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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침략 영상 고발장
-5.18은 북한의 침략이었다-
-광주 폭동현장 사진들 속 400여 얼굴들, 모두 평양에 있다!-
1. 선전포고 없이 광주로 침략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광주의 양민을 학살한 후 이를 한국군의 행위로 뒤집어씌운 북한의 범죄행위를 UN과 국제사회에 고발한다.
2. 1980년 광주에 왔다가 위장탈북 해 정치세력화한 서울의 트로이목마를 고발한다.
3. 북한의 모략 내용으로 왜곡한 한국의 5.18역사를 고발한다.
로고: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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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표지>
5.18재판은 중요한 사실 6개에 대해 ‘사실오인’을 범했다
재판은 “사실확인”과“사실에 대한 법률해석”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5.18재판은 사실자체들이 오해되었다. 이런 판결은 쓰레기다. 이 위대한 발견을 판결 20년 만에 밝힌다. 5.18에 대한 재판은 1980-81년과 1996-97년 두 번 했다. 전자의 법원은 우익판사들로 구성되었고, 후자의 법원은 좌익판사들로 구성되었다. 전자는 5.18을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음모 사건이었다고 판결했고, 후자는 5.18을 전두환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고 판결했다. 한 마디로 두 개의 재판 모두 다 정치재판 이념재판을 한 것이다.
전두환 및 김영삼 시대의 사법부는 각기 김대중 또는 전두환을 단죄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상황일지에 기록돼 있는 자료들이 ‘5.18은 북한특수군 600명이 주도한 침략행위였다’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었는데도 여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국의 사법부가 6개의 매우 중요한 사실에 대해 ‘사실오인’을 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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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말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소요사건은 1980년 5월 18일로부터 10일 동안 광주에서 발생한 5.18폭동이다. 광주5.18폭동은 그 후 17년 동안 공산주의자 김대중이 배후 조종하고 북한의 불순분자들이 끼어든 내란목적의 폭동인 것으로 공식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 추종자들이 여론을 장악하면서 1997년부터 지금까지 19년 동안 이 사건은 광주 시민들이 김대중의 지휘에 따라 일으킨 거룩한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공식화 돼왔다. 이 기간, 5.18은 법과 정의 위에 군림해왔고, 대한민국 위에 군림해왔다. 5.18세력 즉 위장한 공산주의자들이 곧 법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대위 시절에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44개월 동안 전투를 했고, 미해군대학원에 유학하여 경영학석사와 응용수학(시스템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령으로 예편하여 미해군대학원에서 교수로 봉직 한 후 귀국하여 반공대열의 최전선에 서서 애국운동을 하고 있다.
저자는 억지와 폭력을 무기 삼아 대한민국 위에 군림하는 5.18이, 10-20대의 개념 없고 천대받던 도시근로자들의 작품이 아니라 북한의 작품일 것이라는 직관(Conjecture)을 가지고 2002년부터 지금까지 13년 동안 연구했다. 검찰 및 재판 서류, 북한 자료 등 실로 방대한 자료를 획득하여 연구했고, 2015년 5월초부터 11개월 동안에는 광주의 폭동현장에서 촬영된 사진 속 인물들이 북한에서 출세한 권력실세라는 사실을 찾아냈다. 무려 500명 가까이 된다. 이 책에는 그들의 얼굴모습들과 당시 광주 상황을 나타내 주는 모습들이 정리돼 있고, 각 인물에 대한 광주의 얼굴과 평양의 얼굴이 비교돼 있다.
5.18은 북한이 1,000여명의 분야별 전문 엘리트들을 광주로 보내 일으킨 게릴라식 침략전쟁이었다. 광주시민들을 참혹한 모습으로 살해해놓고 이를 한국군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워 광주인들을 분노케 하고, 한국군이 환각제를 먹고 광주의 여인들을 희롱하고 악랄하게 살육하고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확산시켜 광주인들을 분노케 함으로써 광주로 하여금 적개심을 가지고 국가에 대적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역사는 북한의 끝없는 대남공작으로 인한 이념전쟁으로 정의될 수 있다. 5.18을 주도한 존재도 북한이고, 5.18에 대한 역사관을 민주화운동으로 왜곡해 놓고 이를 성역으로 호위해온 존재도 북한이었다. 일예로 소설가 황석영 이름으로 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은 법정에서나 언론에서 5.18의 바이블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그 책의 내용들은 북한 노동당이 발간한 책들을 조합하고 베낀 것들이다. '5.18은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관을 수호해온 사람들은 거의 다 공산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이 역사관에 의혹을 제기하는 모든 국민을 물리적으로 린치하고 감옥에 넣는 방법으로 탄압했다.
5.18은 한국현대사의 전부라 해도 될 만큼 큰 역사다. 한 국가가 분단돼 냉전을 치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쪽에 의해 이토록 감쪽같이 속아 역사를 왜곡당한 나라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런 나라가 바로 경제에서 상위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사실, 이러한 엄청난 증거들이 인터넷과 호외신문을 통해 전국에 많이 알려져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규명하라“는 아우성 소리를 내고 있는데도 국가가 오히려 표현을 방해하고, 대부분의 언론이 침묵해왔다는 사실, 이 모든 사실들을 대한민국 국민들에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는 국제사회에 고발하기 위해 이 화보 책을 낸다.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1,000여명으로 추산되는 침략군을 보내 게릴라 전쟁을 수행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모략하기 위해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 이러한 행위는 UN이 나서서 규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정치인들 중, 이 매머드 급 과제를 다룰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국제사회에 의해 이러한 사실이 증명되면 여기에 동조한 내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뒤 따라야 할 것이며, 남북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된 5.18역사도 바로 잡혀야 할 것이다.
5.18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선언문
선언자: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
우리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은 2002년부터 12년 동안 18만쪽에 달한다는 수사-재판기록 등을 면밀히 분석하여, 5.18이 거룩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적화시키기 위해 북한이 주도한 대규모 게릴라전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2015.5.5.부터 지금까지 만 12개월 동안의 첨단 영상분석을 통해, 광주에서 집단으로 찍힌 폭동주역의 얼굴들 477명이 모두 북한의 핵심권력층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아울러 500만야전군은 ‘전가의 보도’로 남용돼 온 5.18관련 1996-97년의 판결이 6개의 사실오인을 범한 불량품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여기에서 이를 증명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범한 이 6개의 사실오인으로 인해 북한이 저지른 전쟁범죄행위와 광주의 여적행위를 놓고, 어이없게도 거룩한 민주화운동이라고 판결했다. 이는 대한민국 사법부는 물론 대한민국 모두의 수치요 망신이다. 이로 인해 이제까지 발생해온 수많은 고통과 낭비 그리고 대한민국을 증오하게 만드는 반국가적 5.18교육이 하루 빨리 시정돼야 할 것이다.
5.18은 제2의 6.25사변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인식돼 있는 5.18 광주사태는 1980년 전라남도 광주시민들과 국가 사이에 발생했던 10일간의 무력충돌 사건이었다. 1980년 5월 18일 09:30분경, 250여명의 학생집단이 감히 400여 명의 공수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를 찾아가 가방 속에 숨겨간 돌멩이를 던져 7명의 공수부대원들에 부상을 입힌 순간부터 시작됐고, 5월 27일 새벽 05시 23분 주영복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한 순간에 종결됐다. 1980년 당시의 사람들에게 5.18광주사태는 국가를 상대로 하여 김대중 추종자들이 일으킨 ‘반국가폭동’인 것으로 인식됐고, 당시의 법관들도 그렇게 판결했다.
5.18에 대한 재판은 1980-81년과 1996-97년 두 번 했다. 1980-81년의 제판부들은 우익판사들로 구성되었고, 1996-97년의 재판부들은 좌익판사들로 구성되었다. 전자는 5.18을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음모 사건이었다고 판결했고, 후자는 5.18을 전두환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고 판결했다. 한 마디로 두 개의 재판 모두 다 정치재판 이념재판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 500만야전군이 고발할 대상은 1996-97년의 판결이다.
1996-97년의 사법부는 5.18재판에서 6개의 ‘사실오인’을 범함으로 인해 그의 국가에 치욕을 안겨주었고, 대한민국 운명에 결정적인 가해행위를 했다. 5.18은 1,200명의 북한 침략자들이 은밀하게 침투하여 벌인 게릴라 침략전쟁이었는데 한국사법부가 이를 거룩한 민주화운동으로 판결한 것이다. 한국 사법부가 6개의 ‘사실오인’을 범했다는 사실, 그래서 북한의 게릴라남침 역사를 거룩한 민주화역사로 잘 못 판단한 사실은 최근 500만야전군이 5.18사태에 대한 13년 동안의 연구를 종결하는 순간에 비로소 확실한 표현으로 정리됐다.
1945년 미국이 일본에 승전함으로써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이 그 후 지금까지 겪어온 역사는 북한의 끊임없는 대남 침략 및 소요-공작과 이에 대한 남한의 반작용의 역사였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침략이 1950년의 6.25침략이었고, 그 다음으로 큰 침략이 1980년 광주에서 주도한 5.18 게릴라전이었다.
5.18은 이제까지 군사독재를 청산시키고 문민정부에 의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는 의미에서 “5.18광주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국내와 국외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500만야전군이 최근 종합적으로 내린 결론은 북한이 600명의 특수군과 또 다른 600명 정도의 각 분야 전문 엘리트 등으로 구성된 공작집단이 광주로 침투하여 국가를 전복시키고 이를 남침의 기회로 활용하려 했던 게릴라 침략이었다. 아주 최근에는 남한에서 역대 장관을 지낸 사람들, 대통령 지망자들 중에서 순위를 다투는 사람들 중에서도 북한군과 한 팀이 되어 활동한 사람들도 발견되었고, 행정부에서 활동하고 공무원들 중에서도 여러 명 발견되어 충격을 더욱 강하게 주고 있다.
1996-97년 김영삼 시대의 사법부는 전두환을 처벌하기 위해 “당시 북한으로부터는 특이한 징후가 전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전두환이 최규하를 겁박하기 위해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을 과대 포장하여 5.17계엄확대 조치를 취했고 민주화의 상징인 김대중 등을 체포했다”며 전두환을 옭아맸다. 광주 폭동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600명의 학생시위대는 대한민국 헌법을 전두환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결집한 준-헌법기관이라고 판시했고,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빠른 기간에 확산됐었어야 했는데 전두환 등 신군부가 이를 조기에 진압한 것은 내란행위에 해당한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노골적인 이념재판이었던 것이다.
1981년에 이미 대법원 판결이 끝난 5.18사건을 1997년에 다시 재판한 이유는 재심 사유가 발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산세력이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5.18역사'를 뒤집기 위해 여론몰이로 제정한 '5.18특별법' 때문이었다. 1997년의 재판은 재심재판이 아니라 헌법을 초월하는 이 5.18특별법에 의한 정치재판이었던 것이다. 이 5.18특별법'은 헌법에서 규정한 일사부재리 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무시했다. 재심 사유가 없는 5.18사건을 좌익판사들이 다시 판결한 것도 있을 수 없는 사법쿠데타였지만, 재판내용은 그야말로 무법천지 그 자체였다 .
검찰이 작성한 팩트들은 1980년 것이나 1995년 것이나 변함이 없었다. 단지 1996-97년에 재판을 주도한 판사들의 해석이 상식과 논리를 뛰어 넘는 막무가내였다. 증거도 철저히 무시되었고, 헌법도 법률도 무시되었다. 오직 허위사실들로 가득 찬 여론조작에 의한 북한식 인민재판만 있었다. 1996년에 발행된 이 사건 제2심 판결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법률도 아니고 헌법도 아닌 '자연법'에 의한다. 자연법이란 국민인식법이다". 1996년에 시작된 5.18재판은 증거재판도 아니고 법률재판도 아닌 인민재판이었다는 뜻이다. 김영삼은 1995년에 시동을 건 제2의 5.18재판을 군사독재를 처단하기 위한 재판이기 때문에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라 명명했다. 이 재판과정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들이 아무리 팩트와 법률조항들로 어필해도 판사와 검사들은 “이 재판은 접근방식이 달라야 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그 접근방식이라는 게 무엇이냐”는 변호인들의 거듭된 질문에는 끝내 답변하지 않았다.
이로써 한국사회에는 좌익세력과 무산계급이 5.18역사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대한민국에 반역한 5.18폭동이 갑자기 민주화운동으로 탈바꿈된 것이다. 이로써 예전의 ‘내란세력’이 ‘헌법수호세력’이 됐고, ‘내란’을 진압한 ‘국가’는 ‘내란세력’이 됐다. 국가가 북한에 정복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이변이었다. 5.18폭동에서 사망한 폭도들이 묻힌 곳은 국립묘지가 되었고, 그 묘지를 가려면 길 한 가운데 묻어놓은 전두환의 동상을 지금도 밟고 다녀야 한다. 전두환은 지금도 살아있다.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5.18묘지 입구에 묻어놓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짓밟고 다니게 하는 것은 김정은 집단의 잔악성과는 어울려도 거룩하다는 민주화운동과는 어울릴 수 없다.
김일성을 추종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충신세력이 되었고, 반공세력이 역적세력으로 내몰렸다. 공산세력이 남한사회의 주인이 된 것이다. 남한이라는 국가가 내용상 북한체제로 체제전환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계 역사에 이렇게 황당하게 뒤집힌 역사는 아마 이것 말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재판 모두가 다 5.18을 북한이 주도한 침략사건이라는 사실은 발견하지 못했다.
한국사법부의 주홍글씨, 6개의“사실오인”
사회일반에 5.18이 사실과는 정 반대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5.18의 바이블이라는 황석영의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이 북한이 날조한 대남모략용 유언비어를 종합한 것이었는데도 이것이 지금까지 “5.18역사의 바이블”로 널리 읽혀왔다. 하지만 팩트들로 뒷받침되지 않은 이 내용들은 모두 북한의 대남모략용 책자들로부터 나온 것들이라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다른 하나는 1980년의 수사자료와 1995년의 수사자료를 음미하면, 광주사태는 북한특수군 만이 주도할 수 있었다는 결론을 금방 내릴 수 있었는데, 당시의 수사-재판 과정에 참여한 인물들이 분석의 초점을 오직 정치적 희생양을 찾는 데에만 집중한 관계로 이 중요한 사실에 대한 분석을 도외시했다.
그 결과 개개인 모두가 살인기계요 맥가이버 능력으로 훈련된 북한특수군 만이 이룩할 수 있는 기적적인 작전성과를 놓고 광주대학생 600명이 이룩한 성과인 것으로 사실오인을 하였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광주시민들 중 이 600명에 소속됐던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5.18은 북한의 공작세력이 와서 저지른 침략 및 살인 행위였는데 한국 사법부는 북한의 공작에 말려들어 이를 공수부대의 소행이라고 뒤집어 씌웠다. 이처럼 사실오인된 판결문은 소각 절차를 밟아야 마땅할 것이다. 아래에 6개의 오인된 사실들을 증명한다.
사실오인 #1) 세계최정상급 특수 맥가이버(MacGyver: 못할 것이 없는 기술과 능력의 소유자를 의미) 능력을 가진 대학생이 광주에 600명씩이나 있었다고 사실오인을 하였으며, 그들이 수행한 작전내용들이 세계 최정상급 특공대의 실적보다 더 높은 것들이었는데도 이를 광주대학생들이 5.17계엄에 공분하여 즉흥적으로 일으킨 민주화운동이라고 사실오인하였다.
