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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는 시편 8편의 물음은 모든 학문과 예술에 깔려 있다.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라고 촉구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본성적으로 앎”을 추구하는 존재로 정의했다. ‘호모 사피엔스’의 탄생이다. 문제는 앎의 성격과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이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는 데 있다. 특히 디지털화된 정보에 기반을 둔 앎은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변화는 인간 이해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시대의 사회와 문화
디지털은 첨단 기술의 결정체다.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그 기술에 의해 형성되고 작동하는 사회 네트워크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살고 있다. 디지털 사회는 기계적인 장치에 저장된 정보의 제작과 접속, 소통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삶의 환경이다. 앎의 기초 단위가 0 또는 1로 표시되니 단순하고 효율적이다. 정보는 단편적이며 파편화돼 있고 비인격적이다. 특히 성경이 중시하는 앎의 인격성과 관계성이 빠져 있다.
대표적인 후근대 철학자인 리요타르는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정보화 사회의 특징을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이라고 했다. 정보화로 인해 지식의 연계성이나 통일성이 무너진 것이 주된 원인이다. 보편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지식 체계나 진리의 틀도 사라졌다. 사회와 문화를 결속시키는 기초인 신화나 이념 같은 모든 거대 담론이 신빙성과 설득력을 함께 잃었다.
기술은 그것을 사용하는 공동체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뎃와일러는 디지털 기술은 인간에게 “무엇이든지 기억할 수 있고, 세계 어디에 있든지 누구와도 무료로 대화할 수 있으며,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을 줬다고 했다. 일종의 전지성과 편재성을 갖춰 도구의 자리를 넘어 전능한 신의 지위에 오른 셈이다. 애플의 신화인 스티브 잡스는 실제로 “아이갓”(iGod)이라고 불렸다. 뿐만 아니라 이런 기술은 세상이 더 빠르고, 더 스마트하며, 더 효율적으로 발전한다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드러나는 일종의 종교가 됐다.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특이점이 곧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많다. 알파고와 챗GPT는 그 가능성을 실감나게 만들었다.
디지털 사회와 문화는 정보화의 특성을 반영한다. 실제로 인터넷과 SNS 같은 디지털 기술들은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분열시키기도 한다. 또 알고리즘은 같은 성향을 가진 이들만 모이는 ‘소셜 버블’을 형성해 혐오와 증오의 엔진 역할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기술이 형성하는 사회와 문화를 도외시할 수 없다. 오늘의 이웃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이들을 넘어서 디지털 공동체로 확장돼야 한다. 타인에 대한 상호 배려와 존중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이유다.
디지털 기술에 대한 맹신으로 형성된 세계관
오늘날 사람들은 기술을 맹목적으로 따라간다. 열정적으로 기술을 사용하지만 그것이 현명한 일인지 반성하는 일이 없다. 기술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를 반성하지 않는다. 인간은 우상을 만드는 전문가라고 한 칼뱅의 말처럼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는다. 자고 깨면 진화해 있는 기술은 삶에 넓고 깊게 들어와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밤낮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기술이 삶을 바라보는 안경, 즉 세계관이 되는 것은 큰 문제다.
네덜란드의 기술 철학자 스휴르만은 《기술의 불안한 미래》에서 현대 기술은 “가능한 것은 무조건 실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비판했다. 현대 기술은 모든 것을 공격적인 관리와 제어 대상으로 삼는다. 나노 기술로 DNA를 조작하고, 뇌에 칩을 심어 마음도 통제한다. 기계에 뇌를 내려받아 영생을 꿈꾸기도 한다. 그 속에서 모든 생명과 인간 자신도 위협받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스휴르만은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정체성 규정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기술 사회의 특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보여 준다. 근대 이후 과학은 지식은 물론 진리까지 독점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퍼뜨렸다. 그래서 기술은 종교이자 구원의 길이 됐다. 거기에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덤으로 따라왔다.
과학과 기술의 세계관은 유물론 사고에 기초한다. 유물론 사고는 세상에 영적으로 설명할 부분을 남겨 두지 않는다. 그래서 악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다. 사물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가로막고, 삶의 근본적 물음을 중요치 않은 것으로 여기며 배제한다. 더욱이 기술의 특징은 가능한 최대의 효과적 진보와 최대 효율을 가장 싸게 추구하는 것이다. 스휴르만은 지금 세계는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 아래 부와 경쟁 승리의 유혹에 미혹돼 신기술 유토피아를 좇고 있음을 일깨운다.
기술 사회에 대한 인간의 책임: 기술 윤리의 출발점 정립
스휴르만은 기술의 위험에 맞설 신학적 기원을 가진 윤리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사회 전체에 걸쳐 작동하는 거대한 비인격적인 시스템적 기술도 결국엔 인간의 산물이므로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기술문화는 기술 밖의 영원한 관점에서 평가돼야 한다. 실재가 창조주에게 의존하고 연결돼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표현이 연약한 것들을 돌보는 기술 윤리의 출발점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기술의 가면을 벗기고, 그 안에 숨겨진 악한 이데올로기를 밝혀야 한다고 스휴르만은 주장한다. 기술은 창조주와 보존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생명을 바라보는 문화에 관심을 둘 때만 적절한 위치에 설 수 있다. 특히 문화 명령을 정복과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과 희생과 돌봄으로 행하는 것이 성경적인 방향임을 강조했다. 특히 인격성을 훼손하고 영적 정체성에 압력을 가하는 기술을 반대해야 한다. 인간을 기계와 동일시하는 경향은 인류 존속을 위협할 수 있는 기술에 저항할 수단을 잃고 만다고 경고했다.
