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진(通津) 이현감(李縣監:壽俊)의 격문(檄文)으로 본 朝鮮 지세(地勢)
2022년 06월 02일
○ ‘왜란(倭亂)’하면, 떠오르는 것이 「‘왜(倭)들의 난동(亂動)’이고, 이는 곧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설명(說明)이 이어진다.
“왜(倭)”라고 하면 ‘한국사(韓國史)=조선사(朝鮮史)’에서는, 신라(新羅)의 변경(邊境)지방을 약탈(掠奪)하는 해적(海賊)이나 왜구(倭寇)로 비춰지며, 큰 의미(意味)도 없었다. 즉(卽) 신라(新羅)의 ‘경주(慶州)=계림(鷄林)’의 동(東)쪽 해안(海岸)에 상륙(上陸)하여 약탈(掠奪)과 방화(放火), 살인(殺人)을 일삼던 왜구(倭寇) 무리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亦是) “반도(半島) 신라(新羅)”의 지형지세(地形地勢)로 바라보면 황당(荒唐)한 이야기로, 「당서(唐書)에 따르면 : ‘계림=경주(慶州)’의 동(東)쪽은 산악지대(山岳地帶)가 펼쳐져 있고, 이곳에 관문(關門)을 설치(設置)해 놓고 ‘수천(數千)의 정예(精銳) 궁수(弓手)’들이 항상(恒常) 주둔(駐屯), 수비(守備)하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理由)는, 「‘계림(鷄林)=경주(慶州)’ 동(東)쪽 산악지대(山岳地帶)에는 장인국(長人國)이 있어, 이들이 서(西)쪽의 신라(新羅) 땅에 쳐들어와 민가(民家)를 노략질하고, 백성(百姓)들을 잡아가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즉(卽)
【1.舊唐書:新羅國,本弁韓之苗裔也.其國在漢時樂浪之地,東及南方俱限大海,西接百濟,北鄰高麗.東西千里,南北二千里. : 구당서(舊唐書) : 신라국(新羅國)은 본래 변한(弁韓)의 먼 후대의 자손(子孫)이다. 그 나라는 한(漢)때의 “낙랑(樂浪)” 땅에 있었는데, 동(東)쪽과 남(南)쪽은 모두 큰 바다로 한정(限定)되어 있고, 서(西)쪽은 백제(百濟)와 접(接)하며, 북(北)쪽은 고려(高麗:高駒驪)와 이웃하여 있다. 동서(東西)가 천리(千里)이며 남북(南北)이 2천 리(千里)다. 】
【2.新唐書:新羅,弁韓苗裔也.居漢樂浪地,橫千里,縱三千里,東拒長人,東南日本,西百濟,南瀕海,北高麗. : 신당서(新唐書) : 신라(新羅)는 변한(弁韓)의 후예(後裔)다. 한(漢)나라 때의 낙랑(樂浪) 땅에 살았는데, 동서(東西:橫) 1 천리(千里)이고 세로(縱:南北)가 3 천리(千里)이며 동(東)쪽은 장인(長人)에 닿고, 동남(東南)쪽은 일본(日本)이며 서(西)쪽은 백제(百濟)고, 남(南)쪽은 바다에 연하며, 북(北)쪽은 고려(高麗)이다. 長人者,人類長三丈,鋸牙鉤爪,黑毛覆身,不火食,噬禽獸,或搏人以食,得婦人,以治衣服.其國連山數十里,有峽,固以鐵闔,號關門,新羅常屯弩士數千守之. : 장인(長人)은 사람 종류(種類)로 키(長)는 삼장(三丈)이다. 톱니 이빨에 갈고리 손톱을 하고, 검은 털이 몸을 덮고 있으며, 음식은 익혀 먹지 않고, 짐승을 물어 잡거나 혹은 사람을 때려잡아 먹으며, 부인을 얻으면 그저 의복이나 만들게 한다. 그 나라는 수십(數十)리에 산(山)이 이어져 있으며, 협곡(峽谷)이 있어, 관문(關門)이라고 부르는데, 철문짝(鐵蓋)으로 굳게 닫혀 있으니, 신라(新羅)는 항상(恒常) 궁수(弩士:弓手) 수천(數千)을 주둔(駐屯)시켜 지키고 있다.】
위의 신구당서(新舊唐書) ‘1. 2’의 원문(原文)을 보면 ;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반도한국사(半島韓國史)’가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지를 실감(實感)하게 된다.
➊ ‘한(漢)’나라 때의 ‘낙랑 땅(樂浪之地)’이 ‘경주(慶州)=계림(鷄林)’ 인가?
