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라의 할아버지
북평읍 구미마을 부자였음.
자식들 공부시키기위해 강릉으로 이사하기 위해 소 세 마리와 농토를 팔고 미리 보아둔 강릉의 12칸 짜리 집을 사기 위해 나갔으나 큰 아들이 농안의 돈을 들고 만주로 튀었음.
작은 아들이던 김우라 아버지가 625 때 수색대에 근무하다가 휴가 나와서 장가서 나은 아들이 김우라임.
큰 아들 때문에 화병을 앓던 할아버지가 김우라가 태어나자 만세삼창을 불렀음.
김우라 아버지
6년만에 제대해서 김우라 포함 2남 2녀를 더 낳았음.
김우라 본인
19살 까지 평범한 산골 소년이었음.
등하교길이 3 시간 걸렸음.
산골소년 답게 맷돼지 사냥, 엿치기, 화투, 윷, 닭서리, 산토끼 꿩잡기, 눈썰매 놀이 등등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삼척 MBC 가 개국하자 라디오에서 ‘별이빛나는밤에’에서 나오던 노래를 따라 부렀다. 김우라는 노래실력이 나날이 늘었다.
김우라는 ‘김우라’라는 가명으로 노래신청 엽서를 보냈다.
주로 오기택 김상진의 노래를 신청했다.
지게에 장작을 지고 북평장까지 가서 판돈으로 엽서를 샀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눈에서 벗어나고, 술마시고 돌아다니면서, 오후 3시가 되면 이장집 전화로 노래신청을 하면서 DJ 와 이야기도 나누었다.
가수 지망생 선발 대회에 입상하고 작곡가를 따라서 서울로 갔다.
당시 짜장면 20원, 기타 2500원, 소 한 마리 9500원 할 때, 아버지에게 간천을 하여 15000원을 챙겨서 서울로 갔다.
서울로 와서 뚝섬에 방을 얻고, 기타를 사고, 발성연습을 했다.
1년만에 유니버설레코드사 작사 장석일, 김태영 작곡 편곡의 ‘사나이 고향’을 300장 찍어서 각 방송국에 보냈다.
사무실에서 PR 비용을 부단하라고 40만원을 요구했으나 소 네 마리 값을 구하지 못해서 동해로 내려왔다.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삼척문화방송 초청으로 이동교 남교 형제의 밴드로 ‘고향이좋아’ 사나이고향‘ ’도라지고갯길을 불렀다.
양복은 이장옷을 빌려 입고 갔다.
삼척 문화방송 초청 가수로서 그의 가수 인생은 끝이 났다.
그후 쌍용 시멘트 광부로 40년을 보냈다.
김우라의 지금 나이는 71살이다.
사나이 내 고향 가사는 다음과 같다.
“무심하게 흘러가는 저 하늘 흰구름아
사나이 고향소식 너는 알겠지
말을 해다오 말을 해다오
내 눈물 씻고 달랠 내 고향
내 곁에 있다해도 고향만은 못 잊어
내 가슴에 젖어있네 그리운 내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