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오디오의 발전사
한국 오디오의 태동
1959년 금성사(GoldStar)의 진공관식 라디오인 A-501이 나오기 이전, 우리나라 오디오 역사는 주로 일본의 부품을 이용하여 청계천에서 저가제품을 조립 판매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중에는 단순조립을 넘는 완제품 수준의 제품도 있었으나, 그것은 독창적인 회로 설계가 아닌 외형 및 단순한 기능만 바꾸어 조립 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한국 오디오의 역사의 시발은 금성사의 진공관 라디오인 A-501 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A-501은 우리나라 시장에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제 라디오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당시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으나, 로스토우(Rostow)의 경제발전 단계론에 고무된 정부의 수입품 대체상품 개발 및 수출에 전력을 다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에 따라 제정된 전자공업 육성법,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이 착실하게 실효를 거둠으로써 오디오 제조 및 기술 향상에 일대 전환을 맞이 하게 된다. 그 이후 꾸준하게 성장 가도를 달려온 국내 오디오 산업은 반도체 산업의 성장에 힘입어 외국의 선진 디지털 기술은 물론 광전자 산업 분야에 진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한국 사운드를 개발하는데 있어 중요한 과제는 핵심 부품 소재 개발 및 제품의 고급화 와 끊임없는 투자이다.
국내 오디오 시스템이 단품이 아닌 래크 형태의 컴포넌트 오디오 시스템에 주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아직까지 우리의 기술수준에 상응하는 고급 오디오 브랜드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최근 메이저 오디오 회사에서도 이 같은 상황을 직시하고 고급 오디오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 시킬 수 없어, 물밀 듯이 들어오는 외국제품에 외면 당하고 있다. 이런 모든 일들을 감안해 볼 때 이제는 한국 사운드를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하이엔드 제품 개발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과제로 대두 된다. 그 동안 국내 오디오 산업을 주도해온 기업들은 거의가 전문화 된 고급 오디오 보다는 막대한 물량을 투입하여 수량에 치중하는 제품을 만들어 판매 해 왔으나, 소득이 높아지고, 저가의 외산 오디오가 물밀 듯이 들어오자, 부가 가치가 낮은 라인을 철수 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위축되기 시작했다. WTO 출범 이후 전세계 시장은 개방시대를 맞이해 거의 노출된 상태에서 무한 경쟁을 벌이지 않고서는 살아 남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술력 향상을 통한 부가가치가 높은 한국형 하이엔드 오디오를 개발하는 것이 한국 오디오가 살아 남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의 탄생
고종 13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 되면서 우리나라도 신 문명시대를 맞이 하게 된다. 최초의 전파상은 1927년 쯤 광운상회(光雲商會)로 몇 안되는 라디오상 들이 일본으로부터 부품을 들여와 라디오 수신기를 조립하여 판매한 것에서 비롯된다. 최초의 소리통이 소개된 것은 1866년 아산만에서 통상을 요구하던 프러시아(구 독일) 사람인 오베르트에 의해서 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구한말, 미국공사인 호렌스 알렌이 대신들을 초청해 유성기를 틀어준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기불과 함께 개화물결이 일기 시작하면서 소리통의 역사도 서서히 막을 올리게 된다. 1925년 매주 4회 정도의 실험방송이 성공을 거두자 다음 해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이 개국을 했고, 1927년 라디오 방송 원년을 맞게 된다. 당시의 라디오란 지금처럼 흔히 보는 라디오가 아니라 그야말로 귀중품이었다. 후전 직후 1954년 민간방송인 기독교 방송7(HLK7)이 설립 되면서 일반인들의 라디오 수신기에 관심이 높아졌다. 당시 라디오는 소형에서부터 대형에 이르기 까지 많은 종류가 있었는데, 거의가 미국과 일본제 였으며 중고품이나 광석 라디오도 인기가 있었다.
1958년에 주식회사 럭키로부터 분리해 새로운 살림을 시작한 금성사는 59년 11월 최초의 라디오인 A-501을 만들어 냈다. 당시 국제신보 59년 11월 4일자에 보도된 내용은 “국산 라디오 등장”이란 제목과 함께 값싸고 외국제품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평을 실었다. A-501 라디오는 왕관 마크와 금성의 영문표식 등이 외쪽에 새겨져 있었고 국산화율은 60%로 우리나라 전자공업 발전에 있어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이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서독인 헹케(H.W.Henke)를 기술고문 격으로 초빙, 판매 이익금 중 2%를 지급 한다는 조건으로 생산설비 및 부품을 들여왔다. 또한 이 제품을 개발 하는데 참여한 사람으로는 이공계 출신인 하동 중학교 교사였던 김해수(金海洙)씨가있다. 금성사 공채 1기생으로 기능공 2명과 함께 일본제 라디오인 산요를 기본 모델로 설계를 시작했다.