➋ 경상도(慶尙道) 땅이 ‘동서(東西:橫) 1천리(千里), 남북(南北:縱) 2천리(千里)’ 또는 ‘3천리(千里)’ 땅이 되는가?
➌ 신라(新羅)의 동(東)쪽에 ‘장인국(長人國)’이 있었나? 또 그곳의 ‘협곡(峽谷)에 철문관(鐵門關)’이 있었는가?
이런 유형(類型)의 이야기들은, 사실 황당무계(荒唐無稽)함 뿐이다. 무엇으로 이를 반도(半島) 경상도(慶尙道) 땅이라고 우길 수 있나? 아무리 철딱서니없는 자(者)들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最小限)의 학자(學者) 양심(良心)은, 팔아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매국노(賣國奴)와 부역자(附逆者)와 조국(祖國)의 배신자(背信者)들에게 말이다.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은 경제적(經濟的)으로는 풍요(豐饒)로울지 모르나, 정신적(精神的)인 면(面)에서 바라보면 파멸(破滅) 직전(直前)의 상황(狀況)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해도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신의(信義)를 져버린 배신자(背信者)들이 날뛰는 사회(社會)는 흥성(興盛)해 질 수 없다.” 도덕적(道德的)으로 해이(解弛)됨은, 곧 이에 걸맞는 위험(危險)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證據)다. 오늘 우리 사회(社會)가 딱 이 모양이다.
➤ 위 당서(唐書)에 기록(記錄)된 신라(新羅)의 지세(地勢) 또는 풍속(風俗), 상황(狀況)은, ‘반도(半島) 땅의 경상도(慶尙道)’와 그 어떤 연결고리가 없다. 징후(徵候)나 흔적(痕迹), 유물유적(遺物遺蹟). 풍속(風俗), 인종(人種)등등 모든 것들이 생소(生疏)한 것들이다.
〈어떤 근거(根據)로, 어떤 증거(證據)로, “반도(半島) 동남(東南) 모퉁이 땅에 옛 신라(新羅)가 있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구(倭寇)들이 ‘계림(鷄林)=경주(慶州)’ 동(東)쪽 동해안(東海岸)에 상륙(上陸)하여 첫 번째 맞딱뜨리는 적(敵)은, 신라(新羅) 땅이 아니라 ‘장인국(長人國)의 땅이었다.’는 얘기고, 이들과의 싸움은 백전백패(百戰百敗)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긴가? 한국사(韓國史) 얘긴가? 조선사(朝鮮史) 얘긴가? 당서(唐書)의 기록(記錄)이니 믿을 수 없다는 항변(抗辯)한다? 그럼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저자(著者)인 ‘김부식(金富軾)’은 왜 당서(唐書)를 인용(引用)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編纂)했을까?
또 당군(唐軍)은 백제(百濟)를 무너뜨리고, 이 넓은 땅에 5도독부를 설치(設置)하고, 수많은 백제(百濟) 백성(百姓)들을 통치(統治)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사정(事情)을 감안(勘案)해 보면 : 「당시(當時)의 당(唐)보다 더 자세(仔細)하게 신라(新羅)의 지세(地勢)를 알 수 있는 자(者)는 없었다. 더불어 신라(新羅)백성(百姓)들보다 더 확실(確實)하게, 자세(仔細)하게 신라(新羅)지세(地勢)를 알 수 있었던 것이 당(唐)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를 토대(土臺)로 보면 : 당서(唐書)에서 말하는 신라(新羅) 지세(地勢)는, 그 어느 기록(記錄)보다도 우위(優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보면 : 왜(倭)는 신라(新羅)의 어디를 약탈(掠奪)한 것이냐? 하는 이야기고, 문무대왕(文武大王)은, ‘무슨 헛발 짓을 그렇게 요란하게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어떤 해변(海邊)으로 왜(倭)가 소란을 일으키니, ‘죽어 용(龍)이 되어 지키겠다.’는 것이었을까?
➤ ‘반도(半島)’ 땅의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로 보면 : 「이건 블랙코미디 수준(水準)을 벗어날 수 없다.」
반도(半島) 땅에 살고있는 약(約) 7,700만 명(名)의 국민(國民)들! 「그들은 역사인식(歷史認識)를 갖고 있는가?」 라는 질문(質問)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 어떤 답변(答辯)이 나올까?
한마디로 「블랙코미디[Black Comedy] 수준(水準)을 벗어날 수 없으며, 이상(以上)도 이하(以下)도 아닌, 말 그대로 그 수준(水準)일 것이다.」라는 것이 올바른 판단(判斷)일 게다.
