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 단상 12/가족묘家族墓]구슬픈 사부곡思父曲 ‘아버지의 강’

[알록달록]

[찬샘 단상 12/가족묘家族墓]구슬픈 사부곡思父曲 ‘아버지의 강’

가을바람이 소슬한 저녁녘, 툇마루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며 아홉 살 여자아이의 ‘아버지의 강江’을 듣고 있다. <아- 저녁바람에 억새 불고 강기슭에 물새 울면/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버지의 뱃노래/사랑으로 날 키우시고/뱃노래 불러 날 재우셨던 아아아- 아버지/불러봐도 대답없이 흐르는 저 강은 아버지의 강이여!> 어쩌면 저 나이에 저렇게 농익게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김태연은 트롯신동일 듯하다. 그 노래를 듣다가 불쑥 엊그제(지난주 수요일) 가족묘지의 묘제단을 끝내 만드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올라 울컥했다.

나로서 현조부모와 고조부모는 묘비만으로, 증조부모는 둥근 합장봉분으로, 조부모는 각각 단일봉분으로, 2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부계父系의 유일한 친척(조부가 4대 독자)으로 세상에 한 분뿐인 숙부는 직사각형봉분으로 모셔져 있는 곳이 우리집 가족묘지이다. 숙부는 장례를 치르며 숙모와 합장을 대비해 묘비를 세웠으나, 어머니는 아직 묘비를 세우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민족의 명절 추석을 앞두고 조상님 묘 앞에는 상석上石이 있으나 상석이 없는 어머니와 숙부의 묘가 마음에 걸리셨던 듯하다. 하여 아이디어를 내신 게 “이제 유교문화도 다 죽고, 제사든 시제든 다 무슨 필요일까만, 그래도 1년에 한번이라도 성묘를 할 때 윗대 조상님들 상석에 일일이 제물을 차릴 필요없이 산소 맨아래에다 ‘단일상석’을 만들어 합동으로 술 한 잔이라도 따라드렸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자식들을 생각한 마음인 줄을 왜 모르랴.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즉각 찬성을 한 후 곧바로 석재石材집에 연락을 해 작업이 진행됐다. 당신으로서는 어쩌면 마지막 하는 집안일일 것이다. 비용도 아버지가 전적으로 책임지는 데야 반대할 일이 무엇이랴.

나는 나대로 해드리고 싶은 게 있었다. 이 참에 아버지와 어머니 묘비를 세우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함자와 생일生日은 새겼지만 몰일沒日은 훗날을 기약, 남겨놓을 수밖에 없는 일. 그날이 닥치면 출장을 와 새겨준다고 한다. 당신이 낳은 총생들이 아닌 당신이 직접 당신과 어머니의 묘비를 직접 세운 것이다. 예정된 일이긴 하나 <운대초계최공세턔지묘 雲臺草溪崔公世泰/배유인진주강씨기순 配孺人晉州姜氏奇順/지묘之墓>라고 아버지의 묘비까지 적시해놓으니, 자식으로서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기초한자조차 모르는 우리의 후생들을 위하며 <초계최씨판관공파가족묘>에는 한자를 병기해놓았다. 우리의 아버지와 나는 다섯 분께는 청주 한 잔씩, 다섯 분께는 식혜 한 잔씩을 올려드리고, 삼실과三實果(곶감, 대추, 사과)로 간소하게 제상을 차려 성묘를 드렸다. 이렇게 해놓은 가족묘지를 뒤로 한 채 지팡이에 의지한 채 더듬더듬 내려오시는 95세의 아버지 뒷모습이 어찌나 짜안하지 혼났다. 그 마음이 어떠셨을까? 짐작할 수는 없지만 만감이 교차했을 터.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90년의 기억들, 아버지는 놀랍게도 5, 6세때의 일까지 선명하게 기억하신다. ‘아, 나의 한 생이 이렇게 가는구나’ ‘이제 마지막 산소일까지 했으니 홀가분하게 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셨을까?

아버지는 그동안 참으로 많은 큰일들을 하나하나 척척 수행하셨다. 27세에 청상과부가 된 할머니께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효도를 한 효자였다. 또한 전남 구례에서 5대조때부터 단절된 초계草溪최문崔門의 족보도 찾아 이으셨다(일제강점기때 구례현감이 발행한 제적증명서를 근거하여). 할머니의 효열비를 30여개의 호남향교 통문通文과 성균관장의 승인을 받아 동네어귀에 세웠으며, 150평의 가족묘지도 별도 등기로 조성했다. 4남3녀를 낳아 기르고 가르치며 모두 가족을 이루게 했다. 그 밑의 손자손녀가 외손주 포함하여 모두 15명, 증손주들도 9명이 된다. 어머니와 72년의 해로偕老가 어디 흔한 일이던가. 임실문화원에서는 부모님의 회혼례도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2016년에는 <총생들아, 잘 살거라>라는 타이틀로 휴먼다큐멘터리 <인간극장> 5부작에도 아픈 어머니와 함께 주인공으로 출연하셨다.

아버지, 이제 들판을 망연히 바라보며 먼저 간 어머니를 그리기도 하고, 복지관에 출퇴근하며 나날을 소일하고 계신다. 아직까지는 보행이 크게 불편하지 않아 지금도 틈만 나면 밭일에 매달리는 천상 농사꾼 우리 아버지의 뇌리에는 무슨 생각들이 오고갈 것인가. 모르긴 몰라도 지나온 한 평생이 허망하여 마음이 무한정 헛헛하지 않을까 싶다. 무슨 좋은 말을 해드려야 할지 마땅한 말이 없다. 간간히 효녀 딸들이 찾아와 말동무를 해주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일 듯. 데면데면한 아들과는 왠지 모르게 서먹하여 자연스럽게 소통이 되지 않는다. 이제 당신의 마지막 의무인 양 가족묘문제도 정리하였다. 1년에 한번을 찾든, 몇 년을 찾지 않든, 당신의 손에서 이미 떠났으니, 총생들의 몫일 뿐이다. 그날이 언제일지 몰라도 돌아가시면 <아버지의 강>을 부르며 울게 될까? 가만히 <아버지의 강>을 따라불러보며 아버지의 고독과 아버지의 한 생을 이해해 보려 한다.

김태연의 노래는 정점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저 강 건너 나루터에 물새 한 마리 슬피 울면/강바람에 검게 타신 아버지가 그리워/사랑으로 날 키우시고 뱃노래 불러 날 재우셨던 아아아- 아버지/불러봐도 대답없이 흐르는 저 강은 아버지의 강이여> 어쩌면 저런 노래를? 아이가 무엇을 안다고? 살풋 눈물이 난다. 최근 어느 갤러리에 전시된 대나무지팡이(대 속에 탄소섬유를 넣어 엄청 튼튼하다던가)가 너무 탐이 났다. 자식이 부모께 지팡이 선물을 하면 예禮가 아니라는 알고 있었지만, 사드리고 싶어 하니까, 옆에 같이 있던 한 대학교수가 지갑을 털어 갤러리 대표에게 기만원의 현금을 쥐어주는 게 아닌가. 그 친구는 불과 3번 밖에 만나지 않은 사이인데, 이런 것이 '한 감동' 이 아니고 무엇이 감동이겠는가. 고맙네. 예를 아는 멋진 친구여!

[따르릉길]

富보다 孝와 禮를 자손들에게 잘 알려주신
아버님의 훌륭하신 마음이
가장 큰 유산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부럽고 또 부럽고
감격스럽습니다.
효자 아래 효자 난다고
훌륭한 집안입니다.

[우포 장준상]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어르신!
우천 덕분에 그 삶을 배우게 되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