초반부터 헹케와 김해수는 제품설계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즉 라디오 캐비닛에서부터 내부구조에 있어서도 헹케는 ㄷ자형 새시를 고집한 반면에 김해수는 평판형을 추천, 기술감독인 헹케와 실무자 간의 의견대립은 계속 되었지만 결국은 일본제를 모델로 삼자는 김해수의 의견을 존중하게 된다. 여기서 A-501이라는 모델 이름은 A자는 A7에서, 5자는 5구식 라디오란 것이고, 1은 제1호란 의미였다. 이 제품의 설계 특징은 전기사정을 고려해 50볼트 낮은 전압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진공관 라디오에서 중요한 볼륨 스위치를 국산화 시킨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 이었고 기술수준에 비추어 볼 때 불가능 했다.
사용 부품에 있어서도 진공관, 스피커, 저항, 더스트 코어, 볼륨 컨드롤 등은 수입 했고, 전원스위치, 섀시, 트랜스, 전원소켓 등은 자작 한 것을 사용하는 등 매우 공들인 제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모든 공정이 우리나라에서도 라디오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정신 하나로 만들어 졌으나 전자제품이 의욕 만으로 해결 될 수 없듯이 몇 가지 부품이 자작 과정에서 문제점으로 노출 되기도 했다. 1959년 8월 시작품(試作品)이 완성 되어 상공부 제 4133호로 상표 등록까지 마쳤고, 11월 15일 드디어 대망의 소리통인 국산 라디오 탄생했다. 초기 생산은 약 87대로 알려져 있고 5종류의 컬러로 소비자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었다. A-507의 당시 판매가격은 약 2만원 정도였고, 외국제 가격은 3만 3천원, 국산부품을 처음부터 60%나 사용해 만들었다.
한국 오디오의 성장
60년 초기에 박정희 정부는 우리나라가 전자공업 국가로서 발전 하는데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 군사정부가 수출산업에 대대적인 지원을 시작한 1960년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전자공업 육성안이 발표 되면서, 전자 공업 협동조합이 창립 되고 전자진흥 공업법이 제정 되기에 이른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도 한 몫을 했다. 60년대 전후를 기점으로 출발한 음향 산업은 라디오 조립에서부터 시작, 새마을 운동 보급에 따른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에 힘입어 수많은 스피커 제조회사 들이 등장한다. 삼미기업, 고려전자 등을 위시해 몇몇 중소기업 들이 라디오용 스피커를 제조해 라디오를 수출하던 오리온 전자, 금성사, 천우사 등에 납품, 점차 전자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콘솔형 전축 등장초기는 라디오에 크리스탈 카트리지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든 형으로 상당한 인기가 있었고, 이에 필요한 부품들은 시장에 나오자 마자 팔려 나갔다.
우리나라 음향기기 산업에 자주 등장하는 천일사의 별표 전축이나 성우전자의 독수리표 전축이 등장한 70년대 까지만 해도 이런 제품이 전축 행세를 했다. 당시의 전축은 일본 제품을 그대로 복사한 콘솔형으로 디자인이 요란하고 거의 다리가 4개 달린 형이다. 일반가정에서 전축을 사용하고 있다면 경제력이 있는 집안으로 인식 되었으며, 부의 상징적인 표시 이기도 했다. 별표나 독수리표 전축은 일체 형으로 된 스피커 인클로저가 좌우에 부착되어 있고, 중앙 상단에는 라디오 수신기가 내장된 앰프, 그리고 하단에는 레코드 플레이어가 설치된 형이다. 제품에 따라서는 레코드 플레이어를 상단에 설치해 놓은 것도 있고 장식장에 자개를 박은 고급형도 판매 되었다. 이들 전축들이 가장 인기 있었던 곳은 고급요정 이나 술집이었는데, 이때에 우후죽순처럼 불어난 다방에 필수품이 될 정도였다. 우리가 라디오에 한참 열을 올리기 시작할 때 독일이나 일본은 진공관 라디오에 수동식 레코드 플레이어를 탑재시켜 놓은 일체형 전축을 내놓고 바야흐로 LP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일본의 내셔날, 빅터, 독일의 그룬디히 그리고 미국의 마그나복스 등 이었는데, 이 때의 제품 다수가 국내시장에서도 판매되었다.
