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명염불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도작대사이다." <자현스님>
중국 수,당시대의 도작대사(道綽 562~645)는 14세 때 출가하여
열반경을 연구하고 24번이나 강의했으며, 후에는 반야경을 배웠다고 한다.
우연히 정토종의 시조 담란이 살았던 현중사(玄中寺)에 참배하러 갔다가
담란의 덕을 기리는 비문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48세 때 열반종을 버리고 정토문에 귀의하였다.
* 당시 평균수명과 연세로 보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영향이 컸을 것이다
대사는 그때부터 서쪽을 향하여 앉아 아미타불 명호를 하루에 7만 번씩 외우고
관무량수경을 200회나 강의하였다. 7세 이상의 사람에게는 반드시 아미타불 구칭염불을 하게 하고
칭명(稱名)할 때마다 콩 한 알씩 놓게 했는데, 정진을 잘한 사람은 콩의 양이 80, 90석이 되었고
중간 정도 한 사람도 30, 50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구칭염불口稱念佛 → 칭명염불)
* 소두염불(小豆): 콩이나 팥 같은 것을 염불 한 번 할 때마다 넣어 횟수를 세는 것.
당시엔 요즘처럼 정교한 가공기술이 없어서 염주를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도작스님때는 '아미타불'만 했고, 그 제자 선도스님때 와서 '나무아미타불'로 변하였다.
대사는 수행자들에게 항상 당부하기를 "서쪽을 향해서는 침을 뱉지 말고 코도 풀지 말며
서쪽을 향해서 대소변도 보지 말며, 또 앉고 누움에 서쪽을 등지지 말라"고 하였다.
이렇게 염불 위주의 생활불교, 실천불교로 중생을 교화하는 데 진력을 다하자
현중사 인근 고을의 집집마다 염불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도력이 북방까지 알려져
백성들부터 당태종 이세민까지 감화시키는 정토사상을 크게 선양하였다.
▶ 악인 우선
아미타불 48대원 - 제18 염불왕생원 (念佛往生願 또는 十念往生願)
"만약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 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거나,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서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정각을 취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역죄를 범하는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제외합니다."
(設我得佛 十方眾生 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 若不生者 不取正覺 唯除五逆 誹謗正法)
도작대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설사 일생동안 악업만 지었을지라도 수명이 다 했을 때에
열 번을 이어서 내 이름을 불렀음에도 왕생할 수 없다면 나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
(若有衆生 縱令一生造惡 臨命終時 十念相續 稱我名字 若不生者 不取正覺)
하품하생의 부처님 말씀에 내포된 의미에 근거하여
'시방중생'을 '설사 일생동안 악업만 지었을지라도'라고 해석한 것이다.
아미타불은 ‘고통 받는 중생을 크게 연민하여 오로지 윤회 중생을 가엾게 여기시기’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을 급히 구해야지 언덕 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시방중생' 가운데 범부도 있고 성인도 있지만, 범부가 주가 되고 성인은 부차적이 되며
범부 가운데 선인도 있고 악인도 있지만, 악한 근기가 주가 되고 선한 근기는 부차적이 되며
악인 중에서도 건강한 사람은 아직 불법을 만나 구제될 기회가 있으나
유독 임종에 직면한 사람만은 이미 별다른 방편이 없기 때문에
만일 아미타불 원력의 구제를 만나지 못하면 곧바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아미타불은 특히 '임종의 악한 근기'들을 가엾게 여기시기 때문에
‘수명이 다했을 때(臨命終時)’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대사의 이러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아미타불의 대비원력은 숨겨져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유감이 있었을 것이고,
악업을 지은 근기들도 ‘마음만 돌리면 모두 왕생한다’는 희망은 없었을 것이다.
