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인 명례는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던 곳이다. 명례는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가 출생한 곳이며, 1897년 영남 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의 첫 번째 본당이 설립된 곳이다. 또한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세 번째 방인사제인 강성삼 신부가 사목하다 돌아가신 곳이다.
순교자 신석복(申錫福) 마르코는 1828년 밀양의 명례(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넉넉한 살림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행상을 하면서 살았다. 밀양에서 김해로 가려면 명례 나루터에서 낙동강을 건너야 했다. 그래서 이곳에는 늘 사람들로 붐볐고,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도 정착해서 살았는데, 신석복은 이들의 권면으로 신자가 된 듯하다. 형제들은 그가 순교할 당시 신자가 아니었지만 훗날 모두 입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들은 그가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명례로 들이닥쳐 그의 집을 찾아낸 뒤 재산을 탈취했다. 그리고 그가 창원 마포에 장사하러 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돌아오는 길목에서 며칠을 기다려 김해 한림면 가산리 길에서 체포하여 즉시 밀양으로 압송했다. 이때가 신석복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그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했다. 다음날 이 사실을 안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대구로 압송되는 신석복을 뒤쫓아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는 형에게 “일 푼전(分錢)이라도 주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로 인해 그는 대구까지 가는 동안 자주 능욕을 당해야만 했다.
결국 대구로 압송된 신석복은 경상감영에서 배교할 것을 강요당했고, 교우촌 정보를 얻으려는 관장으로부터 혹형을 받았다. 9일 동안 감옥에 있으며 세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아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졌지만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저를 놓아주신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며칠 감옥에 가두었다가 교수형을 집행했다. 이때가 1866년 3월 31일(또는 3월 1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 후 순교자의 아들인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 모셔왔지만 박해의 여파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는 지방 유지들과 신씨 문중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1975년 12월 1일 진영 본당 신자들은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역(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으로 이장했다.
한 가지 불행한 일은 순교자의 행적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한동안 그의 이름 또한 단순히 신 이냐시오로 알려졌었는데, 이는 1895년 “치명일기”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아들 신영순 이냐시오와 혼동된데 기인한다. 후손들이 이를 바로잡아 주길 청해 1925년 발간된 “병인치명사적”에서 마르코로 정정되었고, 교회사가들의 연구에 의해 이름 또한 신석복임을 밝혀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의 미망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명례에서 살았고, 후손으로는 아들 이냐시오에게서 네 명의 아들을 보았는데 그 중 막내인 신순균 바오로(1935년 수품, 1948년 선종)는 후에 사제가 되었다. 지금도 순교자의 4대 후손이 명례리 상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한다. 한편 신석복 마르코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마산교구는 2008년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터 인근에 있는 명례 성당(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122)을 성역화하기 위해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명례는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함께 모여 살던 교우촌으로 1897년 경상도에서 네 번째 본당이자 마산교구의 첫 번째 본당이 설립된 곳이다. 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주임으로 부임한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1866-1903년)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이어 1896년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은 우리나라 세 번째 사제로, 줄곧 이곳에서 사목하다가 1903년 명례에서 선종했다.
강성삼 신부는 1898년 현재 부지에 네 칸짜리 집을 지었고, 1926년 주임으로 부임한 권영조 신부가 ‘기와로 된 성당’을 새로 짓고 1928년에 축복식을 가졌다. 하지만 1935년 태풍으로 성당이 전파되었고, 1938년 옛 성당이 무너진 자리에 현 성당을 축소하여 복원했다. 남녀 신자석이 칸막이로 분리돼 있는 성당 내부는 초기 신자들의 신앙과 영성을 느끼게 해 준다. 명례 성당은 그 후 본당 소재지가 이전함에 따라 공소가 되었다가 한동안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빈 성당으로 남아 있었다.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위원장 이제민 신부)는 2009년 8월부터 매주 토요일 미사를 봉헌하며 방문한 신자들에게 명례의 배경과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그에 앞서 2007년 4월 매입한 입구의 한옥을 보수해 그해 8월 강성삼 신부의 세례명을 따라 라우렌시오의 집으로 명명했다. 또 2010년 개인소유의 축사로 변해버린 신석복 순교자의 생가 터와 주변 일대를 매입하고 8월에 야외 돌제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명례 성당과 그 일대를 경상남도 문화재로 신청하여 2011년 2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 1월 7일부터는 명례 성지 담당신부가 부임하여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신석복 순교자 생가 터에 있던 축사를 이전 철거한 뒤 6월 10일 사제관과 생가 터 축복식을 가졌다. 앞으로 명례 성지는 생가 터에 순교자 신석복 기념성당을 건립하는 것을 비롯해 명례를 신앙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갈 예정이다. [최종수정 2014년 9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