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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공내전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에도 대륙에는 문화와 낭만이 있었다.
문화인들과 홍군지도층 인사들은 꽤나 친밀했었는데 지금의 한국사회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 1947년 겨울 난징南京의 황먀오쯔黃苗子 집 마당.
앞줄 왼쪽부터 청자룬盛家倫, 장루이팡張瑞芳, 위펑郁風.
뒷줄에 딩충(왼쪽 둘째), 황먀오쯔(오른쪽 셋째), 진산(오른쪽 둘째)이 서 있다.
중일전쟁(1935년)이 발발하자 상하이의 문화인들 대부분은 전시수도 충칭重慶으로 향했다.
비교적 젊은 축들은 공산당 근거지 옌안으로 갔다.
충칭은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입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먹고 자는 문제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들 앞에 느닷없는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류당二流堂 당주堂主’로 회자된 20세기의 맹상군 탕위唐瑜였다.
그는 남양화교 출신이다. 버마의 대자본가 집안이지만 사업보다 영화 쪽에 관심이 많았다.
문장도 신랄했다. 여배우 롼링위阮玲玉가 자살했을 때 ‘누가 롼링위를 살해했나’라는 글로 상하이를
뒤집어 놓은 장본인이 탕위였다.
중공 선전부장 판한녠潘漢年과 화남국 서기 샤옌夏衍 등 중공의 문화정책 담당자들과 친했다.
중일전쟁 기간 버마에서 윈난雲南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중국의 유일한 보급통로였다.
탕위는 랑군의 형들에게 사업을 핑계로 돈을 타냈다. 대형트럭 2대와 승용차에 뭔가 가득 싣고
충칭에 와서는 차량까지 처분해 버렸다. 원로 연극배우 뤼언呂恩의 회고에 의하면 자산가치가
은행을 하나 차려도 될 정도였다고 한다.
탕위는 대형 거실이 딸린 번듯한 집을 구입한 뒤 요리사와 세탁부를 고용했다.
상하이 시절부터 알던 문화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중국인이라면 애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막론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시사만화가 딩충丁聰, 뭘 물어봐도 모르는 게 없지만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은 음악가 청자룬盛家倫,
여류작가 펑쯔鳳子, 명名화가에 산문가지만 서예가로 더 알려진 황먀오쯔黃苗子,
왕런메이王人美와 헤어진 한국인 영화 황제 김염金焰과 결혼하는 친이秦怡,
왕런메이의 두 번째 남편이자 중국 발레의 초석을 놓은 현대무용가 다이아이롄戴愛蓮의 첫 남편이었던 화가 예첸위葉淺予, 경제학자 저우유광周有光, 극작가 우쭈광吳祖光, 우쭈광의 첫 번째 부인이나 다름없었던 미녀 연극배우 뤼언,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위문단으로 나왔다가 북한 여배우와의 스캔들로 총살당할 뻔했던 미남 배우 진산金山, 홍색공주 쑨웨이스孫維世에게 남편 진산을 도둑맞은 장루이팡張瑞芳, 장칭江靑과 한방에 하숙했던 죄로 문혁 시절 영문도 모른 채 온갖 고초를 겪었던 황먀요쯔의 부인인 여류화가 위펑郁風, 시장경제의 제창자 우징롄吳敬璉의 모친 덩지싱鄧季惺 등이 상객常客이었다.
▲1943년 충칭重慶 시절의 탕위.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몰려있다 보니 폭소가 그칠 날이 없었다. 저마다 작은 사고 몇 건씩은 저질러 본 사람들이다. 언제 무슨 말들이 튀어나와 웃음거리가 될지 몰라 여간 급한 일이 아니면 빠지려 하지 않았다.
다들 이류二流로 자처했다.
틈만 나면 저우언라이周恩來, 랴오청즈寥承志, 차오관화喬冠華 등과 함께 탕위의 집을 찾아와 한바탕 떠들어야 속이 시원하던 궈모뤄郭沫若가 이들에게 당호堂號를 선사했다.
‘일류인물 이류당一流人物 二流堂’,
세상에 이렇게 멋진 당호가 없었다.