【이건 누굴 무시(無視)하고, 안 하고의 문제(問題)가 아니다.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는, 이미 남북(南北)을 넘어, 세계화(世界化)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항거(抗拒)한다거나 반항(反抗)한다거나, 이의(異意)를 제기한다거나, 반론(反論)을 펴는 것 자체(自體)조차 불가능(不可能)하게 고착(固着)화되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굴 탓할 수 없는 지경(地境)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건 모두 첫 번째는 국민(國民)들 탓이고, 두 번째는 역대(歷代)이래의 정권(政權) 탓이다. 누가 누굴 탓할 수 있겠나? 너도 나도 역사(歷史) 무지랭이들 뿐인 것을!】
➤ 16세기-17세기를 살다 가신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문집(文集)을 보면 : 오산집(五山集) 5권 / 발(跋) / 안남국(安南國) 사신과 주고받은 시집에 대한 발
《我國去皇都五千里。安南去皇都又萬三千里。不翅風馬牛之不相及也。: 아, 우리나라에서 연경(燕京)까지는 5000 리이다. 안남(安南)에서 연경(燕京)까지는 1만 3천 리이므로 풍마우(風馬牛)가 미치지 못할 뿐만이 아니다.》라고 하였음에 비춰보면,
「반도(半島) 땅의 ‘송경(松京)·한성(漢城)’, 경사(京師)였던 ‘북경(北京)=연경(燕京)’과의 관계(關係)는, 이미 성립(成立)될 수 없는 지세(地勢)를 가졌다.」
이러한 지세(地勢) 설명(說明)은, 수많은 개인(個人) 문집(文集)속에서도 생생(生生)하게 살아 오늘에 전(傳)해지고 있는데도, 국민(國民)들과 학자(學者)들과 역대(歷代) 정권(政權)들은, 오로지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반도한국사(半島韓國史)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다.
➤ 심지어는 『‘역사(歷史)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당사자(當事者)의 한 축(軸)이었던 “일본(日本)”에게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반도한국사(半島韓國史)”가 이용(利用)당할까 봐 몰래 숨어 발굴(發掘)을 진행(進行)했다.』는 웃지 않을 수 없는 한심(寒心)한 이야기까지 흘러나오는 실정(實情)이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기막힌 현실(現實)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반도한국사(半島韓國史)’가 무슨 종교(宗敎)의 성전(聖典)이냐? 꿀단지냐? 기막힌 육갑(六甲)을 떤다.
【「오산(五山)의 가문(家門)인 연안(延安) 차씨(延安車氏)는, 고려조의 명문거족이었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하륜(河崙) 등 권신에게 원한을 사서 거의 멸문의 화를 입었지만, 세종(世宗)조에 이르러서는 6대조 차원조(車原頫)가 신원되었고, 부친 이재(頤齋) 차식(車軾)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환에 종사하게 됨으로써 가문(家門)은 회복세를 타게 된다.」고 전해진다. 출처 : 고전번역원db】
○ 올바른 역사(歷史), 잃어버린 역사(歷史),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역사(歷史), 참과 거짓의 역사(歷史)등 많은 수식어(修飾語)를 동원(動員)하여 이야기 해봤자 똑같은 이야기고, 똑같은 설명(說明)이다.
즉(卽) “고대(古代)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만 밝히면 일차적(一次的)인 ‘참의, 진실(眞實)의 역사(歷史) 이야기’는 종료(終了)되는 것이다.
고대(古代)의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중원(中原) 대륙(大陸) 또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또는 그 어디에서 존재(存在)해 있었던 간에 말이다. 일만(一萬)년 또는 반만년(半萬年)을 영위(營爲)했다던 옛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이야기는,
『〈열도(列島) 왜(倭)는 없었다. 중국(中國)은, 중원(中原) 대륙(大陸)에 없었다.〉는 것으로 연결(連結)되기 때문이다.』 조그만 지명(地名)등은 차치물론(且置勿論)하더라도,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반도(半島)에 없었다.”면 그것으로 일단락(一段落)되는 일이다.』
그 뒤의 일은, 당연히 뒤의 일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만의 놀이터에서 우리들만의 놀이에 열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는 어떤가?