증1의 92쪽에는 “시위대 300명이 전투서열이 높은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가 톨게이트를 5월 21일 08시에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알아가지고 몽둥이 화염병 등을 소지한 채 매복해 있다가 08시가 되자 통과하는 차량부대를 기습해 사단장 지프차를 포함해 14대의 지프차를 털어가지고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갔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감히 대학생들이 정규사단을 기습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다 같은 상식이다. 이 차량대열을 마주한 군납업체 사람들이 놀라서 신형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28대(증3의 376쪽)에 열쇠를 꽂아주었다. 증1의 93쪽에는 5월 21일 09시에는 또 다른 300명이 이 공장에 합류하여 도합 600명이 집결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증2의 53-64쪽에는 이 600명이 전라남도 17개 시-군에 꼭꼭 숨겨져 있는 44개 무기고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 12시부터 불과 4시간 만에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꼭꼭 숨은 38개 무기고를 부수고 5,403정의 총기를 털었다는 기록이 있다. 단 증2는 5월 21일, 각 시간대별로 털린 무기고 이름과 무기별 수량만 12개 쪽에 걸쳐 지루하게 나열돼 있었다. 500만야전군은 이 12개 쪽에 산만하게 나열만 되어 있는 시간대 별 기록을 통계처리 했다. 1) 무기고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분산돼 있었다는 사실, 2)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38개 무기고가 털렸다는 사실이 비로소 정보로 나타난 것이다. 3) 북한 책인 증4의 35-37쪽에는 38개 무기고 이외에 6개 무기고가 더 털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래서 44개 무기고가 4시간 만에 털렸고, 그 양이 총기인 경우만 해도 5,403정인 것으로 집계되었다(증3의 375쪽).
증1은 “여러 무기고가 털렸다”는 인식만 가질 수 있도록 증2의 12개 쪽에 나열된 기록들 중 극히 일부만 발췌하여 서술식으로 나열했기 때문에, 증1의 기록만을 보면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44개 무기고를 털어 총기의 경우 5,403정을 탈취했다”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생산해 낼 수 없었다. 증2의 안기부 보고서 역시 괄목할만한 정보를 생산해내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검찰과 사법부는 원천자료를 통계적으로 가공하지 않아 사실을 사실로 인지하지 못한 반면 500만야전군은 원천자료를 통계적으로 가공했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 인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법부의 사실오인인 것이다.
시위대는 광주공원과 학운동 등에서 총기사용 교육을 실시했다(증1의 101쪽). 폭도들은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등을 탈취해 도청 지하실에 폭탄으로 조립해놓았다. 폭도들은 그것에 불을 붙여 광주시를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했다(재판기록). 그 양이 2,100개였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발견됐다. 전라도 계엄군에는 폭탄조립-해체 기술자가 단 1명밖에 없었고, 그 1명인 배승일 문관은 5월 25일과 26일 양일간 도청으로 잠입해 목숨을 걸고 그 조립된 폭탄을 제거했다(증5).
당시는 자가용 시대가 아니라 400명에 가까운 운전수를 더구나 신형장갑차를 4대씩이나 몰 수 있는 운전수를 광주에서 즉흥적으로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였다. 학생시위대 600명은 광주의 부나비들을 선동해 4,000여명의 공수대원들을 몰살상태로 몰아넣었다.(증1의 103-105) 계엄군을 시외곽으로 몰아내고 21일 밤에 교도소를 5회나 공격했다(증1의 91쪽, 증3의 136-137쪽). 이 모든 작전들은 판결문에 기록된 것처럼 5월 18일 아침 즉흥적으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준비된 작전이었고, 세계 최고의 특공작전인 엔테베 작전보다 더 높은 고난도 작전이었다. 그런데 1996-97년의 재판부는 이 작전을 시민군이 수행한 가벼운 작전인 것으로 사실오인을 하였다.
사실오인 #2) “서슬 퍼런 계엄령이 선포되어 모든 운동권과 학생들이 다 꼭꼭 숨어 있을 때에, 광주에만은 만능의 맥가이버 능력을 가진 학생들이 600명씩이나 조직돼 있었다고 오인하였다.
증6은 2006년에 발간되었지만 여기에는 일부만 발췌한다. 여기에는 5.18의 두 영웅이자 운동권 주동자인 윤한봉과 정동년의 증언이 있다. 윤한봉은 역할보다 허명이 높은 자임을 읽을 수 있다. 정동년으로부터 200만원의 폭동자금을 받은 것으로 수사당국에 기록돼 있지만 그는 5.18 직전에 이리 저리 숨어 다니기에 바빴고, 1년 후에 미국으로 밀항했다. 김대중으로부터 500만원의 자금을 받았다는 정동년은 5월 17일 밤중에 체포되어 폭동에 참가하지 못했다.
증7에는 5.18최상의 주동자들인 정상용, 허규정, 박남선의 자술 증언록이 수록돼있다. 발췌한 내용들 중 줄친 부분들을 요약하면 도청은 5월 23일까지 '시민군본부'(주:북한군)에 의해 통제됐고, 그들은 5월 24일에야 비로소 도청에 들어갔으며, 서로가 서로를 도청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조직화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1980년 5월 18일 새벽부터 전국은 계엄령 확대선포와 폭넓은 예비검속으로 인해 전국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했다. 운동권 인물들일수록 숨을 곳 찾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이는 증6 및 7의 빌췌물들에 잘 묘사돼 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서울지역에 비해 시위가 활발하지 못했다. 광주의 학생운동권 지도자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 축산학과 학생회장인 윤한봉, 38세의 복학생 정동년, 5.18의 영웅이라는 윤상원 정도였다. 그런데 박관현과 윤한봉은 5월 17일 밤부터 도망을 다니며 광주사태에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정동년은 5월 17일 자정에 체포됐고, 윤상원은 5월 21일까지도 숨어 있다가(증7의 68쪽) 5월 24일 오전까지 도청을 배타적으로 장악했건 북한세력이 안개 같이 사라진 이후 어슬렁거리며 도청에 들어가 5월 25일과 26일,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을 했다.
이처럼 무시무시한 계엄령의 선포로 당국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받았던 모든 학생과 젊은이들은 모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광주에서만은 이렇게 고도로 훈련된 대학생들이 600명씩이나 뭉쳐서 존재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는 판검사들이 사실오인을 주도한 것이다. 이 600명 작전은 신출귀몰하다는 이스라엘 특공대의 엔테베 작전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고난도 작전에 속한다. 그런데 이 나라의 검찰과 판사들은 이러한 고난도 작전을 광주의 대학생 600명이 수행한 것이라고 쉽게 간주했다. 판-검사들이‘주의의무’를 등한시 한 것이다. 군사부분에 대해 군사전문가를 제치고 그들의 상식만을 가지고 가볍게 재판한 것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 검사들과 판사들은 북한의 침략작전을 놓고, 숭고한 광주시민의 민주화운동이라고 단정ho 버렸다. 대한민국 판사 검사들은 이 엄청난 저지레에 대해 수치를 느껴야 할 것이고, 국민에 사죄해야 할 것이며, 빠른 시일 내에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사실오인 #3) 5월 18일 오진 9시경, 가방에 돌을 넣어 감히 계엄군 집결지를 찾아가 7명의 공수대원에게 부상을 입히고, 공수부대원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아나 광주 도심 파출소들을 불태워 시민들을 끌어 모으고, 준비된 공작용 유언비어들을 살포한 250명의 날래고 대담한 학생들이 광주학생들이라고 오인하였다. (증1의 58쪽)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생들은 무시무시한 계엄령 선포로 모두 숨죽이고 숨어 지냈으며 2사람 이상이 몰려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광주에서만은 대학생 250여명이 감히 400여명으로 구성된 제7공수여단 제35공수대대 집결지인 전남대를 찾아가 가방 속에 숨겨간 돌멩이로 공격을 하여 7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공수부대원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아나 도심의 파출소들을 불태우거나 파괴하여 시민들을 끌어 모으고, 수많은 군중들에 준비해온 유언비어들을 살포하였다. 이런 고도의 백병전 능력과 자신감을 가진 대학생, 도심에 불을 질러 사람들을 끌어 모인 후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정교한 공작 능력을 가진 대학생들이 광주에 250명이 몰려다닌 모습들이 증1의 57-59쪽에 그대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도 판검사들은 이 250명을,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결집된 정의로운 시위대라 오인하였다.
사실오인# 4) 감히 정규사단의 이동계획을 탐지하여, 매복하고 있다가 몽둥이를 들고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 14대의 지프차를 빼앗아 몰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직행한 300명의 날래고 조직화된 시위대가 광주학생들인 것으로 오인하였다.(증1의 92-93쪽)
광주 대학생들이 극비의 군부대 이동계획을 수집하고, 매복지점을 선택하여 매복을 하고, 몽둥이 등을 가지고 정규군인들을 혼비백산케 만들고, 군 지휘차량을 대량으로 빼앗아 곧장 운전해서 군용 차량을 생산하는 방위사업 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직행하고, 거기에서 또 다른 300명의 집단과 합세하여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무기고로 직행하다가 광주 부나비들을 태운 후 44개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기를 털고 광주시민들에게 무기 사용법을 교육하는 맥가이버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라고 판결한 것은 분명한 사실오인이다.
사실오인 #5) 재판부는 위 600명을 광주학생 시위대인 것으로 오인하고 시위대에 대해서는 헌법수호세력으로 오인했고, 이를 진압한 신군부를 국가반역자들로 사실오인 하였다.
5.18사태가 종료되었을 때 주동자들이라고 잡혀 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처벌을 받은 사람들이 328명이다(증3의 354-367). 증3에는 처벌자 명단이 있고, 나이와 직업이 기록돼 있다. 넝마주이, 구두닦이, 껌팔이, 목공, 석공, 자개공, 구두공, 식당종업원 등 59개 직종에 걸쳐 있는 10-20대의 최하층 계급들이다. 증6,7에서 여러 증언자들이 증언했듯이 “개념 없는 부나비”들이었다.
이들 328명 중에 5월 21일의 빛나는 작전을 기획하고 감당할 자가 단 한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실지로 5.18유공자들 중 5월 21일 작전을 주도했다는 사람은 단 1명도 없다.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며 엄청난 포상금과 연금과 수많은 공짜들을 제공해주는 이 마당에 5월 21일 참가자들은 어째서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주동자라고 잡힌 자들 중 대학생은 5월 25-27일 도청에서 자기들끼리 갑론을박 하던 자 두 사람뿐이었다.
광주시청과 5.18단체들은 2015년 10월부터 2016년 3월 31일까지 지하철, 광주시청로비, 번화가, 각 지역의 노인시설, 복지시설 등에 500만야전군이 분석한 북한군 영상들을 크게 전시해 놓고 “5.18 당시 사진 속 광주시민 찾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500만야전군이 북한군으로 지목한 이 얼굴이 바로 나요” 하고 나타나 달라고 6개월 동안 호소했지만(증8) 그날까지 500만야전군이 발견한 총 433명의 북한얼굴들 중 단 1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로 기록돼야 할 것이다. 광주시민들 스스로 5.18의 주역 역할을 하다가 촬영된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이 모두 다 북한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사실오인 #6)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 116명 중 70%-7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무기고로부터 탈취한 카빈총 등에 의해 사망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계엄군이 쏜 것으로 사실 오인을 하였습니다. 당시 계엄군은 M16만 보유하고 있었다. (증2의 96-103쪽-70%, 증3의 131쪽-75%)
광주사람들조차 이 600명을 ‘시민군’이라 부르기도 했고 ‘연고대생 600명’이라 부르기도 했다.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을 쏘았다는 것은 광주의 치욕이다. 북한군이 광주시민을 쏘아놓고, 또는 황해도 신천박물관이 미군을 증오하도록 모략한 방법에 따라 몽둥이, 톱 등의 흉기로 처참하게 살해해놓고 이를 계엄군의 소행이라고 모략함으로써,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계엄군에 대한 적개심을 갖도록 했고, 여기에 더하여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느니, 여성들을 농락한 후 유방을 도려냈다느니 하는 온갖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이런 여러 가지 흑색 공작들은 전쟁 매니어들의 전문공작에 속하는 것이지 즉흥적으로 모인 일반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성격이 못된다.
결 론
모든 재판은 “사실확인”과“사실에 대한 법률해석”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1997년의 5.18재판은 사실 자체들이 오해되었다. 이런 판결은 쓰레기다. 이 위대한 발견을 대법원 판결 20년 만에 밝힌다.
5.18에 대한 재판은 1980-81년과 1996-97년 두 번 했다. 전자의 법원은 우익판사들로 구성되었고, 후자의 법원은 좌익판사들로 구성되었다. 전자는 5.18을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음모 사건이었다고 판결했고, 후자는 5.18을 전두환이 일으킨 내란사건이라고 판결했다. 한 마디로 두 개의 재판 모두 다 정치재판 이념재판을 한 것이다.
전두환 및 김영삼 시대의 사법부는 각기 김대중 또는 전두환을 단죄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상황일지에 기록돼 있는 자료들이 ‘5.18은 북한특수군 600명이 주도한 침략행위였다’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었는데도 여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국의 사법부가 6개의 매우 중요한 사실에 대해 ‘사실오인’을 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어처구니없는 사실오인 판결로 인해 ‘북한의 침략행위와 양민학살 행위, 국가전복 공작 행위가 신성한 민주화운동으로 정의됐고, 북한침략집단을 준-헌법기관으로, 이를 진압한 국군을 내란집단으로 정의됐다. 국가정체성이 뒤집혔고, 역사가 뒤집혔다. 이로부터 파생한 엄청난 혼란이 속히 교정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의를 수호하고 지구의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 바쳐진 이 하나의 노력이 승리로 기록될 수 있도록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물론 모든 지구상의 시민들이 적극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증거자료
증1: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1995/7/18.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증2.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1985.5. 국가안전기획부
증3. “계엄사(戒嚴史)-1026사태와 국난극복-” 1982.3.15. 육군본부
증4. “광주의 분노” 1985.5.28. 조선로동당출판사
증5. 배승일씨 광주진압유공 오명벗고 명예회복
증6. “5.18의 기억과 역사2” 2006.2. 5.18기념재단
증7. “5.18항쟁 증언자료집 I, 2002.12. 전남대학교 출판부
증8. 뉴스1 보도
2016.4.2.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의장 지만원)
광주에서 촬영된 폭동현장의 얼굴들은 모두 북한의 고관들
저자는 2002년부터 12년 동안 5.18관련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18만 페이지, 북한자료, 통일부자료 등을 연구하여 3,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8권의 다큐멘터리 역사책을 썼고, 2014년 10월에 마지막으로 “5.18분석 최종보고서”라는 단행본을 통해 결론을 내렸다. “5.18은 북한의 김일성이 600명의 병력을 보내 국가를 전복시키고 적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일으킨 게릴라 침략이었고, 여기에 김대중을 추종하는 광주의 공산세력이 동조했던 여적사건이었다. 광주에는 5.18시위를 지휘한 사람 전혀 없고, 조직된 시위대도 없었다.”
무려 12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저자는 단호하고도 모호하지 않은 문장으로 이 결론을 냈다. 이 결론을 가장 축복해 준 존재는 하늘이었다. 2015년 5월 5일부터 위 결론을 사실로 입증하는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의 단체에는 영상분석팀과 전략분석팀이 있다. 이들은 1980년 광주에서 촬영된 폭도들의 얼굴이 북한정권의 핵심 얼굴들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 어찌 기적이 아니겠는가? 모 언론사의 영상데이터베이스로부터는 1980년 광주에서 촬영된 사진들을 획득하고, 통일부 데이터베이스와 보도매체들로부터는 북한의 주요인물정보를 획득하여 이들을 대조 분석한 결과였다. 시력을 소진시키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지금까지 무려 477명의 북한 전쟁범죄자들의 얼굴을 특정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오직 애국을 위한 신념과 극기와 감동적인 열정이 없으면 이룩할 수 없는 땀의 기적이었다. 광주에서 촬영된 한 장의 사진에는 수십 명의 얼굴들이 있다. 그리고 최근 김정은과 함께 촬영된 한 장의 사진에는 42명의 북한 장군들의 얼굴이 있다. 이 두 개의 사진들 속에는 27명의 얼굴이 중복돼 있다. 광주사진 속 27명이 평양의 사진 속에 모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이는 확률의 세계가 아니라 확실성의 세계이며, 이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북한군 27명이 광주에 와서 작전을 했다는 사실을 웅변해 준다.