당주堂主는 당연히 탕위였다. 모두 흡족해했다. 20여 년 후 날벼락을 맞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1950년대 말 우파분자로 몰린 우쭈광, 딩충, 황먀오쯔(왼쪽부터)는 지금의 헤이룽장黑龍江성 싼장三江평원인 베이다황北大荒에 끌려가 3년간 노동을 했다. 1961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세 사람.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宋慶齡은 딩충의 열렬한 팬이었다.
1939년 딩충의 항일화전 전시장을 방문했다.
이류당二流堂은 듣기 좋고 부르기도 편했다. 기억하기도 좋았다.
전쟁시절 문화예술인, 학자, 언론인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충칭에 상주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둥비우董必武·린뱌오林彪 등도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공산당 정책과 정치얘기를 하려 했지만 딩충丁聰이
“정객들의 치국治國 행위가 정치다. 우리는 정객이 아니다. 소시민들이다”
라고 한 다음부터는 혁명이나 정치 얘기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항상 옷이나 담요 따위를 들고 왔다.
말이 없던 린뱌오는 가끔 “죽을 끓이면 천하에 별미”
라며 옌안延安에서 수확했다는 대추와 좁쌀을 슬그머니 놓고 가곤 했다.
국민당 남방 집행부 주임 왕신헝王新衡도 툭하면 황먀오쯔黃苗子를 따라 이류당을 찾았다.
공산당 쪽 사람들이 더 붙임성이 있었다. 문화인들은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좌경 유치병’ 환자가 되기 시작했다. 딩충은 증세가 특히 심했다.
중·일전쟁이 끝나자 이류당에 모이던 사람들은 충칭을 떠났다.
원래의 생활터전인 상하이와 홍콩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차오관화喬冠華는
“이류당은 장차 베이징에서 할 일이 많다. 문화인들을 위한 살롱을 만들어
휴식할 장소를 제공해 줄 곳은 이류당밖에 없다”
며 미래를 기약했다.
후일 중국의 초대 유엔대표로 주목 받았던 ‘백발의 노신사’ 차오관화도 당시에는
이류당에서 날을 지새우던 국제문제 평론가였다.
신新 이류당
우쭈광吳組光의 집 건너편에 쓰촨四川요리 집이 문을 열었다.
숙친왕肅親王의 막내딸이 주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실이라면 친언니는
한간漢奸으로 총살당한 동양의 마타하리 진비후이金璧輝, 일본명 가와지마 요시코千島芳子였다.
왕녀王女가 어떻게 생겼는지 두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주인이 미혼이라는 것까지 알려지자 오후 서너 시부터 긴 뱀처럼 줄을 섰다.
쓰촨요리 집에서 볼일을 본 문화인들은 으레 우쭈광네 집을 찾았다.
우의 집은 졸지에 ‘신新이류당’으로 변했다.
쓰촨요리 집 덕분에 우쭈광을 찾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였다.
골병들 지경이 된 우는 꾀를 냈다.
유명 식당이 없는 곳에 집을 구입해 상하이에 있는 부모를 모셔오면 손님들 발길이
줄겠거니 했다. 부친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고궁박물관 소장 문물들을 남쪽의 안전한
지역으로 옮긴 ‘고궁 문물의 수호신’이었다. 그래서 노인에게 인사 오는 사람이 많았다.
인근에 이름난 식당은 없었지만 교통이 너무 편했다.
바록 골병은 들었지만 수확도 있었다. 쓰촨요리를 먹으러 왔던 왕스샹王世襄이
이류당을 제 발로 찾아왔다. 왕은 푸젠福建의 대대로 내려오는 망족望族 집안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영어가 유창했다. 부친은 외교관이고 모친은 평생 금붕어만 그린
중국 최초의 영국 유학생 출신 화가였다. 왕은 법과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형사 재판을
한번 방청했다.
“죄지은 사람들 앞에서나 큰소리치는 한심한 직업”이라며 생각을 바꿨다.
부모가 의과대학을 권했다. 입학해 보니 체질에 맞지 않았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하기는커녕 생사람 잡을까봐 겁이 났다.
