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3월 19일
말씀 : 엡2:8-10
제목 : 십자가 복음이 해답
어떤 이들은 교육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싸움은 무지한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니까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교육시키면 된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고통과 비통함과 상처를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면 무기를 불태우고 서로 포용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현실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벼랑에 선 지성'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오늘날만큼 교육을 많이 받은 시대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만큼 피를 많이 흘리는 시대 또한 없습니다. 교육으로 안식과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사람의 마음에 있지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정욕과 탐심과 자랑입니다. 자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입니다. 사람의 어떤 지혜로도 자랑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세상의 원리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참 평화와 소망은 오직 한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 초대교회 성도들, 그리고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십자가만을 자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십자가만이 오늘날 우리의 유일한 자랑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변명하는 탁월한 기술을 가졌습니다. 내 실수를 다른 사람의 실수로 둔갑시키는 데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혼하는 부부의 말을 들어보면 모두 상대방의 잘못을 참을 수 없어서 갈라선다고 말합니다. ‘나니까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고 말하며 자기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고 변명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항상 상대방이 자기를 이해해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상대방이 이해해주면 된다고 착각합니다. 나의 고통은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결국 나는 전혀 문제가 없고 싸우거나 시기한 마음이 없으며 오로지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확증 편향적'입니다. 철학자 베이컨은 개인적 성향 때문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편견을 가리켜 ‘동굴의 우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에는 헛된 믿음의 동굴에 자기를 가둔 채 진실의 햇볕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확증 편향성으로 인해 가짜뉴스가 진실을 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짜뉴스를 검증하는 시민단체가 출발하면서 첫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사드 전자파가 인체에 해롭다는 괴담을 믿는 사람은 10명 중 4명, 청담동 술집 사건이나 대장동 사건을 이른바 '윤석열 게이트'라고 믿는 사람도 3명 중 1명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사드 전자파는 국방부 환경영향평가에서 휴대전화 기지국의 1/50 수준에 불과하다고 발표했고, 청담동 술자리는 꾸며낸 이야기라고 장본인이 고백했으며, 대장동 사건은 현재 관련자들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상식의 눈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확증 편향성'입니다. 이념과 정치적 성향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내편이냐 아니냐가 사실을 바라보는 잣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은 다 틀렸다', 혹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확증 편향성의 아주 좋은 먹잇감입니다. 정명석은 윤리적으로 못된 짓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당한 여자들이 ‘혹시 저 사람이 진짜 메시야면 어떡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종말론자들은 주님의 재림 날짜를 정해놓고 기도하며 준비하다가 그 날이 지나가면 우리가 기도해서 재림이 연기되었다고 하며 또 다시 날짜를 정합니다. 이렇듯 확증 편향성이 무서운 이유는 진실을 외면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신앙 또한 확증 편향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의 결정과 판단을 말씀에 투영해서 그것이 잘못됐음을 인지하는 성도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며, 하지 못할 상황이면 오히려 불만을 품고 반대하는 확증 편향성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습니다. ‘순종’은 한마디로 자기 확증 편향성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려놓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자신을 비춰주는 역할을 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비춰줄 수 없습니다. 복음은 단순하지만 깊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단 한가지 이유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십자가는 우리에게 ‘너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너는 실패자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도 지킬 수 없습니다. 율례를 지킬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도 없는 내가 어떻게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일상적인 법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소 사람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처럼 확증 편향적인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랑거리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도덕적, 종교적이며, 바리새인 중 가장 잘 배운 사람이라고 자랑했지만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자랑들은 온전히 매몰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은 절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탐내지 말라’는 말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평생 율법을 연구한 이른바 율법 박사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이 말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롬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서의 탐심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심성에 자리잡고 있는 탐심은 실제 범법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 심성의 악한 동기도 죄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즉 탐심은 인간 사회에서는 죄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규정됩니다. 마5:27-28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따른 죄가 아닙니다. 심성의 탐심을 죄로 지적하는 이유는 마음에 품은 것은 언제든지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요일2:16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타락한 인간의 죄는 탐욕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골3:5에서도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바울이 '탐욕'을 우상숭배와 동급으로 취급한 이유는 둘 다 ‘헛된 것’을 추구하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온전하고 하나님 앞에서 만족한다고 생각하던 바울은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롬7:9)’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는 그의 고백은 그의 확증 편향성과 자만이 온전히 무너졌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을 깨닫게 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그가 말과 생각과 행동에서 철저히 실패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랑거리가 많다고 생각했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곤고한 실패자이며, 나약한 존재임을 십자가를 통해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이런 모습을 알게 되면 용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십자가는 진리를 밝히며, 우리를 각자 그리스도로 빚어내는 일을 합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의 위치, 환경, 지위, 권력, 힘, 부를 따지지 않습니다. 