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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과의 결산 ♣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금전적 비금전적 손익계산서가 존재한다. 그 아이템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 바로 ‘귀속재산’(Vested Property)이다. 귀속재산이라는 명칭은 미군정이 지은 것이다. 일본이 조선에 쌓아놓은 재산을 미국이 모두 빼앗아 대한민국 정부에 소유권을 넘겨준 재산이
귀속재산 (Vested Property)
2015년 10월, 성균관대 이대근 명예교수는 ‘귀속재산 연구-식민지 유산과 한국경제의 진로-’ 라는 700여 쪽의 저서를 냈다. 그 내용 일부를 요약한다. 1945년 해방직후, 일본은 그들이 36년 동안 조선 땅에 건설해 놓은 수풍댐, 철도, 도로, 항만, 전기, 광공업, 제조업 등 여러 분야의 사회간접자본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추방당했다. 아울러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운영하던 기업재산과 개인재산 모두를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갔다. 미군은 퇴각하는 일본인들의 주머니를 뒤져 지폐까지도 압수했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씨 조선 518년을 대대로 통치해온 27명의 왕들이 이룩해 놓은 자산이 무엇이었는가를. 도로를 닦아놓았는가, 철로를 건설해 놓았는가? 기업이 생겨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았는가? 한글 단어장 하나 마련해 놓았는가? 그 27명의 왕들은 길을 넓게 닦으면 오랑캐가 침입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일본은 불과 36년 동안에 조선 땅에 52억 달러어치의 재산을 쌓아올렸다. 이 엄청난 재산을 미국이 빼앗아 보관했다가 대한민국 건국자 이승만에게 선물처럼 주었다. 미국은 스스로 지키지 못했던 땅도 빼앗아 주었고, 조선인들로서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도 빼앗아 주었다.
미군정은 처음, 사유재산을 압류대상에서 제외했다가 매우 다행하게도 곧 이어 사유재산까지도 압류했다(군정법령 제8호, 1947.10.6.제정). 공적-사적 재산 목록이 170,605건, 이승만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3년 동안 미군정은 고생을 했다. 엄청난 관리 인력과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에 인수되지 않고 농림부 등에 등록되어 있던 또 다른 일본인 재산이 121,304건에 이른다. 이 모두를 합한 총 재산은 291,909건이었다.
미국은 어느 정도로 일본인을 발가벗겨 보냈는가? 귀국하는 일본인이 소지할 수 있는 돈의 액수를 극도로 제한했다. 민간인은 1,000엔, 군장교는 500엔, 사병은 250엔 이상 소지할 수 없었다. 미군은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는 일본인의 주머니를 검열했다. 1945년 말까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민간인은 47만여 명이었다.
1945년 10월12일 부산항에서 귀환선을 기다리는 일본인들의 주머니와 짐을 미군 병사가 수색하고 있다. 미국국립문서관,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 사본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그 많은 주식회사 급 기업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대부분 그 회사 직원이거나 관련이 있던 조선 사람들에 헐값으로 불하되어 오늘의 대기업들로 성장했다. 오늘의 우리 대기업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일본기업들이었다. 조선인들이 세운 업체는 ‘상회’라는 이름을 단 개인가게들이었다. 아래의 사례들은 현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해방 이후 맨땅에 헤딩해서 창조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할 것이다.
‘쇼와 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 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 조선화약공판’은 당시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 후에 ‘풍국제과’로 상호 변경되어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일본이 팽개치고 나간 회사들을 조선인들이 이승만 정부로부터 ‘불하’란 명목으로 헐값에 인수했다. 그래서 이들 중 일부는 1961년 5.16군사혁명 후 정경유착에 의한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일본인들은 얼마나 속이 쓰렸겠는가? 반면 불하받은 사람들은 어떤 ‘횡재’를 했는가? 그래서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단계에서 남조선에 두고 간 23억 달러 어치의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요구했다.
해방 직후 북한을 선점한 소련은 군정을 통해 북한에 건설된 발전소, 공장 등을 계속 운영하기 위해 그것들을 건설하거나 운영해온 일본인 기술자들을 확보하는 데 공을 들였다. 소련군정은 만주에 주재한 ‘일본피난민단장’과 협의하여 북조선에 있던 모든 기계-설비를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일본 기술자들을 북조선에 남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조선의 민둥산(1903년 서울)
조선의 산은 민둥산이었다. 여기에 일본은 과학의 힘으로 경제성 있는 나무들을 심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산마다 쭉쭉 뻗어 올라간 경제목들이 들어차 있다. 그 많은 나무들에 가지도 쳐준다. 미국도 이렇게 한다. 그래서 해방 당시 전국의 산에는 일본이 심은 나무들이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 광릉에 보존된 나무들이 바로 일본의 작품이다.
이에 박정희 정부 농림장관인 장경순씨가 대통령의 명을 받고 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었지만 그 나무들은 일정시대의 산림처럼 경제림이 아니었다. 포항제철 사례에서 보듯이 공업 분야에서는 일본으로부터 기술지원을 대대적으로 받았지만, 나무를 심는 식수계획에서는 일본기술의 지원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가 장경순씨로부터 직접 들었던 이야기로는 수종선택은 토종기술에 의존했다.
2019.10.20. 지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