○ 최립(崔岦 1539~1612)은, 〈후세에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불릴 만큼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던 선조(宣祖) 말의 대표적 문인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광해군 즉위 무렵에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능문자(能文者)로서 활약하였고, 선조 말에서 광해군 초에 걸쳐 고문(古文)과 관련된 여러 서적에 현토(懸吐)하는 일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시기(時期), 관리(官吏)를 지냈던 분의 기록(記錄)을 살펴보자는 뜻이다. 과연(果然) 반도(半島) 땅을 말하고 계시는가?
○ 간이집(簡易集) 제1권 / 격(檄) : 通津李縣監 壽俊 義兵檄
通津李縣監 壽俊 義兵檄 [통진(通津)의 이 현감(李縣監) 수준(壽俊) 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때의 격문]
《國家有門庭之寇。況不啻於過之。臣子共君父之憂。寧毋爲之急者。義靡暇於度力。擧何羞於後人。: 국가가 집안 마당에까지 쳐들어온 도적의 환란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이 도적이 그냥 지나가는 정도로만 그치지 않았는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신자(臣子)는 군부(君父)와 걱정을 함께해야 할 도리가 있다. 그러니 어찌 이 일을 급하게 여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의리상 자신의 힘을 돌아볼 틈이 없이 나서야만 할 것이니, 어찌 의병(義兵)을 일으키는 일을 남보다 뒤늦게 하여 부끄러움을 자초해서야 되겠는가.》
《維日本之距海疆。自古先而勤邊吏。高麗之浮艦五百。未踰漢津。乙卯之陷城二三。獨在羅徼。乃今之事。夫孰是圖。: 생각건대, 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일본(日本)이라는 나라는 옛날부터 우리 변방의 관리들을 귀찮게 하여 왔다. 그러나 고려(高麗) 때에는 오백 척의 배를 띄워 놓고도 한강(漢江) 나루를 넘어오지 못하였고, 을묘년에 쳐들어와 두세 개의 성을 무너뜨렸을 때에도 피해를 본 지역이 신라(新羅)의 변경에 불과할 따름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彼若掃境而來。我如無人以入。生聚敎訓。枉矣費力於廟謨。叫呼跳踉。徒然收功以兒戲。將軍微墨翟之守。司馬狃謝安之閑。: 저 왜적이 자기 경내(境內)의 힘을 모두 쏟아 부을 것처럼 전력(全力)을 다해 침입하였는데도, 우리는 마치 사람이 하나도 살고 있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들어오게 그냥 놔두고 말았다. 생취(生聚)와 교훈(敎訓)에 관한 일은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묘당(廟堂)에서는 다른 곳에 힘을 헛되이 낭비하였고, 그저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다니기만 하였을 뿐 공을 거두었다고 해야 그저 아이들 장난 정도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장군(將軍)이 묵적(墨翟)처럼 제대로 수비하는 계책도 마련해 놓지 못하였고, 우리나라의 사마(司馬 병조(兵曹)의 별칭임)가 그저 한가하게 보였던 사안(謝安)의 겉모습에만 잔뜩 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➊ 이로 미뤄보면 : 당시(當時) “조선(朝鮮) 땅에는 팔도(八道)가 있었으며, 이곳에는 중조(中朝)로부터 임명(任命)을 받은 ‘왕사(王師)’ 즉(卽) 관찰사(觀察使)가 군대(軍隊)와 함께 상시(常時) 주둔(駐屯)하고 있었다.
왜군(倭軍)이 진군(進軍)하고 있던 각지(各地)에서는, ‘눈치만 보면서 적극적(積極的)인 토벌(討伐) 작전(作戰)을 펴지 않았다’는 정황(情況)이다. 여기에는, 많은 여러 가지 원인(原因)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判斷)이 되지만 오늘의 주제(主題)가 아니므로 패스(Pass)한다.
➋ 우리가 배워온 “반도(半島) 조선(朝鮮)” 이야기로써는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측면(側面)이 많다. 부산(釜山)으로부터 한성부(漢城府)까지 일천(一千)여 리가 넘는 땅에는, 수많은 성(城)과 관리(官吏)들과 병사(兵士)들과 백성(百姓)들이 살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염두(念頭)에 둔다면 왜군(倭軍) 침략로(侵略路)는,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측면(側面)이 많다.