개犬·비둘기·매·귀뚜라미 등을 데리고 노는 것이 훨씬 재미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대학 때까지 놀기만 했다. 곤충과 동물이 친구였다. 가을에는 귀뚜라미
싸움에 넋을 잃었고 겨울에는 곤충들을 품에 넣고 다니며 우는 소리를 즐겼다.
매를 날려 토끼를 쫓고, 개들과 함께 오소리를 잡으러 다녔다. 아무리 놀아도 피로하지
않았다. 애지중지 키우던 비둘기를 멀리 날려 보낼 때는 내가 자유를 얻은 듯 통쾌했다.”
책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옌징燕京대학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 눈이 부리부리한
매 한 마리를 어깨에 얹고 등교하는 학생을 볼 수 있었다.
▲ 문혁기간인 1972년 후베이湖北성 셴닝咸寧의 57간교干校에서 노동 중인 왕스샹.
자연 속에서 소와 함께 있다 보니 항상 즐거웠다고 훗날 회상했다.
1939년 왕스샹은 모친을 잃었다. 야단칠 사람도, 감싸줄 사람도 없다 생각하니
허전해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었다.
모친이 그렇게 좋아하던 중국고대회화에 갑자기 정이 갔다. 5년에 걸쳐
‘중국화론연구國畵論硏究’를 완성했다. 70만 자에 달하는 대작이었다.
“3년상은 너무 짧았다. 떠난 모친에게 선물하고 나니 홀가분했다. 살 것 같았다.”
왕스샹은 가출했다. 허난河南·산시陝西 일대를 떠돌았다. 린후이인林徽音, 량스청梁思成 부부와 함께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고건축물의 실태를 조사하며 고증을 통한 고대건축의 연구에 매달렸다.
이류당이 있는 충칭重慶까지 흘러 들어갔지만 이류당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는 없었다.
왕스샹의 집 팡자위안芳嘉園은 베이징의 대표적 전통가옥이었다. 우쭈광의 집에서
이류당 사람들과 알게 된 왕은 황먀오쯔, 위펑 부부, 만화가 장광위張光宇에게 팡자위안으로
이사올 것을 권했다. 문화부 부부장 샤옌夏衍과 딩충의 집도 지척에 있었다.
샤는 이들의 대장이었다. 팡자위안은 신이류당의 새로운 집결지로 탄생했다.
왕스샹은 음식의 대가였다. 남의 집에 가서도 음식을 직접 만들었다.
그가 만든 국수와 야채요리는 천하의 별미였다. 비결을 물으면
“좋은 자료를 고를 줄 아는 눈만 있으면 된다. 가급적이면 남보다 먼저 시장에 가라”
는 말을 자주 했다. 왕은 새벽마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왕스샹은 중국인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던 중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 신화사新華社 사장 시절 담배를 피우다 부인 징푸춘經普春에게 들킨 랴오청즈가
부하 직원들 앞에서 호되게 야단맞는 장면.
당시 신화사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1979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과 수교했다. 대만 문제에 여유가 생겼다.
무력통일 대신 화합과 대화를 통한 국공 문제 해결을 제시했다.
자존심이 상한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불담판, 불접촉, 불타협’의 3불정책을 고수했다.
82년 7월 25일 전인대 부위원장 랴오청즈廖承志는 인민일보를 통해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에게
보내는 ‘즈장징궈신致蔣經國信’을 발표했다.
“그간의 증오를 털어 버리고 다시 합작의 길을 모색하자” 는 내용이었다.
‘내 동생 징궈經國吾弟’로 시작되는 가서家書 형식의 편지였다.
“ 나이 들면 지난날이 더욱 그리운 법, 요원하기만 한 남쪽 하늘 넋 잃고 바라보느니,
너만 괜찮다면 당장 짐을 꾸려 네가 있는 타이베이로 가겠다”
“ 땅끝까지 가서 파도만 도둑질하면 그곳에 내 형제가 있다.
서로 만나 한 번 웃으면 은혜와 원한 모두가 물거품”
이라는 루쉰의 시까지 인용했다.
