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달걀
이태익
버스는 떠났다.
4 형제가 기다란 막대에 짐 보따리 3개를 꿰어 달고 터벅터벅 낑낑대며 걷고 있다.
보따리 하나하나에는 달걀 30 개가 담겨있는 달걀 판 10 개가 쌓여있다.
300개의 달걀이 담긴 보따리가 3 개다. 총 900개.
어머니는 달걀을 가득 담은 큰 다라이를 머리에 얹고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에는
달걀을 담은 바케쓰를 들고 가셨다.
추석이 코 밑이다. 추석 상을 차리려면 집마다 달걀이 필요하다.
달걀의 수요가 많은 대목이니 이때가 어머니에겐 가장 장사가 잘되는 때다.
양계장에서 최대한 많은 달걀을 떼와 팔기로 했다. 범어 동 지금의 대구 여고 자리는 그땐 양계장 동네였다.
4 형제가 어머니를 돕기 위해 함께 범어 동 양계장으로 가서 달걀을 샀다.
문제는 그 달걀을 집까지 옮기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범어 동에서 머리에 이고, 손에는 들고 걸어가시다 발 닿는 단골 집에 들어가 파시며 집으로 오신다.
그러니 우리와 헤어져야 했다. 엄마는 109번 버스가 우리 동네 입구에 정차 하니 버스를 타고 가라 하시고는
총총히 힘든 길을 걸어가셨다.
버스는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때는 배 차 시간이 길었다. 20 여 분 기다렸을까. 버스가 도착하였고
우리는 보따리 3개를 들고 버스에 오르려 했다. 그때 운전사가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안 돼. 손님들이 많이 타기 때문에 짐을 실을 수 없다.”
109번 노선은 평상시에도 손님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우리 형제는 마냥 다음 차를 기다릴 수 없었다.
다음 차는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나야 도착할지, 또 선다고 태워줄지 알 수 없었다.
“걸어가자.”
맏이 인 내가 결정해야 했다.
“어디 굵은 나뭇가지 있나 찾아봐라.”
마침 근처 공사장에서 굵은, 길고 단단한 나뭇가지를 찾았다. 그것에 엄마가 맡기고 간 달걀 보따리를 꽁꽁 엮었다.
나와 셋째, 나와 둘째, 둘째가 셋째와 서로 번갈아 가며 나뭇가지에 매달린 달걀 보따리를 메었다.
막내는 키가 작아 균형이 잡히지 않아 걸렸다. 범어 동 대구 여고에서부터 대명 동 계명 대학 서쪽 담을 따라
10분은 걸어 들어가야 닿는 언덕 위의 집까지 걷고 걸었다.
문명의 이기인 ‘네이버 길 찾기’로 가장 빠른 큰길 우선으로 치니 지금의 신작 로 거리로도 1시간 38분이 찍힌다.
그 길을 4 형제는 용감하게 반은 허덕이며 반은 끌다시피 4시간 이상을 걸었다.
엄마는 달걀을 다 팔고서 밤 늦게 집에 도착하셨다. 버스와 걸어온 얘기를 듣고 엄마는 눈물을 훔치신다.
“내 탓이다. 차를 태워 보내야 했다” 시며 자책하신다. 그 먼 길을 어떻게 왔냐며 쓰다듬어 주셨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매고 온 달걀 꾸러미를 펼쳐보니 밑에 깔린 아래쪽 2판들은 모두 깨어져 쓸만한 게 없다.
상품 가치가 없다. 아직은 더운 날이라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상해 버려야 할 판이다.
이 삼은 육. 여섯 판 180개. 엄마가 머리에 이고 다니는 다라이에 깨진 달걀을 쏟아 모으니 거의 반이 찬다.
우리는 이 달걀을 몇 날 며칠을 먹어야 했다. 후라이 로, 달걀찜으로…, 도시락 반찬으로 두툼하게 구워 밥 위에도
올렸다. 달걀 장사하는 엄마를 두고도 먹어보기 힘들었던 달걀 요리를 그때 우리 식구는 눈물을 훔치며 먹었다.
엄마의 하루가 얼마나 고달팠는지 그때 알았다.
어머니는 튼튼하셨다. 매일 적어도 10km 이상의 거리를 달걀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범어 동에서 대명동 까지
다니셨으니, 지금으로 치면 열심히 걷기 운동하셨다고 해야 하나(불효 자식).
어머니가 서울 막내 집에 가셨다가 주차 레일에 걸려 넘어져 고관절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셨다.
대구에서 수술 받았는데 의사가 깜짝 놀란다.
“어머님 운동선수였어요? 뼈가 너무 튼튼합니다.”라고 했다.
자식들을 위해 고생하신 어머니는 걸으면서 다듬어진 건강으로 나이 드셨을 때까지도 튼튼하셨다.
죄 많은 불효 자식을 어머니는 고맙게도 자신의 건강 걱정은 덜 하며 살게 해 주셨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중략//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중략//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외할머니 보고 싶다/외할머니 보고 싶다,/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 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 1960.~ )
이 이상 더 먹먹하게 표현할 수 없다. 어머니의 삶에서 자식들을 뺀다면 그 건 3푼, 자식을 넣는다면 만 근이라
한다.
늘 그 자리에 계셨고, 언제나 옆에서 챙겨 주셨다. 항상 자식 만을 바라보는 ‘자식 바라기’였으며 누가 뭐라 해도
자식을 믿으셨고, 끝도 없이 밀어주셨다.
“세상 모든 곳에 신이 있을 수 없어 우리에게 어머니를 보내주셨다.”라고 한다.
어머니는 지상의 하느님이다. 내 어머니도 심 순덕의 어머니도 그렇다.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의 그 어머니시다.
“아,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라고 알았을 때는 어머니는 이미 우리 곁에 안 계셨다.
엄마. 죄송해요. 미안해요. 고마웠습니다.
<옮긴 글>
첫댓글 고향같은 어머님의 품이 그립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가르침 속에서 배우고 닮아 가며 살았지요.
그래서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살아 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