《適以聖人去邠之仁。姑從宰相幸蜀之議。西狩非須於載主。盖慮五廟之陸沈。東歸將見於冠猴。豈期十旬之濡滯。: 그리하여 결국에는 성인(聖人)께서 빈(邠) 땅을 떠나는 인덕(仁德)을 발휘하시어, 촉(蜀) 땅으로 거둥해야 한다는 재상(宰相)의 의논을 우선 따르기에 이르렀다. 서쪽에서 수렵(狩獵)을 행하도록 하는 일이 꼭 신하로서 임금을 모시는 도리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이것은 대개 오묘(五廟)의 신위(神位)가 왜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부득이하게 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원숭이가 갓을 쓴 것[猴冠]과 같다고 일컬어졌던 옛날의 이야기처럼 동쪽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東歸]이 지금까지 십 순(旬)을 넘도록 지체하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➊ ‘서수(西狩)’한다는 말은, 달콤한 말로 포장(包裝)했을 뿐이다. ‘서(西)쪽으로 파천(播遷)했다’는 이야기를 애둘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勿論) 반도(半島) 땅에서의 얘기가 아니다. 만약(萬若) 반도(半島) 땅의 얘기라면, 선조(先祖)는, 인천(仁川)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거나, 또는 수장(水葬)되었을 것이다.
➋ “동귀(東歸)”란, ‘동(東)쪽 땅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다. 당연한 이야기로 동(東)쪽의 도성(都城)에서 서(西)쪽으로 몽진(蒙塵)하였으므로 왜(倭)를 물리쳤다면 당연히 ‘동귀(東歸)’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勿論), 반도(半島) 땅의 이야기가 아니다.
《據拄國之邑。奏嘗用幷地之譎謀。飛假途之書。晉却無射天之兇計。恃天塹則漢已不能臨已不能。而迫之浿水。論地靈則華亦無賴松亦無賴。而窮于柳京。: 옛날에 진(秦)나라는 주국(柱國)의 도읍(都邑)을 점거하고서 병탄(幷呑)을 하려는 속임수를 꾀하였었는데, 진(晉)나라의 경우는 길을 빌리겠다는 글을 날리긴 하였지만 하늘에 대고 활을 쏘려는 흉계를 꾸미지는 않았었다. 장강(長江)의 천참(天塹)이라도 의지해 보려 하였더니 한강(漢江)도 임진(臨津)도 어찌할 수 없게 되어 패수(浿水)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또 지령(地靈)으로 말하더라도 화성(華城)이나 송경(松京) 역시 믿을 수 없게 되어 유경(柳京)에까지 밀리게 되었다.》
➊ “유경(柳京)”은, 평양(平壤)의 별명(別名)이며, ‘패수(浿水)’가의 버드나무가 십여(十餘)리에 늘어져 있어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유경(柳京)”은, 또한 “장안(長安)”의 별명(別名)이다.
이로 보면 ; ‘유경(柳京)은, 평양(平壤)이고, 장안(長安)’이다. 이 역시(亦是) 반도(半島)에 만들어진 “평양(平壤)”의 이야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경조(京兆)’였던 “장안(長安)”을 말하는 것이다.
《虔劉不專於交兵戈。汚辱尤極於略婦女。時雖慙於魯未可伐。禍豈究於周無遺民。: 어찌 병장기가 서로 번뜩이는 사이에서만 살육 행위가 이루어졌겠는가. 부녀자가 겁탈되는 등 오욕(汚辱)을 당한 것이 더욱 극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노(魯)나라는 공격할 수 없다[魯未可伐]고 한 옛날의 말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현재 국내 사정이 비록 부끄럽기는 하다마는, 주(周)나라에 유민이 없게 되었다[周無遺民]고 말하게 될 정도까지 재앙을 당하게 될 줄이야 어떻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行在捷音之三傳。信疑稍定。皇朝震怒於一視。聲援載隨。軍從南來。失之前而庶收之後。士以義起。凡是役者同有是心。: 그 뒤로 승첩(勝捷)의 보고가 두 번 세 번 행재소(行在所)에 올라오면서부터 우리의 승리를 반신반의하던 분위기도 차츰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일시동인(一視同仁)하는 황상(皇上)의 조정에서도 왜적들에게 진노(震怒)한 결과 구원하는 군사들을 계속 보내 주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우리 군사들도 남쪽에서 올라오면서 예전에 잃었던 것을 뒤에 수복(收復)을 하고 있으며, 의병의 기치(旗幟)를 내건 인사들도 함께 힘을 합쳐 이 일에 뛰어들고 있는 바이다.》