말미에는 노부인(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에게 대신 문안인사를 전해 줄 것을 청하고
팡량方良(장징궈의 부인), 웨이궈緯國(장징궈의 동생)와 조카들의 안부를 챙겼다. 랴오청즈는
대만총통 장징궈를 공개적으로 “내 동생”이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소년 시절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랴오는 황포군관학교 서기의 아들이었고 장은 교장 장제스의 아들이었다.
▲ 1950년대 중반 자녀들과 함께한 우쭈광·신펑샤 부부.
신펑샤(왼쪽)는 여섯 살 때부터 노래를 부른 당대 최고의 평극平劇 배우였다.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정변이 발생했다. 주동세력은 생명과 자유와 사랑을 노래하다 요절한 민족시인을
추앙하던 지식인 조직 ‘페퇴피 서클’이었다. 공산당에 축출당한 전임 총리를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다.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자본주의 복벽”이라 단정했다.
무력을 동원해 진압해 줄 것을 소련에 강력히 요구했다.
헝가리 사태는 마오쩌둥에게 경종을 울렸다.
하루아침에 그렇게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실제 베이징·상하이·우한 등 대도시에서는
공산당 비판 학생집회가 간간이 열렸다. 헝가리 사태 초기와 흡사했다. 마오쩌둥은
“혁명에 승리하자 일부 동지의 의지가 쇠퇴했다.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정신은커녕
지위와 명예에만 눈이 벌겋다. 앉았다 하면 먹고 입는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 누가 얼마를
더 받고 덜 받는 타령이나 해대는 것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며 본격적인 당내 정풍운동을 전개했다. 관료주의도 호되게 비판했다.
“관료주의는 금품이나 받아먹고 시치미 떼는 부패한 것들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군중을
대할 때 좋은 말로 하는 법이 없고 매도할 궁리만 한다.
문제가 발생해도 달려가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타도돼야 마땅한 것들이다.”
이어서 ‘반우파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초등학교 교사에서 부장급에 이르기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들 50여만 명이 우파로 낙인이 찍혔다.
문화부 부부장 중 한 사람이 ‘문예보’에 장편의 글을 발표했다. 제목이
“이류당 우파 소집단을 철저히 분쇄하자”
였다. 이류당에 출입하던 문화인 거의가 된서리를 맞았다.
베이징 영화제작창은 전체확대회의를 열어 ‘반혁명 우파분자’ 우쭈광吳祖光을 성토했다.
문화부 부부장이 우의 부인 신펑샤新鳳霞를 호출했다.
“네 남편은 정말 나쁜 놈이다. 태도를 분명히 해라.”
“어떻게 하면 됩니까?” 신은 되물었다.
부부장은 당일자 인민일보를 내밀었다. 우파분자 남편과 이혼하고 공산당 입당을 자청한
여인의 찬양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바로 이거다. 좀 보고 배워라.”
“당은 지식분자들을 개조한다 했다. 남편을 개조시키면 될 거 아니냐.” 신은 주저하지 않고 거절했다.
“개조가 불가능한 사람이다.”
“가능하다.”
“아주 먼 곳으로 보내겠다.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른다.”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도대체 얼마 동안을 기다리겠다는 말이냐?”
신은 평극平劇의 주인공 이름을 거론했다.
“왕바오촨은 쉐핑꾸이를 18년간 기다렸다. 나는 28년을 기다리겠다.”
“당장 나가라.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부부장은 발끈했다. 이 부부장은 훗날 묘한 말을 남겨 당사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신펑샤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내 깐에는 무진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신펑샤는 톈진의 빈민굴 출신이었다. 문맹이었지만 노래를 잘했다.
여섯 살 때부터 목소리 하나로 가족들을 부양했다. 천하의 기재奇才 우쭈광을 만나 글을 깨쳤다.
“내게는 너무 과분했지만 우쭈광은 하늘이 보내준 유일한 선물이었다.”
결국은 여배우 뤼언呂恩과 동거 중이던 우를 손아귀에 넣은 당대 최고의 평극 배우였다.
