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9일 연중 3주간 토요일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내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인생은 정말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어떤 일은 한꺼번에 몰아치기도 하고, 동시다발로 밀려오기도 합니다. 잘 가던 배가 갑자기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배에 물이차서 거의 가라앉을 지경이 되기도 합니다. 바람이 불고, 호수가 파도를 치고, 풍랑이 아주 거세지고, 돛도 부러지고, 암흑과 같은 어두움에 휩싸여 지척을 분간할 수조차 없게 되기도 합니다.
등산을 할 때는 산을 오르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올라갈 때는 잘 갔는데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길도 잃고, 날은 어두워지고, 미끄러져서 골짜기에 떨어져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폭설이 오거나 폭풍우가 몰아쳐 비행기가 결항되거나 여객선이 운항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방송국에서는 기상 요즘 기상이변을 ‘예측불가’라고 방송하고 있습니다. 정말 인생도 예측불가(豫測不可)인 상황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내 인생도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바람도 불고, 폭풍우도 만나고, 논보라도 만나고, 매서운 추위에 떨기도하고, 가뭄이나 홍수를 만나서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습니다. 잘 나가다가 혹독한 시련에 파묻혀 서리 맞은 채소처럼 시들고 썩어가기도 하였습니다.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였고, 하느님께 푸념을 늘어놓기도 수없이 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야속하기도 하였고, 답답해서 하느님 대신 욕을 먹을 사람을 찾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애매하게 내 화풀이 상대가 된 가족들에게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 들고, 그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지고 조용히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자연도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자연도 피조물이니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잘 듣고 또한 큰 잘못이 없는 바람이나 호수를 꾸짖으셨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바람의 원인이나 호수에 풍랑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또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바람이나 풍랑이나 평지풍파를 일으킨 사람들을 꾸짖으셨다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평온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사악한 기운을 갖게 하는 사악한 악마를 꾸짖으셨다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1. 인생에 불어 닥치는 바람을 어떻게 꾸짖어야 하겠습니까? 인생에 몰아닥치는 온갖 바람을 어떻게 달래시렵니까? 조용하던 호수가 왜 갑자기 바람에 출렁거렸겠습니까? 분명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바람은 아마 악마의 간교하고 비열한 파괴의 수단일 것입니다. 악마는 인생에서도 갑자기 일어나는 평지풍파와 같은 일을 일어나게 해서 인생을 괴롭히고 있을 것입니다. 악마의 비열한 훼방과 유혹과 악으로의 이끌림은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것일지 모릅니다.
오직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드님만이 그런 모든 유혹과 악으로부터 구할 수 있으며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간교한 유혹의 원인과 악의 원인에 대하여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 푹 빠져서 자신을 돌볼 수 없는 나약함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2. 모든 피조물이 잘못하였을 때는 하느님의 명령이나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야 하는 것이 자연법칙입니다. 자연 만물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권능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섭리하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자연법칙을 지키는 것, 자연에 순응하고 그 흐름에 따라야 하는 것은 순리입니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억지로 거스르는 것보다는 그 흐름에 잘 순응해야 하는 것이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행지불고세근’(大行之不顧細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사(大事)를 이루고자 할 때는 사소한 근신(謹愼)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에는 사소한 것들이 문제되지 않아야 합니다. 인생에서도 작은 일 때문에 큰일을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께서 중심에 계시다면 어떤 풍랑이나 시련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믿음이 없으면 아주 작은 일에도 두려워합니다. 인생의 매 순간이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두려움의 가장 큰 원인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도 믿음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매일 두려움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믿음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작은 일에도 두려워하니 큰일은 더 두렵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하면서도 항상 두려워합니다. 그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없는 생활은 두려움을 계속 키워갑니다.
내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커지고, 고통과 시련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2,1-7ㄷ.10-17 그 무렵 1 주님께서 나탄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나탄이 다윗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다른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2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매우 많았으나, 3 가난한 이에게는 자기가 산 작은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난한 이는 이 암양을 길렀는데, 암양은 그의 집에서 자식들과 함께 자라면서, 그의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의 잔을 나누어 마시며 그의 품 안에서 자곤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이 암양이 딸과 같았습니다. 4 그런데 부자에게 길손이 찾아왔습니다.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자기 양과 소 가운데에서 하나를 잡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잡아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대접하였습니다.” 5 다윗은 그 부자에 대하여 몹시 화를 내며 나탄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그런 짓을 한 그자는 죽어 마땅하다. 6 그는 그런 짓을 하고 동정심도 없었으니, 그 암양을 네 곱절로 갚아야 한다.” 7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11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거슬러 너의 집안에서 재앙이 일어나게 하겠다. 네가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너의 아내들을 데려다 이웃에게 넘겨주리니, 저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너의 아내들과 잠자리를 같이할 것이다. 12 너는 그 짓을 은밀하게 하였지만, 나는 이 일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 앞에서, 그리고 태양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할 것이다.’” 13 그때 다윗이 나탄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14 다만 임금님께서 이 일로 주님을 몹시 업신여기셨으니, 임금님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15 그러고 나서 나탄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께서 우리야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아 준 아이를 치시니, 아이가 큰 병이 들었다. 16 다윗은 그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님께 호소하였다. 다윗은 단식하며 방에 와서도 바닥에 누워 밤을 지냈다. 17 그의 궁 원로들이 그의 곁에 서서 그를 바닥에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는 마다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축일1월 29일 성 질다 (Gildas)
신분 : 수도원장, 역사가 활동 지역 : 뤼(Rhuys) 활동 연도 : 500?-570년경 같은 이름 : 길다스, 바도니꼬, 바도니꾸스, 바도니코, 바도니쿠스, 질다스
현자로 불리며 8세기 초반부터 성인으로 공경을 받은 성 길다(또는 질다)는 “브리튼의 전복과 정복”(De excidio et conquest Brittaniae)이란 저서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구름에 가려져 있다. 그는 500년경 스트래스클라이드(Strathclyde) 왕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성직자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수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성 길다에 관한 여러 전기와 자료를 종합해 보면 그는 스코틀랜드 서부에 있던 덤바턴(Dumbarton)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클라이드(Clyde) 강 연안 지역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일투드(Illtud, 11월 6일) 성인의 지도로 웨일스(Wales)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돌(Dol)의 주교가 된 성 삼손(Samson, 7월 28일)과 레온의 성 베드로(Petrus)와 같이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자로 생활한 후 아일랜드로 건너가서 사제가 될 준비를 하였고, 북아일랜드의 아마(Armagh)에서 잠시 생활하였다. 이때 그는 많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고 수도원과 교회 건립에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로마(Roma)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독한 삶을 위해 브르타뉴(Bretagne) 외곽 지역에 있는 오트(Houat) 섬에서 은수자로 살았다. 그 후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본토의 뤼에 수도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성 길다는 아일랜드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고 있고, 브르타뉴와 그외 여러 지역의 성당과 수도원의 수호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바도니쿠스(Badonicus)로도 불린다.
오늘 축일을 맞은 질다 (Gildas)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