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동숭동 옛 서울대 자리에 있던 미 8군 사령부를 찾아간 때는 1951년 11월 중순이었다. 1군단 사령부를 떠난 L-19 경비행기가 동대문 밖 뚝섬 인근의 경비행장에 내린 뒤 나는 지프에 타고 곧장 8군 사령부로 갔다. 밴플리트 사령관의 집무실에는 이종찬 참모총장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8군 참모장 애덤스 소장과 작전 참모 마제트 대령도 자리에 있었으나, 밴플리트 장군은 이종찬 총장과 나를 대상으로 직접 말을 꺼냈다. 회의 내용은 공비를 토벌하는 일이었다. 전쟁 전에도 빨치산은 존재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양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전선으로 보내는 물자가 빨치산의 준동으로 크게 위협을 받는 상황이 빈번해지고 있다면서 말을 꺼냈다. 그는 지리산 일대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점을 다시 강조했다. ‘해방구’가 도처에 등장했으며, 밤에는 지리산 일대에 일반인들이 출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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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에서 공산 게릴라 소탕작전을 벌였던 밴플리트(오른쪽).
실제 그랬다. 전쟁이 터진 뒤 그곳 일대의 상황은 더 꼬여가고 있었다. 남침 대열을 따라 침공을 벌였다가 후퇴하는 북한군에 합류하지 못한 채 낙오했던 일부 김일성 군대의 정규 전력이 그곳에 합세하면서 상황이 더 어려워졌던 것이다. 아울러 북한은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특별 훈련을 거친 정규 병력을 대한민국으로 침투시켜 이들 빨치산 대열을 키우려는 의도를 보이기도 했다.
산세가 깊은 지리산은 그들이 활동하는 데 아주 적절했다. 빨치산의 세력이 더욱 커지면서 남쪽 항구에서 전선으로 보내는 물자들이 위협을 받았다. 경부선은 아주 가끔, 전라선은 빈번하다 해도 좋을 정도로 빨치산의 공격에 의해 운행을 멈췄다. 전쟁을 지휘하는 미 8군 사령관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대한 조치를 취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설명한 뒤 밴플리트는 나를 보면서 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 “제너럴 백, 귀관은 전쟁 전에 호남 일대의 빨치산을 토벌한 경험이 있다고 들었다. 게다가 전쟁이 터진 뒤 귀관은 많은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이제 당신이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책임을 맡아야겠다. 모든 지원을 할 테니 작전을 빈틈없이 수행하길 바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밴플리트의 발언이었다. 그의 발언은 무뚝뚝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가 끝난 뒤 밴플리트는 커다란 아이스박스에
샌드위치와 과일을 담아와 직접 내게 음식을 권하던 모습으로 변했다. 사람 사이는 가까워지면서 신뢰가 깊어지며, 다시 그를 바탕으로 상대를 아껴주려는 감정이 깊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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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 국군 지휘관과 붙잡힌 빨치산. 왼쪽에서 두 번째가 토벌대장 송요찬 준장.
핵심 참모를 내게 보내다밴플리트는 이종찬 총장이 돌아간 뒤 내게 “제너럴 백, 이번 작전은 전쟁의 후방에서 위협적인 요소를 근절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다츠 대령을 당신에게 보낼 테니 그와 모든 것을 상의하라.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를 신뢰했으며, 나를 든든하게 후원하고 있었다. 다츠는 밴플리트 자신이 그리스에서 공산군 게릴라를 소탕할 때 참모로 기용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한국 전선에 와서 연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지리산 토벌 작전을 위해 내게 그를 참모로 보내주겠다는 배려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1951년 말에 벌어진 지리산 일대 빨치산 소탕 작업은 밴플리트의 아주 빛나는 전과(戰果)에 해당했다. 그는 휴전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적군과의 고지전을 수행하면서 대한민국의 장기적인 안보를 해결하기 위해 후방의 빨치산을 없애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밴플리트는 그 앞에 나를 내세웠던 것이다. 부대의 규모는 매우 컸다. 단기적인 작전을 위해 군단 이상의 부대를 편성키로 했다. 정규 2개 사단과 예비 1개 사단, 전투경찰 1개 사단을 모두 이끌도록 했다. 밴플리트는 “귀관은 이미 토벌 경험이 있으니 휘하에 둘 정규 2개 사단은 직접 선택하라”고 재량권까지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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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년 봄 빨치산에게 반동이나 악질지주 등으로 몰려 학살당한 지리산 주변 농촌의 양민들.
