리하는 이동 수리상도 있다. 한마디로 갓을 쓰지 않은 조선인은 상상할 수도 없으며, 갓은 약하면서도 귀중한 물건이라 항상 머리 위에 단단히 놓여 있다. 황제가 지나갈 때도 조선인은 절은 하여도 갓을 들어 인사하는 법은 없다.
92_ {…} 하루종일 답답하게 갇혀 있던 아낙들이 풀려나 바람을 좀 쐬는 것이 허락되는 시간이다. 예전에는 밤이 되면 도시 전체에 여성들이 넘쳤고 남성들은 활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이런 관습이 사라졌다. {…}. 조금 사는 집 여성들은 젠체하기 위하여 비단치마를 서너 개 두르고 소매가 펄럭이는 장옷을 입고 나이 먹은 하녀 옆에 붙어서 도보로 시내를 한 바퀴 돈다. 아주 부유한 집 아낙은 네 명의 하인이 우직하게 어깨에 지는, 내부를 표범가죽이나 비단으로 장식한 가마 속에 앉아 시내를 돈다. {…}. 많은 여성들이 이 시간을 이용하여 연애를 하거나 연애편지를 받거나 자신의 연서(戀書)를 남의 집 문지방에 꽂아두고, 동반한 노파가 공모라도 하면 님을 만나러 간다.
95-96_ 장례식이 치러지는 것도 밤이다. 해질 무렵에 여느 때와는 다른 초롱불이 왔다갔다 하면 장례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행렬를 더 성대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장례식 참가자를 산다. 장례행렬에는 부채꼴, 해모양, 연꽃문양 등의 초롱을 든 사람, 핏자국처럼 밤에도 눈에 띄는 홍사초롱을 든 사람이 있고, 가족과 친지들은 구별을 위하여 백초롱을 든다. 이런 여러가지 초롱들이 모두 고인의 집 주위에 모인다. 집앞에는 두 개의 상여가 기다리고 있다. 앞의 것은 형식상의 것으로, 장례행렬의 선두에 서서 적은 액수의 지전(紙錢)을 던져 악귀의 흥미를 끌어 악귀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 뒷상여에 시신이 실려 가는데, 작은 관에 시신을 굽혀 모신다. 시신은 베로 된 수의가 입혀져 있으며, 종이 화환으로 장식되어 있다. 고인의 아들들은 상여의 시신 옆에 타고 가는데 상심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하여 찢어진 베옷을 입고 있으며, 머리에는 베로 된 관을 쓰고 요령을 흔들며 듣기에도 끔찍한 곡을 한다. 돈을 받고 곡을 하는 사람들과 친지들은 상주를 따라 곡을 하며, 이 침울한 행렬은 한양의 대로를 가로지르는데 그 소란과 불꽃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 도시 전체가 이 야간이 행렬로 뒤흔들린다. 고인의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수백 개의 등불이 사람들은 현혹한다.
한양의 묘지들은 시내에서 몇 시간 떨어진, 한적하고 바람이 들지 않는 계곡에 있다.
97_ 조선에서 상(喪)은 엄격하게 치러져서, 고인의 가족은 몇 달 동안 상복을 입으며, 머리에는 굴건을 쓴다. 여행을 할 때는 삿갓을 쓰고, 입을 베일로 가린다. 관습에 따르면 상제는 말을 하여서는 아니 되며, 사람들이 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도 무례한 짓으로 여겨진다.
99-101_ 장롱에 두었던 잔치옷들을 꺼내 입고 여인네들의 머리에는 가장 세련된 장식인 땋아올린 머리와 꽃으로 장식된 화관이 놓인다. {…}. 머리를 왕관처럼 땋아올린 신부 들러리들이 앞서서 들어오는데, 전통에 따른 치마폭이 어찌나 넓은지, 그 작은 손으로 치마폭을 사리고 힘들게 걷는다. 사각거리는 새 비단옷은 아직 이들의 몸에 길이 들지가 않아서 소리가 더하며 힘을 들인다. 그런가 하면 길이 든 옷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 들러리 역할을 위해서는 키가 크고 아주 단아한 처녀들을 고른다. 몸종들은 비단보자기에 싼 선물을 들고 따르며, 그 뒤로 아이들이 소중한 기념물인 목각오리를 들고 따르는데, 이 색칠된 오리들은 부부의 정절을 나타내는 순박한 상징이다. 신부의 남동생은 왕자처럼 차리고 당당하게 자신이 이날의 개선장군인 양 뽐내며 조랑말을 타고는 말을 거칠게 다루며 혼자 나타난다.
그 뒤에 신랑은 말을 타고 성큼성큼 등장하는데, 고삐는 머슴이 잡고 있다. 신랑은 두 개의 깃털이 달린 사모관대를 쓰고 있다. 신랑은 대개 아직 수염도 안 난 풋내기로, 부모가 시키는 대로 혼인에 응한 것인데, 잔칫날 어린아이처럼 들떠서 흥겨워한다.