반면 1980년의 광주에서 촬영된 얼굴들 중 북한의 얼굴로 지목된 477명의 얼굴들 중, “저 얼굴이 바로 나요” 하고 나타나는 사람은 없다. 한국에서 가장 큰 방송국 3개사가 1999년부터 공개적으로 나서서 1980년 광주에서 촬영된 '5.18의 주역'으로 알려진 4명의 얼굴들과 닮은 사람들을 애타게 찾았지만 그 후 18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네 주역들의 얼굴은 최근 저자의 팀이 평양에서 찾아냈다. 5.18에 북한군이 관련돼 있지 않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광주의 5.18단체들, 광주시장 그리고 스스로 5.18주역들이라며 1990년 당시 2-3억원의 보상금을 탄 후 지금까지 월 수백만 원씩의 연금을 수령하고, 병원 교통 등 수많은 공짜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이 2014년 10월 1일부터 2015년 3월 31일까지 광주시청 로비, 지하철 공간, 번화가, 노인시설 등에 저자의 팀이 인터넷에 공개한 광주사진들 속의 북한얼굴들을 전시해놓고 닮은 얼굴을 애타게 찾았지만 끝까지 나서는 사람이 없다.
“우리가 모두 민주화 주역”이라며 국가로부터 온갖 금전적 복지적 혜택을 누려왔던 5,700명의 5.18유공자들 중 단 한 사람도 사진에 나타난 5.18의 주역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광주사회에 먼저 알려진 것이다. 대부분이 가짜로 속여서 5.18유공자가 된 것이다. 이들 5,700명의 5.18유공자가 각기 무슨 공적을 세웠기에 유공자가 되었는지를 증명해줄 수 있는 ‘유공자 공적서’들은 정보공개 요청을 해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북한군 600명의 지휘자는 3성장군 리을설, 총체적 대남공작 지휘자는 김중린
이 영상 분석에 의해 북한특수군 600명은 당시의 인민군 상장 리을설(1921)이 지휘한 것으로 발견되었다. 영상분석 결과 이와는 별도의 대규모 행정 엘리트, 예술인, 체육인, 소년단, 유아로 구성된 정치공작팀이 활동했던 사실도 발견되었다. 후자의 팀은 대남모략 공작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대한민국을 접수하기 위해 필요한 엘리트들이었다. 한국을 살인극의 나라로 모략-선전하기 위해 북한은 모략용 무대를 끄며놓고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를 고용하여 촬영했다. 광주의 전남 도청 일대에 북한사람들로만 남녀노소를 골고루 섞어서 집합시켜놓고, 마치 그들이 광주사람들인 것처럼 위장하여 촬영을 한 것이다. 이 사진들이 이 책에 집중 분석됐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5.18광주작전은 군사작전, 모략작전, 국가접수작전으로 구성되었다. 이 통합작전은 북한판 CIA국장인 김중린(1923)이 총 지휘한 것으로 분석됐다.
5.18 사진들을 촬영해 국제사회에 전파한 독일인 기자의 정체
“푸른 눈의 목격자"로 알려진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는 독일 출신으로 당시의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광주의 폭도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취재를 했다. 독일인 힌츠페터는 일본특파원이었다. 그는 1980년 5월 20일 광주로 잠입하였다가 21일에 광주를 빠져나가 일본에 가서 취재자료를 독일에 송고했다.
그는 5월 23일 광주에 소재한 전남도청으로 다시 왔다. 북한 특수군의 호위를 받으며 계엄군이 없는 샛길을 따라, 통역자 김완수(훗날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대표)와 태권도 7단인 리용선(현 국제태권도협회 회장) 등의 호위를 받으면서 차를 타고 유유히 샛길을 통해 전남도청으로 직행했다. 도착하자마자 미리 준비돼있던 북한의 연출 장면들을 촬영했고, 이 사진자료들은 전 세계에 ‘한국군부가 저지른 살인 만행’이라는 내용으로 방송됐다. 힌츠페터가 샛길을 따라 전남도청으로 호위되는 과정을 촬영한 동영상이 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2015년 10월 10일 장대하게 치러진 북한 노동당창건 제70주년 기념행사장 앞좌석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푸른 눈의 목격자는 북한이 고용한 공작원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세계인들은 힌츠페터가 마련한 보도내용을 북한이 연출한 모략공작이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
위장탈북자들로 구성된 트로이목마, 그들도 광주에 왔었다
저자측의 전략팀과 영상분석팀은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477명의 광수들 중 50명은 현재 서울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탈북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현재 대한민국 최고 랭킹의 유명인들이 되어 있고, 사회 심층부에 뿌리를 내리고 정치적 파워를 행사하고 있다. 한 개의 사진에 탈북자들을 빼닮은 사람이 50여 명 씩이나 들어있다는 사실은 확률의 결과가 아니라 확실한 팩트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이들 50명은 '서울광수' 또는 '위장광수'로 명명하고 있다.
이들이 위장간첩으로 의심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들이 직접 광주에 왔으면서도 이 사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5.18에 북한이 연관돼 있다는 근본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이 그들의 영상을 공개한 저자에 대해 "정신병자다", "미국대사처럼 칼침을 맞을 것이다" "납치하여 가두겠다"는 등 북한식의 험한 표현으로 협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보를 제작한 목적
이 화보의 내용은 2015년 5월 5일부터 인터넷에 공개됐고, 세 차례에 걸친 8쪽 분량의 호외신문과 각종 인쇄물을 통해 대한민국 곳곳에 전달됐다. 한국사회에는 입소문이라는 표현이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소문이 무서운 효과를 낸다는 뜻이다. 이 효과로 인해 아마도 국민의 60% 이상이 5.18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진실을 알게 된 많은 국민들은 그동안 속아 온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에 침묵하는 정부와 언론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한 애국단체가 공산주의로부터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 정도의 결과를 내놓았으면 당연히 국가가 나서서 규명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정부와 언론은 어째서 이토록 무관심하고 냉담할 수 있느냐?"
당연히 정부가 나서야 할 엄중한 국가적 이슈이건만, 매우 기이하게도 오히려 현 정부는 이러한 결과가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는 것을 공권력으로 저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매우 이상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화보집은 언론들의 냉담한 태도와 국가의 방해 속에서 수많은 애국국민들의 격려와 성금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세 가지 목적을 위해 무료로 배포된다.
첫째, 1980년 5월, 북한은 살인기계요 맥가이버로 특별히 훈련된 600명의 특수군과 또 다른 600명 규모의 전문 엘리트 및 꿈나무 공작원들을 보내 대한민국을 전복한 후, 남침으로 연결시킬 목적을 가지고, 선전포고 없이 한국영토에 비밀 침투하여 국가전복 활동을 수행했고, 수많은 광주시민들을 잔인한 모습으로 살해해놓고 이를 한국군의 만행으로 뒤집어씌웠다. 북한의 이러한 침략행위 양민학살 행위를 국제사회에 고발하고자 한다.
둘째, 1980년 북한이 광주에 데려왔던 북한의 10대 소년들이 주로 김대중 정권 시절에 탈북하여 지금은 수많은 방송국에 고정출연하여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상당한 규모의 팬-그룹을 키우면서 통일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스스로를 가장 훌륭한 애국세력이라고 자가선전하고 있다. 매우 위험한 이 트로이목마의 존재를 고발하고자 한다.
셋째,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5.18역사가 온갖 허위사실들로 포장되어 국가정체성이 북한에 있는 것으로 확산 교육되고 있다. 이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과 국민들은 대한민국을 증오한다. 이 위험한 현실을 고발한다.
세계에 유례가 없을 이 영상고발장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물론 모든 세계인들의 관심을 초대한다. 북한의 이 잔인무도한 악행과 세계를 속이는 허위선전 행위는, 세계평화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UN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역량들이 일치단결하여 응징해야 할 인류 공동의 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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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라는 표현에 대하여
1980년 5월, 북한은 광주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들을 북한주민들에 반복해서 중계방송 했다. 당시 북한은 광주에 촬영시스템을 이미 마련해 놓고 있었다. “야~ 저거 광수다 광수~” 장갑차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광주시를 질주하는 모습을 본 북한병사들이 내무반에서 손뼉을 치면서 이렇게 소리를 쳤다. 2009년, 탈북자들로부터 이런 증언들이 공개되자 5.18의 진실을 탐구하려는 사회일각에서는 광주폭동에 참가한 북한사람들을 ‘광수’라 부르기 시작했다.
북한특수군 600명은 두 개의 그룹으로 편성되었다. 하나는 일선에 투입되어 파괴와 살인을 담당한 '전투조'였고, 다른 하나는 로열패밀리와 엘리트들로 구성된 정치공작 지휘부를 호위하는 '경호조'로 나뉘었다. 계엄군을 시외곽으로 추방시키는 데 성공한 '전투조'는 5월 21일 밤 광주교도소를 6차례씩이나 무모하게 공격하다 대량살상 사태를 맞이했다. 광주교도소에는 좌익수 180명을 포함해 2,700여명의 수용자들이 있었다. 북한은 리을설에게 그 수용자들을 해방시켜 폭동의 모멘텀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으로부터 발송되는 이런 지시는 당시 계엄군에 접수됐고, 이에 따라 계엄군은 5월 21일 밤의 공격에 대비해 교도소 주위에 호를 파고 기다렸다.
2014년 5월 13일부터 많은 매체들이 광주로부터 200km 거리에 있는 청주시 흥덕지구 야산에 1m 깊이로 질서 있게 대오를 갖추어 가매장된 단체유골 430구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서 사용된 시체포장 방법은1980년 5월의 광주에서만 일시적으로 존재했을 뿐, 대한민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법이었다. 칠성판’이라 불리는 규격화된 나무판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두꺼운 비닐로 둘둘 말은 후 그 위에 일련번호가 쓰인 시체들이었다. 이 430구의 유골에 대해서는 그 후 보도가 안 되었고, 흥덕경찰서와 청주시청은 화장을 했다고 하지만 여러 경로로 알아본 결과 화장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정부는 이에 대해서도 냉담했다.
한 기자가 쓴 5.18 현장 수기에는 1980년 5월 24일 오전, 도청을 최후로 지키는 제1,2,3호 광수가 철모에 하얀 찔레꽃을 동여매고 도청에서 철수하는 북한 침략 집단을 마지막까지 엄호하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5월 24일 오전에 찍혔다는 이 사진들에서는 관을 부여잡고 울던 북한의 얼굴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북한군은 5월 24일 오전에 모두 도청에서 사라진 것이다. 도청에 있던 수많은 관들 중 찔레꽃이 얹혀 있는 관들이 눈에 띈다. 이 찔레꽃 관들이 바로 북한군의 관들인 것이다. 그 기자는 5월 22일, 광주 외곽에서 찔레꽃으로 장식된 두 개의 관이 어두운 얼굴을 한 낯선 사람들에 의해 유가족의 동반도 없이 야산으로 급히 옮겨지는 관경을 목격했다. 청주에 있던 430구의 시체 말고도 광주에 급히 묻힌 광수들이 더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군인광수 중에서 우리가 현재 영상분석을 통해 얼굴을 확인한 군인광수는 총 147명, 그중 여성이 4명이다. 군인광수는 평양에 가서 출세들을 했다. 인민군원수 1명, 차수 9명, 대장 27명, 상장 30명, 그 이하가 55명이다. 비-군인 광수는 286명, 이중 로열패밀리 7명, 여성 63명, 예술인 30명, 위장탈북자 50명 등이 포함돼 있다. 관직으로 출세한 비-군인 광수들의 출세현황을 보면, 대남사업총책(통전부장) 5, 총리 4, 부총리 5, 국회의장 1, 장관 8, 대사 8명을 포함해 관 및 사회 각계 단체들의 수장들이다. 김중린, 임동욱, 김양건, 연형묵, 김용순, 김영길, 박봉주 등이 남한 사회에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들이다. 북한 권력의 핵심들 대부분이 광수였다.
위장광수의 효시는 신중철, 그는 1980년 광주에 왔다가 3년만인 1983년에 인민군 대위계급을 달고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자로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정보사령부에서 대령까지 승진한 다음 김대중 시절인 2001년에 엄청난 정보를 가지고 북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은 김희성이다. 광주사진들에는 두건을 쓴 남자가 어린 학생을 늘 끼고 있는 모습들이 들어있다. 두건 쓴 남자는 훗날 북한 내각총리(김영일)가 됐고, 교복 입은 어린 남학생은 1997년 5월 22일 MBC가 보도한 두 가족이 동시에 귀순했다는 기자회견 사진에서 발견되었다. 어머니 가족과 이모 가족이 동시에 귀순하였다는데 그 누가 여기에 간첩이 끼어 있을 줄 짐작이나 했겠는가?
광수를 찾기 시작한 것은 2015년 5월 5일부터였다. 가장 먼저 발견된 광수는 광주에서 찍힌 3인 1개조의 전투팀원들이다. 2010년 평양 노동자회관에서 ‘5.18기념 30돌 기념’ 행사가 열렸다. 그 행사장의 로열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세 사람이 바로 광수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사진은 5.18 광주에 북한군이 왔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참으로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실이 인터넷에 떠오른 순간 많은 국민들이 환호했다.
경악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인민군상장 리을설이 여자 복장을 하고 전투조를 지휘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많은 국민들이 경악했다. 황장엽과 김덕홍도 광수로 판명됐다. 이 사실이 발견됐을 때 많은 국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남한사회에 주체사상을 창조한 학자로만 알려져 있던 노쇠한 모습의 황장엽, 알고 보니 그는 1980년 광주에 와서 광주시민을 살인했던 반탐조 조장이었다. 그가 지휘하는 반탐조가 남한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젊은이들을 도청으로 끌고 가 고문하다가 죽인 사실도 사진에서 발견됐다.
드디어 북한의 의도를 판단할 수 있는 전체 그림을 찾아냈다. 북한이 광주에 파견한 존재는 단순한 특수군인들뿐만 아니라 폭넓은 엘리트들과 로열패밀리로 구성된 대한민국 접수사령부였다. 접수사령부의 총책은 김중린, 북한판 CIA의 현역 장수가 광주에 내려왔던 것이다. 로열패밀리로는 김정일의 첫 부인 홍일천, 처형 성혜랑과 그 아들 이한영, 김일성의 여동생 김정숙, 장성택과 김경희 그리고 3살 난 딸 장금송 등 7명이었다. 사진들에 나타난 독특한 현상이 있다. 광주에서 무리를 지은 상태에서 촬영된 얼굴들이 유엔, 평양, 서울에서도 그 무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드디어 광주사진 한 장에 들어 있는 27명의 얼굴들이 최근 김정은과 함께 촬영된 한 장의 사진 속에 다 들어 있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이는 이들이 북한침략군임을 입증하는 명확한 증거다.
집단 속 광수 얼굴들의 의미
광주사진들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했다.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집단을 형성한 상태에서 찍힌 집단사진들이고, 다른 하나는 1-2명씩 찍힌 개별사진들이다.
집단사진이 개별사진들 보다 더 중요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북한에서 파견된 인력이 광주에서 무슨 작전을 했는지를 집단사진들에서 찾을 수 있다.
둘째, 광주에서 집단을 이룬 얼굴들이 평양 등에서도 한 집단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수학적 확실성을 확보해 준다. 한 장에 찍힌 광주에서의 한 얼굴과 북한의 한 얼굴이 일치한다는 것은 아무리 정확해도 확률 세계에 속한다. 하지만 한 장에 찍힌 수십 명의 얼굴이 평양에 있는 수십 명의 얼굴과 일치한다는 것은 확률세계가 아니라 확실성 세계에 속한다.
