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꽃 피면
김정호
새봄을 알리는 화사한 매화꽃이 피고 있다. 며칠 전부터 한두 송이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완전히 매화꽃이 만발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매화 곁으로 다가간다. 매화꽃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진다. 얼마나 기다려온 봄 냄새였던가. 넋을 놓고 매화 곁에서 명상에 잠긴다. 봄꽃이야 많고 많지만 맨 처음 봄을 알리는 꽃은 매화꽃이다. 시인 묵객은 매화꽃 하면 눈 속에 피어난다는 설중매雪中梅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설중매를 본 적은 없지만, 새봄을 알리는 매화꽃이 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희망을 가져올 것만 같은 예감에 가슴이 들뜬다.
지난겨울을 생각해 본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삭풍과 눈보라는 팔공산의 위용만큼이나 겨울답고 잔인하다.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뒤엎어버릴 듯한 기세로 몰아치는 겨울 삭풍에 모든 것은 몸을 감추었다. 동면하는 북극곰처럼 사람도 자연도 움츠리고 숨죽이며 목숨을 이어왔다. 산꼭대기가 아니더라도 나무 가지마다 하얀 상고대가 피어 은빛으로 반짝이지만, 모두들 죽은 듯이 엎드려 가는 시간을 죽이며 빨리 겨울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잔인한 겨울은 날씨만이 아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했던가. 해토머리가 가까워지는데 아내가 이상하다. 간간히 배가 아프다고 한다. 소화제도 먹어보고 동네 의원도 몇 차례 드나들었다. 의사가 처방해주는 약을 먹어도 잠시뿐이다. 내 손톱 밑에 가시는 견딜 수 없이 아프지만 곁에 있는 사람의 맹장염은 아프지 않은 법이다. 별 탈이야 없겠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와중에도 아내는 시름시름 앓고 있다. 어느 날 저녁 모임에 다녀오니 아내의 몰골이 말아 아니다. 얼굴은 부석부석하고 머리는 산발이다. 덜컥 겁이 났다. 당장 큰 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이 밤중에 어떻게 가느냐며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보자고 한다. 그렇게 또 며칠을 미련스럽게 보냈다.
미련스럽게 보낸 세월이 벌써 달포 가량을 지났다. 죽을 만치 많이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기분 나쁠 만큼 아랫배가 아프다고 한다. 혹시나 싶어 산부인과 진료도 받아보았으나 그쪽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단다. 그래도 여전히 배는 아프다고 호소한다. 변비약에 설사약까지 먹어보고 동네 의원을 찾았지만, 별무소득일 뿐이다. 배 아픈 것쯤이야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하고 미련을 부린다. 당장 큰 병원에 가서 입원이라도 하게 된다면 간간이 찾아오는 손님 뒤처리는 누가 하느냐며 차일피일 미루어 달포 가까이 지났다.
주차장 한 귀퉁이에 제법 튼실하게 자란 매화나무가 서 있다. 팔공산에 들어와서 이듬해 봄에 심어놓은 것이다. 사랑채를 찾아오는 손님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매일 아침 주차장 청소는 꼭 해야 한다. 간밤에 광풍으로 몰아친 겨울바람에 온통 낙엽천지가 되고 말았다. 대빗자루로 쓸어 모으고 삼태기에 담아 소각장에서 소각하는 일은 매일 반복하는 일과다. 그때마다 매화나무를 돌아본다. 언제쯤 매화꽃이 필까 하고 유심히 살핀다. 마치 봄소식이 전해지고 매화꽃이 활짝 피면 아내의 건강이 좋아질 것만 같다.
종합병원은 아니지만 제법 큰 병원을 찾았다. 지난해 위장과 대장은 내시경 검사를 하였으므로 다소 안심이 된다. 담당의사의 진찰과 권유로 복부 CT촬영을 하기로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아내도 긴장하는 모습이다. 세상에는 험하고 힘든 병도 많고 많아서 불길한 생각이 앞선다. 촬영을 마치고 한 시간 남짓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진다.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아무런 이상이 없단다. 그런데도 계속 복통을 호소한다. 돌팔이 의사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의사를 믿는 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길이 무겁다.
내가 미련했지 싶어 자책감이 앞선다. 옛날 소를 몰아 농사를 짓는 농부도 소를 너무 많이 부려먹어 소가 지치면 평소와 다른 보신용 사료를 먹이다고 했다. 1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3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손님들이 남기고 간 흔적과 방 청소를 감당해야 하는 아내도 지쳤을 것이다. 내가 너무 무관심했다. 겨우내 수입이 적어 적자 가계를 꾸려가고 있다 하더라도 아내에게 보약 한 재 지어주어야겠다. 그동안 무심했던 미안함과 무안함을 감추고 당장 한의원에 가보라고 아내를 닦달한다. 한약 한 재 먹는다고 기운이 팔팔하게 살아나고 몸에 병도 금방 나을 것이란 확신은 없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아내도 한의원에 가보겠다고 한다.
매화꽃이 활짝 피고 매화꽃 좋은 향기가 가득하다. 겨우내 움츠리고 살아왔던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기지개를 켜고 깨어난다. 이제 활기찬 새로운 세상이 돌아왔다. 아내도 나도 아직은 감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나이는 젊다. 구순九旬의 나이에도 자식 걱정에 밤잠을 설치시는 부모님과 제법 뼈대가 굵어가고 변성기가 오는 손자녀석들 앞에서 아프다고 드러누울 수도 없다. 이것이 숙명이다. 보약 한 재 먹고 기운 차리고 나면 아내도 괜찮아지겠지.
(2014. 12. ≪수필문예≫ 13집)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