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불의 열반과 당부
【정견망】석가모니 여래가 49년간 설법하시고 장차 ‘열반’에 드시려 했다. [열반은 멸도(滅度) 또는 원적(圓寂)으로 번역되는데] 불생불멸(不生不滅), 멸적귀진(滅敵歸真)이란 뜻이다.
부처는 무수한 법신(法身)이 있는데 청정(淸靜)하며 일체에 두루 충만해 예나 지금이나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
부처님의 여러 뛰어난 제자들 중에서 사리푸트라(사리불)는 지혜(智慧)제일, 목갈라나(목건련)는 신통(神通)제일, 마하가섭은 고행(苦行)제일, 아나율은 천안(天眼)제일, 수보리는 해공(解空)제일, 부루나는 설법(說法)제일, 가전연(迦旃延)은 의론(議論)제일, 라훌라는 밀행(密行)제일, 아난다는 다문(多聞)제일, 우팔리는 지계(持戒)제일이니 세상에서는 흔히 이들을 가리켜 불문(佛門) 십철(十哲)이라 부른다.
이중에서도 특히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가 가장 상수(上首)제자였다. 이에 사리푸트라 존자는 부처님의 멸도를 차마 볼 수 없어 자신이 먼저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 열반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을 설해 법신(法身)이 상주하는 이치를 널리 알리신 후 제자들에게 석 달 후 인간세상을 떠나신다고 알려주셨다. 마지막으로 히란야와티 강을 건너 쿠시나가라로 가시던 도중 쭌다가 공양한 버섯죽을 드시고 식중독에 걸리셨다.
사라쌍수 사이에 쉬셨는데 이 지방에는 도처에 두 그루의 사라나무가 자라는데 가지가 마주보고 잎과 잎이 어우러져 매우 가지런하다. 중간에 파릇파릇하고 부드러운 풀이 난 곳이 있었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명해 이곳에 자리를 펴게 하셨다. 그리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시고 얼굴은 서쪽을 향하여, 우측 옆구리를 자리에 대고 두발을 포개 편안히 누워 한밤중에 멸도하려 하셨다.
이에 아난이 비통하게 울면서 부처님께 오래 머무실 것을 청했다.
한편 이날 밤 다른 공부를 했던 바라문 방랑수행자 수밧다(수발타라須跋陀羅)가 부처님이 곧 열반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부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아난이 거절해도 고집을 피우자 부처님이 그를 불러 들여 팔정도 법을 설해주자 부처님의 가르침이 곧 정법임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해서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부처님은 또한 여러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 가르침을 말씀하셨는데 그중 출가제자들에게 산림을 의지해 스스로 청정(淸淨)을 지키고 욕망을 줄여야 하며 만족함을 알며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계율과 선정을 닦으라고 정중히 당부하셨다. 또 세상의 일이나 병 치료, 점치기, 관상, 풍수 등 속세의 학문에 힘쓰지 말라고 하셨다.
또 잠을 많이 자지 말고 육근(六根)을 엄하게 통제해 부지런히 해탈을 구하라고 하셨다. 또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는 계율을 가장 존경해야 하며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以戒爲師)고 신신당부 하셨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 적연(寂然)하게 아무 말씀도 없으셨고 우측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편안히 떠나셨다. 이것이 2월 15일의 한밤으로 세존의 향년 80세였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자 사람은 눈물을 흘렸고 하늘에선 비가 내렸다. 사라쌍수도 하얗게 변했다.
나중에 마하가섭과 오백 명의 비구들이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불을 붙여 화장했다. 다비가 끝난 후 반짝이는 ‘사리’ 여덟 곡(斛) 네 말을 얻었다
이때 각국에서 부처님이 쿠시나가라에서 멸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파와의 말라족, 라마촌의 꼴리야족, 나마가국의 구리족, 베타디파의 바라문족, 카필라국의 석가족, 베살리의 릿차위족, 마가다국의 아소세왕 등 일곱 나라가 모두 무장 병력을 동원해 쿠시나가라 성 밖에 와서 사리를 나눠가지려 했다.