셋째, 같은 조에 소속돼 있지만 얼굴이 뚜렷이 인식되지 않은 사람들이 200여 명 정도 된다는 것을 획인 할 수 있다. 따라서 광주에 왔던 북한 인력의 총수는 총 1,200명 규모인 것으로 추산된다.
각 침투조의 임무
전투조: 전투조는 600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 중 450명 정도는 1980년 5월 21일 밤, 광주교도소를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몰살당한 것으로 판단되고, 이들 중 현재 군인광수로 발굴된 수는 188명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인민군 원수, 차수를 포함해 북한군의 최고직위를 차지하는 등 고위 장성들이 되었고, 일부는 예편하여 권력의 핵심들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극히 일부는 남북회담에 참가하는 영관장교들이다.
공작조: 비군인 광수로 발굴된 인원이 289명이다. 이들은 로열패밀리, 내각행정가, 외교관, 예술가, 12-3세의 어린이 집단들이다. 시체의 관을 독점하여 마치 자기들이 광주의 유족들인 것처럼 위장을 하고, 엉엉 울기도 하는 쇼를 연출하는 그룹이 있다. 광주의 남녀노소가 다 모인 것처럼 위장했다. 도청 밖에서 사망자 명단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룹들이 있고, 관을 바라보는 그룹들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양민을 학살하는 악한 존재라는 것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한 사진들인 것이다.
예술조: 예술조로 남파된 북한사람들은 화가, 조각가, 미술가, 영화제작가, 시나리오작가 등 다양하며 발굴된 예술가는 30명이다. 이들은 북으로 돌아가 광주작전의 위업을 선전하거나 대남 모략작품을 만들기 위해 남파되었을 것이다. 이들 28명 역시 공작조로 활동했다.
어린이조: 이들은 10세 전후의 아이들로 전남도청 밖에서 남녀노소의 배합집단을 구성하는데 동원됐다. 우리가 발굴했다고 공개한 인원은 50명, 또 다른 10명은 발굴은 했지만 전략상 발표를 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이들을 장차 한국에 보내 트로이목마를 구성할 꽃나무로 키우려고 광주에 데려온 것으로 판단한다. 그들의 공작이 장기적 플랜을 가지고 수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주로 김대중 시대에 석연치 않은 동기들로 한국에 귀순자하여,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다. 특히 이들 대부분은 남한의 모든 TV 방송국 등에 인기인으로 출연하여 인기 높은 유명인이 되어 있고, 청와대, 국정원 등 국가기관들과 대형교회, 관-민 안보단체 등에 폭넓은 인맥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 단체는 이들을 트로이목마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 원정대의 광주침략 작전
작전 목적
게릴라전에 의한 남침 돌파구를 마련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에서 광주시민들을 많이 살해해놓고 이를 한국군의 소행으로 모략하고 이에 더해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광주시민들과 계엄군을 서로 싸우게 만들어 놓고, 폭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후 국제 여론을 한국에 매우 불리하게 악화시켜 남침의 명분을 마련한 후 해주에 대기시킨 10만 군과 연결시켜 남침의 승기를 잡으려 한 것으로 판단된다.
침투 과정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자 김일성은 남한에서 암약하는 간첩들에 광주를 거점으로 하여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키고, 이를 명분으로 하여 그의 숙원인 남침을 감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위해 그는 박정희 시해 직후인 1979년 11월부터 10-30명 단위의 소부대를 잠수함, 어선을 가장한 쾌속정, 산맥통로, 땅굴 등을 통해 침투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침투조들은 남한에서 암약하는 고정간첩들이 마련한 수많은 아지트에 은거하다가 1980년 5월 이전에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 머무르면서 작전지역의 지형을 답사하여 작전을 구상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한국의 동쪽에는 북한으로부터 시작해서 휴전선을 통과하여 경상북도에 이르는 험준한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흐르고, 이 산맥은 경상북도에서 7시 방향으로 꺾여 전라남도와 광주 지역으로 연결돼 있다. 이 산맥통로는 1945년 이후 1953년 휴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공비’ 즉 빨치산들의 활동무대요 은거지가 되었고, 이후 남한에서 암약하는 수많은 간첩들의 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이러한 판단은 군사작전 개념과도 일치하고 탈북자들이 쓴 5.18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2009, 460쪽)에도 일치한다. 실제 광주에서 찍힌 사진들 중에는 손성모라는 고정간첩이 여러 장면에 등장해 있다. 그는 1981년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999년까지 수감되어 있다가, 김대중에 의해 특별 석방되었고 이어서 2000년 김대중에 의해 북송되었다.
손성모에 대한 재판 기록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피고인 손성모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11일 전인 5월 7일부터 광주 증심사에서 승려로 신분을 위장하고 사찰의 위치 및 정황, 주지들 및 승려들의 신원, 경찰의 검문 사항, 광주사태와 관련한 민심동향 등을 지득하여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하였다”(서울고등법원, 1988.7.20. 선고 88노1367 판결, 대법원 1988.10.25. 선고 88도1568 판결).
손성모는 전라도에 돌출한 반도지역인 부안군 출신으로 김일성 종합대학을 나온 고정간첩이었다. 그는 광주폭동 직전, 광주 외곽의 ‘증심사’라는 사찰에 은거하면서 북한군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길안내를 하는 등 광주작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정체가 재판과정을 통해 드러났고, 수많은 현장사진들이 그가 행한 활동들을 증거 했는데도 당시의 정보당국은 5.18광주에 북한군이 대규모로 왔었다는 가정(conjecture) 자체를 하지 않았다.
광주에 왔던 북한 인력은 1,200명 규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속에는 남녀노소, 로열패밀리, 현직에 있던 북한판 CIA국장도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최상류층 인물들이 대거 광주에 왔다면 전라남도 해안은 거의 무방비로 뚫려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의 서해안은 북한의 안방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리고 유독 전라도 지역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매우 많아 간첩들이나 북한군이 활약하기에는 최적의 공간이 되어왔다.
작전 과정
1980년 5월 17일 자정, 김대중과 함께 내란을 음모했던 24명이 전격 체포됐다. 김대중의 내란음모를 폭동현장에서 실헹하기로 돼 있는 광주시민들도 체포됐다. 40일 이상 전국의 학생시위를 주도했던 주모자들도 전격 체포됐다. 1980.5.17. 국무회의는 기존의 계엄령보다 매우 강화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업그레이드 된 계엄령에 따라 5월 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이 배치됐다.
대부분의 공수부대들은 서울의 주요 대학들에 진주했고, 광주는 위험지역이 아닌 곳으로 분류돼 전북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제7공수여단 소속의 2개 대대(800명)만 뽑아 전남대와 조선대에 각각 1개 대대씩 주둔시켰다. 공수부대는 총을 등 뒤에 걸고 실탄은 일체 지급도지 않은 상태에서 폭도들과 육박전을 치렀다.
5월 18일(일) 오전 9시경, 북한특수부대 250-300명이 학생으로 위장해 전남대에 주둔중인 제33대대 공수부대원들(400명)에 돌멩이를 던져 7명이 부상을 입고 얼굴 등에 피를 흘렸다. 해방 직후부터의 대한민국 역사는 끝없이 전개되는 북한의 대남공작과 이에 대한 진압작전으로 구성돼 있다. 이 모든 역사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언제나 경찰과 군을 먼저 공격했고, 이에 대한 반작용이 발생하면 이를 유언비어로 만들어 무고한 국민들이 파쇼정부에 의해 공격당했다고 선전했다.
5.18 폭동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격은 광주 대학생으로 위장한 250-300명의 북한군이 먼저 했는데, 지금까지 한국에는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무기고를 털어 항전하였다고 거꾸로 선전해왔다, 그러나 모든 팩트들은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검찰부가 14개월 동안 조사해서 발표한 1995년의 수사보고서(216쪽)에 들어 있다. 하지만 광주사람들과 한국 내의 공산주의자들은 그 보고서까지도 부정하고, 북한당국이 지어낸 유언비어들만 사실이라고 선동하고 있다. 거짓말도 100번 하면 참말이 된다는 레닌의 가르침이 현실화되고 있는 곳이 바로 광주와 전라남도다.
공수부대 요원들에 돌멩이 세례를 가한 250여 명의 북한군은 번화가로 나가 파출소를 보는 대로 불태우고 파괴했다. 파출소에 불을 태우는 목적은 1차적으로 광주의 천대받는 도시빈민들, 껌팔이, 구두닦이, 양아치, 구두공, 목공, 석공 등 평소 경찰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은 10-20대들의 마음을 사서 그들을 부나비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모여든 광주 시민들을 향해 북한군은 수많은 유언비어들을 뿌렸다. 환각제를 먹은 공수부대가 무고한 광주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때린다,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편성한 공수부대가 전라도 주민 70%를 죽여도 좋다는 전두환 명령을 받고 남자고 여자고 마구 살해하고 있다, 여성을 발가벗기고 유방을 도려내고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는 등의 유언비어들이었다. 이에 격노한 광주시민들이 광주의 번화가로 몰려들어 위장한 대학생들 즉 북한특수군에 합세했다.
오후 5시부터 공수부대들은 3-4명씩 주요 길목에 배치하여 폭도들을 향해 순진하게도 해산하라고 독려했지만 북한군은 그들을 면전에서 그들을 조롱하고 공격했다. 이로부터 양측은 감정차원에서 육박전을 벌였다. 북한군에 합세한 20대들도 많이 맞았지만 공수부대원들도 많이 맞았다. 지쳐버린 공수부대가 주둔지로 복귀하면서 이날의 충돌은 마감됐다.
5월 19-20일 양일간은 공수부대가 중과부적으로 매타작을 당하고 농락당하는 시간으로 일관했다. 19일, 오전까지 공수부대는 3-4명 단위로 골목골목에 흩어져 있다가 매타작만 당하자 대대 단위로 집결했다. 발 빠른 북한군은 즉시 대형 버스와 트럭을 지그재그 궤적으로 몰아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케 했다. 여기에 동원된 소모품들은 모두 광주사람들이었다. 5월 20일에는 경찰 4명이 돌진하는 버스에 깔려 사망했다. 공수부대와 경찰은 이 지그재그 돌진 차량에 노이로제가 걸려 있었다.
이 이틀 동안 MBC 및 KBS 방송국이 불에 타고 세무서가 불탔다. 경상도 번호판을 단 수 많은 차량이 소각되고 탑승했던 경상도 주민들이 몰매를 맞아 즉사하는 일들이 비일비재였다. 5월 20일 밤에는 광주역 앞 넓은 공간에 집결한 제3공수여단 5개 대대 모두가 포위되어 몰살당할 뻔했지만, 어려운 과정을 통해 지급된 실탄으로 공포를 쏘고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포위망을 가까스로 뚫고 전남대로 철수했다. 그리고 이 5개 대대는 20일 밤 내내 전남대에 갇혀 유린당할 뻔했다.
전남대에서 5개 대대의 공수부대(2,000명)를 압박하던 북한군은 5월 21일이 되자, 세기의 걸작(?)이라 할 만한 특공작전을 벌였다.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보다 더 컸고 더 정교했고 과감했다.
제20사단은 전투서열이 높은 정규육군 부대다. 부대의 이동계획은 극비사항이다. 그런데 북한군은 지휘부 차량부대가 광주 톨게이트를 08:00시에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입수했다. 북한군 300명은 몽둥이와 화염병 등을 가지고 톨게이트 부근에 매복하고 있다가 차량부대를 정확히 08시에 기습하여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 지프차 14대를 빼앗아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진출하여 위용을 과시해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28대를 탈취했다. 09시, 아시아자동차공장에는 또 다른 300명이 5대의 버스를 타고 나타났다. 당시는 자가용시대가 아니라서 광주시 단독으로는 이렇게 많은 운전수를 확보할 수 없었다. 더구나 한국군에 지급되지도 않았던 최신형 장갑차를 4대씩 몰고 다닐 사람은 광주에 없었다. 5.18의 핵심유공자들 중에 이런 일로 포상을 받은 사람도 없다.
무기고는 모두 대외비로 위장돼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미리 준비한 약도들을 가지고 전라남도 17개 시 및 군에 숨어 있는 44개 무기고로 돌진하여 불과 4시간(12-16시) 만에 5,403정의 총기, 수류탄,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했다. 그리고 이들은 전라남도도청 지하실에 다이너마이트 폭탄 2,100개 순식간에 조립해놓았다.
오후 5시, 공수부대들은 모두 광주를 버리고 북한군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서 구사일생으로 시 외곽으로 밀려났다. 이날 밤, 북한특수군의 주력은 광주교도소를 5차례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450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나머지 150명의 군인들은 광주도청을 장악하고, 로열패밀리와 김중린 등으로 구성된 600명 규모의 광주작전 총사령부를 호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150명의 북한군 중 우리는 147명의 얼굴을 찾아냈고, 비군인광수 600명 중 279명을 찾아낸 것이다.
5월 22일부터 도청에는 이른바 광주 유지들로 구성된 시민수습위원회가 있었지만 이들은 시민군본부로 위장한 북한군의 삼엄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넥타이를 매고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했다. 유지들이 모이자, 이들은 “싸우자”는 파와 “총기부터 반납하자”는 파로 갈라져 하루 종일 싸우기만 했다. 무기를 탈취한 학생집단을 찾았지만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지상명령을 받고 온 북한군들이 나타날 리 없었다. 반면 그 시간 북한군은 복면을 쓰고 광주시 거리를 활보하면서 투쟁을 선동하기도 했고, 황장엽처럼 남한 당국의 스파이로 보이는 사람들을 찾아내 숙청하는 일을 했다.
계엄군이 퇴각한 광주시는 한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북한의 해방구가 되었다. 북한집단은 도청 지역에 모아 놓은 시체의 관을 독점하고, 광주인들로 위장한 남녀노소의 북한침투단을 이용하여 한국을 모략하기 위한 사진들을 찍었다. 5월 23일에는 북한군이 독일 기자 힌츠페터를 데려와 각가지 무대를 만들어 놓고 이를 촬영하여 세계에 방영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주력 전투부대원 대부분을 잃은 북한 지휘부는 계엄군이 광주를 재탈환하기 전인 5월 24일 오전 서둘러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 마지막 철수를 끝까지 옹호한 광수는 제1광수였다.
어린 아이들까지 합쳐 750명 정도로 남아 있던 북한의 원정대, 로열패밀리까지 모시고, 10세 전후의 꼬마들을 수십 명씩이나 인솔하고 단 몇 시간에 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해의 일부가 완전히 그들의 통제 하에 있었고 그래서 대형 선박들로 대량 탈출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들과는 전혀 별도로 5월 19일 북한을 떠나 5월 23일부터 광주 뒷산에 은거하면서 상황을 점검한 후, 5월 27일 새벽에 광주를 떠난 문제심(현 3성장군)이 이끄는 50명 팀이 있었다. 이들은 지리산이 포함된 소백산맥을 거쳐 경상북도 문경 지역을 거쳐 태백산맥을 타고 1주일간의 행군을 하여 6월 4일 휴전선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 문경지역의 산에서 산나물을 캐는 처녀가 자기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의심한 북한군은 그 처녀를 무자비하게 죽이고 암매장 했다. 이는 실제로 그 침투조에 소속됐던 탈북자 가명 김명국의 증언이다. 그 탈북자는 지금 국정원이 마련해준 국영기업에 취직해 있고, 서울 인근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 50명의 침투조는 사진에 찍히지 않은 관계로 여기에 합산되지 않았다.
5월 24일 오후, 북한군이 떠난 도청은 비로소 광주사람들의 소유가 되었다. 이때부터 전남도청에 들어온 광주시민들은 개념 없는 10대의 어린 학생들과 20대 막노동자들이었다. 이들 역시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어져 2일 내내 말싸움만 했다. 그리고 25일 밤중, 복학생인 김종배와 26세의 트럭운전수 박남선, 19세의 구두공 윤석루 등이 이끄는 20대의 강경파가 온건파를 총으로 위협하여 내쫓고 계엄군을 향해 “결사항전”을 선포했다. 이들이 지금 5.18 최고의 영웅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엄청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1997년 대법원의 판결이 참으로 코미디인 것이다.
