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황석영의 귀국
은호기(시사평론, 캘리포니아 거주)
「객지」의 작가 황석영이 사년여에 걸친 해외객지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지난 4월 26일 뉴욕케네디 공항을 출발, 귀국하였다.
1989년 3월, 당국의 승인없이 북조선을 방문하였다가 남한 당국으로부터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귀국을 포기, 일본 · 독일 · 미국 등지를 떠도는 삶을 해 온 터였다. 작가에겐 말과 글이 삶의 전부랄 수도 있을진데, 구태여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모국어를 떠난 그의 삶'이 어떠했으리라는 쉽게 짐작이 간다. 게다가 작가 자신이 자신을 서슴없이 '황구라'라고 부를 정도로 말 또한 그에겐 중요한 삶의 부분이었기에 그의 귀국은 썩 잘한 일이며 마땅한 결론이었다. 또한 그의 귀국은 갑작스런 결정이라기보다는 이미 준비되고 예정되었던 일이었다. 지난 연말의 대통령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주변을 정리하는 듯한 말 속에 언뜻언뜻 귀국의 뜻을 담아왔기에 말이다.
작가 황석영의 귀국을 놓고, 몇년 전에 북으로 갔다, 미국으로 왔다, 남으로 갔다 하면서 수선을 떨던 어느 영화인 부부의 잔영을 겹쳐 놓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납치', '탈출' 등의 용어로서 거액의 공금횡령기도가 사건화되지도 안했으며, 누구에게나 쉽게 적용되어 오던 국가보안법마져도 피해갈 수 있었던 부부, 그들과 황석영의 경우가 같을 수는 없다. 작가 황석영 역시 북조선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은바 있으며, 특히 그의 말대로 김주석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여 온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황석영은 북조선의 지원 아래 창작, 문화 활동을 해 온 일은 없다. 이 점에서, 북조선의 막강한 지원과 배려 속에서 영화활동을 해 온 그들 부부와는 경우가 다를 수 밖에 없다. 황석영과 북조선과의 구체적인 관계는 재판과정에서 상세히 밝혀지리라고 본다. 그런데도 한가닥 찜찜한 마음이 황석영의 귀국에 걸쳐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그 찜찜한 마음은 황석영의 해외활동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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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해외생활 4년은 한마디로 작가적인 면모보다는 조직운동가적인 면을 강하게 부각시켜온 삶이었다. 작가로서의 고뇌나 의욕보다는 그의 열정과 힘을 조직과 운동에 모두 하기위하여 안간힘을 써 온 삶이었다.
1989년 3월의 맨 처음 방북은 문익환 목사 일행과 겹쳐지긴 하였지만, 그것은 분명 작가적 결단에 다름아니었을 터였다. 분단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 온 작가가 자꾸만 떨어져 나가는 듯한 민족의 반쪽을 확인하고 붙들고 싶은 욕망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욕구와 충동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방북은 뜸금없이 단행된 전라도행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정치 · 경제 · 교육 · 문화 등 모든 것이 서울로 집중되고, 서울을 떠나면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고 뒤진다는 현실을 뒤로하고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전라도 땅으로 훌쩍 떠난 작가, 그는 거기서 소외되고 파편같은 삶을 확인하였고, 그 삶의 숨결이 어떻게 정치적 항쟁으로 이어지는가를 스스로 목격하고 겪었다. 이러한 민족적, 민중적, 체험은 작가의 세계를 역사에 확실하게 붙들어 매게하였다. 이러한 작가적 충동의 연장이 곧 방북사건이라 보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1990년의 제 3차 방북은 황석영의 작가적 본질보다 운동가적 측면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수경이 제 13차 평양축전에 전대협을 대표하여 참석하였듯이 황석영은 남측 대표자격으로 범민족대회에 참가한 것이다. 범민족대회는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남측운동권이 제안하고 해외운동권이 남측의 제안을 지지, 북측이 받아들임으로서 삼자간에 이루어진 최초의 모임이었다. 정부당국의 불허로 남측대표의 참가가 불가능하게 되자 남측은 이미 해외에 나와 있던 황석영에게 대표권을 위임, 참석케 하였으며, 황석영은 남측 대표로서 처음부터 대회의 열기를 이끌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조연설에서 범민족대회를 위한 남 · 북 · 해외간의 상설기구의 설치를 제안하였고 이를 다시 해외에서 지지하고 북측에서 받아들이는 절차를 밟아 조국통일 범민족연합(범민련)의 결성을 성사시켜 대변인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이래, 황석영은 범민련의 조직을 완성시켜 뿌리를 내리도록 온 힘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노력은 미국에 건너와서도 독일에서처럼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범민련 남측본부의 결성이 늦어지고 (현재까지 결성을 못하고 있다) 미국 현지의 전폭적인 지지조차도 얻어내지 못하여 벽에 부딛히고 말았다. 드디어 그는 금년 정초(1993년 1월 7일) 한국내의 정치적 변화 등이 범민련 창설 당시의 상황과 많이 달라졌으며 이로써 범민련의 시대적 사명은 끝났다'고 선언하고 범민련 대변인직을 사퇴한다고 밝히기에 이르렀다.
