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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는 자와 멸망받는 자의 반응
사도행전 13:44~52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함께 살펴본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비비시아 안디옥 전도 사역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 사역에 이어지는 비시디아 안디옥 성읍과 그 지방의 주민들의 반응입니다. 적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도 활동에 응답하여 구원받았으나, 격렬한 반대도 있었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주의 백성들의 복음 전도 활동에는 핍박과 환영이 엇갈리면서 구원받는 자와 멸망받는 자가 나뉘곤 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일어난 이 일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다시 한번 멸망받기로 작정된 자들의 마음의 완고함과 달리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이 신앙의 은혜를 입는 반응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받은 신앙의 은혜를 인하여 다시 한번 감사하며 복음 전도의 복된 사명감을 다시금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여 모입니다.
4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지난 주 안식일에 처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한 바 있습니다. 그 때 회당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복음의 풍성한 은혜에 대하여 들었던 유대인 중 일부와 경건한 이방인들의 대다수가 그 한 주간 동안에 얼마나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다가오는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듣자고 강권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강권했는지 비시디아 안디옥 성의 시민들 거의 대다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그 다음 안식일에 회당에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적어도 이 지역에 이주한 유대인 세대만 이천 세대가 있었다고 할 정도이므로 적어도 시민의 숫자가 몇 만 명이었을 것인데, 그 많은 숫자가 이 작은 회당에 전부 몰려온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사 누가는 거룩한 과장법으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몰려들었다는 의미로 ‘온 시민이 거의 다 모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는 먼저 지난 주 안식일에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복음 진리에 굶주렸던 마음이 그만큼 컸다는 증거입니다. 또 그들이 자기만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지 아니하고 가족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구원받기를 원하는 갈망이 그렇게 컸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우리 주님의 간절한 바람이 그 만큼 컸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을 주어서 사도들의 말씀을 들으려고 구름떼처럼 몰려오게 역사해주신 것이라고 봄이 합당합니다.
하나님은 만민들이 구원을 받기를 누구보다 더 간절히 원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3 말씀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택하신 자들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듣게 하시려고 감동 감화하시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땅 끝에 있을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풍성한 은혜의 잔치에 나와서 그 은혜의 말씀을 듣고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여러 천국 비유 중에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대한 이야기와 큰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청하는 주인의 비유에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보면, 임금과 주인은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미리 초대한 사람들을 잔치에 청합니다. 그런데 청한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임금과 주인은 종들을 보내어 처음에 잔치에 초대하지 않았던 이들을 불러오되 자리가 여전히 남아 있자,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나 시골에 있는 이들까지 종들을 보내어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 자리를 채우도록 하였습니다. 이 비유들의 핵심적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풍성하고 복된 구원의 은혜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들이 다 참석하여 그 구원을 받고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누리기를 갈망하신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당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많은 그 때에 유대와 갈릴리 지역을 여행하면서 전도하실 때 이르시기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
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한복음 6: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택한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으로 부르시어 그 복음에 담긴 풍성한 은혜를 날마다 배우고 듣고 영적으로 은혜 가운데 장성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이 구원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까지도 부르시어 이 은혜의 잔치에 함께 참석하여 영적인 기름진 음식을 먹고 마시어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비시디아 안디옥 사람들처럼 성령의 내적 감동을 받아 복음이 선포되는 진리의 전당인 교회에 늘 설레는 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씁시다. 또한 아직도 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영적으로 죽어가는 우리의 가족, 친척, 친구, 이웃, 동료들도 구원의 복음을 듣고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강권하여 주님의 집을 채워가는 복된 전도자들이 됩시다.