천일사 별표전축과 성우전자의 독수리표 전축이 등장한 60~70년대 까지 진공관을 사용해 만든 전축들이 우리나라 오디오 산업의 전성기를 구가 했는데 대표적인 회사가 천일사의 별표전축과 성우전자의 독수리표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이 기기들은 우리나라의 진공관 전축의 일대기를 기록했다고 보는데, 금성사의 진공관용 라디오 A-501이 소개되기 이전에는 수공으로 만들어져 서울의 청계천 주변에서 판매된 라디오식 전축이 많았다. 이 제품들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중고 라디오를 해체시켜 배터리용 레코드 플레이어를 부착시켜 만들었다. 60년대부터 70년대 사이에 전축하면 별표를 비롯 독수리표, 활표, 바이킹, 엠파이어 등이 있었다. 60년대 초 전축은 거의 라디오를 개조시켜 제작 된 것으로 대형은 물론 요란하게 치장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울긋불긋한 전등과 요란한 장식 등이 부착되어 있었고 고급품은 호마이카 칠을 한 자개장처럼 랙이 내용보다 더 중요한 몫을 차지 했다.
천일사의 별표 전축은 1978년 태광산업으로 넘어갔다. 이 회사가 만든 전축이 전세계에 수출 될 때만 해도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사업을 확장했으며, 우리상품, 우리기술, 우리힘 이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천일사의 별표전축과 함께 성우전자가 내놓은 독수리 표를 들 수가 있는데, 성우전자는 1957년 진공관 시대에 천일사 별표전축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문화 전파사란 상호로 출발했다. 트랜지스터 앰프 등장으로 오디오 산업이 급진전하여, 전축 소자로 사용된 트랜지스터의 등장은 설계에서부터 디자인, 그리고 성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으며, 인건비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았던 중소기업은 호경기를 맞이하게 된다. 반영구적인 트랜지스터의 등장은 오디오 업계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었고 혁신적인 회로설계와 함께 참신한 디자인의 제품들이 등장하여 소비자들로 하여금 구매의욕을 갖게 했다.
70년에 와서 우리나라의 오디오 산업의 본격적인 시작은 바로 트랜지스터 등장이라고 볼 수 있다. 진공관으로부터 트랜지스터로 이어지는 시기에 등장한 전축으로는 바이킹이란 상표가 있다. 명동입구 등에 전시장을 마련, 대대적인 판매에 임하기도 했다. 바이킹 전축은 당시 4대 유명 일간지에 3일에 한번 광고를 낼 정도였으며, 한 달 신문 광고료만도 약 280만원이 지출 되었다고 한다. 공장은 청계천 8가에 위치한 벼룩시장 근처의 중앙시장 쪽이었는데 랙과 스피커 유닛, 그리고 부품 들을 국내 외에서 납품받아 조립한 것으로 거의가 월부판매 방식으로 운영했다. 당시의 전축은 출력표시도 엉망으로 5~10와트 정도의 라디오 전축에 스피커 유닛이 큰 것을 사용했을 때는 20~30와트 라고 했으며 소형 유닛일 때는 그보다 약하게 표시해 놓았다. 다시 말해 출력이 낮은 제품에 대형 스피커를 연결하면 청감상 음량이 크게 들리므로 출력을 높게 표시 해 두었다.
당시 전축 시장은 몇몇 업체를 제외 하고는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사용되는 트랜지스터 부품도 국내조달은 거의 불가능해 외국 수입에 의존 하고 있었다. 이들 부품중 상당량이 밀수로 반입 되기도 했고 전축은 사치품이란 이름 하에 과다한 세금이 부과 되었다. 그 당시 전축 사업에 관여 했던 사람이 과다한 세금이 우리나라 오디오 산업을 가로막는 장애요소라고 했듯이 중소 기업인 들은 거의가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전자 부문에서 라디오가 단일 품목으로는 가장 인기가 있었고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소자가 바뀌게 되자 점차 다양한 종류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음향기기의 핵심 부분인 스피커는 거의가 외국제품이었으나 몇몇 중소기업인들이 이 부분에 적극 참여, 국내 제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마그네트형에서부터 시작, 다이내믹형 스피커를 만들어냈다. 그 당시 순수한 국산재료를 사용, 제작한 다이내믹형 상표는 코스모스였으며, 같은 계열의 삼미사는 웨스턴이란 상표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대로 국산 스피커를 제조하게 된 것은 당시 정부와 민간단체가 주동이 되어 새마을 운동으로 스피커 보내기 붐이 일어 난 것이 주 원인 이었다.