기술이 가져온 심각한 위기 상황을 꿰뚫어 보면서도 스휴르만이 희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모든 상한 상태를 치유해 새롭게 창조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희망과 책임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거대한 기술 시스템에 맞설 새로운 종류의 윤리를 향한 열망도 준다고 했다. 최고의 계명인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때만 기술의 문화, 사회, 생태, 정치, 경제적 가치를 바로 깨닫게 된다. 위기 해결을 위한 희망은 거기에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성경적 인간 이해: 전인적(全人的) 인간관
디지털 사회의 위험을 극복하는 시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본질을 성경적으로 회복하는 데 있다. 초지능과 신체적 능력을 구비한 슈퍼 휴먼인 트랜스휴먼은 초인이 되려는 욕망의 발로다. 이는 인간의 근본적 정체성을 왜곡하고 파괴를 초래한다.
인간은 자기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본질 중 관계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인간은 관계 지향적 존재다. 이런 인간 이해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본질을 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정신적 능력인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중심으로 파악했던 것과 대조된다. 근래에는 인간 몸의 중요성도 강조된다. 사회적 정황 또는 관계도 인간의 중요한 본질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범주로서의 영혼이 강조된다.
지성과 감정과 의지는 인간의 몸을 통해서만 구현된다. 그것은 우리 몸의 기능들이다. 몸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다. 인간은 생각이나 의지로만 살지 않는다. 많은 경우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도 몸에 배인 습관을 따라 거의 자동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러니 디지털 문화의 탈-신체적 성격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마련돼야 한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역시 인간의 일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에만 본래 의도된 삶을 바로 살 수 있다. 사회적인 정황도 이 관계의 중요한 일부다. 물론 우리 삶의 환경인 자연 만물과의 바른 관계도 중요하다.
인간은 무한한 환경 즉 모든 일의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은 물론이고 그 너머의 영원 속에서 살아간다.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분리되거나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더불어 하나의 영혼으로 통합된 전인적 인간관은 인간을 이성이나 감정, 의지로 축소하는 환원주의나 정신을 육체의 부산물로 간주하는 유물론적 사고와 심리학적 인간관을 비판한다. 또 비본질주의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을 전적으로 사회적 상황에 의해 형성되는 텅 빈 존재로 보고,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치적인 권력 투쟁이나 계급 투쟁이라고 한다. 이는 성경과 다르다. 성경은 인간을 영적 존재인 동시에 육체와 사회적인 관계를 가진 전인적 존재라고 정의한다.
관계적이며 역동적인 인간관
영성 운동가로 잘 알려진 달라스 윌라드는 《마음의 혁신》에서 성경이 보여 주는 전인적 인간의 모습을 세밀히 살폈다. 영혼은 인간의 모든 요소가 통합된 삶을 이루는 가장 깊은 차원의 전인이다. 영혼은 생각과 마음만 아니라 몸과 사회적 관계까지 통합하는 인격의 중심이라고 했다. 따라서 영성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 관계는 경외와 배척, 두 가지 방향으로 갈라진다. 인간은 하나님과 동행하거나 우상과 더불어 살아간다. 물질적인 것과 몸을 하나님으로 삼는 현대인은 말할 수 없는 영적 갈증을 느낀다. 그래서 이방 종교나 뉴에이지 운동과 같은 영성 운동에 심취한다고 윌라드는 지적했다.
윌라드의 또 다른 중요한 통찰은 인간을 타고난 성품만이 아니라 여러 후천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는 역동적인 존재라고 여기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 혁신은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에 전인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이뤄지는 긴 과정이다.
그는 전적으로 수동적이거나 전적으로 능동적인 혁신은 믿지 않는다. 그것은 은혜에 응답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마음의 혁신은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서며 시작된다. 이는 순간의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 일상적이면서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성장과 변혁으로 나타난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뿐만 아니라 육체적이며 사회적인 관계의 변혁도 수반한다. 영적인 변화는 인간의 모든 차원이 거듭나고 그리스도를 닮아 갈 때 일어난다. 인간이 형성되고 재형성되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영적 형성에 있어 우리는 디지털 미디어의 영향력을 감안해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인간 이해는 과학기술의 세계관에 기초한다. 과학기술은 인간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줄 수 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과학과 종교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과학과 종교는 우리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종교는 가장 가까운 별까지의 거리를 알려 줄 수 없고, 과학은 인생의 의미를 말해 줄 수 없다.”
무신론과 유물론 세계관에서는 티끌보다 작은 인간이 장엄한 우주 앞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비인격적 우주관은 별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 대신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을 안겨 준다. 그리스도인은 장엄한 우주를 경이와 찬양으로 대한다. 시편 8편에서 인간은 창조주가 사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와 찬송으로 경배한다. “여호와 우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디지털 시대를 바로 살기 위해 회복할 바른 인간 이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참된 지식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