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낳은 뽕나무
- 강판권지음 -글항아리
1. 중국 문명의 가장 오래된 상징
-산서에서 시작된 뽕나무의 고대사 중국 역사를 열었던 堯와 舜임금이 태어난 산서의 봄은 무척 아름답다. 봄철이면 집집마다 예쁘게 차려 입은 아가씨들이 삼삼오오 몰려 나와 웃고 떠들며 뽕밭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산서성을 포함해 섬서성, 감숙성 등지는 비옥한 비여과성 토양을 이루는 황토로 덮여 있었다. 그래서 매년 비료 없이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고, 강우량이 제한돼 있는데도 습기를 유지할 수 있는 토양 때문에 매년 풍년이 들었다. 이 지역들은 고대 중국 농업의 가장 오래된 중심지였다. 특히 산서 동북에 위치한 大同지역은 뽕나무가 즐비했다. 이곳에 뽕나무가 많았던 것은 이곳을 흐르는 桑乾河 때문이었다. 상간하 주변 땅은 뽕나무가 자라기에 아주 적합했다. 상간하는 바로 이곳의 상황을 고려해서 붙인 이름이다. 하천 이름이 ‘마를 간’ 이 들어간 것은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가 5~7월 경 익을 즈음 이곳의 하천이 말랐기 때문이다.(마를 건의 본음은 간이다.) 夏나라 禹임금이 도읍한 산서성 해주의 안읍에서 가까운 하현 서음촌에서는 중국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채도문화의 유적이, 포주 만영현에서는 앙소문화의 유적이 발견됐다. 이러한 흔적은 이 지역이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한 곳이었음을 증명한다. 1926년에 하현 서음촌 유적 발굴에서 사람이 반으로 잘라 실을 뽑아낸 듯한 누에고치 껍질이 발견됐다. 돌 혹은 도자기로 만든 물레도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고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누에고치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발굴자인 이제는 누에고치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는 중립적 입장을 내보였다. 하지만 앙소문확에 이미 잠업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뒤를 잇는 은나라와 주나라의 시대에 고도로 발달한 잠상 관련 유물의 존재를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선사시대를 지나면 중국대륙은 기원전 1600년대에 용산문화기에 접어든다. 은?주의 역사 시대에는 양잠이나 견직물이 유물이나 기록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옥누에와 누에고치 문양이다. 1953년 안양 대사공촌에서 발견된 은묘의 부장품에서 7절 백색옥잠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발굴 되었고, 1966년 산동성 소부둔의 은묘에서도 정교한 옥잠이 출토되었다. 옥잠과 함게 은대(기원전1500~1100) 청동기에는 튀어나온 눈을 달고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생동감 있는 누에 문양도 선명히 나타나고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러한 잠문이 북방에서는 물론, 남방의 흑도 유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대부터 중국 전역에서 비단이 생산됐다는 걸 의미한다. 1959년 강소성 오강의 언덕 유적지에서 출토된 검은 간토기에는 누에 문양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누에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중국은 ‘옥의나라’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옥이 흔하다. 옥공예 기술 또한 아주 뛰어나다. 갑골문에 등장하는 ‘옥’은 세 개의 옥을 세로의 끈으로 묶은 모습이다. 옥은 누구나 탐내는 물건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옥에는 ‘사랑하다’는 뜻도 담겨 있다. 옥은 단단하기 때문에 조각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상나라에 이르러 옥조각 기법이 매우 발달해 평면부조나 선 조각이 존재했고, 반입체와 입체 원형 조각도 있었다. 상나라 때는 璧?琮?圭?璋?璜 등 옥의 종류도 아주 많았다. 상나라 때 옥공예가 발달한 것은 옥이 제사에 사용하는 상스러운 물건이었을 뿐 아니라 권력의 징표였기 때문이다. 아주 귀한 옥궤는 예악기로 사용했다. 이처럼 누에가 상징물로 도안될 정도라면 실생활에서 비단이 널리 쓰였음은 짐작할 만하다. 그 증거로 청동기 표면에 부착된 견직물의 흔적이 있다. 1950년 안양 은허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세 점의 창과 1955년 정주에서 출토된 상나라 때의 무덤에서도 그 흔적이 나왔다. 스웨덴의 견직물 학자 실완(Vivi Sylwan)은 스톡홀름의 말모 박물관에 소장된 은대의 청동기 술잔과 청동 도끼에도 직물의 직조 과정에서 나타나는 마름모 문양인 능형문과 마름모꼴을 여러 개 겹쳐 돌아올 回 자의 모양으로 만든 回文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실완은 비단인 綺를 생산하는 데에 이르렀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은대에 잠업이나 견직물이 성행했다는 사실은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 기록에 의해서도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갑골문에는 잠상과 연관된 단어로 뽕나무를 의미하는 桑, 누에를 뜻하는 蠶, 비단으로 만든 천을 의미하는 帛, 비단으로 만든 머리쓰개를 의미하는 巾, 옷을 의미하는 衣 등이 등장한다. 