한편, 황석영은 지난 여름 (1992년 7월 18일) 뉴욕에서 「동아시아 문화연구소」(동문연)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는 미국의 '코리언 이민사회의 중심부가 1세에서 2세로 넘어가고 있다'고 진단하고 '이민 2세들의 역랑을 묶어 세워 조국운동에의 종속에서 벗어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고 '다른 진보적인 아시안 공동체들과 연결하여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 드디어는 하나된 조국의 민족문화와 건강하게 접목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하여 「동문연」을 설립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의욕적인 계획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동문연」을 기본축으로 하여 「동포사회연합」이라는 대전국조직을 만들 계획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황석영이 귀국할 때까지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했으며 그가 귀국하자마자 사무실마져 닫아버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듯 황석영의 사년여에 걸친 해외생활은 줄곳 운동가적 삶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귀국은 운동가적 입장을 벗어난 감이 없지 않다. 갑 작스런 범민련운동의 부정이라든가 서둘러 김영삼 정부를 지지하는 등, 아무리 귀국을 위한 사전 조절용이라 하더라도 운동가로서의 강인함과 의연성 그리고 책임감을 찾아보긴 힘들다. 바로 이점이 황석영의 귀국에 찜찜한 마음을 걸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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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작가라해서 민족운동을 하지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작가가 민족운동에 뛰어들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음을 세계사는 여러곳에서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황석영의 경우, 그의 해외활동을 찬찬히 굽어보면 조직운동가라기보다는 역시 작가라는 결론이 쉽게 난다. 다행히 지난 4월 27일, 김포에 도착하자마자 '창작에 전념하겠다'고 황석영은 밝혔다. 그의 귀국만큼이나 당연한 결심이다.
사실, 분단시대를 사는 작가로서 황석영만큼 폭넓은 경험과 삶을 가진 작가도 없다. 북의 고위층을 비롯한 권력의 핵심부, 북의 사회생활을 직접 살펴 볼 수 있었을 뿐 더러 사년여에 걸친 해외생활은 각국의 해외동포사회를 꿰뚫어 볼 수 있었기에 그의 삶에 폭과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사회에 대하여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폭넓은 이해를 얻어낼 수 있었으며, 이러한 구체적인 경험은 그의 창작생활에 좋은 영양소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그의 주변사람들은 차분히 민족사적인 큰 작품 하나를 써 주길 기대하였다. 아직도 많은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국의 상황을 감안할 때 미국에서의 권고와 기대는 그런데로 당연성을 가진다 할 수도 있다. 물론 당위성이나 의무감만으로 작품이 써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긴 하더라도 이점 역시 아쉬움으로 남는다.
해방이후 가장 큰 성과의 하나로 꼽히는 「장길산」이 말하여주듯, 황석영은 역량과 패기의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의 역량이 그간의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작품으로 구체화되길 바란다. 귀국조절과정에서 스스로 인정한 셈이 되었지만 그의 조직운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기존 운동조직들과의 갈등, 그리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흠집을 남긴 것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조직운동가로서의 황석영의 한계이다.
그러나 황석영은 작가이다. 개인의 실패나 흠집을 작품을 통하여 얼마든지 짚고 일어날수 있다는 말이다. 실패나 실수가 항용 실패나 실수 그 자체로 끝나기 일쑤여서 사람을 괴롭혀 오기 마련이지만, 작가는 오히려 실패한 경험이 작품속에서 승화되여 질 수 있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특이한 면책특권이기도 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작품이 작가를 구체적으로 말하여주기 때문이다.
1993년 6월호. 미주현대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