이 기간(5.25-26)에도 도청에 나타난 대학생은 불과 3명이었다. 도청을 점령한 20대들이 “결사항전”을 선포하자 바짝 긴장했던 계엄당국은 5월 27일 새벽시간에 도청지역을 점령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그리고 계엄 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주동자들은 5월 26일 하루 도청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난동을 부렸던 자들로 1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5월 21일의 빛나는 작전을 마치 자기들이 수행한 것이라고 국민을 속여 개국공신에 해당하는 금전 및 복지 혜택을 받고 있으며 전쟁 유공자보다 더 높은 연금을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낸 광주사진들에서 찾아낸 작전의 주역 433명은 모두 북한인들이었다.
개념 없는 20대 도시근로자들이 도청 건물에서 서로 싸우던 5월 25일과 26일 양일동안, 계엄군은 다이너마이트 조립 전문가 1명을 도청으로 보내 온건파 학생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2,100발의 다이너마이트폭탄을 해체했다. 이 폭탄이 해체되지 않았더라면 5월 27일의 광주시 재진입 작전은 계획되지 못했을 것이다. 폭도들은 이 폭탄에 불을 질러 광주시 전체를 날려버리겠다고 정부 당국을 협박하고 있었다.
5월 27일 새벽, 한국군의 작전비밀은 대책 없이 새나갔다, 그래서 광주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하던 지역계엄사령관은 작전시간을 여러 번 변경하여 간첩들을 교란했다, 이날의 광주시 탈환적전에는 공수부대 전부(4,000명)를 작전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350명 정도만 사용했다. 외과적 수술을 하듯 점 공격을 하였기에 이 작전에서 사실당한 광주시민은 불과 17명에 불과했다. 그 90%가 개념 없는 10-20대였다.
이날 아침 05시 19분경 소준열 중장은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작전종료를 보고했고, 05시23분에는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하였다. 이로써 김일성이 주도한 침략작전, 김대중의 추종자들이 동참한 여적사건은 종결되었지만, 대한민국과 세계는 감쪽같이 속아 왔다. 그리고 북한군이 이룩한 작전성과는 5월 25-26일 동안 도청에 들어가 무모하게 결사항전을 선포해 군법회의에서 중죄를 선고받은 풋내기들의 공로로 왜곡되었다.
여기에 폭동기간 중 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사람들, 뺨을 맞고 왔다는 사람들이 끼어들어 5.18유공자가 되었다, 제1심 재판에서 유죄를 받은 사람은 불과 328명인데, 여기에 5,400명의 유령 유공자들이 합류하여 지금은 5,700명의 5.18유공자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호강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간첩이 지휘한다는 평을 듣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이 왜 유공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공적서’를 절대 비밀로 취급하고 있다. 아마도 5.700명에 대한 공적서가 노출되면 정부는 대대적인 국민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폭동 10일 동안 북한군은 광주시민들을 등 뒤에서 총으로 쏘았고, 몽둥이 등으로 사살했다. 그리고 이를 공수부대 소행으로 뒤집어 씌웠다. 하지만 시민들이 죽은 장소를 일일이 살펴보면 이들 대부분은 공수부대가 없는 지역들에서 사망했다. 10일 간의 폭동기간 중 총상으로 사망한 시민은 116명, 이들 중 75%에 해당하는 85명이 이른바 ‘시민군’(북한군)이 소지한 카빈 총 등에 의해 사망했다. 당시 공수부대는 M16 소총만 휴대하고 있었다, 이것이 광주민주화운동의 본색인 것이다.
5.18이 김대중과 김일성의 합작품이라 생각하는 이유
박정희의 로고는 한강의 기적이다. 1962년에서 1979년까지 연평균 약 9%의 고도 경제성장률을 유지했고, 1인당 GNP도 1962년 87달러에서 1979년에는 1,644달러로 18배의 상승률을 보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김일성은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1968년 1월 21일에는 31명(2014년, 33명으로 정정)으로 구성된 김신조 팀을 감히 청와대에 침투시켜 박정희를 살해하려는 대담한 시도를 하였고, 그해 11월 초에는 동부지역인 울진-삼척에 120명의 무장공비를 보내 무차별적인 학살을 감행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박정희를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시도했다.
1974년 8월 15일에는 일본 한민통 소속의 자객 문세광을 서울로 보내 박정희를 저격케 하였지만 총알이 빗나가는 바람에 영부인 육여사를 사망케 했다. 1979년 10월 18일부터는 부산과 마산에서 봉기를 유도하기 위해 북한 특수군 요원들을 보냈고, 이들 북한군은 1980년 광주로 이동하여 5.18폭동에 합세했다. 드디어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제거에 성공함으로써 김일성의 1차 소원은 성취됐다. 만일 누군가가 김재규를 사주했다면 그것은 김일성의 공작일 것이다. 김일성은 박정희 사후의 권력공백기를 이용하여 사회혼란을 조성하고 남침의 결정적인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남한에 파견된 간첩들에 전국적 봉기를 일으키도록 지령했고, 이와 동시에 소규모 단위로 북한특수군을 광주로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에 김대중은 전국단위로 학생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전국봉기 지령과 김대중의 활동이 일치했던 것이다.
1980년 4월 17일, 김일성은 강원도의 동원탄좌에 북한특수군을 보내 광부 3,500여 명을 폭도화 하려다 조기에 제압당하자 그 특수군을 광주사태에 투입했다. 같은 시기에 김대중은 국가를 뒤엎으려는 음모를 진행하면서 전국의 학생시위를 지휘했다. 4차례에 걸쳐 북악호텔에 비밀로 모여 혁명내각 명단을 작성한 후, 5월 16일에는 대정부 선전포고를 했다. 과도정부인 최규하 내각을 자진 해체하고, 계엄령을 철회하지 않으면 1980년 5월 22일을 기해 전국적 시위를 벌일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한 것이다. 그 결과 5월 17일 자정, 김대중 및 그와 함께 혁명하기로 모의한 24명이 전격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사려 깊은 김대중이 저지른 이 무모한 행위는 광주폭동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고, 그 결과 남한은 북한에 의해 접수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절대로 시도할 수 없는 자살행위였던 것이다. 실제로 1980년 5.18과 관련해 군사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김대중 추종세력이었다. 김일성이 특수군 600명과 또 다른 엘리트집단 및 로열패밀리 600여명을 광주에 보낸 것도 사실이고, 남한에 전국폭동을 일으키라 지령한 것도 사실이고, 김대중이 전국폭동을 주도한 것도 사실이고, 혁명내각을 준비한 것도 사실이고, 광주폭동 관련자들이 김대중 추종자들인 것도 사실이다. 이에 더해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남한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북한을 위해 일했다. 이 모든 것을 중합해 볼 때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그대로 5.18은 김일성과 김대중의 합작품이라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다.
국가를 배신한 공산주의자에 주어진 노벨평화상
김대중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김정일의 충신이었다
김대중은 일생 내내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그런데 그는 순발력이 강해 그 빨갱이라는 비난을 오히려 그에 유리하게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자기가 빨갱이라서 그런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군사정권이 뒤집어씌운 모략이라고 선전-선동함으로써 그를 정치적 피해자인 것으로 이미지화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정치적 수난자에 대한 동정심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고, 그것으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것이다.
한국은 1945년 미국 덕분으로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국제공산주의의 확산으로 남한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들끓었다. 김대중은 그의 나이 23세인 1946년에 남로당의 모체인 조선신민당 목포시지부 조직부장이 되었다. 23세에 공산주의자가 된 김대중은 1971년 일본에 가서 북한의 간첩들과 어울려 반국가단체인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결성헸고, 그 죄로 1980년 대법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2006년 그는 그의 권위를 이용하여 재심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그의 반정부 활동은 최근의 재심과정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악성적이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북한에 30억 달러에 상당하는 자금을 김정일 정권에 바쳤고, 그 중 5억 달러는 2,000년 6월 김정일을 방문하는 대가로 국민 몰래 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방문을 “세계평화를 위해 적진에까지 들어가 적장을 만난 거룩한 행위”인 것으로 미화하여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대통령 재임기간 5년 간 김대중은 남한의 대통령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김정일의 충복에 어울리는 행동을 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그의 지지자들을 향해, 이명박 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시위를 벌이라고 독려했다. 그 시위는 미국산 쇠고기수입을 거부하라는 시위였다. 그가 얼마나 김정일에 충성했는가에 대해서는 그의 자유가 한껏 신장돼 있었던 대통령 시절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래 내용들은 모두 증거자료가 뒷받침돼있는 것들이다.
김대중이 대통령 시절에 북한에 충성한 내용들
1) KCIA, 경찰, 기무사 등의 대공전문요원 대량 강제 해고, 공산주의자들로 교체
1998년 4월 1일, 김대중은 국내 대공수사요원들을 집단으로 해체했다. 취임 후 33일 만에 국정원 대공요원 581명을 강제 해고하고, 그해말까지 320명을 더 해고했다. 같은 기간에 대공경찰 2,500명, 기무사 대공요원 900명, 공안검사 40명을 해고했다. 그리고 그 자리들을 공산주의자들로 채웠다. 그 어느 군사정권도 이렇게 무자비한 처분은 하지 않았다. 북한을 감시하는 방공전선을 완전히 와해했고, 국가 정보기관들은 지금도 북한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2) 국민과의 합의 없이 북한의 선전-선동 물인 연방제 통일방안에 합의
2000년 6월 13-15일, 김대중은 평양에서 김정일과 함께 지냈고, 북한이 늘 선전해왔던 연방제 통일방안에 서명했다. 이는 적화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3) 적장인 김정일을 만나고 돌아오자마자 지뢰제거
2000년 6월 15일, 김대중은 평양에서 돌아오자마자 지뢰를 제거하기 시작했고, 남북 간 철로를 복원하고 6차선 고속도로를 건설하려 하다가 미국에 의해 제지됐다. 얼마나 급했던지 군은 성능검사를 할 시간도 없이 지뢰제거 장비를 해외로부터 공수해왔다. 2000년 9월, 43억원의 예산을 들여 독일 및 영국으로부터 3대의 지뢰제거장비를 긴급 구매하였지만 2대는 도입 즉시 사용이 불가능했다. 사용가능한 장비는 1대였지만 그나마 곧바로 북한에 넘겨주었다. 남한의 대통령이 적정에게 무기를 공여한 것이다, 그 많은 언론사들 중 아무도 이에 대한 문제를 지기하지 않았다.
4) 북한이 러시아에 진 빚, 대신 갚아 주려다 실패
신동아 2000년 10월호 기사 내용이다. 한국은 러시아로부터 14억7,000만 달러를 받을 것이 있고, 러시아는 북한으로부터 약 40억 달러(38억 루불)를 받을 것이 있는데, 김대중이 러시아에 인맥이 있는 이병화 박사를 거간으로 하여 한국도 러시아로부터 받을 돈을 포기할 테니 러시아도 북한으로부터 받을 돈을 포기하라는 제안을 했다는 내용이다.
5) 군에 침투한 공산주의자 색출하려던 기무사 장군, 비행기 내에서 전역조치 당해
월간조선 2001년 8월호는 “좌익세력의 대군침투 실상”이라는 기무사가 작성한 보고서 내막을 밝혔다. 김대중이 일으키는 친공 분위기로 인해 군인 정신이 병들었다는 내용들이다. “나에게 총알이 지급되면 우리 부대의 지휘관부터 먼저 쏘겠다”는 적대적인 발언을 하는 병사도 소개돼 있었다. 기무사는 이 자료의 서두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적화통일 야욕을 버렸다는 데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오히려 북한은 정상회담 이후 군을 와해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군내부에 침투한 좌익세력이 1,000여명에 달한다” 는 표현들로 김대중 정부와 견해를 달리했다. 이 자료를 작성한 기무사 대공처장 염 모 준장은 2001년 6월 30일 해외에서 귀국하다가 기내에서 전역조치 당했다.
6) 결핵백신 북한에 다 주고 국내환자 외면
2001년 10월 10일, 김대중 정부는 30만 명분에 해당하는 결핵백신을 북한에 비공식적으로 지원했다. 그 바람에 국내에 결핵백신 공백사태가 이어져 국내 예방접종 자들이 백신을 맞을 수 없어 전국 보건소에서 한동안 소동이 벌어졌다. 결핵연구원은 이 같은 사실을 외부에 노출하지 말 것을 전국 지부에 통보했다. 북한에 몰래 주고 입단속을 시켰다는 뜻이다. 김대중에는 북한만 있고, 백신을 맞아야 하는 남한의 어린이들도, 생명이 위험한 결핵 중병 환자들도 없었다. 2001.11.27. 동아일보는 “약 없다고 방치하는 나라”라는 제하에 이 사실을 개탄했다.
7) 북한의 핵개발 사실 알고서도 적극적으로 은닉하며 북한에 핵개발 자금 지원
1998년 8월 30일짜 조선일보는 뉴욕타임스 ‘1면 주요기사’를 인용하여 북한이 핵무기 제조공장 건설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비밀내용을 김대중 정부에 제공하면서 경고했지만 김대중 정부가 이를 경시 또는 묵살했다(Play down)고 보도했다. 2002년 11월 17일, 미국은 북한이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시인했다고 발표했다. 2010년 11월 21일, 지그프리드 해커(Siegfried S.Hecker) 스탠포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Center for International Security and Cooperation at Stanford University) 소장이 2010.11.9-13. 방북 당시 영변에서 수백 개의 원심분리기가 설치된 것을 목격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한은 해커 박사에게 원심분리기 2,000개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북한의 우라늄 개발사실을 알고서도 은폐해왔다. 사실이 이와 같은데도 김대중은 2001년 북한의 핵개발을 적극 커버해주었다. “북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없다. 그래서 대북지원금이 핵개발에 악용된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다. 북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지겠다.”
8) 한국군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 표출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이 발생했고, 우리 해군은 완승했다. 이로 인해 국민의 사기기 올라갔지만, 김대중은 달랐다. 대승을 이끈 당시 제2함대 사령관 박정성 제독은 훈장을 받지 못했고, 그 대신에 북한의 요구대로 좌천되었다. 1999년 6월 15일 오전 9시 28분, 서해상 서측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함정이 한국함정에 선제사격을 가해왔다. 이 때 한국군에는 “절대 먼저 사격하지 말라”는 김대중의 엄명이 있었다. 그래서 포위 기동과 함미충돌 전술로만 싸워 이겼다,
2002년 6월 29일, 서해 연평해전에서 ‘선제사격금지’ 명령을 받은 한국해군 고속정 참수리호는 북한의 낡은 함정으로부터 사격을 일방적으로 당해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이들을 싸늘하게 무시한 채 그 다음 날인 6월 30일, 브라질-독일간의 결승전 경기를 본다며 출국하여 경기를 관람했다.
7월 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체육관에서는 당시 전사자 4명에 대한 합동영결식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대통령인 김대중도 없었고, 김동신 국방장관도, 국무위원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부는 북한의 공격행위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며 북한을 옹호했다. 서해교전 전사자 한상국 중사의 부인은 2004년 4월 24일 영혼까지 떠난다며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국가에 대한 서운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군인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가 계속된다면 누가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서겠습니까?”
9) 북한에 퍼주기
김대중은 금강산 광광사업, 개성관광사업, 개성공단을 벌려놓고 합법적으로 달러를 제공했고, 이에 더해 비료, 쌀, 건설자재, 덤프트럭 등을 정부차원에서 제공했다. 정부가 지원하는 돈도 모자라 일반 기업들을 압박하여 북한에 달러와 재물을 지원하라고 다그쳤다, 아래에 그 일부를 소개한다. 지원액수도 문제이지만 지원성격이 가관이었다.
