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미리보기 맛보기
2018. 7. 금계
8. 유달산 일주도로
우리 집 옥상에서 바라본 7월 하늘. 미세먼지 때문에 봄철 내내 하늘빛이 찝찝했는데 며칠 장맛비가 쏟아지더니 오랜만에 하늘이 새파랗게 맑고 구름에 물든 저녁노을이 처절하게 붉다.
며칠 쉬었으니 내일은 또 똑딱이 사진기 들고 유달산 쪽으로 나가봐야겠다.
오늘은 유달산 일주도로를 자전거 말고 그냥 걸어 다녀야겠다. 7월 10일 새벽 5시 50분, 시내버스정류장으로 나가 기다리는데 조용하다. 아직 첫차가 출발하지 않았나보다. 손을 들어 택시를 탄다.
“어디로 가실까요?”
“선창 바닷가로 가서 아리랑고개 입구에 내려주세요. 유달산으로 천천히 걸으면서 똑딱이 사진기로 사진이나 몇 장 찍을라요.”
택시 기사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하, 서울 중고품 가게 뒤지면 괜찮은 카메라 적당한 가격에 사실 텐데요.”
“돈도 돈이지만 가지고 다니기에도 불편해요. 내가 뭐 전문적인 사진작가도 아니고.”
“우리 아버님이 괜찮은 공무원이셨어요. 당신이 가지고 다니시는 일제 카메라가 아주 좋은 거였지요. 니콘도 아니고 뭐였더라. 아무튼 나도 한가해지면 카메라로 사진 좀 찍을까 생각중이랍니다.”
카메라는 나중 이야기이고 아직까지 택시 기사의 가장 중요한 취미는 클래식 음악 감상이란다. 나도 한 마디 거든다.
“나도 아마추어라서 그렇지 피아노 아코디언 좀 만질 줄 알아요. 사진기도 그렇고 악기도 그렇고 만지는 것마다 삼류급이고 아예 내 인생 자체가 돌팔이 아마추어 삼류인생이라오.”
“하하, 누구나 비슷하지요. 아마추어 인생 아닌 사람이 어디 있을랍디여?”
“허허, 그런가요?”
벌써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택시에서 내리니 바로 바닷가. 벌써 동녘이 훤하다. 바다 건너편 산 아래가 용당, 예전에는 목포항에서 용당까지 연락선이 부지런히 건너다녔다. 저 용당에서 강진, 장흥, 순천, 여수, 부산 가는 버스가 출발했다. 그러나 영산호 방조제가 완공되고 새 길이 트이면서 목포 공용버스정류장에서 모든 버스가 출발하자 용당은 잊힌 땅이 되고 말았다.
아리랑고개로 올라간다. 참 정다운 땅이름이다. 우리나라에 어디 아리랑고개가 한두 군데이겠는가. 목포 아리랑고개에 애착이 가는 것은 길을 사이하여 왼쪽 온금동, 오른쪽 서산동이 일제강점기부터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한 많은 사연 때문이리라.
다순구미(온금동)는 유달산 남쪽 끝자락 양지바른 골짜기 마을이다. 예전에는 마을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길게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선창 양쪽으로 바닷물이 두 갈래로 갈라져 들어왔으므로 ‘째보선창’이라 불렀단다. 물론 지금은 훨씬 선창 앞쪽까지 죄다 막아버렸으므로 ‘째보선창’은 사라지고 없다.
지금은 제법 그럴싸한 모습을 갖췄지만 예전에는 대부분이 초가집이었고 목포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더란다.
옛날에는 온금동에서 여유가 있는 방을 선원들한테 세내주었다. 고기잡이배는 먼 바다까지 나갔다가 조금 때(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적고 고기도 적게 잡힐 때)면 온금동으로 돌아왔다. 온금동에는 생일이 같은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 아이들은 선원들이 조금 때에 집에 돌아와 생긴 아이들이기 때문에 ‘조금새끼’라고 불렀단다.
물론 지금은 째보선창도 없고 선원들도 없고 조금새끼도 없고 모두 사라져버렸지만 온금동에는 저 험한 시절 어려웠던 삶을 이어간 사람들의 한이 마디마디 맺혀있을 법하다.
온금동 조선내화 벽돌공장 터.
아리랑 고개 고갯마루에 올라선다. 아침 해가 구름장을 뚫고 목포시내 구석구석에 내려앉은 어둠의 앙금을 걷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리랑 고갯마루에서 건너다보이는 노적봉과 천년의 종각.
고갯마루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서산동. 부지런한 여객선이 힘차게 스크루를 둘려 물살을 일으키며 다도해에 널브러진 섬들을 향하여 떠나고 있다.