둘째로, 복음을 들을 때에 믿음으로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를 거부하고 싫어하며 대적하는 자들도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4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많은 사람들이 그 회당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도의 말씀을 들으며 다시 한번 귀를 열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있을 그 때에 마음에 분노와 시기와 미움이 가득차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설교 말씀에 반발하며 소리를 치거나 딴지를 걸며 방해하며 욕설과 비방의 말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이곳에 와서 정착하여 유대교 회당을 짓고 구약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다른 이방 종교와 달리 유일신 사상을 믿으며 건전한 윤리를 지키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알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랍비들의 바리새적인 가르침을 받아서 사소한 율법 규정과 종교적인 자세한 지침들을 지키는 것에 몰두하면서 그것을 경건의 진수로 알고 믿어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와서 구약의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드디어 오셨고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심과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죽은 자의 부활의 영광과 썩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의 특권을 주신다는 놀라운 말씀을 가르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이 구원의 특권과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사도들로부터 이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어놓으신 큰 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듣게 되니, 유대인들은 정말 화가 났습니다. 그 동안 자기네 유대 민족만이 선민의 특권을 누리는 줄 알았고 이방인들은 이러한 특권을 얻으려면 유대교로 개종해야 하는 좁은 문을 겨우 통과해야 구원을 얻고 선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라도 그 활짝 열어진 문으로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유대인으로서 그 동안 가졌던 특권을 빼앗긴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도가 전하는 복음이 조금도 반갑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도 이방인들이 이렇게 회당에 가득 몰려와서 자기들만이 앉던 자리마저 이방인들에게 빼앗길 정도가 되고 조용하던 회당이 시장바닥처럼 변한 것도 마음에 안 들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향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설교를 중단시키려고 여기 저기서 일어나 훼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의 유대인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놓으신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듣고도 싫어하고 배척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고 좋아하는 것을 시기 질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대적 마귀가 자기 백성이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이 좋은 부모 자식간이라도, 아무리 우애가 좋던 형제 자매들이라도, 아무리 흉허물 없이 내 것 네 것 없이 지내던 절친한 친구라도 복음 앞에서는 서로 완전히 갈라서고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는 사이가 얼마든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챙겨주고 돌보아주던 사이라도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생겨나면 원수처럼 여기고 싫어하며 핍박하는 사이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 중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태복음 10:34~36)
고 하신 말씀이 그러한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것은 인간적인 차원을 넘은 영적인 거대한 싸움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흑암의 세력과 빛의 세력 사이의 영적 줄다리기요 천국과 지옥의 결투가 일어나는 가장 무섭고 위험한 대결장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한편으로는 열렬한 기쁨과 감격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있는가 하면 그 반면에 한편에서는 격렬한 다툼과 시기와 미움과 비방이 일어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인 우리는 한 영혼과 한 가정과 한 민족의 영적 운명을 바꾸고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참으로 중대한 하늘의 사자들인 까닭에 마귀의 공격도 있고 천사들의 호위도 뒤따르는 대단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와 및 동역하는 동료 전도자들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 중에 일컫기를,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린도후서 2:14~16)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함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이 영원한 사망에 떨어질 자라는 것을 알리는 영적 경고자들인 까닭에 그들이 싫어하고, 반면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은 자기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주는 생명의 말씀을 전달해주는 자요 생명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향기로 알고서 천사처럼 반가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존귀한 사역으로 부르심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세상에서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은 취급을 받는다 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영적인 자부심을 가집시다. 또한 신앙의 좁은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며 온갖 훼방과 미움을 받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고 복음 전도의 지극히 영광스러운 사명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복음 전도자는 전도의 문이 막힐 때에 열리는 문으로 나아가 계속 전도해야 합니다.
46절로부터 47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회당 내의 유대인들이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하며 비방하니까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전해야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반대하고 비방하고 스스로 멸망길을 자처하므로 이제 복음을 환대하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사역을 전환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도들은 거부하는 유대인들이 터주대감 노릇을 하는 그 유대인 회당을 버리고 이제 이방인 중에 복음을 받아들인 형제들의 집이나 그들이 대여한 공공 장소에서 집회 장소를 열어서 복음 전도 집회를 계속 이어가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결국 안디옥 비시디아의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복음과 성령의 은혜로운 집회를 더 이상 맛보지 못하고 다시금 답답하고 전통적인 유대인 회당의 안식일 예배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시디아 안디옥의 이방인 형제들과 복음을 받아들인 일부 유대인들은 그 후에 회당에서 나와 조용한 장소에서 두 사도들을 통하여 증거되는 복음의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풍성히 듣고서 더 깊이 깨닫는 은혜를 입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풍성한 열매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4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비시디아 안디옥 성읍만 아니라 그 지방 곧 비시디아 지역과 브루기아 지역 전체에 널리 퍼져서 수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는 열매가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에도 복음 전도가 안 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극심할 때 그 자리에 주저앉지 말고 복음의 문이 열리는 쪽으로 전도의 물꼬를 틀어 계속 전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낼 때에 이르시기를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죽이려 들면 광야로 들어가셔서 은둔하시기도 하시고, 유다 지방에서 그를 죽이려 들면 피하여 요단강 건너편 베뢰아 이방 지역에 가셔서 사역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보내시는 전도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16)
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땅에서 전도할 때에 전도의 막힌 담을 만나면 그 담이 무너질 때까지 억지로 그 담을 두드리지 말고, 다른 열린 문이 있나 살피고 그곳에 가서 문을 두드려서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되면 주님께서 돌같이 단단하였던 마음도 녹여주시어서 나중에 다시 전도하게 될 기회가 될 때에는 열린 마음으로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할 때 막히면 돌아가시고, 전도의 문이 열린 곳을 살펴서 그리고 가서 복음을 계속 전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구원의 섭리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영혼들을 많이 구원의 길로 주님의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전도는 사람의 일이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은혜의 열매입니다.