하다 보니 신이류당 당주가 되었던 우쭈광은 1958년 봄 500여 명의 우파분자와 함께
베이다황(헤이룽장성 북부, 현재의 싼장평원 일대. 지금은 곡창지대로 변했지만 당시엔 황무지였다)행
새벽 열차를 탔다.
그날 따라 눈이 내렸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아 늦게 결혼한 딩충은 출산을 앞둔
부인 선쥔沈峻을 병원에 둔 채 황먀오즈, 여류작가 딩링丁玲 등과 함께 베이징을 떠났다.
딩충과 황먀오즈는 벌목장에 배치받았다.
체격이 우람한 사람들은 고생이 많았지만 두 사람은 키 작은 덕을 단단히 봤다.
여러 명이 나무를 운반할 때 어깨가 나무에 미치지 않았다.
타고난 재주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베이다황北大荒 문예를 편집했다.
문혁 초기에도 4인방은 “중국의 페퇴피 구락부”라며 이류당을 정조준했다.
최종 목표는 저우언라이... 산전수전 다 겪은 저우가 모를 리 없었다. 홍위병들에게
“문인들이 모이던 곳이다. 조직이 아니다. 이류당을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온갖 흉악한 용어가 이류당 사람들의 이름 앞에 다시 난무했다.
홍색공주 쑨웨이쓰
1937년 겨울 우한武漢의 팔로군八路軍 연락사무소에 열여섯 살짜리 여자애가 찾아왔다.
요구가 무척 당돌했다.
“옌안延安으로 가겠으니 빨리 안내해라.”
사무소 측은 어리고 믿을 만한 소개장도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날만 밝으면 왔다. 한결같은 거절에 문 앞에 앉아 훌쩍였다.
하루는 울고 있는 애 옆을 지나치던 중년신사가 멈추고 돌아봤다.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자애 입은 자물통이었다. 이름을 물어도 부모가 누구냐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무조건 당 중앙이 있는 옌안으로 보내달라고만 했다. 신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웨이스維世가 아니냐?” 여자애 눈이 반짝했다.
“누구기에 내 이름을 알죠?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내가 바로 주 아빠야. 못알아 보겠니?"
10년 전 장제스에게 요참腰斬당한 쑨빙원孫炳文의 딸을 찾은 저우언라이는 부인을 불렀다.
헐레벌떡 달려온 덩잉차오鄧潁超는 쑨웨이스를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통곡부터 해댔다.
덩이차오는 웨이스를 옌안까지 직접 데리고 가 항일군정대학抗大에 입학시켰다.
비슷한 시기에 옌안에 도착해 항대에 입학한 리윈허李雲鶴(후일의 江靑)는 쑨을 보자 당황했다.
쑨빙원은 신해혁명 직후 민국일보를 창간한 언론인이다.
하지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황제 즉위 기도를 비판해 체포령이 내려지자 고향에 돌아와
교육사업을 벌인 교육자이기도 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전쟁으로 혼란에 빠져들자
37세라는 늦은 나이에 마르크스의 고향에 가겠다며 고향 친구 주더朱德와 함께
독일 유학을 떠난 이상주의자였다. 저우언라이를 만나 공산당에 입당했고 귀국 후
저우언라이의 뒤를 이어 황포군관학교 정치부주임과 북벌 시기 국민혁명군 후군사령관을
역임한 혁명가였다.
27년 4월 국공합작을 파기하고 공산당 숙청에 나선 장제스는 쑨빙원이 체포되자 직접 찾아가
고관후록高官厚祿을 약속하며 회유할 정도로 평소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거절당하자 요참을
지시했다. 쑨빙원은 체포 4일 만에 상하이의 룽화龍華 감옥에서 몸이 두 동강 나는
처참한 모습으로 삶을 마감했다. 쑨웨이스가 여섯 살 때였다.
웨이스의 모친은 딸을 데리고 우한으로 피신했다가 상하이로 돌아와 지하공작에 투신했다.
비밀문건 소각과 발송을 도맡아 하던 쑨은 열네 살 되는 해에 공산당 지하조직이 운영하던
극단에 들어가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일곱 살 위였던 리윈허도 같은 극단에 있었다.