보리마당에서 바라본 서산동 닥지닥지 붙은 옛날의 초가집들. 여기도 그러니까 좁은 골목 계단 길을 숨 가쁘게 오르내려야 하는 달동네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 집이다. 세월호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썼다가 전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최 선생은 꾸꿈스럽게 서산동 꼭대기에 자리 잡은 이 집까지 나를 안내했다. 간판도 없었다. ‘할미집’이라고 불렀다. 말린 민어찜과 통닭찜을 하는데 조리하는 데에 긴 시간이 소요되므로 반드시 예약을 해야만 한단다.
식당 방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가 기거하시는 안방으로 들어간다. 여기저기 걸린 사진들하며 소박한 꾸밈새가 참 예스럽고 시골스런 분위기다. 알맞게 꾸덕꾸덕 마른 민어를 물에 잠깐 불렸다가 천천히 쪄낸다. 그 촉촉하면서도 쫄깃한 맛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또 김치라든지 나물이라든지 상에 오른 밑반찬 맛도 심상치 않다.
세월이 흘러 저 할미집이 사라지고 나면 이제 그 어느 곳에서도 저 은근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민어찜의 맛을 다시 보기는 어려우리라. 사랑은 가고 추억만 남는 것.
서산동 할미집 안방에서 먹던 민어찜
서산동 고갯마루에 휘날리는 점집 깃발.
우리는 어려서부터 점이나 푸닥거리는 미신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살아보니 미신은 맞는 것 같은데 그 효능이 전혀 없지는 않아 보인다. 요컨대 정신적으로 위안을 받는다든지, 기분이 좋아진다든지, 최면에 빠진다든지, 그런 것들이 육체적 건강까지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우리 초가집은 허물어진 옛날 읍성 성벽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 언저리를 나주 사람들은 ‘성까테’라고 불렀는데 말하자면 허술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달동네 비슷한 곳이었다. 수대로 못 살 때인지라 좀도둑이 극성을 떨어서 없는 살림에도 자꾸만 무엇이 없어졌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한 되 보살’을 불렀다. 우리 동네에 사는 백발의 할머니였는데 점을 치거나 푸닥거리를 해주는 대가로 곡식 한 되를 받기 때문에 ‘한 되 보살’이었다.
얼굴에 잔주름이 많고 눈이 움푹 파인 그 할머니는 마귀할멈보다 더 음산하고 무서워 보였다. 우리 집 부뚜막에 떡을 찌는 떡시루가 올라앉고, 시루 안에 콩기름 불을 켜 놓은 다음, 시루 위를 백지로 덮고 가운데에 조그만 구멍을 뚫어서, 열 살쯤 된 날더러 그 구멍 속으로 시루 안을 들여다보라고 했다. 콩기름 불이 가물가물.
“뭣이 보이냐?”
“아무것도 안 보이는디라.”
“어허, 눈을 크게 뜨고 잘 봐봐!”
“쪼그만 사람이 등에 푸대를 지고 걷고 있는디라.”
“어느 쪽으로 가냐?”
“서쪽으로 가요.”
세상에나, 만상에나, 나는 일생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되 보살’의 최면에 빠져서 헛소리를 마구 지껄였다.
노적봉을 향하여 아리랑고갯길을 끄덕끄덕 내려온다. 저 건물이 예전에 목포제일여자고등학교가 있던 곳. 지금은 인구 변동 때문에 하당 신도심으로 학교를 옮겼다.
목포의 역사는 간척의 역사였다. 그러니까 개항한 100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어딘가 바다를 메우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매립사업이 갓바위부터 둑을 막고 바다를 메워 대형아파트와 상가 건물들이 들어선 하당 신도심이었다.
요즘은 또 남악 지구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거기에 대형 아파트가 난립하고 하당과 구도심에 살던 중산층들이 대거 남악으로 옮겨갔다.
드디어 노적봉 광장. 한정식집 ‘미르 식당’ 여기서 식사하면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제법 운치가 있으렷다. 옛날에 한 번 들어갔던 것도 같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며칠 전 그 아저씨 아주머니들인가 보다. 아침마다 올라오는가보다. 광장 뒤쪽에 걸린 현수막을 읽어본다.
[2018 건강 생활체육 기공체조 광장교실] - 건강 거 참 좋은 것이제.
노적봉 광장 나들목에 그 모습 그대로 수십 년 동안 변함이 없는 구멍가게.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가게 이름은 [노적봉 휴게소]
언젠가 여학생들과 함께 유달산에 오르기 전 이 가게에 들어가 ‘어묵’을 먹었다. 아이들만 먹으라 하고 나는 다이어트 중이라고 입을 봉하고 있으니까 주인아주머니가 어묵국물에 들어 있는 무 한 토막을 건져주었다. 단식 중에는 모든 음식이 안 좋아도 삶은 무만은 괜찮다고 가르쳐주었다. 그 무 토막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일등바위 아래 긴 쇠기둥이 두 개 박혀 있다. 바야흐로 지금 유달산은 한창 케이블카 건설 공사 중.
