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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연휴인데 비 내리는 날들입니다. 하필 어린이날, 특히 야외놀이를 기대했던 어린이들의 실망이 컸을 듯합니다. 어쩌겠습니까? 하늘에 대고 투덜대봐야 별무소용 득 될 일도 없습니다. 지긋지긋 말 안 듣는 인생들에 대한 하늘의 짜증 폭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시간은 갑니다. 다시 다른 날을 잡아야지요. 오늘만 기회냐, 눠 그런 겁니다. 그래도 파란 하늘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큽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또 다른 주말입니다. 날은 지나도 때는 옵니다. 실망을 이기고 희망을 심어야지요. 그것이 살아가는 인생의 힘 아니겠습니까?
코로나, 그거 별 것 아니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별거였음을 경험했습니다. 한 주간 격리생활을 집에서 행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내가 바톤을 이어받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초에나 끝납니다. 한 사흘은 꽤나 아팠습니다. 다행히 저는 아프거나 말거나 밥은 잘 먹었습니다. 아내는 밥맛이 없다고 힘들어 합니다. 체력을 유지하면 빨리 이겨내는 거죠. ㅎㅎ 다만 창살 없는 감옥생활, 좀 답답하기는 합니다. 정말 기나긴 한 주간이었습니다. 아내 덕에 연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계획이 중단되고 어버이날이라고 아이들 오는 것도 무기연기, 재미없지요. 걸려서 좋을 것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대부분 한 번씩은 다 거쳐 간 것 같습니다.
답답한 ‘집콕’을 마칠 때면 하늘도 풀리겠지요. 나가고 싶습니다. ㅋㅋ 건강할 때 잘 챙기세요.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3년 5월 6일 김종우 목사 드림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히브리서 13 :4)
<킬링 로맨스>
결혼, 요즘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꼭 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도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식과 문화가 많이 변하였습니다. 아무튼 결혼에도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전 세기에는 그런 것 따지지 않고 나이가 되면 결혼은 마땅히 하는 것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고 강요를 당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사회가 변하고 의식이 변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세기가 바뀌면서 젊은 세대에게는 삶이 더욱 팍팍해졌습니다. 개천에서 용은커녕 비단뱀도 나오기 어려운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노력으로 이루는 시대도 멀리 사라지고 있는듯합니다.
한참 N포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였습니다. 이제는 유행 정도가 아니라 그냥 현상으로 굳어진 느낌입니다.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조차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생깁니다. 먹고살기 힘든 판에 연애는 사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젊음의 낭만이라 할 수 있는 연애까지 접어야 한다는 사실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아무튼 이제 연애와 결혼도 일부 있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행사가 될까 걱정됩니다. 꼭 가진 것이 있어야 연애를 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들다 싶은 지금의 삶이라면 사실 한눈팔기 어렵습니다. 가엽고 안타깝습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의 배부른 소리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 때의 시간인데 쉽게 포기하지 않기 바랍니다.
결혼, 요즘은 꼭 남녀의 역할이 꼭 구분되어 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더구나 부부가 똑같이 사회생활을 한다면 무엇은 남편이, 무엇은 아내가 하는 식으로 가사가 구분되어 있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사를 돕는 많은 기구들이 생겨났기에 역시 도움이 됩니다. 먼저 퇴근하고 온 사람이 저녁을 준비할 것이고 먼저 일어난 사람이 아침을 준비하면 좋을 것입니다. 물론 아직 의식 자체가 우리 부모 세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그러하다면 다행이지만 어느 한쪽만 현대화되었다면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여야 정당들처럼 극단화되지 않았다면 부부가 협의해서 분업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혼자 살면 편합니다. 간섭받지 않습니다. 어려운 협상도 필요 없습니다.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판단하고 혼자서 결정하여 밀고 나가면 됩니다. 누구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 양육 걱정도 없습니다. 글쎄 혼자 살면서도 육아를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야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불평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전적으로 본인의 책임입니다. 아무튼 혼자 산다는 것은 ‘자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부가 사는 것이 불편한 것인가? 그렇다면 여태 인류가 보존되어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부로 사는 즐거움이 있기에 인류 역사와 함께 남녀가 부부가 되어 살아왔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사람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한다고요. 그래서 개인의 입장에서는 그럴 바에는 하고 후회하는 쪽이 낫다 싶습니다. 미안하지만 결혼은 천국에도 없습니다. 오직 이 세상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천국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남녀 사랑의 기쁨은 오로지 이승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놓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현실적으로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하지 않습니까? 그야 경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사랑으로 하나 된 부부라면 어떤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위로와 격려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든든한 남편과 사랑스런 아내, 두 사람이라면 어떠한 세상 풍파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괴팍한 남편들이 있습니다. 아내를 마치 자기 개인비서처럼 여기는 사람입니다. 다소 고상하게 표현했지만 어쩌면 자기 몸종으로 생각하고 대하는 그런 남편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집안일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의 집안 내력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기에 아직도 남존여비 사상이 은연중 남아있기도 합니다. 