* 1999년 한 해 동안 대기업들이 부담한 준조세는 업체 당 평균 745억 원이었다. 이는 기업들이 부담한 국세의 1.2배이며 지방세의 20배 규모에 해당하는 액수다.
* 1999년10월 6일 현대가 20인치 칼라 TV 3만대를 북송하도록 승인했다. 445만 달러어치다.
* 1999년8월16일 대한제당이 연간 2만톤(60만 달러)씩 북한에 제공하도록 허가됐다.
* 1999년1 1월 27일 삼성도 북한에 172만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 2000년 1월 25일 현대아산은 190만 달러 상당의 기와공장 설비를 반출했다.
* 2000년 2월 8,863평짜리 평양실내 체육관 준공식이 거행됐다. 한국 돈 3,420만 달러가 갔다.
* 평화자동차 공장에 금강산 국제그룹 박보희 회장이 3억 달러를 투입했다.
* 2000년 3월7일 삼성전자가 평양체육관용 전광판 시스템에 400만 달러를 투입했다. 2000년 3월 22일 삼성이 조선컴퓨터 소프트웨어 지원에 73만 달러를 부담키로 했다.
* 2000년 3월6일 축협에서 보낸 계란 1천만 개가 인천항을 출발했다. 새마을운동에서 곡물 1,660톤을 보냈다.
* 2000년 4.12일 평화의 숲에서 묘목 20만 그루를 보냈다. 인도적 차원에서 이뤄진 지원은 99년 한 해에 4,688만 달러였다. 2000년 1.4분기에 순수 민간 조직이 보낸 대북지원 액만 해도 56억 원이다.
* 1998년 11월부터 금강선 사업이 중단된 2008년까지 현대는 북한에 3억8천만 달러를 지불했다. 이는 6년 3개월 동안 독점개발권을 갖는 대가 9억 4,200만 달러의 일부분이다.
저자에 관하여
저자는 1942년 12월 강원도 산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학으로 서울 변두리에 소재한 한 야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66년 포병장교로 임관하였다. 1967년(소위)부터 1971년(대위)에 이르기까지 44개월 동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베트남 전쟁에 전투요원으로 참전하여 공산주의자들이 펼치는 게릴라전에 대응하여 싸웠다.
귀국 후 합동참모부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고, 사관학교를 졸업한지 9년째 되는 1974년에 미해군대학원 경영학 과정에 입학하여 1975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석사논문을 통해 공장 재공품(Work In Proses)에 대한 가치를 통계학적으로 평가하는 수학적 접근방법을 개발하여 교수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미해군대학원 창설 (1947)이래 처음으로 경영학 석사가 응용수학 분야인 시스템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신뢰성(Reliability)과 정비성(Maintainability)을 혼합한 가동성(Availability)이라는 학문분야는 당시 비교적 새로운 학문분야였으며, 이 분야의 박사논문에서 저자는 2 개의 수학공식(Mathematical Formula)과 6개의 수학정리(Theorem) 그리고 1개의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해군함정이 90일 작전 시에 싣고 나가야 할 각 수리부품 재고량을 결정하기 위한 알고리즘(Algorithm)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당시 미해군대학원에서 이변으로 평가되었고, 지금도 그 학교에서는 하나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학위를 받은 1980년, 저자는 육군중령이었고, 귀국하면서부터 공항에서 곧장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실로 직행하는 인사발령을 받았다. 1년 동안 중앙정보부 내부의 학교과정을 이수하고, 특별보좌관으로서 국정원 내부 업무들을 파악한 후, 본인의 희망에 따라 국방연구원(KIDA)으로 발령받았다. 1982년, 저자의 연구에 따라 당시 윤성민 국방부장관은 5년 동안 재임하면서 한국군 역사상 처음으로 저자가 연구한 연구결과를 가지고 각 단위부대별 회계시스템을 설치하는 자원관리 개혁을 추진했고, 이는 '예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정부부처에도 확산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필자는 대령이자 연구소의 중견 연구관리자 자격으로 전국의 육해공군 부대들, 군수품 조달본부, 방위산업 업체를 돌아다니면서 실정을 파악해 저자를 알아주는 국방장관에 수시로 보고했다. 이로 인해 군의 고위 장군 세계에서 적이 많이 생겼고, 적이 생기는 것만큼 친구도 많이 생겼다.
1986년, 군이 해외로부터 구매한 방공자동화 시스템 장비들이 중국과 북한으로부터 날아오는 비행기들을 탐지하지 못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방장관에게 13년 동안의 무기획득 사업의 효율성을 평가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국방장관은 이 방대한 작업을 필자에게 맡기는 일이 있었다. 필자는 2억 5천만 달러에 구입한 방공자동화 장비가 25달러 가치도 없는 쓰레기라는 평가를 내렸고, 군의 무기획득사업의 효율성이 전반적으로 매우 저조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 충격적인 보고서로 인해 후임 국방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불려가 심한 꾸중을 들었고, 그 후부터 필자는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1987년 2월 대령으로 예편하면서 모교인 미해군대학원에서 3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 국방성이 요청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1989년 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군사분야 및 시스템경영에 대한 베스트셀러 책들을 쓰면서부터 저자는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군사평론을 독점적으로 전담하였고, 기업체를 상대로 시스템경영에 관한 강연을 하면서 당시 장관 연봉의 2.5배라는 비교적 높은 수익을 창출하는 프리랜서로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복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격적으로 파괴되었다. 저자는 김대중을 북한의 총독이라 비판했고, 김대중은 그런 저자를 도청하고, 린치를 가하고, 감옥에 보내고, 또라이로 선전하는 등 맹렬하게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13년 동안 무모한 도전을 했던 이유
저자 제1의 관심사는 한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공산주의 세력을 어떻게 제압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공산주의가 나라를 지배하는 것을 가장 위험하게 생각했기에 저자는 김대중이 대통령 자격으로 저지르는 이적행위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그 반작용으로 국가기관으로부터 도청 등 다양한 탄압을 받았다. 기고, 방송, 강연 등의 기회를 차단당했고, 감옥에 갔고, 광주검찰에 의해 린치를 당하는 등 고통과 치욕을 수반하는 탄압을 김대중 임기 내내 지속적으로 받았다.
한국 대부분의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사회지배 현상들에 대해 많은 우려들을 했고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파괴하는 행동을 할 때마다 대증요법으로 저항해 왔다. 그러는 사이 공산세력은 점점 더 무성해졌다. 저자는 공산세력의 뿌리인 5.18의 허구성을 국민에 알리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생각했다. 5.18이 정당한 민주화운동인 줄로 속아왔던 국민들이 5.18이 사기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은 5.18을 성역으로 호위해왔던 공산세력에 대해 매우 분노할 것이고, 그 분노에 의해 공산세력이 제압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자는 5.18의 진실을 찾아내고, 그것을 전파하는 일에, 지난 13년의 시간을 바친 것이다.
북한은 인류 제1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유린하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세계 최악의 깡패조직이다. 결론적으로 5.18의 진실은 한국사회에만 국한되는 지엽적인 이슈가 아니라 전 세계가 다 같이 다루어야할 세계적인 이슈라고 생각한다. 이 고귀한 목적을 위해 나는 여유롭게 인생을 즐겨야 할 60-70대 인생을 기꺼이 이 일에 바쳤다.
난공불락에의 도전
5.18과 김대중은 하나다. 5.18의 진실에 도전한다는 것은 모든 좌익세력과 김대중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김대중이라는 존재는 한 자연인이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큰 세계적인 인물이다. 김대중이 주도한 것으로 공식화돼 있는 5.18은 군사독재를 몰아낸 성스러운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전 세계에 선전돼 있다. 김대중은 “군사정권으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고도 대통령이 되어 민주화시대를 열었고, 적장을 만나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공적으로 2000년 10월 13일,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패러다임 측면에서 바라보면 김대중은 그 어떤 힘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격랑속의 암반과 같은 존재였다. 한낱 자연인에 불과한 저자가 이런 인물에 도전하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한 행위로 보였다.
5.18사건 역시 전 세계에 성스러운 민주화운동으로 선전돼 있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거대한 철옹성으로 단단히 자리 잡은 공산세력의 성지 5.18,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이것이 더더욱 불가능해 보였던 이유는 5.18과 김대중이 독립된 두 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5.18의 진실을 캐서 널리 전파하는 일은 공산주의자들의 성지를 호위하는 남북한 공산세력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야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김대중에 대한 세계인들의 인식을 바꿔야 하는 것을 뜻했다. 이 두 가지 임무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모한 일로 보였다.
저자에게도 전쟁 에너지 있다
하지만 저자는 1%도 채 안 되는 가능성에 도전했다. 저자가 이런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자에게도 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얼마간의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를 믿고 따라주는 일각의 애국국민들의 성원과 지지가 있었다. 저자에는 양심과 애국을 상징하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이 있고, 44개월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미해군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와 응용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지적인 저력이 있고, 이 저력으로 이룩한 공익적 기여가 한국사회에 축적돼 있었다.
저자는 1990년대 10년 동안 언론을 통해 한국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축적돼 있었다. 저자가 도청을 당하고, 경제활동을 차단당하고, 공권력에 린치당하고, 감옥에 간 사실들도 많이 알려져 있다. 저자는 2000년부터 개인 홈페이지 www.systemclub.co.kr를 운영해오고 있다. 이는 저자가 공공적 사안에 대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언론수단이었고, 애국에너지를 결집하는 만남의 공간이었다. 이 공간은 김대중과 5.18이 갖는 아킬레스건을 공격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는 정의와 진실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팩트들이 저자 편에 있다는 사실이다.
김대중의 아킬레스건
한국사회에 김대중은 북한이 키운 간첩이라는 이미지가 팽배해 있다. 김대중이 대통령 재직 시,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에 보여준 간첩행위들은 이미 한국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5.18은 김일성과 김대중이 야합한 사기극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디. 따라서 그에게 주어진 노벨평화상은 이 나라의 영광이 아니라 수치라는 인식도 팽배해 있다. 이런 것들이 김대중이라는 성역을 허물 수 있는 아킬레스건인 것이다.
모진 탄압 속에서 발굴해낸 진실 승리할 수 있게 도와 달라
국정원으로부터 당한 탄압
김대중의 아바타라 불리는 임동원이 국정원장을 하던 시절, 임동원은 직권을 남용하여 국정원의 제2차장과 8국장, 그리고 여러 명의 과장 및 직원들을 총 동원하여 저자에 대해 불법 도청을 실시했다. 특히 임동원은 저자를 특별관리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제2차장과 8국장에게 저자를 철저히 감시하고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을 여러 차례 내렸다. 당시 국정원의 도청행위는 저자 말고도 1,800여명의 인물들에 대해 폭넓게 실시됐지만 저자가 김대중 제1의 목표였다.
당시 국정원의 제2차장 김은성은 대통령이 저자를 가장 미워했다고 검찰에서 밝혔다. 제2차장은 임동원으로부터 저자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조치를 취하라는 독려를 자주 받았다는 사실을 검찰에 진술했고, 이 명령이 그의 재임기간 중 가장 고통스러웠다고 진술했다. 국방부와 협력하여 저자에게 불이익을 주었고, 정기간행물에 싣기로 했던 저자의 글을 제거시켰다고 진술했다.
이런 방해들로 인해 저자의 프리랜서 생활은 순식간에 차단되었다. 2007년 저자는 ‘한 자연인에 대해 국가기관이 저지른 탄압행위’는 징벌돼야 한다는 뜻에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은 국정원이 행한 모든 탄압행위는 인정하면서도 겨우 2,000만원(2만 달러)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소송가액의 4%에 해당하는 소액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김대중이 KCIA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저자의 생활수단을 제거했다는 사실이 법원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사실이다.
광주의 공권력으로부터 당한 백주의 린치
2002년 8월16일, 저자는 동아일보에 ‘좌익세력의 최후발악이 시작된다’ 는 제목의 신문광고를 내 김대중을 ‘김정일에 충성하는 총독’정도로 묘사했다. 3,500자의 신문광고문에는 ‘5.18은 소수의 좌익과 북한 특수부대가 순수한 시민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다’ 라는 35개 문자가 들어 있었다.
이 문장이 순수한 5.18정신을 훼손했다며, 광주의 5.18단체들이 검은 유니폼과 군화를 착용한 11명의 어깨들을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왔다. 이들은 서울 충무로에 소재한 자자의 사무실에 가서 집기들을 파괴하고 소란을 피우면서 이웃 주민들에 공포감을 주었다. 현장에 있던 경찰은 이들 앞에 주눅이 들어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어서 저자의 아파트로 몰려와 아파트 대문을 부수고 승용차를 파괴하고 몰려 든 주민들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며 소란을 피웠다. 식구들은 피난을 갔고, 경찰은 바라보기만 했다. 이어서 광주검사 최성필이 서울근교에 위치한 저자의 거소에 4명의 경찰을 보냈고, 이들은 처음부터 조폭과 같이 험악한 얼굴로 폭력부터 행사했다. 그들의 나이는 저자보다 30살 정도 낮았다.
이들 광주경찰관들은 저자의 두 팔을 등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우고, 승용차에 태웠다, 광주에까지 호송해 가는 6시간 동안 용변도 거부당한 채 온갖 폭력을 쉬지 않고 가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수갑을 등 뒤로 채우면 단 10분을 견디기 어려워 할 것이다. 이 엄청난 고통 속에서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들어보지도 못한 험하고 살벌한 욕설을 쉬지 않고 들었다. 뺨, 이마, 턱, 머리 등을 번갈아가면서 때렸다.
일생 처음 당해보는 생지옥이었다. 거룩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는 광주사람들이, 문명을 등지고 사는 맹수들이나 다름없었다. 저자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단지 5.18에 북한특수군이 관여했다는 1981년의 대법원 판결내용을 인용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는 5.18사건에 대해 2개의 대법원 판결이 병존한다. 하나는 1981년의 대법원 판결, 다른 하나는 1997년의 대법원 판결이다. 2개의 판결이 병존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1997년 판결과 다른 의견을 표현하지 못한다. 5.18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철저한 공산국가다.
김대중 시대에는 김대중 추종세력이 곧 법
광주검찰청에 도착해서도 검사는 수갑을 뒤로 채운 채 2시간 동안 더 조사를 받게 했고, 때릴 듯이 덤벼들면서 고함을 질렀다. 이웃에 있는 여성 검사는 손가락으로 저자의 턱을 들어 올리면서 “이 자가 무슨 육사를 나왔고 무슨 미국 해군대학원 박사랑가, 사기를 친 것 같으니 조사 좀 해보소, 광주가 없었다면 이 땅에 무신 민주화가 생겼당가, 어림도 없제이” 이런 식으로 한동안 조롱했다.
이어서 사전구속연장을 발령할 때까지 두 사람의 판사가 공포분위기를 연출했다. 전남 함평출신의 정경헌 판사는 구속영장 발부 판사였다. 그는 법정에서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저자를 노려보면서 고성을 질렀다. “당신이 5.18을 어찌 아요. 나는 재 눈으로 직접 현장을 보았소”이어서 저자의 변호를 맡은 광주출신 변호사에게 “변호인은 광주시민들로부터 무슨 욕을 먹으려고 서울사람 변호를 맡았소” 하며 공포의 고성을 질렀다. 변호인이 변호를 시작하자 “시끄럽소, 닥치시오” 하고 고성을 또 질렀다. 그 변호인은 60대 후반이고, 판사는 40대 초반이었다.
이후 저자는 엄동설한의 101일 동안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낡은 구치소의 마루방에서 광주사람 12명과 함께 모로 누워 칼잠을 자면서 수감생활을 했다. 한국의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바에 따르면 저자는 서울 소재의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고 서울 소재의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민주화의 화신이라는 김대중이 정권을 잡은 이 시기에는 광주와 전라도가 대한민국 위에 군림했다. 김대중 세력이 곧 법이었다.