유달산 일주도로 어귀에 카페 [복숭아꽃 살구꽃]. 나는 저 카페 안락의자에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시며 숱한 추억을 쌓았다. 저 안에서 레코드판으로 ‘예스터데이’를 들으면 언제나 마음이 녹작지근 가라앉았다.
지난날의/ 나의 모든 근심은 멀리 사라진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이제 근심이 다시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오, 지난날이 좋았어요.
일주도로 어느 다방 바깥 휴게소 의자에 선원 복장을 한 등신대의 아가씨가 노적봉을 배경으로 앉아 있다. 나는 처음에 진짜 사람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물감이 벗겨진 가슴을 다시 예쁘게 색칠했으면 좋겠다.
5부 능선쯤 될까. 유달산을 한 바퀴 빙 도는 일주도로는 시민들의 훌륭한 산책로다. 특히 개나리꽃 벚꽃 목련꽃이 앞 다투어 피는 4월 초순이면 외지에서 방문한 상춘객들까지 가세하여 산책로가 혼잡하다. 나는 그 때 산책길에서 사먹는 간간한 삶은 고동, 번데기, 어묵 맛을 잊지 못한다.
유달산 골짜기마다 빼곡히 들어박힌 집들. 물론 옛날에는 모두 초가집이었고 굽이굽이 힘겹게 골목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달동네였다.
저 건물이 예전에는 달성초등학교였는데 지금은 유달예술타운. 저기가 극단 '갯돌‘의 본거지. 1981년에 창단한 극단 ’갯돌‘은 남도 유일의 마당극 전문 단체로 세계 마당극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등, 꽤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나는 저기에서 2008년에 극단 ‘갯돌’ 주관으로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달성공원 주차장부근. 주위에 가게가 즐비하여 봄이면 상춘객들이 가장 붐비는 곳.
달성공원 도로가의 [달성 휴게소]. 4월 유달산 꽃 축제가 열릴 즈음이면 우리 몇몇은 어김없이 이 주막에 모여 앉아 파전에 동동주를 마시며 또다시 우리한테 주어진 기적처럼 화사한 봄을 자축한다.
인심 좋은 이 집 주인은 꽤 전문적인 낚시꾼이다. 그 날 목포 앞바다에서 낚은 주꾸미를 요리해서 내놓으니 그 싱싱하고 쫄깃한 맛이 그냥 끝내준다. 어느 해인가는 금방 낚은 웅어회 무침을 서비스로 내오기도 했다. 웅어는 갈치의 동생쯤 되는 작은 물고기다.
유달산 일주도로에서 내려다본 시가지. 전에는 오순도순 들어앉은 집들이 다정한 모습이었는데 요즘은 높다랗게 올라간 아파트들이 스카이라인(하늘공제선)을 가로막아 좀 보기에 어수선하다.
은하수 휴게소. 통닭집. 삼십 년 전 저 가게 이층에 수십 명이 모여 앉아 떠들썩하게 부어라 마셔라 하던 때가 생각난다. 은성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이제는 권혜경이 부른 ‘산장의 여인’처럼 ‘아무도 날 찾는 이’가 없어 적막하고 쓸쓸하다.
야외 조각공원에 들렀다. 유달산 야외조각공원은 일주도로 산책하는 중에 가장 좋은 휴식처다. 자세한 작품소개는 잠시 뒤로 미룬다.
야외 조각공원에 들렀다. 유달산 야외조각공원은 일주도로 산책하는 중에 가장 좋은 휴식처다. 자세한 작품소개는 잠시 뒤로 미룬다.
오른쪽은 덕인중고등학교, 왼쪽은 혜인여자중고등학교. 같은 재단이라 한 울타리 안에 있다. 나는 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을 닮은 혜인여고의 현관 기둥을 특히 좋아한다.
일주도로 바로 곁에 케이블카 공사장 사무실이 있다. 그 부근에 걸린 유달산 케이블카 조감도.
케이블카 건설 현장 언저리에 걸린 목포대교의 야경 사진.
일주도로 서쪽 끄트머리에서 건너다보이는 리라유치원. 건물 옆 벽면 파스텔 색조의 노란색과 파란색이 무척 잘 어울린다. 목포의 아이들아! 저 밝고 부드러운 빛깔처럼 밝게 무럭무럭 자라거라! 이쯤에서 오늘 일주도로 산책을 마친다.
나는 집으로 가는 1번 버스에 몸을 싣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