마침내 마지막으로 속옷과 비단보퉁이가 들어오고 그 사이에 혼약의 반지가 빛나는 갈색의 손이 나온다. 신부가 도착한 것이다. 신부는 정말 고통스럽다. 전날 밤부터 동무들이 와서 관자놀이의 머리를 한 올도 없이 올려 주었고, 얼굴에는 화장을 하고 연지 곤지를 찍었으며, 입술에도 연지를 발랐고, 눈썹을 그리고 덧붙였으며, 콧구멍과 귀를 막다시피 했다. 올린 머리에 꽃을 꽂고 장식띠를 두르고 비단에 싸인 신부는 잔치의 꽃이다. 그렇지만 갖가지 장식에 사인 신부는 혼삿날 유일하게 고통스러운 사람이다. 귀 먹고 앞이 안 보이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신부에게 혼인날 남은 추억은 몇 백 번이나 애를 먹은 가마행진뿐이다. 신부는 불구자와 같은 상태로 신랑에게 인도된다. 이후로는 보고 듣고 말하고 숨쉬는 것 모두가 신랑에게 달린 것이다. 그런데 신부가 신랑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혼인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부모가 혼사를 정하지만 약혼자끼리는 서로 몰래 얼굴을 본다. 신랑은 신부를 가마에서 내리도록 하여 자신의 집 대문턱을 넘어 피로연이 있는 대청으로 선녀라도 모셔 오듯이 모셔 와 앉힌다. 신랑은 신부에게 녹용, 혼례음식, 봄에 사냥꾼들이 따 모은 갖가지 열매를 대접한다. 이때 신부가 아주 완고한 여자가 아니라면 기꺼이 받아먹는다.
{…}. 새벽같이 일어나 아직도 달이 뜬 시간에 밥이나 국수를 준비하고, 개장국, 혹은 호박국 등을 끓여야 하며, 떡도 하고 특히 밤낮없이 남편의 의복을 반질거릴 때까지 다듬이질 해야 한다. {…}. 그래도 이웃으로 마실을 가게 하며, 글방에라도 다니게 하는 충실하고 성실한 남편을 만난 여인은 복이 많은 편이다. {…} 조선의 여인네들은 여성스럽고 사랑스러우며 소설의 애독자이며 감수성이 예민한데, {…}.
108-110_ {…} 조선문학은 격언조로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속담을 많이 사용한다. 이 속담들을 보면 분별력이 있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악의없이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을 조롱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지혜는 싱겁거나 단조로운 것이 아니라, 생기있는 단 세 마디의 짧은 형태에 실수를 담아낸다. 속담은 민족의 거울인 것이다. 조선 속담은 이 나라가 가난한 나라이며 그래서 무엇이든지 계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배 주고 속 빌어 먹는다” “아주머니 술도 싸야 사 먹는다” 같은 속담이 있는가 하면, 운이 없는 사람이 많은 나라여서인지 다음과 같은 속담도 있다. “소금 팔러 가면 비가 오고, 쌀가루 팔러 가면 바람 분다.” 또 혐오스러울 정도의 가난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라는 속담이 있다.
없는 재주를 억지로 부리지 말라는 뜻으로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라는 격언도 있다.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급히 서두르는 야심있는 자를 슬쩍 비웃는 말로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다”가 있으며,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꿀 먹은 벙어리”라고 한다. 쓸데없이 여러 일을 벌여 수고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라는 속담이 있다. 속담은 또 “왕지네 회쳐 먹을 비위”를 가진 철면피인 권세있는 사람을 경계한다. 그런가 하면 왕의 힘도 한계가 있음을 경고하는 “왕도 포도밭에서 당황한다”라는 속담과 불가항력을 나타내는 “하늘의 별따기”라는 속담도 있다.
허풍떠는 한양의 멋쟁이를 비웃는 속담으로 “단삼 적삼 벗고 은가락지 낀다”가 있으며 경솔한 젊은이를 경계하는 것으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가 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을 경계하는 말로는 “행렬을 꼭 만져 봐야만 할까”(원 속담이 변형된 듯하나 출처가 확실치 않다 ― 역주), 허풍선이 마부에 대해서는 “먹기는 발장이 먹고 뛰기는 말더러 뛰란다”는 속담이 있다.
속담 중에는 주변국에 의해 억압받고 짓밟히는 상황에 있는 조선의 가련한 신세에 대해 암시를 하는 것도 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가 그것이며, 조선의 절망적인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나무에 올려놓고 흔드는 격”이 있다. 그 중에는 계속되는 국가의 시련 앞에 저항하는 심정을 말하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표현도 있다.
쓸 만한 명언들은 시골의 장날이나 주막집에서 주로 들을 수 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잘 알게 해준다. 한편 오랜 숙고 끝에 얻어낸 지혜를 소박하게 표현한 것으로, 못난 것이 조숙하다는 뜻의 다음과 같은 속담도 있다. “산살구 지레 터진다.” #속담
113_ {…} 예전에 그렇게 훌륭하게 꾸며졌던 정원, 아름다운 곡선을 따라 심어진 잔디밭, 진달래꽃들, 소나무숲 등등의 이 유서깊은 궁의 아름다움이 보존되지 못하고 묻혀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 그나마 빈민들에게 나무갈퀴로 쓸어내게 하는 일마저 시키지 않았더라면 땅이 완전히 덮여 버릴 것이다. 이 고궁터의 고요함을 깨는 사람이라고는 가을 한철 일하러 오는 일꾼들이 전부이다. 그 외에는 노루⋅다람쥐⋅독수리가 왕노릇을 하며, 겨울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면 기러기떼가 와서 자리를 잡는다. 꿩은 이 궁 안에 새끼를 깐다. {…}.