4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처럼 그 모인 이방인들의 거의 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것을 두고서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라는 문장에서 ‘작정하다’는 헬라어 단어 ‘타소’는 ‘배치하다 정렬하다, 지정하다, 결정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책에 기록하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하늘 나라 생명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자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 영혼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로 어린 양의 생명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나 하나님 자체의 존재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분이시고 그가 바로 시간과 공간 자체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기 백성의 이름을 생명 책에 기록하였다고 성경이 계시한 것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것이 우리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도자들의 설교와 권면이 있고 그 복음을 듣고서 우리 마음에 뜨거움이 생기고 말씀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생기고 구원의 감격을 느끼는 심령의 은총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은혜의 결과요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결단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복음을 진정으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리까지 믿음을 지켜온 것도 우리 자신의 믿음이 투철해서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굳세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 환경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이는 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이 우리를 붙들어 오셨고 죄악과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불철주야 우리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요 영원전부터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에 의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만세 전에 작정하신 구원의 은혜를 깊이 자각하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더욱 깨닫게 된 사람입니다. 이 신비를 깨닫는 사람일수록 더욱 경건해지고 죄를 멀리하게 되고 주님을 위하여 충성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같은 악하고 못난 자를 영원전부터 자기의 자녀로 작정하시고 죄 가운데 있는 자에게 찾아와주시고 이렇게 구원의 길로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사랑을 기억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할렐루야.
다섯째,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은 고난과 핍박 중에도 기뻐하며 신앙을 끝까지 잘 지켜갑니다.
50절로부터 52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그 당시 그 지역으로 삼백여전에 강제 이주된 유대인들은 귀족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들이기에 그들의 자녀들 중에 당시 유력한 자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서 비시디아 안디옥의 지도자들을 남편으로 둔 사람도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경건한 이방인 귀부인들과 그 성의 유력한 가문의 남편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였습니다. 결국 그 도시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떠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떠나면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박해한 자들을 향하여 옷을 털고 발의 티끌을 떨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행한 악행으로 인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나간다는 행위 예언인 것입니다. 결국 그 비시디아 안디옥 성의 유대인들과 박해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축복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져나가는 결과를 자초한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도 때가 있고 기회가 있는데, 그들 스스로 이 기회를 다 저버림으로써 구원의 문이 닫히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 성을 어쩔 수 없이 떠나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그곳에 새롭게 세워진 기독교회 공동체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지도하던 영적인 지도자가 떠나가고 그 성에 유대인들과 유력한 권력자들이 자기들을 극심하게 핍박할 것인데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인 바울과 바나바가 떠났는데도 의기양양하며 복음 안에서 기뻐하며 성령 충만하여 모이기에 더욱 힘쓰며 전도하며 핍박을 무릅쓰고 믿음 생활에 계속 전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듯 자기들을 믿음으로 길러낸 영적 부모가 혹시 곁을 떠날지라도 그 영적인 본보기를 기억하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계속하여 열심을 내어 모이며 부름받은 교회를 잘 세우며 전도하며 핍박을 너끈히 이겨갑니다. 시련 중에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도리어 성령 안에서 기뻐하며 계속하여 활발히 신앙 생활을 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것이 바로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 곧 영혼 구원을 받은 자의 신앙 생활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앞으로 이런 저런 시험이 오거나 어려움을 겪더라도 구원받은 자답게 앞으로 영적인 어린아이 단계에서 벗어나 속 사람이 강건해지는 자가 됩시다. 그리하여 많은 시련과 핍박 중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더욱더 열심히 신앙 생활하며 교회를 붙드는 기둥이 되고 약한 자들을 곁에서 붙들어주고 세워주는 성숙한 신자들이 되어서 주님 앞에 서는 날 큰 상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이렇듯 우리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도들이 복음 전도할 때에 나타난 구원받는 자들의 반응과 멸망받기로 작정된 자들의 상반된 반응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는 복음과 경건의 교훈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듣기를 사모하여 모입니다. 반면에 멸망받기로 작정된 자들은 복음과 영적 권면의 말씀을 들을 때 싫어하며 대적합니다. 복음 전도자는 이러한 때에 전도의 문이 막힌다고 낙심하지 말고 문이 열리는 쪽을 향하여 나아가 계속 전도해야 합니다. 그러할진대, 하나님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을 붙여주실 것이며, 그들은 귀가 열려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듣게 될 것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할 일이지만, 믿음을 갖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만세전의 작정에 따른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은 환난과 핍박을 당할지라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도 즐거이 신앙을 끝까지 잘 지켜가게 됩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심령 속에 성령께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과 고난을 능가하는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안에 일어났고, 우리를 통하여 앞으로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도하라는 부름에 응답한 순종하는 주의 백성들을 통하여 그 구원의 선물을 작정된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도 흠모하는 영광스러운 복음 전도 사역에 우리 모두 기꺼이 순종하여서 구원받기로 작정된는 자들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를 풍깁시다. 그리고 멸망받기로 작정한 자들에게는 멸망의 냄새를 풍기는 이 엄중한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