위 내용들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의 예를 든다,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 부산 소재의 동의대학교에서는 극단적 좌파학생들이 경찰관 7명을 즉석에서 불태워 죽인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의 법원은 주동자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2002년 김대중 정부는 그 주동자에게 6억원의 보상금을 지급했고, 민주화 열사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노태우 정부는 군사정권이고 그 때의 경찰은 군사정권이 고용한 폭력배이기 때문에, 그 경찰을 불태워 죽인 행위는 가장 위대한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이었다. 국가가 공산주의로 전환되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동토를 뚫고 올라온 진실, 법원도 덮지 못했다.
저자는 이 시기부터 18만 쪽에 달하는 5.18관련사건 수사기록과 공판기록 모두를 정리하여 2008년, 1,720쪽에 이르는 4권의 책에 다큐멘터리로 담았다. 책명은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5.18단체들은 또 이 책에 대해 고발을 했다. 5.18에 대해 ‘1997년의 대법원 판결’과 다른 표현을 한 것이 5.18단체장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시대인 이때에는 2002년처럼 광주검사가 저자를 광주로 끌고 가지 못했다. 서울근교의 안양법원에서 2년 동인 제1심 재판을 받았다. 2명의 단독판사가 이 사건을 담당했다가 모두 사건이 부담스럽다며 회피했다. 그래서 사건은 합의부로 넘어갔다. 합의부 재판장은 공판 첫날에 “피고인은 재판 도중 언제라도 구속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저자의 표현이 범죄행위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재판을 시작한 것이다. 1심 재판은 2년 정도 진행됐다. 저자가 법원에 제출한 답변서는 증거자료를 포함해 천여 쪽은 되었을 것이다. 재판장이 답변서를 매우 자세히 읽고 있다는 징후들이 나타났다. 그러던 2011년 1월, 재판장은 저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제2심도 무죄를 선고했다. 이어서 2012년 12월 27일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드디어 5.18의 진실이 방송됐다
저자는 5.18에 북한특수군이 개입했다는 표현을 두 번 했다. 2002년과 2008년이다. 같은 표현에 대해 2002년에는 광주의 공권력으로부터 폭력과 린치와 감금처분을 당했지만, 2008년 이후에는 저자가 속한 관할 법원들에서 연속 무죄를 받았던 것이다. 이 사실은 네티즌들에게 커다란 뉴스거리였다. 2개의 방송국에서 저자를 초청했고, 저자는 2013년 1월부터 3월까지 5회에 걸쳐 방송에 출연했다. 수많은 자료들을 방송국에 안고 나가 5.18광주에 북한특수군 600명이 와서 내란폭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특히 5월 21일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남녀 진행자들은 물론 이 방송들을 듣는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저자의 설명에 동감했다. 각 30분 정도 진행된 저자의 설명들은 실로 가공할 만큼의 호응을 받았다. 여론의 뜨거운 호응을 받자 두 개의 방송국들이 서로 경쟁하듯 5.18의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며 많은 논객들을 불러 대담프로를 진행했다. 2013년 5월 15일에는 실제로 5.18 광주작전에 직접 참전했던 탈북자가 소개되었다. 5.18의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는 희망적인 분위기가 온 사회에 확산됐다. 2013년의 5개월은 참으로 행복했었다.
진실보도를 갑자기 탄압한 박근혜 정부
그런데, 바로 이때 위기를 느낀 광주사람들이 광주출신 정치인들을 동원하여 박근혜 정권을 압박했다. 2013년 6월 10일. 당시 국무총리 정홍원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할 수 없는 국회 발언을 했다.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정부 판단에 반하는 표현은 역사왜곡이고, 역사왜곡은 반사회적 범죄행위로, 이에 가담한 인터넷 회원들의 글은 삭제 등의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북한특수군 개입을 증언시킨 방송들은 방통위를 통해 제재할 것이며 역사왜곡자들은 검찰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이어서 대통령 직속 기관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권력을 남용했다. 5.18을 주제로 하여 방송을 진행한 두 방송국 관계자 8명에 대해 중징계 처분을 내리고, 앞으로는 5.18방송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 지난 5개월 동안의 모든 5.18관련 방송 내용은 사실이 아님을 선포하고 방송진행자가 사과하도록 명했고, 방송출연자들을 영구 출연중지 시키라는 독재적 처분을 내렸다. 유튜브와 포털 사이트에 게시된 북한군 관련의 표현들을 모두 차단하고 삭제 처분했다. 이는 저자의 연구결과를 일체 확산하지 말라는 탄압이었다. 이러한 삭제처분에 대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저자에게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 몰래 삭제 처분을 단행했다.
13년에 걸쳐 발굴한 역사의 진실 탄압하는 한국 재판부
저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반민주적 검열 및 밀실 처분에 대해 행정법원과 민사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두 개의 재판부 모두가 저자의 게시물이 1997년 4월 17일의 대법원 판결과 다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우려가 있어 인터넷과 방송에 표현하는 것을 금지시킬 수 있다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행정처분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있을 법 한 판결이다. 이 두 개 사건은 현재 제2심에 계류 중이다.
저자는 광수들에 대한 영상분석 과정을 문서화하여 법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양개 법원은 판결문에서 영상분석 결과물들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영상분석물들은 최소한의 기본 가치를 갖는다.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왔었을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증거인 것이다. 법원이 이 영상분석 자료를 무시하려면 북한군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야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측이 발굴한 477명에 대한 영상분석 내용들이 모두 다 사실이 아니라는 과학적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법원이 북한군에 대한 표현자체를 금지시키는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좋게 보아 판사들의 독재행위요, 나쁘게 보면 판사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유발시킨다.
법원이 도둑재판까지 감행
인터넷 신문 뉴스타운이 있다. 한국사회에서는 오직 이 하나의 신문만이 5.18에 대해 새로 밝혀지는 모든 사실들을 기사화했고, 2015년 7-9월에는 4면짜리 호외신문 1,2,3호를 각 10만부씩 발간했다. 이들은 전국의 정열적인 회원들에 의해 널리 뿌려졌고, 이로부터 5.18진실에 대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고 있다. 추측하건데 지금은 60% 이상의 국민들이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한특수군 수백 명이 와서 저지른 국가전복 공작이었고, 광주세력을 지휘한 김대중은 간첩이라는 인식들이 널리 전파되고 있는 중이다.
진실이 알려지는 것만큼 국가를 향한 국민적 분노가 축적되고 있다. 대통령은 무얼 하고 국가정보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대통령과 국정원은 이 새로운 진실에 함구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다. 그러는 동안 광주의 5.18단체들과 광주법원이 또 다른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5.18단체들이 허위사실들을 내세워 광주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 뉴스타운 호외지 발간 및 배포를 중지시켜 달라는 가처분신청이었다. 광주법원은 소장을 제출한지 3일 만에 소송의 당사자인 저자 및 뉴스타운 측에 아무런 통지도 하지 않고, 공판을 열지도 않은 채, 광주의 5.18단체들이 허위로 주장한 내용들을 100% 그대로 인용하는 결정문을 썼다. 광주법원이 전대미문의 도둑재판을 한 것이다.
위장한 탈북자들로부터의 살해 협박
마지막으로 저자는 1980년 광주에 왔다가 북한으로 돌아간 후 다시 탈북하여 남한에서 활동하는 위장탈북자가 50명 정도 있다는 사실을 인터넷을 통해 발표했다. 이들의 명단과 영상분석 내용들을 2015년 11월 7일부터 12월까지 인터넷에 널리 공개했다. 아울러 이들의 대부분은 남한의 모든 방송국에 출연함으로써 인기인들이 되어 있다는 사실, 국회의원에까지 진출해 있다는 사실, 이들이 정부의 정책기관들에 침투해 역량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들을 밝혔다.
그런데 이들 위장탈북자들은 1980년 광주에 왔었다는 사실에 대해 정면 부정했다. 자기 개인이 광주에 왔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5.18광주사건은 북한이 주도하지 않았다고 반박을 했다. 거의 모든 일반 탈북자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내용이 있다. 북한에서는 5.18을 김일성과 김대중이 야합해서 일으킨 폭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50명만은 이와 정반대의 주장들을 한다. 이들은 저자를 원색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미국대사가 당했던 것처럼 커터 칼로 목을 자르겠다는 협박도 했고, 저자를 강제로 외진 곳에 데려다 감금하겠다는 위협도 했고, 매우 심한 욕설들도 했고, 저자가 미쳤다는 말도 했다. 신변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이 위장탈북자들의 스폰서
2015년 10월 29일, 저자는 위장탈북자 50명에 대해 국정원에 신고했다. “간첩신고‘라는 명분이었다. 그런데 국정원의 태도가 참으로 수상했다. 간첩신고를 하러 간 저자에게 ”봉투를 창구에 그냥 맡기고 가라“는 것이었다. 문서를 받았다는 접수증도 발부해줄 수 없다고 했다. 이 순간에서부터 저자는 국정원으로부터 적대적인 대접을 받았다. 1개월 이내에 신고자에 진행사항을 통보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국정원은 6개월이 넘는 지금까지 신고자인 저자에게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김대중이 좌익들로 채워놓은 대북정보 요원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이다.
모진 탄압 이겨내면서 발굴한 진실, 승리할 수 있게 도와달라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 그리고 세계의 모든 양심가들에게 호소한다. 앞에서 약술하였듯이 저자는 오직 진실을 밝혀 왜곡된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 잡고, 대한민국의 안보와 인류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존재를 밝혀 징벌해야 한다는 오직 한 가지 마음으로 개인으로서는 감내할 수 없는 가시밭길을 지난 13년 동안 걸었다.
저자는 무엇이 나에 이로우냐에 따라 세상을 살지 않고, 무엇이 정의냐에 따라 세상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이익을 추구했다면 아름답고 여유롭게 살아야 할 인생 황혼기를 13년 동안이나 이렇게 험한 가시밭길에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70세를 훨씬 넘긴 지금에야 저자는 역사의 진실, 악의 진실을 밝히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제부터 저자가 한국국민과 세계인들에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 발굴된 진실이 승리로 기록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달라는 것이다.
5.18 폭동의 프로필 (화보 맨 뒤 에필로그)
세기의 여적사건, 1980년 5.18 광주폭동
그것은 김일성과 김대중이 손잡고 남한을 침공한 내란이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국가는 이를 세계에 빛나는 민주화운동이라며
해마다 기념하고,
교과서를 통해 교육하고,
적과 손을 잡고 국가에 항적한 반란자들에게 개국공신에 해당하는 연금과 일시금과
옛날 귀족이나 누릴 수 있었던 특혜들을 부여하고 있다.
이들은 매년 수만의 젊은이들에
민주화교육을 한다면서 국가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왔다.
나는 이런 나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한국의 한 애국단체를 결성하여 36년 만에 이 사기극의 진실을 밝혀냈지만
국가는 이를 반기기는커녕 철저히 외면하고 그것도 모자라
방송, 인터넷, 신문 호외지에 표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처벌하고 있다.
5.18소요사태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공론화의 공간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이 그의 적국인 남한에 1,200여명의 작전집단을 보내
광주시민을 살해 해놓고
이를 남한의 공수부대의 행위라고 뒤집어씌운 것도 기적이고,
북한정권을 위해 일생을 살아온 간첩 김대중에게 적장과 손을 잡았다며
노벨상이 주어진 것도 기적이고
한 작은 애국단체가 13년 동안 국가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으며
이 사기극을 추적하여 과학으로 증명해 낸 것도 기적이다.
5.18의 진실은 여러 개의 기적들로 이루어진 세계적인 낭중지추다.
이를 외면하는 한국이라는 국가와 언론들은 세계의 불가사의다.
전 세계에 민주화운동으로 선전된 1980년 5월 광주폭동,
13년의 분석결과 북한특수군 600명과
또 다른 600여명의 행정 및 대남공작 엘리트 집단이
주도한 사기극이었음이 36년 만에 증명되었다.
남한 땅 서남쪽 광주에서 600명의 북한군을 총지휘한 사령관은
3성장군인 리을설 상장
그는 광주에서 여장으로 변장한 채 남북한 반역집단을 지휘했고,
그후 전설의 화신이 되어 95세로 인민군원수를 달고 있다가 2015년 11월 사망했다.
당시 북한의 대남공작 총 사령관인 김중린은 광주에서 1,200여명의 대남공작 집단만 지휘한 것이 아니라
남한에 파견된 수많은 고정간첩들과
김대중을 추종하는 전라도 주민들을 간접 지휘했다.
1980년 5월 18일, 내란사건 발발 이전 수개월 전부터
광주일원의 사찰, 호텔, 여관, 개인주택 등 수많은 숙박수단들이
이미 북한집단과 간첩들에 제공되었고
이들은 광주 등 전남지역 일대의 지형과 지형지물들을 부지런히
정찰하여 익숙시켰다.
이런 사실을 수많은 광주인들과 전라인들이 알고 있었다.
1980년 4월 초부터 김대중은 전국 대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조종하였고,
북악파크호텔에서 4차례 비밀모임을 주도하여 국가전복이
성공했을 때 가동시킬 24명 내각명단을 작성하였다.
5월 16일에는 국가를 향해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5월 19일까지 내각이 총사퇴하고 계엄령을 철폐하라,
이에 응하지 않으면 전국봉기를 강행할 것이다”
정당도 갖지 못한 한 정치꾼의 이런 당돌 무쌍한 행동은 어떤 힘에서 유래 했는가
김대중은 이때 이미 광주에 여적사건이 곧 발발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대중은 1981년 4월 1일 대법원에서 내란죄 및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10일 동안 진행됐던 광주폭동은
처음 4일 동안의 폭동과 나중 6일 동안의 사태수습기간으로 분해된다.
처음 4일은 북한특수군이 주도한 전광석화와 같은 도깨비 작전이었고
그 다음 2일간은 북한 원정대에 의한 대남모략용 사진찍기 작전이었고,
나머지 4일간은 개념 없는 10대 및 20대들이
전라남도 도청 안에 모여들어 자기들끼리 갑론을박하며 싸운 기간이었다.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은 북한특수군의 작전에 밀려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부지한 채 시외곽으로 탈출했다
적을 잃은 북한군은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복면들을 하고
그들을 염탐할 수 있는 젊은 광주인들을 잡아다 살해했다.
철학자로 위장한 황장엽이 그 대장이었다
알고 보니 황장엽은 나치의 헤스 같은 존재였고, 대남선전선동을 담당했다.
광주의 유지들이 전남도청에 모여 수습방안을 논의했다.
수습방안이란 총기를 먼저 반납하자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총기를 반납하자 하고
20대 막노동자들은 북한 공작조의 영향을 받아
이에 저항했다.
이처럼 광주인들은 모이면 의견충돌로 날을 지샜다.
말싸움이 고질화된 이런 광주인들이
처음 4일 동안 북한군이 이룩했던 특공작전을 수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북한특수군이 처음 4일간 수행한 특공작전,
제20사단 지휘부 차량이 5월 21일 08시에 광주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정보를 알아가지고 매복해 있다가
사단장 차를 포함한 지프차 14대를 탈취해가지고
이를 군용차 생산공장으로 몰고 가 위세를 자랑했다
위세에 눌린 공장간부들은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에 열쇠를 꽂아주었다
북한군 600명은 여기에서 차량들을 몰고 전남지역 44개소에 숨어 있는 무기고를
공격해 5,408정의 총기와 다이너마이트를 불과 4시간 만에 탈취했다
그리고 다이너마이트 2,100발을 조립해놓고
광주시를 날려버리겠다 계엄군을 협박했다.
2,700명이 수용된 광주교도소를 6회 공격했다,
5월 26일 아침이었다.
일부 개념 없는 10-20대들이 온건파를 몰아내고
끝까지 계엄군에 맞서 싸울 것을 선포했고,
이것이 계엄군의 진압작전을 초대했다.
