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모르는 사람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김밝은
뒤에서 몰래 너를 읽을 때도 있었다고 말하지 말걸 사람의 향기에 기울어지는 데도 취향이 있는 것 같다고 살짝 돌려서 말할 걸 그랬나 봐요
손을 뻗으면 마음을 다 건네지 못한 혀들이 우르르 쏟아질 것만 같은 11월의 하늘은 사진으로만 오래 들여다보던 먼 나라의 소금호수 같아서 오늘은
으깨져 버린 향기에 손길 하나 닿지 않아 씁쓸한 모과나무 아래서 무심하게 밀어놓았던 안부라도 떠올려야 할 것 같은데요 바닥에 떨어진 순간 자기의 빛깔을 놓쳐버린 모과처럼 우리는 생기를 잃어가는 서로의 눈동자를 모르는 사이 밀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내 몸에서 출렁이는 이름을 가만히 만져보면 싱싱한 향기가 뭉클뭉클 올라와 속절없이 몸이 기울던 날도 있었는데요
뭉툭해진 명치끝을 가만가만 어루만지며, 멀어지지 않으려 꼭 껴안고 있던 이름을 그만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는 듯
이렇게 내일도 뒤돌아 걸으면서 조금씩 잊힌 얼굴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우리는
눈사람에 대한 예의/ 김밝은
백 년만에야 찾아왔다는 듯
꺼이꺼이 눈이 내렸어
지나간 시간을 돌돌 굴려
눈사람이 되고 싶었던 기억에 설렜지
시들어가는 나무에 꽃소식 내려앉았다며 부르던
더는 맞댈 수 없는 손이
멀어져 가던 소식이
두 팔 벌리며 서 있을까 기대했는데
사람들, 화풀이라도 해야겠다는 듯
사정없이 목을 치고 가고
온몸을 두들기고 간 바람에
입가 웃음만 붙잡은 채 나뒹굴고 있는 눈사람
산산조각이 나버린 풍경에
오늘은,
내가 사람이어서 울고 싶은 날이야
ㅡ 시집《새까만 울음을 문지르면 밝은이가 될까》미네르바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