▶ 자력과 타력
"성도문(聖道門)은 지혜가 극에 달해야 열반을 증득할 수 있지만,
정토문(淨土門)은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
성도문은 자력(自力)에 의지하는 것이어서 수행하기 어렵고, 만 명이 닦아 한 명도 성취하기 어렵지만
정토문은 부처님의 자비력(慈悲力)에 의지하는 것이어서 수행하기 쉽고, 백 명이 닦아 백 명 모두 왕생한다." <안락집>
도작선사는 〈안락집〉에서, 말법시대에는 정토문이 유일한 법이라고 역설하였다.
"성도문은 지금 시대에는 증득하기 어렵다. 첫째 부처님께서 가신 지 오래되었고
둘째 성도문은 이치가 깊어 중생이 해오(解悟)하기가 미약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역시 〈염불감응록〉에서는 "자기의 공덕을 정토에 회향하면 이것이 자력(自力)이요
아미타불의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하여 베풀면 이것이 타력(他力)이다.
자력도 오히려 정토에 왕생할 수 있거늘 하물며 타력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성불하겠다는 자력문의 뜻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오탁악세의 현실은 타력문에 성불의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왜 그럴까?
염불은 구도자 자력(自力)에 아미타불 가피력(加被力)이 더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염불을 타력이라고 하지만, 정토법문을 오롯이 믿고(信) 왕생극락을 발원하며(願)
일심으로 염불하는 행(行)은 이미 자력수행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여기에 법장비구의 크나큰 본원력이 더해져 성불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 자력을 중시하던 선종에서는 정토종을 폄하하였으나 정토종은 선종을 비난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대승은 소승이라 폄하해도 상좌부에선 무반응이었던 것과 유사한데
왜 그랬을까? 정토종이 관대해서? 세력이 크고 대단하여 신경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자현스님>
* 염불이 곧 여래선이요 조사선이라는 말씀도 있다. <동훈스님>
▶ 수명연장과 왕생극락
68세가 되던 해 4월 8일, 도작선사는 명(命)을 마칠 것을 예감하고 인연있는 제자들에게 기별하니
사람들이 산중에 가득 모여들었다. 그때 허공 중에 마음의 스승 담란법사께서 칠보로 된 배 위에 나타나
선사에게 말하길 '너의 정토의 집은 이미 다 완성되었지만 너의 남은 보(報)가 다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때 화현 부처님이 허공 중에 머물러 계시면서 찬란한 하늘꽃을 널리 흩어 내렸다.
당시 모든 대중들이 이를 보고 크게 환희심을 내어, 정토종이 더욱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대사 70세에는 치아가 전부 새로 나고 체력이 강건해지고, 안색이 맑고 선미(善美)함이 마치 젊은 사람과 같아졌다.
법문을 함에 그 음성이 온화하고 자비스러워 듣는 이로 하여금 환희심과 신심이 절로 나게 하였다.
이렇게 정토법문을 한번 더 선양하며 14년의 세월이 더 흘러 84세 되던 해에 대사는 제자들에게
"나는 3일 후면 왕생극락을 하게 되니, 그대들은 열심히 염불할지어다"라고 작별을 고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세 고을 사람들은 스님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리려고 수도 없이 찾아왔다.
드디어 4월 27일, 현중사에서 선사의 임종 시에 백옥 같은 흰 구름이 서쪽 하늘에서 떠 오더니
눈 부시게 빛나는 세 갈래의 흰 광선으로 변하여 스님이 계시는 방으로 들어가 찬란하게 비추고 지나가니 열반에 드셨다.
그리고 다비하는 때에 오색광선 세 가닥이 해를 둘러싸며 세 번 돌고 나서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또한 자색 구름이 빈소 위에 세 번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대사는 이와 같이
그 누구보다 장한 상서를 보이며 극락정토로 왕생한 것이다.
※ 참고: 자료1 자료2 자료3 (*표시: 자현스님)
첫댓글 염불은 구도자 자력에 아미타불 가피력이 더해진 것.
염불을 타력이라고 하지만
정토법문 오롯이 믿고(信) 왕생극락 발원하며(願)일심으로 염불하는 행은(行)
이미 자력수행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법장비구의 크나큰 본원력이 더해져 성불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오탁악세에 마지막 남은 부처님의 자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