쑨은 리를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지만
“리윈허는 행실에 의심 가는 부분이 많다. 가까이하지 마라”
는 모친의 주의를 받은 다음부터 리를 멀리했다.
그때만 해도 리윈허는 아직 상처받기 쉬운 나이였다. 별것도 아니지만 자신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모녀를 볼 때마다 수치와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쑨웨이스는 옌안의 유일한 홍색공주紅色公主였다. 거칠 것이 없었다.
항일군정대학을 마치고 중앙당교와 마르크스레닌학원을 다니며 정통파 당원의 길을 걸었다.
저우언라이 부부는 쑨의 모친에게
“열사의 혈육을 딸로 삼고 싶다.”
는 편지를 보내 허락을 받았다. 이들 부부는 혁명가 유자녀와 지하공작자 자녀들을 무수히
수양아들과 수양딸로 삼았지만 쑨은 이들과 경우가 틀렸다. 39년 소련에 가겠다며
마오쩌둥을 찾아가 단번에 허락을 받아 냈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쑨을 소련까지 데리고 갔다.
모스크바에는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진산金山과 함께 쑨웨이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린뱌오林彪가 총상치료와 요양을 위해 신혼의 부인 장메이와 함께 와 있었다.
유학생들에게 청년장군 린뱌오는 이미 전설적인 존재였다.
틈만 나면 몰려가 무용담을 들으려 했다. 쑨웨이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린뱌오는
쑨만 보면 빨개지며 말을 더듬었다. 유학생회의 초청을 받았을 때도 전원이 참석하느냐는
말을 수없이 물었다. 불참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움직였다. 쑨이 보이지 않으면
그냥 나와 버렸고 중간에 자리를 뜨면 린뱌오도 자리를 떴다. 3년을 그랬다.
귀국 전날은 부인과 함께 쑨이 다니던 희극학원 기숙사를 찾아왔다.
부인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고 하더니 혼자 남은 쑨에게
“귀국 즉시 이혼하고 기다리겠다. 너도 빨리 와서 나랑 결혼하자”고 했다.
복잡한 사람인지 단순한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가는 엉뚱한 말을 남기고 린뱌오는 돌아갔다.
▲ 중공 지도자들은 소련을 방문할 때마다 유학 중인 쑨웨이스(뒷줄 오른쪽 첫째)를 챙겼다.
마오쩌둥, 주더, 류샤오치, 저우언라이와 함께 중공 5대 서기의 한 사람이며 공청共靑의
창시자인 런비스任弼時(왼쪽 첫째) 부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앞줄 오른쪽 첫째는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
46년 가을 쑨웨이스는 7년간에 걸친 유학생활을 마쳤다.
귀국 도중 하얼빈에 주둔하던 동북민주연군사령관 린뱌오를 찾아갔다.
장메이와 이혼하고 예췬葉群과 결혼한 린뱌오는 쑨이 누구인지 기억도 못 했다.
예췬은 장메이와 달랐다. 눈에 서릿발이 돋았다.
붉은 담장이 낳은 예술가 쑨 웨이스, 47세에 감옥서 ‘요절’
중공 1세대 지도자들의 딸 중에는 재녀才女 소리를 듣는 사람이 많았다.
덩샤오핑과 뤄루이칭羅瑞卿의 딸은 부친의 회고록을 펴내 세상을 놀라게 했고,
마지막 보황파保皇派 타오주陶鑄 딸 스량斯亮은 아버지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글로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
건국 공신 예젠잉葉劍英의 둘째 딸도 중국의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들의 활동은 한 차례로 끝났다. 전문성과 예술성에 한계가 있었다.
쑨웨이스는 이들과 달랐다.
영화와 무대예술을 선전도구로 여겼던 스탈린 시대에 모스크바 희극학원에서 희극과 영화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문혁시절 비참한 최후를 마쳤지만 붉은 담장이 배출한
유일한 전문가이자 진정한 예술가였다. 1946년 가을 옌안으로 돌아온 쑨웨이스를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은 연극애호가 장칭이었다.
“너는 저우언라이의 딸이고 나는 마오쩌둥의 부인이다. 우리를 흠집 내려는 사람에게 같이 대응하자”
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쑨은
“전쟁에 승리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며 묵살했다.