처음에 쿠시나가라 왕이 동의하지 않으려 하다가 거의 전쟁이 벌어질 뻔했다. 하지만 “모두 부처님의 신자들인데 어찌 부처님 사리 때문에 싸울 수 있겠습니까?”라는 권유에 여덟 나라가 모두 공평하게 사리를 나눈 후 각기 탑을 세워 공양하기로 했다.
부처님이 멸도하시고 100년이 지나자 아소카왕(阿育王 아육왕)이 마가다국에서 일어나 인도 각국을 통치하면서 불교를 크게 일으켰다. 또 아소세왕이 조성한 사리탑을 발굴해 8만 4천 개의 사리를 얻어 8만 4천 개의 사리탑을 만들었는데 사방에 분포한다.
현재 중국 절강성 영파에 있는 아육왕사(阿育王寺) 및 천태산 진각사(真覺寺) 등에 있는 석가여래 진신사리는 바로 아소카왕이 천하에 널리 사리를 나누고 탑을 새로 만들 때 공양했던 것이다.
사리(舍利)는 또 사리자(舍利子)라고도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는 실리라(室利羅)로 쓰고 영골(靈骨)이라고 번역한다. 즉 여래 몸에서 나온 뼈를 말하는데 계정혜 수련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오백 나한이 모두 기사굴산으로 돌아와 제석암(帝釋岩)에 머물렀다. 아난을 장로로 삼고 여래의 경법(經法)을 결집했다.
이에 아난존자가 상좌에 올라가 자신이 들은 경법을 다시 외우면 여러 사람이 따라 적었다. 매번 첫 구절에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라고 증명했는데 부처님께 직접 들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삼장(三藏)의 법보(法寶)가 이뤄졌고 그에 따라 수행하면 모두 따라 도과(道果)를 성취할 수 있었다. 일설에는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아난존자는 여전히 수다원과에 불과했으나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에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가섭존자의 의발(衣鉢)을 전수받아 천축 이조(二祖)가 되었고 나중에 전해지고 전해지다 마명(馬鳴)과 용수(龍樹) 두 대사(大士)에 이르러, 대승불교가 생겨나 여러 이론을 널리 만들고 경전의 이치를 밝혔다.
또 28조 달마대사는 남조 양나라 무제 때 동쪽으로 강을 건너와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이것이 불교가 유전된 정통(正統)이다. 불법이 중국에 전해지자 수당(隋唐) 이래로 핵심적인 의리를 명확히 밝혀 큰 장관을 이뤘다.
인도의 대승불법(大乘佛法)은 결국 인도에서 실전되었다.(인도는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 10세기에 외도가 다시 일어나고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인도 전역에 부처님의 자취가 사라졌다. 그러므로 인도에서 망한 것은 불교가 망한 게 아니라 불교(佛敎)를 믿고 실천하지 않아 망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은 인도에서 발원했지만 중국에서 대승불교가 창성(昌盛)했고, 이후 한국으로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역주: 문장 중 일부 내용은 중국불교 특유의 인식으로 한국과 다른 부분들이 있으나 최대한 원문 그대로 번역했다. 또 지명이나 인명도 가급적 원문의 한자 표현을 살리되 국내에서 널리 통용되는 일부 용어에 한해 현지 발음으로 표기했다.
(옮긴이주) 붓다는 자신이 가르친 불법이 말법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설했는데, 대방등대집경 월장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약 내가 세상에 있을 때는 法을 들은 모든 성문들은, 계구족(戒具足 계를 잘 지키며),
사구족(버림을 잘 지키며), 문구족, 정구족, 혜구족, 해탈구족, 해탈지견구족하여,
나의 正法이 세상에서 활짝 타오를 것이다..... 나의 법에서 해탈한 듯이 견고할 것이다.
다음 오백년에는 나의 법 중에서 선정에 들고, 삼매에 드는 사람이 견고할 것이다.
다음 오백년에는 경을 많이 읽고 경을 많이 듣는 사람이 견고할 것이다.
다음 오백년은 나의 법을 배우는 사람 중에 탑과 절을 많이 짓는 사람이 견고할 것이다.
다음 오백년은 나의 법에서 다투며 법이 사라지며 견고함이 없어질 것이다.
청정한 사람들아 알지어다! 이때 이후 나의 법을 배우는 사람은 비록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었지만 戒를 파괴하며 法이 없는 듯이 행동하며 이름만 비구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