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 본 슬픔에서 C. S. 루이스는 아내의 죽음이 가져다 준 심리적 고통을 기록한다. 산만하고 또 슬픔에 잠긴 글을 통해서 그는 인간이라는 상태가 가진 취약한 본질을 탐구한다. 인간은 우연과 덧없음에 쌓인 취약한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변증가인 루이스조차도 깊은 상실 앞에서 과연 선하신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시는지 여부를 놓고 의심하는 시간을 만난다. 그가 겪은 고통은 “모든 일차적 증거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소리친다.
루이스의 기록은 의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인에게 의심은 그 근원과 처방 모든 면에서 다면적이다. 루이스의 차고 넘치는 변증 지식도 그에게 의심과 슬픔을 극복하게 하는 예방약이 되지 못했다. 그는 악과 고통의 문제에 관한 모범답안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고통의 문제까지 썼다! 그러나 루이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지적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통에 관한 그의 주장에 합리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부족한 것은 감정적인 무게였다. 합리적이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주장도 아내의 죽음 앞에서는 단지 공허한 울림에 불과했다.
믿음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서 루이스에게 필요했던 것은 유신론적 논증의 견고함이 아니었다. 그건 그가 이미 완벽하게 숙지한 내용이었다. 그에게는 다시 보는 능력,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마냥 설득력으로 넘치던 이유에 한 번 더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이 필요했다. 말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루이스는 인간에게는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로마서 1장을 연상시키는 그 글에서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무시할 수는 있지만 결코 피할 수는 없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건 불가능하다. 세상은 그분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얼굴을 한 채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알아보는 게 항상 어렵기만 한 건 아니다. 단지 제대로 인식하려면 우리는 기억하고 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신을 향한 의심으로 가득 찬 “환멸에 빠진”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는 실천법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의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영적으로 충만한지 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할까? 네 가지 방법이 있다.
1. 불안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라.
기독교 신앙은 규모와 주장에 있어서 인생 전부를 변화시킨다. 따라서 내면에 파고든 의심은 인생 전체를 흔들고 불안정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의심은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야기하며, 이는 결국 더 치열하게 답을 찾도록 만든다.
물론 기독교에는 의심의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비판적 탐구라는 오랜 전통이 존재한다.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독교에 대한 몇 가지 주장과 증거를 탐구하는 과정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의심하는 이들이 가진 질문에 대한 해결책이 오로지 합리주의에 근거한 논증에 그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명확한 탈출구가 없는 거대하고 불안에 휩싸인, 반박이 반박을 부르는 무한 루프에 빠질 것이다.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절대적인 증거를 찾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은 오히려 더 큰 의심을 키울 수도 있다. 이건 마치 말년에 의심이라는 병을 겪고 있는 루이스에게 잘못된 약을 처방하는 것과 같다. 만약에 당신의 친구가 루이스와 비슷한 문제로 고통 받고 있다면, 이런 식의 접근법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당신이 제시하는 처방약 때문에 친구는 더 큰 회의감에 빠질 수도 있다.
두려움이 야기한 광란에 빠지는 대신, 하나님이 당신의 삶 전부를 통제하신다는 사실 안에서 불안하지 않은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라. 하나님의 주권을 확신할 때 당신은 더 이상 의심하는 친구와 불필요한 논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그를 도울 수 있다. 친구의 의심을 끊임없이 공격할 필요도 없고 모든 질문에 굳이 철저하게 대답할 필요도 없다. 대신 친구와 동행하며 지혜와 조언을 제공하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물론 함께 힘을 합쳐서 깊이 파고들어야 하는 특정 질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친구가 다른 시각으로 세상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2. 신성함에 함께 참여하라.
현대 세계가 가진 신에 대한 환멸은 완전하지 않다. 가장 열렬한 자연주의자들조차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누구라도 더 신성한 것을 향한 갈망이 내 속에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가장 세속적인 문화에서도 탄생과 죽음, 결혼이 가진 깊은 의미를 인식해야 함을 알고 있다.
친구와 함께 이 매혹적인 순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아기를 꼭 안아주라. 새로운 삶이 가진 경이로움과 나약함을 생각하라. 결혼식에 참석해서 사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라. 휴일을 축하하라.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고 삶의 덧없음을 떠올리라. 지혜와 잘산다는 게 무엇인지 숙고해 보라. 루이스에게는 죽음이 의심의 동기기 되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장례식에 가라고 충고한다(전 7:2). 이생의 영속성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 우리가 답할 수 없는 질문에 직면하도록 만드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깊이 숙고함으로 우리는 진짜 중요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궁극적으로 의심과 환멸을 통과하고 한 번 더 “매혹적인” 삶을 사는 길을 제공할 것이다.
3. 함께 걸으라.
우리의 일상생활은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산성으로 나날이 침식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둘러야 한다는 충동에 시달린다. 그럴수록 속도를 늦추고 산책을 나가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은 자연계 전체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증언한다고 말한다(시 19:1-6). 이 말씀에 의지하여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서 보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폭포에 감탄해 보라. 별이 빛나는 밤을 바라보며 경이로움에 젖어 보라. 당신 주위를 둘러싼 하나님의 위엄에 주의를 기울이고 당신이 느끼는 점을 친구에게 설명하라.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는 인간의 믿음을 파괴한 경험이 있는 악마가 자신의 젊은 상대를 질책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된 방앗간으로 걸어가서 차를 마시도록 놔뒀어. 그가 정말 좋아하는 시골길을 혼자 산책하게 그냥 뒀어. … 아니, 자연 속에서 누리는 진정한 즐거움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결코 느끼도록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던 거야?”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다음과 같이 썼다. “감각적인 아름다움에서 기쁨을 느낀다면, 물질 속에 아름다움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리고 물질에서 느끼는 사랑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라.”
현대의 세속적인 세계는 자연조차도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잔인한 현실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주문처럼 눈에 붙은 이 해로운 거짓말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평평하고 지루하며 생명 없는 것처럼 보도록 속인다. 의심하는 친구가 주변 세상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도록 도와주라. 그렇게 함으로써 친구는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의 더 큰 아름다움도 볼 수 있을 것이다.
4. 공동 예배에 초대하라.
의심이 파고들 때 교회에 가는 발걸음을 중단하는 사람이 있다. 한때 위안을 주었던 예배가 이제는 불안한 질문들로 가득한 현장이 된다. 보기에 따라서는 의심이 사라질 때까지 신앙 공동체에서 한 발 떨어지는 게 더 진실한 태도인 거 같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루이스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친구들조차도 적극적으로 예배의 자리로 이끌어야 한다.
교회가 항상 의심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목사라고 해서 모든 종류의 회의론을 없애주는 확실한 3단계 논증 같은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죄인들을 위한 병원이고, 공동 예배는 깨어진 인간의 주의력이 회복되도록 만드는 가장 구체화된 처방약이다. 교회는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서 함께 찬양하고,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성찬식에 함께 참석함으로 성도가 하나님에게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을 살리는 가장 구체화된 방법이다.
교회는 의심이 생길 때 피해야 할 곳이 아니다. 교회야말로 믿음이 강하든 약하든 모든 죄인을 환영하는 곳이다. 믿는 마음만큼이나 의심하는 마음도 얼마든지 진실 되게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
시편 44편의 기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의심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갔다. 친구들도 똑같이 하도록 초대하라. 그들의 의심이 사라지든 안 사라지든 상관없이 예배에서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받도록 도와주라. 그리고 당신부터 예배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친구들로 하여금 한 번 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쉽지 않은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