당시 사형 및 무기 징역을 선고받은 폭동의 중범죄자들은
바로 이들 10대와 20대였다
북한특수군 여러 명이 계엄군에 잡혔지만 간첩들의 역할로 즉시 풀려났다.
북한특수군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활동사실은 그로부터 36년 동안 발견되지 못했다.
그리고 1980년 군사재판과 대법원은 5월 26일 하루 동안
광주시 중앙에 소재한 전남도청을 지배했던 10-20대 막노동꾼들만
내란 폭동의 주범들로 처벌하고 말았다
대한민국은 수적으로 엄청난 정보기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1,200여명으로 추산되는 북한의 주동자들은 단 1명도 잡지 못하고
넝마주이 10대 및 20대의 계급들만 붙잡아 사형 및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당시의 정보분석자들, 검사, 판사들이 참으로 한심한 수준의 사람들이었다.
1980-90년대에는 북한과 내통하는 젊은 세대들이 ‘민주화’라는 단어를 선점했다.
그리고 정말로 민주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을 속여 세상 여론을 장악했다.
그들은 국민여론을 등에 업고 “독재자”(?) 전두환을 심판하기를 원했고,
전두환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그가 주도했다는 5.18폭동 진압 사실을 심판해야했다.
1997년의 한국 대법원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일사부재리원칙을 무시하고
"5.18은 김대중이 배후 지휘한 폭동이었다”는
1981년의 대법원 판결을 뒤집었다.
북한에서 온 위장 특수군과 그들을 추수하여 여적죄를 저지른
광주의 부나비들을 헌법수호세력으로 판결했고,
이를 진압한 정부군을 폭도로 판결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역사는 뒤집힌 판결 그대로 기록됐고
오늘도 학생들은 교과서를 배우며
대한민국에 대한 적개심을 합법적으로 키우고 있다
국가가 북한에 점령되지 않고서는 발생할 수 없는 기막힌 기현상이다.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신격화되어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군림했다.
누구든 5.18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고 말하면
법관들은 그를 끌어다 감옥에 넣었고
5.18성역을 지키는 광주의 어깨들은
그 사람을 데려다 린치하고 생활근거를 파괴했다.
말로는 민주화라 하지만 사실은
지금 이순간의 한국은 요덕수용소처럼 무시무시한 공포가 지배한다.
5.18에 관한한, 한국 땅 전체가 요덕수용소였다.
광주의 5.18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성전이었고
‘5.18’과 ‘민주화‘라는 단어만 내세우면
국가도 논리도 정의도 부정돼 왔다.
민주화의 성지 ‘5.18’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폭군 그 자체였다.
1997년 대법원 판결로부터 18년만인 2014년 10월,
작은 한 애국단체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이
삼엄하게 호위되던 판도라 상자의 뚜껑을 열어 젖혔다.
열고 보니 5.18은 남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쌓아올린 사기극의 성전이었다.
미해군대학원 석사 및 박사 과정에서 분석학을 전공한
수리공학자가 13년 동안 18만 쪽에 달하는 5.18재판기록을 정리하고,
북한책과 정부보고서 등을 총정리하여
3,500 페이지의 책 8권을 냈다.
그 8번째 책의 결론에는 수학적 증명의 상징인 Q.E.D. 식 결론이 내려졌다.
5.18광주민주화는 김일성과 김대중의 야합한 사기극이었고
살인과 모략공작을 전문으로 하는 북한군 600명과 공작단 600명이
1979년 10월 박정희 시해사건 직후부터 축차로 침투하여 일으킨
내란폭동이었다 결론지은 것이다.
2015년 5월 5일부터 4개월 동안, 북한정보를 전공한 전문팀,
최신영상분석 기술을 구사하는 기술팀이 여기에 참여했다.
1980년 광주에서 찍힌 얼굴들과
지금 평양의 김정은 권력 핵심인물들의 얼굴을 비교분석한 결과
400여명의 평양얼굴들이 광주얼굴들과 일치함을 증명하였다.
분석팀은 영상분석과정을 낱낱이 공개하였고,
국제사회의 검증을 환영하면서
이 화보판 내용들을 능동적으로 널리 공개하고 있다.
이 결론들은 한국사회의 인터넷 공간을 압도할 만큼 널리 확산되었고,
각 지역에서 수많은 애국국민들이 1인시위를 벌이고 나섰다.
일간지 신문 사이즈 4개면 분량으로
인터넷 신문 뉴스타운이 호외지 1호, 2호, 3호를 각 10만부씩 발간했다.
전국에 분포돼있는 애국국민들이 이를 온 국민에 전파하느라
땀과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 국무총리, 국정원장, 국방장관, 청와대참모,
대법원장, 검찰총장, 국회의장, 국회의원들에
“내우외환죄 신고서” 형태로 이 증명된 사실을 범죄신고 타이틀로 신고했지만
신고된 지 16개월이 되도록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웬 일인지 한국의 그 어느 주요 언론들도 이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는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다.
1807년 독일의 피히테가 묘사한
독일인들의 부패상보다 더 악화돼 있다
5.18역사를 바로 잡는다는 것은
첫째, 선전포고 없이
한국을 침략하여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킨 북한을
전쟁범죄자로 UN에 신고하여 처벌하는 것이고
둘째, 북한군을 광주로 끌어들여
이들과 함께 국가에 항적한 광주시민들을 여적죄로 처벌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엄청난 일을 하기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너무 약하다고 국민들은 우려한다.
더욱 우려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여적의 수괴로 판명된
김대중을 처벌할 수 없다는 우려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2년 북한 김정일을 찾아가
3박4일 동안 최고급의 대접을 받았고,
그와 손가락을 걸고 사실상의 적화통일인 연방제통일을 약속하였다.
그 후부터 박근혜는 김대중을 숭상함과 동시에
그의 친부 박정희를 김대중 학대자로 선언함으로써
혈육을 버리고 공산주의 이념을 선택하였다.
박근혜정부가 아무런 개념 설명 없이
대대적으로 선동하는 통일대박은
사실상 적화통일대박이라는 것이 많은 국민들의 생각이다,
박근혜 정부
여적의 편에 서느냐,
아니면 여적죄를 다스리느냐,
그 자신의 운명도 국가의 운명도 이 하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만일 박근혜 정부가 여적의 편에 선다면
이는 대한민국 운명에 빨간 SOS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하기에 우리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은
국가를 구하고 5천만 국민을 구하기 위해
미국 등 우방국들과 UN 등에
이 위급사항을 알리고 구원을 청하기에 이른 것이다.
청주유골 430구, 2014년 김정은 전용기에 실려 갔을 것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가 침몰했다. 대통령은 그 많은 인재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팀을 만들지 않았다. 이 공백기를 이용하여 이념적 선동세력이 그들과 한편인 야당과 결합해 엄청난 시간과 예산만 낭비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세월호를 침몰시켰다”는 결론을 얻는데 그쳤다.
바로 그 다음달인 5월 13일, 세월호에 못지않은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광주로부터 200km 내륙방향으로 떨어진 청주 야산에 1m 깊이로 군대식 대오를 갖춘 채 가매장된 430구의 시체가 공원개발 인부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430구의 시체가 군대식 대오를 갖추어 1m 깊이로 가매장되었다는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이는 세계적인 토픽에 오를 만한 사건이었다. 10여개의 매체들이 이를 가볍게 보도했지만 이는 세월호라는 쓰나미에 밀려 조금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430구의 시체가 군대식 대오를 갖추어 가매장되었다는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이 430구의 시체는 대통령 최고의 관심사로 지정되어 진실규명의 대상이 되었어야 마땅했다. 우리는 단 한 구의 이상한 시체만 발견해도 온 매스컴이 떠드는 시대에 살고 있다. 430구의 매우 수상한 속성을 가진 시체들이 발견되었는데도 조용한 나라가 어떻게 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세계인들에 묻고 싶다.
이 430구의 유골들은 모두 손상 없이 잘 보관되었으며, 같은 사이즈의 나무판(칠성판) 위에 누운 상태에서 두껍고 흰 비닐에 둘둘 싸여 있었고, 유품이 일체 없었다. 430구 단체유골 모두에 유품이 없다는 말은 증거를 남기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 비닐 위에는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우리는 힌츠 페터가 찍은 동영상에서 북한특수군이 관 위에 일련번호를 쓰고 다니는 것을 관찰했다. 5월 하순의 광주 기온은 더웠다. 시체가 썩어 물이 마구 흘렀다. 그래서 급하게 고안해 낸 방법이 규격이 일정한 나무판(칠성판)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두꺼운 비닐로 칭칭 감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시체 위에 일련번호를 쓰고 다닌 사람은 북한특수군이었다. 430구의 유골은 이 상태에서 1미터 깊이의 땅속에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시체를 포장한 경우는 오직 1980년 5월의 광주 한 곳 뿐이었다. 그 어느 개인도 시체를 이런 식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보도가 나가자 이 유골들은 누군가에 의해 매우 민첩하게 컨테이너 박스에 옮겨졌고, 그 후부터는 보안조치가 이루어져 더 이상의 추적 기사가 없었다. 당시 이 시체의 존재에 대해 수사를 했던 흥덕경찰서와 청주시 체육과에 전화를 해보니 유골은 모두 화장해 처리했다는 말만 했다. 이에 분노한 한 해외교포가 청주를 방문해 탐문작전을 펼쳤다. 화장행정에 관련해 있는 한 지방 유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한다. “청주시 화장터에서 화장한 유골들 중, 내 서명을 거치지 않은 유골은 있을 수 없다. 430구를 화장한 적이 절대 없다.” 저자 역시 화장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일정한 규격의 나무 판 위에 시체를 발가벗겨 올려놓고 비닐로 둘둘 감은 후 그 위에 일련번호가 파괴되지 않도록 가매장된 430구의 시체, 이런 시체가 대한민국의 시체일 수는 없다. 당시 보도에는 공원 공사 차 3개의 공동묘지를 7개월에 걸쳐 정리하면서 임자 없는 유골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정리돼 있지만 이는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식의 어불성설이다.
필자는 이 유골이 1980년 5월 21일 밤, 광주에 왔던 북한특수군이 교도소를 무리하게 6회씩이나 공격하면서 공수부대로부터 대량으로 살상당한 시체라고 생각한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공산주의자 180명을 포함해 모두 2,700여 명의 수용자가 있었다. 북한은 이들을 해방시켜 폭동의 모멘텀을 확보하라는 지령을 여러 차례 내렸다. 저자는 이 유골들이 청주지역 담당 간첩들에 의해 잘 관리되었을 것이고, 유골이 말썽이 된지 5개월 만에 간첩들과 김정은 수족들에 의해 북으로 가져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430명은 “5.18공화국영웅”들이다.
2014년 10월 4일 북한의 실세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이 김정은의 전용기를 타고 '인천 아시아게임 폐막식에 참석한다'는 전혀 설득력 없는 이유로 인천공항에 왔다. 그들이 갑자기 인천에 온 목적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과의 회담에 목을 매는 박근혜는 이들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이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안보실장 김관진을 포함해 정부 실세들이 공항으로 나가 식사를 대접하고 이들로부터 무슨 말을 들을까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이들은 먼 산만 바라보다가 폐막식에 형식적으로 참석한 후 싱겁게 돌아갔다. 남한의 지휘부는 참으로 나이브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것 같다.
도대체 이들은 왜 감히 '존엄'의 전용기를 가져와서 먼 산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갔을까? 김정은 전용기는 치외법권이 작용한다. 누군가가 007작전에 의해 청주에 있던 컨테이너 박스를 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동시에 죽은 430구의 시체, 광주에서 한 북한특수군이 시체에 쓰고 다니던 일련번호, 그런 일련번호를 달고 있는 430구의 시체, 대오를 갖추어 1m 깊이로 질서 있게 정열 돼있는 시체에 대해 어찌 정부가 이토록 무관심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광주에서 죽은 430구의 시체라면 광주 근교에 가매장할 일이지 어떻게 철통같은 포위망을 뚫고 청주에까지 시체들을 운반해야 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당시 광주에는 얼마든지 샛길들이 있었다. 5월 23일 힌츠페터 역시 샛길로 북한특수군의 호위를 받으며 유유히 광주로 들어왔다. 그리고 430구나 되는 시체를 광주에 가매장한다면 누군가에 쉽게 발견될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5.18사건 직후부터 광주 사람들, 얼마나 열심히 광주 주위의 땅을 파고 다녔던가.
이 유골이 혹시 5.18 희생자가 아니냐는 일부 여론에 따라 광주 유공자 단체들은 모 법의학자라는 사람을 데려와 “그 430구의 유골은 5.18때 희생된 광주인들이 아니다”라는 말로 광주와의 인연을 단절시켰다. 여기에 상당히 수상한 점이 있다. 아무리 법의학자라 해도 유전자 감식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 유골은 광주에서 희생당한 광주시민이 아니다”라는 말 한 마디에 그 430구위 유골을 국민이 모르는 사이에 몰래 처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국민에게 명명백맥히 진실을 설명해주지 않는 정부의 자세는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도저히 격에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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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13일 청주 현장에서 발견된 유골
1980년 광주의 시신 포장
정황증거를 뒷받침할 새로운 영상들 발견
2014년 9월에 시작한 아시아게임에 참가하겠다는 요청은 북한이 매우 적극적으로 했다. 일반적으로 국제게임에 참가한 국가의 정상들은 개막식에 오지 폐막식에 오지 않는다. 생뚱맞게 폐막식에 북한의 최고 인물들이 김정은 전용기를 몰고 온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정보기관들의 분석이 뒤따라야 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매우 수상한 장난일 수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개막식 참석과 폐막식 참석에서 모종의 의혹이 보이는 것이다. 황병서의 이런 수상한 행위를 청주유공 430구와 연관 지은 존재는 대한민국에서 오직 저자의 팀 하나뿐이다. 그래서 이 팀은 아래의 매우 엄중한 증거들을 포착하게 되었다.
1) 2014년 8월 21일, 아시아게임 조-추첨을 하러 온 북한인 8명이 모두 광수라는 사실, 2) 2014년 10월 4일 황병서가 김정은 전용기에 태우고 온 북한사람들 중 10명이 광수라는 사실, 3) 이 두 차례의 북한 방문단과 내통돼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내국인 간첩용의자 5명이 광수라는 사실 4) 황병서를 밀착 수행할 직책에 있지 않은 고위 공무원들이 황병서를 밀착해 수행하고 있었던 사실 들이다.
위와 같은 정보를 뒷받침해주는 영상들이 준비돼 있지만 이는 보안상 여기에 게재하지 못한다. 대한민국 국정원은 김대중이 심어놓은 간첩들이 간첩 잡는 부서와 대공업무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위 사실들에 대한 정보를 주기 어렵다. 대신 선진 각국의 조사를 바란다. 이 430구의 수수께끼가 풀리면 5.18에 대한 진실이 가장 쉬운 방법으로 풀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널리 알려질 것이다.
끝
2016.5.20.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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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국가라면 지만원 박사가 제기한 본문의 모든 주장에 대해 국정원 또는 검찰이 철저하게 조사해야 합니다.
조사 결과 사실이라면 '5.18 민주화 운동'이란 판결을 한 김영삼의 재판을 원래의 판결이었던 '광주 폭동'으로 바로 잡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를 왜곡했던 모든 잘 못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국제사회에 북한의 선전포고 없는 무장공격이었음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조사결과가 사실무근 또는 사실오인으로 나타났다면 그런 사실을 널리 알리고 지만원씨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 있다면 법에 따라 조처해야 합니다.
이런 중대한 문제 제기를 모른척하더라도 언젠가는 밝혀지고 그 책임을 질 것입니다.
두어달내로 문제의 영상화보집이 출간된다니, 온 세계 관련기관에 돌려서 경천동지할 모맨트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련지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