쑨웨이스는 자유주의자 기질이 강한 예술인들, 특히 2류당 사람들과 가까웠다.
▲ 신중국 선포 직전인 49년 9월 부다페스트에서 딩충丁聰과 함께한 쑨웨이스.
쑨웨이스는 토지개혁운동에 참여하고 해방군 점령지역의 대학에서 영화와 희극이론을 강의했다.
최전선을 찾아다니며 소련 현대희극도 선보였다. 예술성과 선전효과가 뛰어났다. 뤄루이칭은
“쑨웨이스는 당이 키워낸 첫 번째 홍색 전문가”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 중국 설립 후 중국의 연극과 영화계는 옌안에 있던 사람과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활동하던 연예인들이 뒤섞여 복잡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쑨웨이스는 청년예술단 총감독과 부단장을 겸하며 연기자들을 휘어잡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집무실도 마음대로 출입했다.
49년 12월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은 쑨웨이스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오는 난생처음 떠나는 외국여행에 장칭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장이 아무리 졸라도
“스탈린이 흉 본다”
며 허락하지 않았다. 쑨은 기밀을 다루는 기요비서 겸 통역팀 조장으로 수행했다.
마오가 소련에 머무는 동안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장칭은 젊은 시절 오해받을 행동을 많이
해 본 사람다웠다. 쑨을 만날 때마다 모스크바행 열차에서 있었던 일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대답은 한결 같았다.
“국가 기밀이라 말해줄 수 없다.”
문혁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67년 장칭은 린뱌오의 부인 예췬과 손을 잡았다.
“네 원수는 내가 갚아주마. 내 원수는 네가 처리해라.”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 주임이었던 예췬은 30년 전 린뱌오와 쑨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쑨의 남편을 간첩혐의로 체포하고 가택수색에 나섰다. 마오, 린뱌오, 저우언라이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들이 다량으로 나왔다. 연애편지에 가까운 것도 많았다.
장칭은 저우언라이가 쑨에게 보낸 편지를 들고가 저우를 몰아붙였다.
중요인물 체포에는 저우언라이의 서명이 필요했다. 저우는 진땀을 흘렸다.
이날 장칭은 국가주석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와 저우의 동생에 대한
체포지시서도 덤으로 받아냈다. 이듬해 3월 1일 군이 관리하던 베이징 공안국에 끌려온
쑨웨이스는 7개월간 얻어맞기만 하다가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쑨웨이스는
“열 명의 군자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한 명의 소인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는 말만 명심했어도 피할 수 있는 화를 자초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름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똑똑한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한다”
는 경구 따위를 익힐 기회가 없었다.
양부모 저우언라이 부부와 쑨 웨이스
첫댓글 무지 무지 긴 글입네다.
눈이 다 빠질 뻔 했는디,
그래도 하나 크게 건졌슴다.
"열 명의 군자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한 명의 소인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일 주일 전에만 이 글을 접했어도 시생의 인생이 훨 나아졌을 낀데...
중간쯤 읽다보면 앞서 뭘 읽었는지 새까맣게 잊어버리니,,,이 일을 어쩌지?
6.25때 미군 초상화 한장에 몇 딸라씩 받았던 박수근, 굶주리며 담배 은박지에 그리던 이중섭,
미군부대 PX 에서 일하던 박완서 등등 우리들의 초상이 겹쳐 떠오르지 않습니까?
박완서씨 얘기에 따르면, 부모 모시느라 피난도 못간 어린 처녀가 미군 PX 덕에 월급장이가 되어 매월 따복따북 봉급 받아
소녀가장 하게 된 것이 남다른 혜택으로 느껴졌다지요? 사십이 넘어 문단에 데뷔, 늙도록 활약을 했는데
나머지 저 두 남정네는 일이 잘 안풀린다고 술을 너무 마셔 술병을 얻어 죽었으니
역쉬 남정네보다는 여성이 위기대응능력이 탁월하지 않아요?
정작가님 의도를 벗어나 흰소리 좀 해봤습네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