{…} 바위로 된 작은 섬과 향원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생명력이 강한 식물의 증식으로 인해 거의 사라지고 청기와 지붕은 잎새에 가려져 있다.
118-119_ 양반의 법도에 따르면 양반은 명예를 추구하거나 아니면 그저 근근히 살아가야 한다. 체면을 잃지 않고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 있다면 그것은 서적상인데, 이것으로 큰 부자가 될 수는 없다. “생원님이 종만 업신여긴다”라는 속담도 여기에서 유래한 듯하다.
{…}. 때때로 고관들은 황제에게 일정한 수의 호랑이 가죽을 상납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냥꾼들에게 사냥 명령이 떨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고관이 마을을 지나다 새로 지붕을 이은 집을 눈여겨본다. 그러면 그 지붕을 새로 한 사람은 돈을 바쳐야 한다. 이런 가차없는 징세제도 때문에 차라리 백성들은 빈둥거리며 노는 편을 택한다. 그러나 조국을 떠나 시베리아라도 가게 되면 한두 푼 저축을 한다. 만약에 정부가 덜 가혹하게 군다면 백성들은 덜 게으를 것이다.
119-120_ 신식 군대는 매일 아침 왕궁의 뜰에서 훈련을 하는데, 진전이 전혀 없어서 군인들은 여전히 발도 제대로 못 맞추며, 나팔수는 항상 음정이 틀린다. 징집된 장병들은 꼭 달라붙어 활동이 불편한 제복을 입고 난처해 하며, 상투 위에 얹은 군모, 흔들흔들하는 말총모자, 군화 때문에 발이 아파한다. 목도리를 두르고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총은 팔 밑에 낀 채 군인들이 훈련을 받으러 온다. 기병대도 신통치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작은 국산 조랑말은 대담하고 거세어 어떤 산길이라도 달리며 매복전에서 훌륭하게 한몫을 할 터인데도 황제는 전쟁시에는 사실상 무용지물이며 평화시에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덩치가 큰 호주산 말을 군인들에게 지급했다.
125_ {…} (명동성당은 1892년에 착공되어 1897년에 완공된 성당으로 프랑스인 코스트 신부가 세었다. 최초의 미사는 1898년 5월 29일에 있었다. 그런데 한양을 내려다보고 있는 위치 때문에 조선정부는 풍수지리상의 이유를 들어 문제를 제기했었다. {…}.
129-130_ 북악산에 오르려면 사대문 중에 하나를 빠져나와 무단강과 북경까지 이르게 되는 황제로를 따라가야 한다. 이 길은 예전에 중국 사신들이 오가던 길로, 한양에 연호를 가져오거나 혹은 지참금을 가진 왕녀를 동반하고 오던 길이다. 그런데 일본군들이 이 길에다 조선의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경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독립문을 세웠다. 그렇지만 조선인들은 이런 식의 독립에 대해 그다지 큰 긍지를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133-134_ 한양 남쪽에 있는 남산은 오르기가 수월하다. 이 산은 한양 사람들의 여름 산책 장소로, {…}.
남산 꼭대기에는 조그만 절이 하나 있는데, 아마도 태풍이나 시내로 갑자기 들어오는 흉액을 막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이 절의 절지기는 가난한 사람으로, 산보 나온 사람들이 때때로 향이나 과일을 놓고 갈 뿐이다.
134_ 운명이 고약해도 다음과 같은 속담으로 위로를 한다. “웃는 팔자로 태어난 자가 있는가 하면 울 팔자로 태어난 자도 있다.” #속담 ⓔ
때로는 시인이자 철학자이지만 항상 다음과 같습니다. 우울함으로. 6천 년 동안 동양인들은 비행을 보는 것에 대해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흰갈매기
자유 비행
넓은 바다에서 수영을 할 때 걱정이나 후회가 없습니다.
필멸자가 슬픔을 떠나고 당신을 따라 날아갈 수
있는 행복한 섬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 산, 이 푸른 물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크게 증가했습니다.
나도 성장했고, 나의 젊음이 자랐고,
나의 세월이 펼쳐
졌고, 보라,
늙음이 진행되고 있다.
내 인생의 절반은 이미 끝났습니다.
나는 다시는 젊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노화를 멈출 수 있다면! 내 머리카락이 더 이상 하얗게 변하지 않는 비결을 알
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네 개 또는 다섯 개의 시체
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두세 개의 삶
이 있습니까?
이것은 나쁜 꿈
이다 잠시도 쉬
지 않고 우리는 고통만 철저히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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