➊ 이때서야 비로서 “남(南)쪽” 지방의 왕사(王師)들이 움직이기 시작(始作)했다는 이야기다. 이건 임란사(壬亂史)를 재조명(再照明)해야 할 근거(根據)가 될 것이고, 중요(重要)한 자료(資料)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燕巢安而火至不知。其何能久。鼠夜動而晝猶莫伏。固已弗詳。如雷如霆以加。不日不月而克。: 제비가 위태한 곳에 둥지를 틀고 편안하게 여기고만 있다가 불길이 치솟는 것도 미처 알지 못했으나, 언제까지 오래도록 그렇게 잠자코 있기만 할 수 있겠는가. 쥐새끼들이 한밤중에 설쳐 대다가 환한 대낮에도 숨을 줄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앞으로 재앙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라 하겠다. 이제 천둥치고 벼락치듯 우리가 공격을 퍼부어 대면, 몇 달이 가기 전에 아니 며칠도 지나기 전에 통쾌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顧惟京圻之內。尙少忠勇之興。貔虎縱橫。傷心五陵之路。弓刀寂寞。何處三輔之豪。: 그런데 다만 생각건대, 경기(京畿) 지방의 경우에는 충용(忠勇)한 인사들의 의거(義擧)가 아직도 현저히 부족한 형편이다. 그래서 조종(祖宗)의 능침(陵寢)에까지 맹수들이 제멋대로 횡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저 가슴이 아파 올 따름이다. 활과 칼을 손에 든 우리 경기 지방의 호걸들은 도대체 어디에 가 있기에 이렇게 조용하기만 하단 말인가.》
《二百年神聖之生成。澤在人則先被。一千里河山之環擁。利因地則素稱。泯泯于玆。忉忉可已。: 2백 년 동안 신령스럽고 거룩하게 펼쳐진 생성의 은혜로 말하면 우리 경기 지방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먼저 성대하게 받았다고 할 것이요, 일천 리에 걸쳐 둘러싸고 있는 우리 경기 지방의 산하 역시 지리(地利)를 얻었다고 평소에 일컬어져 왔던 터이다. 그런데 이토록 적막하기만 하다니, 어찌 슬픈 마음을 금할 수가 있겠는가.》
➊ 〈一千里河山之環擁。利因地則素稱 : 일천(一千) 리에 걸쳐 둘러싸고 있는 우리 경기(京畿) 지방의 산하(山河) 역시 지리(地利)를 얻었다고 평소에 일컬어져 왔던 터이다.〉고 하였는데,
반도(半島) 땅, 남북(南北)은 길어 ‘3천리(千里)’요, 동서(東西)는 ‘좁고 좁아 겨우 7백리(百里) 정도’나 될까 말까한 지세(地勢)를 가졌다. 이러한 형편(形便)에서 전국(全國)을 팔도(八道)로 나눴다고 하였고, 한성부(漢城府)에서 남해(南海) 끝까지는 겨우 일천(一千)리’를 조금 넘을 뿐이다. 1970년 7월 7일, 서울과 부산의 428km의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날이라고 하였으니 꾸불꾸불한 길이가 겨우 일천(一千)리가 조금 넘을 뿐이다.
이런 형편(形便)에 “경기(京畿) 땅이 일천(一千)리” 라고 한다면 비웃음 당할 일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웃음은 2022년 오늘의 이야기고, 「16-17세기 초(初)까지도 경기(京畿) 땅은 1천리(千里)였다.」는 것이다. 이걸 누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 〈고대(古代) 왕조(王朝)에서 “경기(京畿)” 땅이 1천리(千里)가 되었던 곳은,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땅에 있었을 뿐이다.〉 이건 뭐 고증(考證)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 벌써 확정(確定)되어 있는 일이다. 곧 잔소리가 필요(必要)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이고,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한복판 요충지(要衝地) 관내도(關內道) 땅인 “경기(京畿)”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否認)할 수 없다는 뜻이다.