아무튼 나락으로 떨어졌던 인기배우 ‘여래’가 구세주 같은 ‘조나단’을 만난 것은 행운일 수 있지만 결혼은 행운을 행복이 아니라 노예생활로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요? 뜻이 있으면 길도 있다.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사를 간 집 앞에 여래의 열성팬이 살고 있습니다. 대입 4수생 ‘범우’가 놀라움과 반가움, 기쁨으로 범벅이 되어 여래를 마주합니다. 마침 여래는 자기의 노예 가정에서 탈출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웃사촌이 되며 범우가 부잣집을 드나듭니다. 가까워지며 여래의 사정도 알게 됩니다. 두 사람이 연인관계가 되기는 좀 어렵겠지요. 그래서 누나 동생이 됩니다. 그리고 여래가 ‘인형의 집’에서 탈출하도록 돕습니다. 이야기니까 과장도 있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동화 같은 이야기인데 ‘어른 동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영화 ‘킬링 로맨스’(Killing Romance)를 보았습니다. 글쎄 호불호가 있겠지만 시간이 남는다 싶으면 봐도 됩니다.
무엇을 먹을까요?
한창 웰빙 문화 때문에 먹거리가 관심의 초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건강식품은 계속 개발되어 나오고 덩달아 가짜도 판을 쳐서 소비자들을 울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좋다는 소문이 나기만 하면 너도나도 사서 먹습니다. 하기야 이제 오래 사는 것보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중요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혹 병이라도 생기면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이 다 함께 고생을 하기 때문에 서로서로 건강 지키기에 열심입니다. 사실 따로 건강식품을 먹는 것보다는 우리가 일상으로 먹는 음식이 더 중요합니다. 거기서 필요한 영양소를 다 공급 받는다면 구태여 또 따로 먹을 필요가 없지요. 아무튼 우리는 먹어야 사는 것이고 먹어야 에너지를 생성해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논다고 한들 역시 기운이 없으면 그나마 놀지도 못합니다. 이래저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래서 먹거리 이야기는 끊임없는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먹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담 때로부터 그 먹거리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보면 그것 또한 대단합니다. 채식만 하다가 노아 홍수 사건 이후에 육식이 허용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그 육식에도 많은 제약이 생겼지요. 하나님 백성에게는 먹을 수 있는 것보다는 먹을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으로 명시되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으니 철저히 지켜졌습니다. 모세 이후 예수님 오시기까지 1,500년이라는 세월을 지키며 살아왔지요. 그 시간이 얼마나 깁니까? 우리나라 역사로 비교한다면 아마도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지켜왔던 법입니다. 법이면서 전통이고 문화입니다. 그러니 그 벽을 허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벽을 허무시는 겁니다. 이제 음식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 백성인 유대인들이 쉽게 용납하겠습니까? 이 작자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지켜온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려고 한다고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지요. 안식일 문제도 있지요, 먹거리 문제도 있지요, 아무튼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였습니다. 도저히 용납해줄 수가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속에서조차 이 먹거리에 대한 이런저런 의견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왜 제한을 하셨을까 하는 전체적인 이유보다는 각각의 먹지 못할 것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하신 이유가 분명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우리 사람에게 좋지 않은 어떤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금하셨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러쿵저러쿵 이유를 만듭니다. 듣고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좋지 않다고 하는데 꼭 그것을 먹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먹는 동물들도 있습니다. 그 흔한 돼지고기, 성경의 말씀대로라면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리낌 없이 먹습니다. 더구나 다시 문제가 되려는 보신탕은 어떤가요? 비싸서 못 먹지, 있는데 왜 못 먹습니까? 무슨 근거로 이렇게 거리낌 없이 잘들 먹을까요? 제대로 알고나 하는 겁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신약성경은 이 먹는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고전 8 : 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무슨 뜻입니까? 이제 더 이상 먹는 것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한 가지, 믿음이 아직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라는 지시가 있을 뿐입니다. 9 - 10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13절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음식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연약한 믿음이라도 지켜주기 위하여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가 없다면 먹는 것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율법은 하나님 섬김에 초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지요. 갈 3 :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 우리는 육체의 예법을 따르는 시대에서 새로운 율법의 시대로 넘어왔습니다. 즉 ‘자유의 율법’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 2 :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은 사실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참 형상을 따라 살아야 하지요.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그림자만 따라 살 것이 아닙니다. 참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히 9 :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모세의 율법에서는 육체의 예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심령의 예법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겉이 아니라 속뜻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를, 문자가 아니라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몇 가지 예를 통해서 그 의미를 알아보도록 합니다. 