전국 유선방송 연합회가 주축이 되어 극장 입장객을 상대로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스피커 제조 부분에서 삼미사는 김문주 형제에 의해 설립 되었고 실질적인 사주는 동생으로 엔지니어 출신이다. 고려전자공업사로부터 상호를 마샬로 변경, 본격적인 스피커 제조에 뛰어든 마샬은 한국전쟁 중 단신 월남, 초기부터 음향기기에 뛰어들었는데 70년대 국내시장은 물론 외국까지 한국 스피커 상표를 널리 알려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70년대부터 80년 사이에 레코드 플레이어로 이름을 떨쳤던 신일산업(지금은 가전제품 생산)의 김덕현씨도 국내 오디오사에서 손꼽을 수 있는 분이다. 국가정책에 힘입어 출발한 국내전자산업은 70년을 향해 더욱 힘찬 발전을 거듭해 왔는데, 이때는 누구나 한번쯤 전자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여하간에 우리나라 음향기기는 70년대를 기점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그 중에 70년초 혜성처럼 등장한 동원전자를 들 수 있다. 동원전자는 70년 이 회사 창립 20주년을 맞아 주식회사 인켈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 회사를 설립한 조동식씨는 그가 전자산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7년 일본의 전자시장인 아키하바라를 둘러본 후 였다. 특히 전자공학을 연구한 김완희 박사의 권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1972년도에 설립한 삼풍전자상사는 전자산업과 인연을 맺은 첫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일동제약의 윤용구 사장과의 만남이 오디오 산업에 진력하게 된 계기가 된다. 일동제약 윤용구 사장의 권유로 결심을 굳힌 조동식 사장은 100% 외국법인(윤용구의 아들인 윤두영씨는 당시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고 외국인이 투자한 회사로 한국 EV를 설립했음)인 한국 EV의 최고 경영자로 참가 하면서 부득이 상호를 인터내셔널 코리아 전자주식회사로 변경하게 된다. 현재 해태전자가 소유하고 있는 인켈이란 회사 이름은 당시 이 회사가 TELEX 전보 약자로 사용해 온 것으로 인터내셔널의 IN을, 코리아에서 K첫자를, 그리고 일렉트로닉에서 EL를 딴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73년 3월 7일 정관을 개정하고 탄생된 이 회사는 초기에 전축 바늘인 카트리지와 헤드폰을 생산, 현재 위치인 도봉동에 인켈의 아성을 다져가기 시작했다.
70년 초반 설립된 스피커 시스템 전문 제조 메이커로 KEP를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이 회사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전자부품공업으로 오직 스피커시스템 제조만을 위한 메이커로 제일동포인 김용태씨에 의해 1973년에 설립되었다. 또한 서음전자는 최초로 시도한 검정색 전면 색상은, 80년 초기까지도 오디오 시스템의 전면패널 색상이 거의 실버 계통의 밝은쪽이 대부분이었으나, 서음전자가 과감하게 검정 색상을 오디오시스템의 새로운 패션으로 등장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검정 패널의 스트라우트 제품은 색다른 감각을 주었으나 검정 색상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소비자 들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유럽형의 오디오 시스템의 독특한 면을 알리려고 했던 이 아이디어는 결국 국내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밝은 미래를 내다보며 시작된 사업이 여러 가지 내부사정과 경영의 문제에 직면하고 설상가상 석유파동으로 인한 수출부진등에 의해 결국 스트라우트란 이름은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 스트라우트 제품에 관련해 인상 깊었던 것은 당시 신문지상이나 잡지 등에 “소리는 안다, 선택할 오디오는 없었다.