그 외에 실을 묶는다는 束, 실로 낚시질을 한다는 敏등 방직과 관련된 문자들이 나온다. 상형문자인 갑골문은 수천 자에 불과한 것으로서 당시 사회에 존재했던 보편적인 사물이나 현상만을 표현하고 있는 제한된 문자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잠업이나 방적?직견과 관련된 문자가 많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잠업이나 견직물이 보편적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정수일 교수의 실크로드 연구에 따르면 주대에 이르러 견직업이 더욱 발달해 생산규모가 확대되었고, 견직업을 체계적으로 관리?운영하는 제도도 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례?에는 주나라가 방직업을 “부녀자의 일[婦功]”로 저극 장려하고 왕공, 사대부, 백공, 상려, 농부 등과 함께 국가의 6대 직종으로 규정했으며 전문적인 관리 기구와 제도를 마련해 견직물 생산을 국가적으로 통제했다. 天官산하에 典婦功, 典絲, 典?, 內司服, 縫人, 染人 등 6개 생산관리 부서를 둬 방적 원료의 구입과 저장?이용에서 염색과 의류 봉제에 이르기까지 관리하고 전담자를 배치했다. 중국의 고대 언어, 신화, 문학, 철학, 사회, 문화를 총망라한 ?상서?를 보면 전국 9주 중 곤주, 청주, 서주, 양주, 형주, 예주 등 6개주에 잠사가 분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공물 조항을 보면 生絲, ?蠶絲, 綢, 검은색 주, 흰색 絹, 고운 絹綿, 고운 갈포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렇듯 양잠은 중국의 신석기 시대에 출현해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기반산업으로 성장했다. 중국은 지금부터 3~5천여 년 전부터 뽕나무를 심고 누에고치를 길러 비단을 짠 나라였던 것이다. 이 시기 대부분의 다른 문명에서는 동물의 가죽과 털을 가공하거나, 나무껍질을 가공해서 실을 얻는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식물을 먹고 자란 동물의 배설물로 실을 뽑아낸 중국의 방식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고대 황하문명이 농경민족의 발상지였다는 점과 뽕나무가 자라기 좋은 비옥한 토양, 그리고 의복을 중시하는 문화가 결합되어서 오랜 기간 진화?발전해온 결과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 문명이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윌리엄 맥닐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이 비단 생산에서 앞섰던 반면 서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전차나 정교한 무기에서 중국 문명을 훨씬 앞질렀다. 기원전 1400~1100년 사이에 은의 수도 안양에서 발굴된 맑의 유골, 청동 무기와 장신구, 전차 등은 서아시아 문명이 이 시기 중국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이런 유물들은 비슷한 시대에 서아시아?그리스?인도 등지에서 전차를 몰던 정복자들이 이 땅에 남긴 흔적을 강하게 암시한다. 전차의 좁은 공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본체의 크기를 줄이고 동물의 뼈나 힘줄을 덧대어 강력하게 만든 합성궁, 도시 자체의 장방형 배열은 분명 중국적인 것이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황하 유역과 서아시아를 갈라놓은 사막과 험준한 산맥 등 지리적 거리 때문에 둘 사이에 영향이 있지는 않았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가령 서아시아에서 전차가 완성되었을 때, 이 강력한 신형 무기의 주인들은 중앙아시아 오아시스의 평화로운 농경만을 쉽게 복속시켰을 것이다. 지금이야 사막화가 진행되어서 중앙아시아가 완벽한 오지가 되어 버렸지만, 과거에는 눈 덮인 고산에서 떨어져 내린 물줄기가 히말라야?알타이?천산 산맥의 기슭에 있는 사막으로 흘러들어 다양한 크기의 오아시스가 즐비했다. 황하유역은 이들 오아시스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동쪽에 있던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 전차를 탄 정복자들이 처음으로 서아시아에 출현한 시기와 전차를 닮은 유사한 군사장비가 중국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는 연대 사이에는 약 200년의 격차가 있다. 바다로 막혀있지 않다면 비록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문명간의 교류가 생겨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모든 문명은 고유의 발명품이 있다. 서아시아의 무시무시한 전차나 도시건설의 기술은 유럽으로 전해져 후대에 로마제국의 위용을 만들어냈다. 반면 3천 년 전부터 정교화되기 시작한 중국의 견직업은 당?송대에 이르러 중국을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랄로 만들었고,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남송의 수도 항주를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번화한 도시로 만들어놓았다.