➋ “경기(京畿)”란 말은, “도성(都城)을 중심(中心)으로 5백리(百里) 이내 땅”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일천(一千)리’를 나타내는 것이고, “일천(一千)리 산하(山河) 경기(京畿)” 땅은, 황제(皇帝)의 직할통치구역(直轄統治區域)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勿論) 반도(半島) 땅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壽俊。靑袍縣宰。白面書生。乃父風乃祖風。知文武之俱忝。事主曰事毋日。敢短長之遽裁。無尋丈之城。共宜見恕於敗將。阻鼓鼙之野。始亦非嫌於逃夫。: 수준(壽俊)은 청포(靑袍)를 입은 고을 수령이요, 백면(白面)의 서생(書生)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나 부조(父祖)의 풍도(風度)를 이어받아 문무(文武)의 업을 조금은 닦을 줄 알게 되었다. 임금을 떠받들고 어버이를 섬겨야 하는 이날을 맞아 어찌 감히 서로 재주의 장단(長短)을 따질 수가 있겠는가. 팔 척(尺)이나 한 길 되는 성곽도 없었으니 우리 서로 패장(敗將)을 관대하게 포용해 주어야 할 것이요, 크고 작은 북소리가 전장(戰場)에서 처음에는 저지되곤 하였으니 도망쳤던 사람들을 혐의쩍은 눈으로만 바라볼 일도 아니라고 하겠다.》
《嘗膽臥薪。忍使君之再辱。隕身橫草。毋與賊而竝存。計見糧之苟全。募散卒而復振。縣小猶多於三戶。朋來寧間於四鄰。: 오직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결의를 굳건히 해야 할 것이니, 어찌 차마 우리 임금에게 두 번 다시 치욕을 안겨 드릴 수가 있겠는가. 운수 결초(隕首結草)할 각오를 다져야 할 것이니, 이 왜적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결코 함께 살 수가 없는 노릇이다. 현재 군량(軍糧)을 헤아려 보아도 그런대로 구비가 되었고, 흩어진 병졸들을 끌어 모아 군세(軍勢)도 다시금 떨치게 되었다. 우리 고을이 작다고 하지만 그래도 삼호(三戶)보다는 많으니, 사방 이웃에서 동지들이 몰려드는 것이 어찌 서로 차이를 보여서야 되겠는가.》
《聞禹斯文之先獲心。折簡要約。承沈故相之遙主議。具舟奉迎。豫空倉厫。金陵載浮之粟相恃。急斷津渡。月串已試之鋒可因。: 듣건대 우 사문(禹斯文)이 먼저 뜻을 같이하여 편지를 보내 약속을 하였는데, 심 고상(沈故相)이 멀리서 주도하는 의논을 받들어 배를 갖추고서 영접하기로 하였다 한다. 진작부터 텅 비게 되었던 창고도 이제는 금릉(金陵)에서 배로 실어 오는 곡식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고, 나루를 급히 차단하는 일 역시 월곶(月串)에서 예전에 시험해 보았던 대로 다시 행할 수 있게 되었다.》
《何生陣中。多是超乘賈勇之伍。尹子部下。無非捩柂有神之工。慮足以沈幾先。則有崔僉樞。才足以酬紛宂。則有尹正錄。: 하생(何生)의 진중(陣中)에는 수레를 뛰어서 올라타고[超乘] 용기를 파는 용사[賈勇]가 대부분이요, 윤자(尹子)의 부하(部下)는 모두가 배를 조종하는 데에 귀신같은 솜씨를 지닌 자들이다. 기선(機先)을 제압하기에 충분한 지모(智謀)는 최 첨추(崔僉樞)가 책임을 질 것이요,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고도 남는 재질로는 윤 정록(尹正錄)이 건재하다.》
《同志非盡於記名之內。勒移何妨於置帥之前。有或搢紳之流。後飛塵於扈駕。有或介胄之輩。收驚魄於戰塲。: 우리의 동지들로 말하면 지금 이름을 기록한 이 정도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데, 비록 대장(大將)을 뽑기 이전이라 하더라도 이를 새겨 널리 알린다 해서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더러는 날리는 먼지를 뒤따라서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했던 진신(搢紳)들도 포함되어 있고, 더러는 넋이 다 달아날 정도의 전쟁터를 헤치고 돌아온 무사(武士)들도 섞여 있다.》
《鹿走險之餘生。鳥擇陰之奚所。憂憤空勤而無奈。炎涼愈邁而詎安。: 지금 백성들은 험한 산길을 빠져나온 사슴처럼 헐떡거리며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다. 새처럼 불쌍한 백성들이 그늘을 찾아 쉬려고 한들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공연히 걱정만 하고 울분만 쏟아 낸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앞으로 덥고 서늘한 시간이 얼마 더 흘러간들 어떻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겠는가.》
《聲相應氣相求。正其時矣。兇未除恥未雪。何以生爲。欲從軍爲國則從之。無受命於君猶受也 : 지금이야말로 소리를 같이하고 기운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뭔가 일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흉적을 제거하지 못하고 치욕을 씻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나라를 위해 종군(從軍)하려는 마음이 있는 이들은 지금 따라올 것이니, 임금님에게 직접 명을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실은 명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凡應施措。此不具詳。半夜聞鷄。莫負劉琨之感槪。中流擊楫。願同袓逖之誓言。: 앞으로 조치하고 시행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여기서는 더 이상 구체적으로 자세히 알리지는 못하겠다. 모쪼록 한밤중에 닭소리를 듣고서 감개(感慨)에 젖었던 유곤(劉琨)의 옛일을 저버리지 말 것이요, 강 한복판에서 노를 치며 다짐했던 조적(祖逖)의 맹세를 함께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出處 :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9》
---------------------------------------------------------------------------------------
○ ‘주군(主君)을 향한, 백성(百姓)들을 위한 마음이 처절(凄切)하게 표현(表現)되어 있는 격문(檄文)’ 내용(內容)이다.