주문진에서 1군단을 이끌었던 경험이 내게 있지만, 대규모 병력을 지리산 일대로 이동시킨 뒤 은밀하고 치밀하게, 또 기민하게 부대를 지휘해야 하는 만큼 작전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런 임무를 밴플리트는 서슴없이 내게 맡겼던 것이다. 또 그리스에서 게릴라 토벌에 나섰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신의 참모를 내게 보내줬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작전 구상의 개요를 밴플리트에게서 들었고, 직후에는 미군 참모들과 줄곧 세부적인 작전 계획을 짰다. 그 작업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또 보안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상대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상황에서 적의 옆에 바짝 다가서야 했다. 그 뒤 전격적으로 모든 작전을 펼쳐야 했다. 아군에게는 낯선 지역이었으나, 적들은 익숙한 지형에서 활발한 기동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문진의 1군 사령부와 서울의 미 8군 사령부를 오가면서 면밀하게 작전 계획을 짜갔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대구의 육군본부에 내려가 아주 은밀하게 후속 작전을 계획했다. 내가 선택한 국군 사단은 수도사단과 8사단이었다. 수도사단은 험악한 산지(山地)가 많았던 강원도 1군단에서 작전을 펼친 점, 8사단은 전쟁 전에 빨치산 토벌에 나섰던 경험의 부대라는 점이 이유였다.
수도사단은 먼 거리를 이동했다. 강원도에서 수륙함정에 올라타 여수 근처로 상륙한 뒤 은밀하게 지리산으로 이동토록 했고, 8사단은 육로를 거쳐 지리산 북쪽으로 다가가도록 했다. 나는 대구 육군본부에서 마지막 작전계획을 작성한 뒤 트럭에 올라탄 부대 인원 500여 명을 이끌고 전주를 향했다. 바야흐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대구에서 전주로 향하면서 나는 이 작전의 의미, 내가 어떻게 대규모 부대를 이끌어야 하는가를 두고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피의 악순환을 끊어라”부대 정식 명칭은 ‘백 아전전투사령부’였다. 영어로 적으면 Task force Paik이었다. 부대 이름에 지휘관의 호칭을 붙이는 사례는 처음이었다. 그만큼 밴플리트의 깊은 신뢰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8군 사령관의 호의에는 깊이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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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6월 13일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평양 만수대 의사당 내부를 안내하고 있는 이상진 만수대 의사당 부총장. 이씨는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하다 1953년 사망한 이현상의 딸이다./청와대 사진기자단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를 봐서 풀어가도록 하겠다. 지금 소개하는 내용은 밴플리트 이야기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덧붙일 생각이다. 그는 지리산 토벌 작전이 벌어진 뒤에도 아주 전폭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런 8군 사령관의 배려와 관심 및 지원에 부응코자 했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후방을 크게 위협하는 빨치산을 어떻게 빨리 잠재울 수 있겠느냐를 두고 절치부심했다. 밴플리트의 지휘철학은 매우 중요했다. 그는 그리스에서 공산 게릴라를 완벽하게 소탕한 경험자답게 몇 가지 주문을 잊지 않았다. 우선 게릴라를 상대로 하는 작전은 민간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그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초토화(焦土化)’라는 작전이 있다. 작전을 구사하는 입장에서 그 초토화는 매우 수월했다. 적이 있는 곳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는 일이 초토화의 본질이다.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 특히 무기를 손에 들지 않은 민간인의 입장에서 그것은 악몽(惡夢)이다. 영혼의 목을 죄는 아주 불길한 꿈이다. 나는 1948년에서 약 1년 반 동안 광주 5사단을 이끌면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을 토벌할 때 일찌감치 그 초토화의 잔인함을 경험했다.
적성(敵性)이 있다 하더라도 민간인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 작전이 어떤 성과를 내든 효과는 크게 줄어든다.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살려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을 벗어야 한다. 빨치산 주변에 붙어 있어야 하는 민간인들을 최대한 살리고, 귀순의 의향이 있는 빨치산도 가능하면 최대로 살려야 한다. 작전의 요체는 바로 그 점이었다.
전주와 남원, 그리고 광주에 우리 사령부의 요원들이 도착하면서 그 일대의 모든 전화선을 끊었다. 아군 병력의 이동 정보를 그들이 서로 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전주 북중학교에 차린 사령부에는 유리창에 담요 등을 걸어 빛을 차단했다. 움직임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낮에는 모든 요원들이 출입하지 않도록 했다. 수도사단은 예정대로 여수 인근으로 상륙해 지리산 남쪽에 도착했고, 8사단 또한 양구에서 출발해 무사히 지리산 북록에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