2. ?빈풍광의?에 실린 섬저지역 사람들의 잠상관련 자료
1. ?정월, 잠상 도구와 농기구 수리? 정월에는 백성들이 衣食의 단초를 여는 시절이다. 그래서 잠상에 필요한 잠박이나 잠추, 농경에 필요한 농기구 등을 손질해야한 한다.
2. ?2월, 밭갈이? 2월은 중춘절이라 밭두둑 등지에 뽕나무를 심어야 한다. 또한 곡물농토에는 쟁기질 하는 시절이다.
3. ?3월, 누에가 나오는 시기? 3월은 늦봄이라 누에가 겨우 나올 즈음이다. 뽕 잎을 칼로 잘라서 먹여야 한다. 누에를 키우는 일은 어린애를 기르는 것과 같다.
4. ?4월, 식욕이 왕성한 누에와 뽕잎 따기? 4월은 보리나 밀이 푸른 물결처럼 출렁이는 시절이다. 누에도 세 번째 잠을 잔 뒤라 큰 잎을 먹여야 한다. 더욱이 이 때는 누에가 뽕잎을 많이 먹기 때문에 아주 부지런히 제공 해야만 한다.
5. ?5월, 실을 토하는 누에와 실뽑기? 5월은 여름에 접어들어 누에가 고치를 만들 때다. 이 시기를 잘 보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6. ?6월, 한가한 시간? 6월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인지라 고치가 오래되면 실을 켜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솥에 삶아 실을 켜야만 한다.
7. ?7월, 베짜기 독촉? 7월은 밤새도록 불을 밝혀 부녀자들이 비단을 짜느라 무척 고통스러운 시절이다.
8. ?8월, 면화 작업 및 누에 장비 수리? 8월은 白露인지라 만물이 가을을 만나 찬 기운이 점차 몸으로 파고드는 시절이다. 그래 서 이때 명주옷을 모두 만들었다. 아울러 이때는 면으로 옷을 만들어야 추위를 잘 견딜 수 있었다.
9. ?9월, 비단 판매? 9월엔 서풍이 점차 불어 찬 기운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이때는 비단옷을 몸에 걸쳐야 한 다.
10. ?10월, 추운 겨울의 잔치? 10월은 초겨울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알 수 있는 계절이다. 의식이 족하면 가을에 수확한 찹쌀로 술을 담그고 잔치를 베푼다. 자제들에게는 시와 글자를 가르친다.
11. ?11월, 눈 내리는 날 비단옷 입고 외출하기? 11월엔 눈이 날려 얼굴을 때리고 날 저물면 북풍이 분다. 이때 누에의 공을 절감할 수 있다.
12. ?12월, 오디 심기? 12월은 문을 닫고 발을 드리워 쉬기에 아주 적합한 시절이다. 아울러 이때는 다음해 양 잠을 준비해야 한다.