매킨토시와 비교해 보십시오”란 선전문구였다. 스트라우트가 상품으로 등장시킨 검정 색상은 이후 1~2년후 모든 오디오 시스템이 이 색상을 채택하기 시작, 지금까지도 건재하고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빛을 보지 못한 것은 남보다 너무 앞섰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금에 와서 다시 한번 해보게 된다. 현재 오디오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대부분의 회사들은 70년대를 기점으로 설립되었다. 대표적인 메이커로는 아남, 롯데 파이오니아, 인켈 등을 들 수 있고, 천일사를 인수한 태광산업, 그리고 기존의 라인을 늘여 음향기기 제조를 시작한 금성사나 삼성전자도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참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 1967년 설립된 성음사는 금성사의 전신이다. 1974년 대우전자는 경영난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한전선의 오렉스를 인수하면서 음향기기 대열에 끼어 들었다.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는데도 국내 오디오 산업에 있어 70년대를 떠올리면 어쩌면 먼 옛날 이야기를 하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
천일사의 별표 전축이나 독수리표, 바이킹 전축 등의 월부판매 광고 플랭카드가 변두리 길거리에 나부끼기 시작했고 충무로나 세운상가에는 거의 대부분 외국제품이 판을 쳤다. 70년대 외국 음향기기가 국내시장에 소개된 경로를 살펴보면 미군 PX에서 유출된 상품과 서독 쪽에 진출한(당시 광부와 간호원) 인력편에 의해 반입된 유럽 오디오 제품, 그리고 월남전에 참가한 군인들에 의해 들여온 일본 오디오 제품들이었다. 80년대의 우리나라 오디오 산업은 2차 오일 쇼크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그 동안의 경제 성장에 힘입어 인켈을 비롯 롯데, 태광, 삼성, 금성사, 대우, 아남 등은 계속 하이파이 사업이 큰 못을 차지하며 현재까지 와 있다. 특히 초기에 일본 기술을 제휴한 제품이 인기를 끌기시작 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오디오 시스템을 가지고 신제품 품평회를 가진 회사는 한국 내셔널 전기주식회사(현재의 아남 전자)였다. 아남과 기술제휴를 맺고 있던 테크닉스 상표는 우리나라 오디오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으며 특히 레코드 플레이어 부분에서는 타회사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인기상품이었다.
외국과의 합작회사로 1973년에 설립, 80년 초 내수용을 만들어 판매 했다. 이 회사가 국내시장에 내놓은 초기의 제품은 종합 앰프인 리시버형이었는데, 이 모델 또한 테크닉스 제품처럼 일본의 파이오니아 회사에서 판매하고 있는 것과 같은 모델이었다. 이 회사는 오디오 시스템에서 가장 먼저 단품판매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0년 초기 국내 오디오 시장은 동원전자의 인켈 상표가 그 아성을 쌓기 위한 기초를 겨우 마련할 때여서, 전량 수출만 하던 파이오니아 오디오 제품의 국내 판매 허용은 경쟁상품으로 경영진이나 대리점을 긴장시켰다. 그리하여 파이오니아 제품은 국내시장에 제품을 판매하기 시작 하면서 음향기기 전문회사로 인켈과 함께 초반부터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였다. 롯데는 음향기기 전문회사로 인켈과 함께 초반부터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였다.
롯데는 음향산업에서 음의 출구쪽인 스피커에 관한 연구와 개발에 치중하면서 한동안 외국 유명메이커의 제품과 비교 시청회를 개최함은 물론 소비자들에게 스피커 제일주의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제품이든 간에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제품의 성능은 물론 가격 등에서 소비자들에게 유리해 질 수밖에 없다. 한편 별표전축이란 상호를 간판으로 출법한 태광산업은 그 동안 일본의 도시바와의 기술제휴를 한 이후, 이렇다 할 히트 상품을 내지못했다. 국내 오디오산업을 최초로 시작해 별표전축이란 이미지를 업고 자신만만 하게 도전한 태광은 그 동안 군납 등을 통해 안간힘을 써왔으나 국내시장에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컴포넌트인 토파즈란 패션 상품을 내놓아 보급형 오디오 시스템 매출의 제1인자로 부상하게 된다.
토파즈 시리즈가 롱런하자 이번에는 ‘쾨헬’이란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대우전자가 오디오 산업에 뛰어들면서 내놓은 마제스타는 그 동안 어떤 이유에서인지 슬그머니 그 자취를 감추었다. 스피커 시스템에서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또 한가지 일은 현재 해태전자가 소유하고있는 에어로 시스템사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당시 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유신영이 3차원 음향이라는 에어로 할러소닉 음향이론으로 개발한 스피커로 한때 떠들썩했으나 지금은 먼 옛날 이야기로 남아 있다. 80년대를 거쳐 90년 후반기를 맞기까지 우리나라 오디오 산업은 무수한 발전을 해왔으나, 그것이 질 보다는 양에 치중하여 오디오 본연의 문제인 음질문제를 등한시 하여 고급화에 실패 하였다. 이 때문에 최근 수입 자유화에 따른 저가의 동남아산 일본제품과 고급 외산제품에 밀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같은 문제는 꾸준한 기술개발과 음향전문가를 육성하지 못한 결과로서, 한국 사운드 이미지가 흐려지고 있는 형편이다.