레 11 : 3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그 대표적인 짐승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양과 소를 잡아먹었습니다. 그렇다면 먹으라는 이 양과 소가 문자대로 양과 소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육체의 율법을 따르던 시대에는 그렇게 하였지요. 그렇게 1,500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속뜻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자대로 소나 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요 1 :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여기서 양이, 양이 아닙니다. 잘 아는 대로 바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6 : 54 - 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연결하면 예수님의 살은 곧 양의 고기입니다. 양은 고기를 먹지만 예수님은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양은 예수님이면서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의미합니다. 요 10 : 3 - 4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여기서 그는 예수님이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그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양고기를 먹으라는 것은 곧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가 소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신 25 : 4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찌니라” 사실 이 말씀대로 했다가는 농부의 손실이 큽니다. 소가 가만있지 않겠지요. 바닥에 깔려있는 곡식을 다 집어먹습니다. 그래서 입에 망을 씌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씌우지 말라 하십니다. 율법이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속으로는 얼마나 불평 원망하였을까요? 그렇게 1,500년이라는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뜻으로 주신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림자일 뿐이지요. 정작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고전 9 : 9 - 10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여기 소는 소가 아니라 ‘우리’ 곧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제자들 곧 목자들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지요.
이제 먹지 말라는 짐승들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개와 돼지고기를 보겠습니다. 율법대로라면 개나 돼지는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입니다. 레 11 : 3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개는 쪽발이 아니니 먹을 수 없고 돼지는 쪽발이지만 새김질을 하지 못하므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돼지가 돼지인가, 개가 개인가, 이제는 그 참 형상을 찾아야 합니다. 벧후 2 : 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 말씀에 개와 돼지가 나오는데 이 짐승들에 대한 이야기가 ‘저희에게 응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 ‘저희’가 누구입니까? 그 ‘저희’라는 사람들이 곧 개와 돼지 같은 사람들이라는 뜻이지요. 그 앞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0 - 21절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예수님을 믿고 세상의 더러움에서 떠났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개나 돼지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개고기나 돼지고기는 바로 그들이 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제자가 되었다가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이 사역 말기에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합니다. 딤후 4 : 9 - 10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여기 데마라는 제자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사역하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을 사랑해서 그 제자의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개나 돼지로 표현합니다. 그러니 개고기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은 그런 사람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이지요. 사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방해하는 것보다 교회를 다니면서 방해하는 사람들이 상대하기가 더 어렵고 불편합니다. 근간 교회들 속에서 사건들이 빈번하게 터져 나왔습니다. 폭력사건과 성폭력사건, 금권선거사건, 교회의 사기업화 사건, 교인 감금사건 등등 세상 이야기가 아니지요. 모두 교회 안에서 터졌던 사건들입니다. 더구나 교계의 지도자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모두 세상으로 돌아간 자들입니다. 목자를 바라보는 양들이 어디로 가야할지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리라는 것은 꿈일 뿐이지요. 그러니 기근입니다. 설교는 있지만 진리의 말씀은 없습니다. 성도들이 먹지 말라는 개고기 돼지고기만 잘들 먹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들이 정력제라고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나 유명하지요. 바로 뱀탕입니다. 뱀을 먹는다는 건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먹는다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물론 모세 율법에 의하면 먹어서는 안 됩니다. 레 11 : 41 - 42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찌니 곧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찌니 이는 가증함이니라“ 기어다니는 동물 중 대표적인 것이 뱀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 앞에 가증해집니다. 그러니 먹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뱀이 뱀이겠습니까? 창세 때 에덴동산에 나타나서 사람으로 범죄케 하였던 존재입니다. 계 12 :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그 뱀은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니 곧 세상에서는 마귀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은 마귀 사단이 쓰는 사람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 잘 섬기고 설교 잘하고 허물할 데 없는데 어찌 알겠습니까?