모두를 한 영혼, 귀한 생명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자들 모두를 위해 독생자의 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문제는 전적으로 상대방이 아닌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마귀에게 조종당하는 희생물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면 사람들의 불쌍함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배가 난파되어 거센 파도, 저체온증과 싸우며 구조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죽음의 위기 속에서 중요한 것은 돈이나 지식이나 권력이 아닙니다. 죽음을 직면한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습니다. 그 누구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하나같이 실패하고 비참함에 놓인 자들입니다. 무능과 절망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실패자라는 것을 알면 지위도 아무 소용없고, 부요함도 자랑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면 뛰어난 두뇌나 엄청난 지위도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비참한 마음과 영혼에 시기와 탐욕과 악의만 가득 차있다면 여러분들의 부와 힘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를 겸비하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우리 모두가 같은 위치,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죄를 범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나이나 권력 같은 각자의 차이는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두 비참하고, 무능하며, 절망적인 죄인들이며,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 확인할 뿐입니다.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자식들을 내 마음대로 키울 수 있습니까? 돈을 내 마음대로 벌 수 있습니까? 생명을 내 마음대로 연장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랑거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내지 않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실 어린양을 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구주십니다. 십자가 복음은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습니다. 어디든지 갈 수 있고 가야 합니다. 저 북녘 땅에도 복음이 흘러가야합니다. 이 복음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예수 그리스도는 전 우주를 품을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섬길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믿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가 전해서 구원을 이룬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가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셨고, 우리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시키셨습니다. 참으로 감사와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엡2:8-10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8절의 ‘이것’은 구원의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모든 구원의 과정이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전적인 은혜입니다. 또한 바울은 9절의 '행위'를 율법과 연관시키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와 오늘 설교를 통해 이 사실을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은 그것을 더 이상 자랑할 수 없습니다. 10절의 ‘만드신 바’의 헬라어 ‘포이에마’는 원래 하나님의 첫 창조 사역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재창조사역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으며 그 목적은 ‘선한 일’, 즉 십자가 복음을 통한 삶의 열매를 위해서입니다. ‘선한 일’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십자가 복음을 통해 마땅히 드러내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입니다. 결국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으며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선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롬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고전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렘9:24를 인용한 이 말씀은 곧 자랑하지 말 것을 구약에서부터 권위적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십자가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선(善)은 하나님께만 있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자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구속받은 백성임을 인식시킨 후 그에 합당하게 주님의 영역 안에서 자랑할 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고전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십자가는 모든 면에서 우리를 하나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죄인이고, 하나의 실패자이며, 무능하고 절망적인 하나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습니다. 동일하게 죄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같은 생명을 누리며 같은 생명을 소유했습니다. 여기에는 빈부, 인종, 귀천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영광을 보며 그분의 임재 안에서 그분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담을 허무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유일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소망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우리의 자랑거리는 얼마나 하찮은 것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행한 모든 일들을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들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정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됩니까? 여러분들의 수치, 질투, 시기심, 음탕함을 다 털어놓을 수 있습니까?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까? 그것을 고백할 용기는 있습니까?
우리는 격렬한 증오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인했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고 시인할 수 있는 길은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교만이 꺾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 모두는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자랑인지, 구원이 얼마나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인지, 그 나라가 얼마나 비밀스러운지, 그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알게 됩니다.
십자가는 평화를 만들며 평안을 허락합니다. 화평을 이루고 분쟁이 사라짐으로써 보배로운 피의 대가가 얼마나 생명력이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를, 우리와 우리의 이웃을 화평하게 만들었습니다. 십자가만이 유일하게 이웃과의 담을 허물고 생명을 흘려보낼 수 있으며, 평화를 선포하고 자유를 만끽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십자가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사명을 다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로 이 땅에 화평이 임하고 어둠이 물러가는 은혜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