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가는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꼭 둘러보게 되는 성당이 있다. 그것은 엄청난 규모의 돔 형태로 이루어진 두오모 성당이다. 원근법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 1377~1446)가 설계한 이 거대한 돔은 흥미롭게도 치밀한 설계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중세시대에 지어진 대부분의 성당은 시공을 위한 설계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두오모 성당의 장엄한 돔의 비밀은 완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은 정확한 설계도면 없이 건축물을 짓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알고 보면 건축에서 설계도가 사용된 것은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오늘날처럼 시공을 위한 설계도면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19세기 중엽 신고전주의 건축가인 비올레르뒤크(Eugène Viollet-le-Duc, 1814~1879)로 알려져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계산된 도면을 사용할 경우 건축물은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치명적인 단점도 존재한다. 건축 과정에서 도면으로 수량화할 수 없는 불규칙한 곡면의 형태는 배제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직선과 사선, 원이나 타원의 호와 같은 규칙적인 선만 시공이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건축물의 형태는 획일화되고 만다.
근대 이후 모더니즘 건축물이 획일적으로 직사각형의 반듯한 형태를 띠는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건축가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1928~2000)는 일부러 울퉁불퉁한 형태의 불규칙한 곡면을 사용한 건축물을 만들었다. 그는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직선으로 이루어진 설계도면을 무시하였다. 정량화한다는 것은 현실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비올레르뒤크, 노트르담 대성당 cathédrale Notre Dame de Paris, 1345
훈데르트바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Hundertwasser house, 1986
중세와 달리 근대에는 계산된 도면을 통해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건물을 짓고자 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신고전주의 건축가인 비올레르뒤크가 복원하고 첨탑을 설계했다. 사람들은 현실을 계량화하는 방법을 연구하였으나 현실을 수량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훈데르트바서는 고전주의의 획일적인 건축에서 벗어나고자 불규칙한 곡면을 이용했다.
사람들은 현실을 계량화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끊임없이 계량화하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수량화할 경우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역설에 빠지고 만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철학자 제논(Zenon, B.C. 490~B.C.430)이 제시한 그 유명한 역설 또한 현실이 지닌 본성을 잘 보여준다. 잘 알려진 대로 제논의 역설은 이러하다. 어떤 사람이 활에 화살을 꽂아 10미터 떨어진 과녁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이제 화살은 활을 떠나 과녁을 향해서 날아간다. 정확하게 조준된 화살은 순식간에 과녁에 도달할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제논에 따르면 이 화살은 결코 과녁에 도달할 수 없다. 제논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명한다. 활을 떠난 화살은 먼저 활과 과녁의 중간지점(A1)을 통과해야 한다. 그다음에 화살은 그 중간지점(A1)과 과녁 사이의 중간지점(A2)을 통과해야 한다. 또 그다음에 화살은 이 중간지점(A2)과 과녁 사이의 중간지점(A3)을 통과해야 한다.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말하자면 화살은 A1, A2, A3, A4, A5, A6······의 중간지점을 통과해야만 과녁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중간지점은 무한하기 때문에 결국 화살은 무한한 지점을 통과해야 하며, 무한한 시간이 걸리게 된다. 그리하여 제논은 결국 활을 떠난 화살은 결코 과녁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제논의 논증에 어떠한 오류가 있을까? 이를 수학적으로 해결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지만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서 베르그송은 제논의 역설을 아주 다른 각도에서 해결하였다. 그는 제논의 역설이야말로 오히려 현실의 운동을 잘 설명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제논의 역설은 사람들이 운동에 관해서 지니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사람들은 운동을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공간적 좌표의 변화로 생각한다.
이에 상응하여 특정한 공간의 한 지점에 하나의 시간이 대응한다고 믿는다. 공간적 좌표가 무한히 분할할 수 있듯이 시간적 좌표 또한 무한히 분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그것을 요소들로 분해하고 단절하여 계량화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베르그송은 시간을 계량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제논의 역설을 발생시킨 원인이라고 본다. 애초에 시간은 공간적으로 분절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분절시켜서 본다. 우리는 항상 시간을 말할 때 시계에 나타난 계량화된 수치를 생각한다. 우리는 아침식사와 점심식사 사이에 다섯 시간의 간격이 있다는 식으로 계량화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생활을 위해서 편의적으로 시간을 공간화하고 단절시킨 것일 뿐, 시간 자체의 특성은 아니다.
우리가 만약 공간적인 측면에서 사고한다면 한 지점에서의 운동은 절대로 발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운동은 하나의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시간적 경과를 거치면서 이동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논의 궤변처럼 하나의 점에서는 운동이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제논이 활을 떠난 화살은 결코 날아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운동을 하나의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공간적인 사건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각각의 한 점에서 운동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 운동이 단순히 공간적인 이동이 아닌 하나의 시간적인 사건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적인 사건, 즉 시간은 전적으로 공간과는 다른 것이며 결코 공간적 좌표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순수한 시간은 공간적으로 분할되지 않으며 지속될 뿐이다. 베르그송은 이렇게 분할되지 않고 공간화될 수 없으며 계량화할 수없는 순수한 시간을 일컬어 ‘순수지속(durée pure, pure duration)’이라고 부른다. 공간적으로 계량화될 수 없으므로 이 순수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오로지 직관(intuition)에 의해서만 파악될 뿐이다. 약속시간에 늦은 연인을 기다릴 때의 5분과 고된 작업 중에 갖는 5분간의 꿀맛 같은 휴식은 같은 5분이 결코 아니다. 이 차이는 계량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느껴질 뿐이다. 이 질적인 차이를 가르는 직관적인 시간이 순수지속인 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운동, 나아가 운동하는 생명체의 근원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순수지속’이다.
잘 알려진 대로 베르그송은 영화라는 매체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 이유 역시 순수지속과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초당 24개의 정지된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흔히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이 정지된 화면의 움직임을 우리의 눈이 감지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사진 속의 인물이나 사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지각된다. 말하자면 영화에서의 움직임은 실제 현실의 움직임이 아니며 그것을 공간적으로 분할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초당 수백 개의 프레임 혹은 수천 개의 프레임으로 구성된 디지털 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베르그송은 현실의 운동 자체는 영화의 화면에 담을 수가 없다고 보았다. 베르그송이 보기에 영화야말로 시간을 공간화한 대표적인 매체인 셈이다. 그러나 운동에 관한 그의 이론은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들뢰즈라는 철학자에 의해서 영화가 지닌 순수지속으로서의 운동을 설명하는 이론적 토대로 사용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날아가는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