새도 마찬가지입니다. 레 11 : 13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찌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그리고 가증한 새들의 이름들 그 종류가 이어져 나옵니다. 사실 그렇게 빼놓고 나면 남는 새는 얼마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먹는 닭 종류, 오리 종류, 참새나 꿩 종류 정도 되겠지요. 성경에서는 비둘기가 좋은 새로 나옵니다. 비둘기가 의미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요 1 : 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그렇습니다. 성령을 의미하지요. 그러므로 비둘기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성령의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백성은 마땅히 비둘기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곧 성령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도 알기는 아는데 이것이 성령의 전하시는 말씀인지 악령의 전하는 말인지 어떻게 구분하느냐 그것이 문제이지요. 앞에서도 문제가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양고기인지 뱀고기인지 어떻게 분멸하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의 입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일반 성도로서는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겁니다. 성령이 직접 말씀하지 않습니다. 악령이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누군가에게 임하여 그 입을 통해서 말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하는가, 마귀의 사람으로 일하는가, 그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단의 사람은 악령이 임하여 사단의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사단도 하나님처럼 나타납니다. 고후 11 : 14 - 15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모두가 가장합니다. 그러므로 그냥 봐서는 모릅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종으로 나타납니다. 전하는 말씀도 그럴 듯합니다. 어쩌면 더 잘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짜가 훨씬 진짜 같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분별하여 진리를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고 사는 길입니다.
사도 요한이 증거합니다. 요 3 : 31 - 32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잘 들어보십시오. 땅에 속한 자는 땅의 것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이야기, 복 받는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자기 집으로 삼고 싶어 합니다. 함께 망하자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성령이 오실만한 신자를 가려 뽑고 있습니다. 그 때 그냥 그 자리에 남아있으면 저주받는 것입니다. 마 24 : 40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한 마디로 데려감을 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 오늘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구약시대는 눈에 보이는 육신의 양식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율법에 ‘먹어라’ ‘먹지 말라’ 하는 것들이 앞에서 보았듯이 성경 ‘레위기’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보이는 육신의 율법에서 보이지 않는 ‘자유 율법’으로 바꾸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마음이 죄로 말미암아 악하고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백성에게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하는 목자들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계명’을 백성에게 먹여야 하는데 ‘사람의 계명’을 먹이고 있기 때문입니다.(마 15장) 오늘 하나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먹어야 할 양식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여태 배워왔듯이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전하는 하늘의 이야기입니다. 썩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생의 양식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6 :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이 영생의 양식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초림 때 예루살렘 목자들 곧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은 그 말씀을 받을 생각도 받아서 백성에게 전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뱀 곧 사단의 영이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재림 때는 누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서 백성을 먹이겠습니까? 우리 신자는 누구에게 가서 이 영생의 양식을 받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초림 때는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을 백성에게 전해주셨습니다. 재림 때는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을 전해주는 목자가 나타난다고 약속(예언)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목자를 찾아가야 하늘 이야기(영생의 양식)를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감추었던 만나’이고(계 2:17) 예수님이 유월절 밤에 약속하신 ‘새 포도주’(마 26:29)이며, 예수님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때를 따라 주는 양식(마 24:45)입니다. 그 목자는 하늘의 것을 보고 들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택하여 당신의 사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전해주는 목자입니다. 우리는 그 목자를 찾아야 합니다.(계 1:1-2, 계 22: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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