오늘의 우리들로써는 이해불가(理解不可)할 정도(程度)의 내용(內容)으로 당시의 사회상(社會相)을 엿볼 수 있다고 보아지는데,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인간(人間)의 삶이요,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의(信義)’요, 바로 ‘의(義)’다.
주둥이로 백번을 떠들어대는, “정의(正義)니, 신의(信義)니, 공정(公正)이니” 하는 말은, 인간(人間)이 아닌 앵무(鸚鵡)일 뿐이다. 스스로 「몸소 실천(實踐)할 때 “정의롭다. 신의(信義)가 있다 공정(公正)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신의(信義)를 저버린 “배신(背信)행위(行爲)”는, “파렴치(破廉恥)한 짓이요, 인간(人間) 이하(以下)의 처사(處事)”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놈들이 판치면 부정부패(不正腐敗)가 만연(蔓延)해지며, 사회(社會)가 혼란(混亂)스러워지니 민초(民草)들만 생고생(生苦生)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무리들을 과감(果敢)하게 퇴출(退出)시켜 사회(社會)를 정화(淨化)시켜야 한다.
2022년 06월 02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1.중국어판 위키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저 멀리 서쪽의 감숙성 란주[蘭州 : 옛 금성(金城)]에도 조선족(朝鮮族)들이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2. 해국도지에 의하면 : 인도의 동북방 땅에도 오늘날의 우리 국민들과 아주 흡사하고, 유전적인 요인까지 함께하는 부족들이 이 시간에도 살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3. 통전에서는 '관구검 때 구려인들이 저 멀리 서쪽의 서강지역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였고, 신강성 여기저기 땅에도 역시 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어떻게, 어떤 연유로, 그 먼 곳에 까지 이동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그들의 땅에서 조상대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인 것을, 후대의 무지랭이들이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후대의 역사 무지랭이들인 우리들이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들 조선족(朝鮮族)들은 원래의 땅에서, 조상대대로 살아온 방식대로 그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인 것을!! 한반도에 살고 있는 백성님네들의 역사 무지에서 오는 의문일 뿐이다.
그들은 수천년, 그들 조상대대로 살아온 방식 그대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한반도 국민들은 엣 조선을 이야기할 자격조차 없다. 과장된 표현일까?
'중국은 동방에 있다'고 하였다.
'동방은 진방이며, 동역이며, 동국과 같은 말'이다.
한족(漢族)은 본시 소수민족이라고 하였다.
동이(東夷)는 구이(九夷)의 총칭이다.
구이(九夷)는, 즉 동방에 살고 있었던 아홉종족을 일컫는 말이다.
동방이란, 서방과 동방을 나누는 곳의 동쪽을 말한다
서방이란, 동방과 서방을 나누는 곳의 서쪽을 말한다.
그 기준은, 오늘날의 중앙아세아 땅[우랄산맥이든 총령이든 코커서스산맥이든 논지는 똑같다. 이건 세대가 아무리 흘러가도 똑같은 잣대다.] 이다.
해동(海東)이란 : 바다처럼 넓고 넓은 동쪽 땅"을 말하는 것이니, 동방(東方)이란 뜻이고, 해동이란 동방의 별칭으로 조선을 뜻하는 말이다. 누가 해동이 한반도 조선을 말한다고 하였는가?
북사[北史 : 242년 동안 역사적 사실을 기록]를 편찬한 이연수외 당시의 많은 학자들은 무엇을 보고 '발해'가 '흑해와 지중해'였다고 말했는가?
이런 기록을 21세기 부정할 수 있는 팩트를 가지고 있는가? 전혀.....없다. 그저 '사가'라는 '블랙코메디 작가'들의 지들의 이야기일 뿐이고, 여기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민중들이 있을 뿐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자가,
국고를 지맘대로 쓰지 못해 안달하는 나라는 '독재국가나 공산국가 또는 유사한 체제를 가진 나라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나라이며, 시장경제주의이며, 법치국가인가?"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고금 역사 이래 국고를 탕진 하는 자, 그 뒤의 일은 언급하지 않아도, "망(亡)과 멸(滅)의 지름길이다."
눈을 부릅뜨고 감시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