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사망 잇달아… 고령화사회 한국의 '사각지대'
아찔한 횡단, 일상적인 풍경
기자가 휴대폰 보는 찰나… 할머니 갑자기 車道 건너
"이 무거운 수레 끌고서 횡단보도까지 언제 가나"
그놈의 가난이 罪지 뭐…
전국 폐지 노인 175萬 추산… 서울市, 교통사고 방지 위해
형광조끼 6600벌 보급했지만 "몰라요" "처음 들어봐요"
하루 5000원 벌기도 힘들지… 폐지값, 2년전엔 ㎏당 130원
요즘은 60~70원으로 떨어져 '신입' 늘어 구역 싸움까지…
- 지난 7일 오후 서울 중랑구 망우동에서 김영선(가명) 할머니가 폐지를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건너가고 있다. 기력이 떨어진 데다 무거운 수레를 끌어야 하는 노인들에게는 이 같은‘서글픈 무단횡단’이 드물지 않은 일이다. / 남강호 기자
대부분의 수거인에게는 그들만이 폐품을 가져가는 '거래처'가 있다. 김씨에게는 여인숙, 피씨방, 주유소 등이다. 두어 시간 돌고 나니 수레가 키 높이만큼 찼다. 마지막 거래처인 주유소 앞에서 기자가 전화를 받으려 휴대폰을 쳐다보는 찰나, 수레 손잡이를 움켜쥔 김씨는 갑자기 인도에서 도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이고, 할머니!"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기자를 뒤로하고 할머니는 건너편을 향해 차도를 가로질렀다. 횡단보도는 빠른 걸음으로도 5분은 더 걸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부랴부랴 할머니를 따라잡았을 때는 상황 종료. 땀을 닦던 할머니는 "그 짐을 밀면서 횡단보도까지 언제 가"라고 했다. "걱정 마. 양쪽에 (빨간) 신호 들어와서 차 없을 때 건너는 거야."
◇폐지 수거 노인 전국에 175만명 추산
할머니의 이날 '아찔한 횡단'은 단발성 이 아니다. 교통사고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 1월 26일 오전 3시 50분 울산 남구 삼산동 부산은행 앞 도로에서 70대 노인이 뺑소니 차에 치였다. 노인은 폐지와 빈병을 실은 수레를 밀고 가던 중이었다. 그는 사고 두 시간 만에 행인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지난 4월 22일 오후 7시 50분 대전 대덕구 신탄진네거리에서 왕복 8차선 도로를 건너던 한 노인이 차에 치여 숨졌다. 그도 폐지 수레를 끌고 있었다.
새벽이나 밤에 다니는 노인은 사고 위험성이 더 높다. 그래서 서울시는 지난 4월 폐지 수거 노인들에게 형광 조끼를 지급했다. 시(市)의 전수조사에 따르면 서울에 사는 폐지 노인은 6354명이다. 시는 형광 조끼 6600벌을 제작해 각 주민센터를 통해 보급했다.
그러나 제도의 햇살이 사회 구석구석까지는 미치지는 못했다. 기자가 고물상에서 만난 노인 10여명에게 형광 조끼를 받았느냐고 물었으나 모두가 "모른다"고 답했다. 일단 수거 노인이 시 집계보다 많다고 전국 고물상 연합체인 자원재활용연대는 주장한다. 재활용연대 추산으로는 폐지 수거 노인이 전국에 175만명이나 된다. 고물상이 7만 곳이고 한 곳당 평균 25명과 거래한다고 치고 계산한 수치다.
형광 조끼는 여름에 입기에 덥다는 점도 문제다. 노인들이 밤에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낮에도 많다는 점에서 형광 조끼만으로 안전 문제 대부분을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명묵 세상을바꾸는사회복지사 대표는 "100만명이 넘는 길거리 폐지 노인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사회적 과제"라며 "이웃의 따뜻한 관심과 국가의 지속적인 정책 지원이 있어야 풀어나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OECD 노인 빈곤율 1위 한국
- *2011년 기준
대한민국은 급속도로 노쇠해지고 있다. 지난 2000년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7% 이상인 고령화 사회로 들어섰고, 이 속도대로라면 2026년에 노인 비율이 20% 이상인 초고령화 사회가 된다. 가난한 노인도 늘고 있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지난달 OECD는 '한국 경제 보고서'에서 "정부는 최저소득 노인층 지원에 집중해 절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생계가 막막한 노인 중 상당수는 폐지나 고철, 공병 등 재활용품을 수집해 살아간다. 기력은 달리는데 무거운 수레를 끌고 다녀야 하니 사고도 잦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 10만명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57.8명으로 OECD 회원국 평균보다 6배 높다.
◇폐지값은 갈수록 떨어져
김씨가 수레 한가득 모았던 폐지는 5000원이 채 되지 않았다. 폐지 값이 워낙 싸졌기 때문이다. 2~3년 전만 해도 ㎏당 130원이었는데 요즘은 60~70원선이다. 대부분의 폐지 수거 노인의 한 달 수입은 많아야 20만원이다. 폐지 단가는 제지 회사에서 정한다. 그러다 보니 담합 의혹도 있었다. 지난해 말 공정거래위원회는 한솔제지와 깨끗한 나라, 세하 등 5개 제지업체에 폐지 매입가격 담합 혐의로 과징금 1056억원을 부과했다. 제지업계에서는 "값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폐지 줍는 노인은 많아지고 폐지값은 싸지니 경쟁도 치열해진다. 지난 8일 오전 5시 광진구 중곡3동 주민센터 앞에서 만난 이남기(61)씨는 "얼마 전 '신입' 수거인과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씨가 거래처에 가보니 낯모르는 사람이 폐지를 쓸어담고 있었다. "이건 내 것"이라는 이씨와 "왜 못 가져가게 하느냐"는 신입 사이에 한참 고성(高聲)이 오간 끝에야 상황이 정리됐다.
이씨는 중곡3동 골목만 5년 넘게 돌고 있다. 고시원에서 혼자 살던 그는 신림동 영세민 아파트로 이사 간 후에도 이 '구역'에서만 일한다. '구역'은 쉽게 얻을 수 없고, 내주지도 않는 것이 수거인들 사이의 불문율이다.
오전 5시 시작해 오전 7시까지 한 바퀴를 돈 이씨는 중곡3동 주민센터 앞 고물상 제일비철로 절반쯤 찬 수레를 끌고 갔다. 오전 8시에 문을 여는 고물상 앞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세워둔 수레가 3대 보였다. "수거품을 훔쳐가면 어쩌려고 세워두느냐"고 했더니 "수레만 봐도 누구 것인지 바로 아는데, 어림없다"고 말했다. 버린 물건을 줍는 일에도 누군가 '생계'를 걸면 질서가 생기는 법이다.
폐지수거노인이 거래하는 도심의 고물상은 사실상 불법이다. 법대로라면 고물상은 폐지 수거인이 걸어서는 접근할 수 없는 시 외곽으로 옮겨야 한다. 고물상은 쓰레기 분뇨 처리 설비를 할 수 있는 잡종지(주거지나 상업지가 아닌 땅)에만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불법'이긴 하지만 고물상은 자유업으로 분류돼 세무서에 사업자등록증만 내면 시내 어디서나 영업을 할 수 있는 이율배반적 측면도 있다. 6년째 중랑구 중곡동에서 고물상인 모든자원을 운영하는 박상열 사장은 "불법이라면서 엄연히 세금도 받아가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느냐"며 "동네 고물상이 없어지면 이 많은 폐지 노인은 어떻게 살아가겠느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