국내 하이엔드 오디오의 약진
그 동안 국내 오디오 업계는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다. 오디오 전문 메이커인 주식회사 인켈(Inkel)은 미국 SAE에 OEM(주문자 상표방식)으로 수출하게 됨으로서, 선진 고급 오디오의 기술축적이 이루어 졌으며, 또한 셔우드(Sherwood)란 미국 브랜드를 인수하여 제품을 개발 함으로서, 외국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또한 AV시스템 및 콤포넌트 전문업체인 아남전자와 태광산업도 그 동안 꾸준하게 하이엔드급 제품을 개발하여 미로형 스피커시스템을 내놓는가 하면 프로로직 기능의 AV 앰프, HDCD 플레이어 등을 발표, 국내 오디오 산업이 하이엔드로 나가는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 그런가 하면 96년 미국에서 열린 Hi-Fi 96쇼에 삼성전자를 비롯 진 사운드(Gin Sound) 그리고 실바웰드(Silvaweld) 등이 하이엔드 제품을 출품하여 관심을 끌었으며, 이는 해외의 평론가나 매니아들에게 한국 사운드를 알리는데 일조를 하였다. 또한 최근에는 불모지인 스피커 업계에도 크리스(Criss Speaker)등이 한국 하이엔드 스피커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삼성전자의 엠퍼럴 시스템은 국내에서 개발한 하이엔드로서는 최상급의 제품으로 전세계 오디오 시장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기도 하였다. 이들 회사들이 출품한 신제품들을 전세계 유명 회사의 제품들과 비교해 볼 때 디자인, 성능 그리고 음질에서도 당당히 경쟁할 만큼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한 97년 미국 CES 동계 라스베가스 하이엔드전에 태광산업이 매니아용 진공관 앰프를 비롯하여, 백로드형 스피커 하이엔드전에 태광산업이 매니아용 진공관 앰프를 비롯하여, 백도드형 스피커 시스템을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이제 국내 하이엔드 시스템 개발은 대기업이 하이엔드 오디오 개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이엔드 오디오 제품에 도전하고 있는 업체들은 장기적인 기술개발과 품질향상, 전문 엔지니어를 양성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은 단기전인 이익과 대량 생산에 의한 수익만을 생각하여, 하이엔드 제품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이엔드 오디오는 좋은 부품과 숙련된 기술자, 자본만 투여 한다고 달성 될 수는 없다. 하이엔드는 기계 이전에 악기와 가까우므로, 제작자의 혼과 개성이 녹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경영자는 개성 보다는 겉으로 들어나는 내용을 중시한다. 그 예는 일본 오디오산업에서도 찾을 수 있다. 또한 언더글라운드의 업체들은 대부분이 마케팅과 자본력의 부족으로 경쟁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이 만들어낸 제품 중 우수한 것이 있지만 장기간에 걸친 지속적인 연구와 기술개발에 따른 자금력이 미약해 결국 경영상의 어려움을 맞게 된다. 스피커 업계를 예로 들면 거의가 제3국에서 생산되는 저가격 스피커 제품과 가격 경쟁에서 밀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써 스피커 유닛 제조 업계는 계속 위기를 맞고 있으며 앞날이 불투명한 상태다.
스피커 관련 사업은 자동차용인 카 오디오를 비롯 컴퓨터, 홈 시어터(Home Theater)에 이르기까지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이나 스피커 제조산업이 계속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그 동안 기술이나 연구개발에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안일한 기술이나 제조 방식으로는 활발해 지려면 이들 제품을 뒷 받침해 줄 수 있는 고성능의 부품개발이 이루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기술 습득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음향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워지지 않고서는 하이엔드 제품을 개발 할 수 없다. 지속적으로 선진국의 높은 기술을 연구하는것도 중요하지만, 하이엔드는 좋은 부품과 신기술 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높은 안목과 음악적 소양을 갖춘 설계자에 의한 오랜 경험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제조회사들이 단기 이윤이 아닌 장기적인 안목으로 기술개발에 과감한 투자와 발상의 전환이 국내 오디오 산업을 발전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