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수심 50미터에 들어갔다 나온 적도 있고, 바다 밑 48미터를 통과한 적도 있습니다. 수심 50미터는 산소통을 매고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왔고, 48미터는 거가대교와 연결되어 있는 해저터널을 통과하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분명히 수심 50미터의 죽음의 바다 속에 들어갔다 다시 나왔고,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는 수심 48미터의 깊은 바다를 통과했습니다. 산소통에 의해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왔고, 터널을 통해 그 바다 속을 통과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냐 하면 세례에 대한 이야깁니다. 노아의 때에 방주가 없으면 물로 바로 들어가야 하므로 반드시 죽음입니다. 그러나 노와와 8식구는 방주로 인해 그 물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세례(벧전3:21)라고 말씀합니다. 죽어야 하는데 방주로 인해 살았다는 거죠.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과 우리 가운데 부활로 임하신 표라고 설명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로 임하지 않는 사람은 물이 심판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부활과 생명으로 임하신 사람에겐 물이 구원입니다. 세례는 잠기는 것인데 죽을 것은 죽고 살 것은 사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도 세례라고 하십니다(고전10:2) 죽지 않을 만한 얕은 강을 건너는 건 세례가 아닙니다. 잠겨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물에서 건짐을 받은 모세에게 속하여 물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아무런 영적인 보장이 없는 애급의 군대는 다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물세례는 한쪽은 심판이며 한쪽은 구원이 됩니다. 그 세례를 통해 노아 때와 같이 땅이 고쳐집니다. 고쳐진 땅에 말씀이 임하고 그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성령세례(고전12:13)를 받습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에서 예수님을 발견한 세례요한은 십자가의 고난 후에 얻으실 주의 영광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나눠 줄 수가 없습니다. 성령세례는 오직 주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마3:1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자로 그 이름 안에서 잠기는 세례를 받습니다. 물 셰례는 죄에 대해 죽고 다시 산 표이지만 성령세례는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새로운 피조물의 대관식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따라와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순간 성령 안에서 주와 한 영이 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이름 안에서 세례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물세례만 아는 사람들이 아볼로처럼 예수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하다가 성령을 받아라고 강조를 하므로 표적과 기사만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따라 세례를 받아야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잠기는 성령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와 한 몸 한 영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성령이 가정교사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므로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 곧 성령세례의 의미를 반복해서 생각나게 하시고 진리를 따라 자신을 부인하고 아버지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 길에서 성령의 충만으로 나아 가게 됩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세례의 의미를 항상 숙고를 하세요. 하나님의 나라의 신령한 복이 시작되는 플렛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