3. 뽕과 누에의 비단 생산 과정
비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뽕나무와 누에가 있어야 한다. 흔히 비단을 만드는 뽕나무는 대부분 桑이다. 상은 집에서 키워 家桑이라 부른다. 그러니 가상은 인공으로 개량한 뽕나무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뽕나무와 누에를 ‘桑蠶’ 혹은 ‘蠶桑’이라 부르는 것도 가상에서 유래한다. 가상은 산에서 자라는 뽕나무, 즉 ?(자)와 달리 누에처럼 사람의 필요에 따라 개량한 것이다. 인간이 이렇게 뽕나무를 개량한 것은 결국 누에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래야만 실을 많이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복잡한 과정과 많은 장비가 필요하다. 결코 여자 혼자서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처음 배우는 사람은 그 과정을 이해하기조차 어렵다. 특히 국가 차원에서 권장할 경우에는 이 복잡한 과정을 설명하는 방법이 매우 중요했다. 그 과정을 이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중국에는 이와 관련한 그림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청초의 ?授時通考?에 그림으로 그 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비단을 만드는 과정은 크게 누에치기, 뽕나무기르기, 실뽑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누에는 실내에 산다. 실내에서도 특히 따뜻한 기운을 만들어 줘야 잘 산다. 이때 필요한 게 火倉이다. 화창에서 불을 지피려면 들고 다니는 화로, 즉 擡爐가 필요하다. 이는 온도 조절을 위해서 꼭 필요한 장비다. 만약 온도가 고르지 않으면 누에가 자거나 일어나는게 일정치 않다. 누에가 만든 고치 속에는 번데기가 들어 있다. 번데기는 다시 나방으로 변한다. 고치를 뚫고 나온 누에나방은 한 시간 정도 지나면 날개를 편다. 그러나 누에나방은 날개를 편다 해도 나비처럼 크진 않다. 오히려 날개가 배보다 작다. 그래서 나비처럼 날지 못한다. 만약 누에나방이 나비처럼 날아간다면 더 이상 잠상 농가들은 비단을 생산할 수 없을 것이다. 누에나방은 인간이 개량한 나방이다. 이들은 특별한 자극을 주지 안는 한 줌직이지 않는다. 수컷 역시 거의 움직이지 않지만 가끔씩 움직임을 보인다. 수컷은 암컷에게 가서 구애해야 한다. 그런데 이 수컷들은 눈으로 암컷을 볼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암컷을 찾아갈까? 암컷은 날개돋이를 하자마자 노란 주머니를 배 끝에 내밀어 냄새를 뿌린다. 수컷을 유혹하기 우해 향기를 내뿜는 것이다. 암컷을 발견한 수컷은 바로 짝짓기에 돌입한다. 짝짓기를 끝낸 암컷은 곧장 알을 낳기 시작한다. 한 마리가 낳는 알은 대개 500개 정도다. 처음엔 노란색이었던 알은 차츰 보라색으로 변한다. 암컷 나방은 고치에 알을 낳지만 종이를 사용하기도 한다. 나방이 알을 낳은 모습을 보면 마치 긴 선으로 연결한 듯하다. 그래서 이것을 ‘蠶連’이라 부른다. 이때 사용하는 이른바 잠연지는 약간 회색을 띤 종이가 가장 좋다.
1) 사잠 도구 누에 기르는 사잠과정에서 필요한 도구도 적지 않다. 우선 누에의 발인 잠박을 매다는 기둥, 즉 蠶?가 필요하다. 이는 곡우 즈음에 세운다. 이외에도 누에 광주리인 蠶筐이 필요하다. 잠광은 대나무로 만든다. 누에 쟁반인 잠반은 대나무 혹은 일반 나무로 만든다. 누에 시렁인 잠가는 대소가 있다. 대개 광주리를 사용할 경우에는 작은 것을, 쟁반을 사용할 경우에는 큰 것을 사용한다. 이 같은 도구는 주로 남쪽에서 사용한다. 누에 망인 잠망은 줄로 만든다. 만드는 방법은 어망 제작과 같다. 그런데 그물을 만든 후 찢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옻칠 혹은 기름칠을 한다. 누에를 고르게 펴는데 사용하는 잠표, 누에고치 담는 바구니인 견농, 누에고치 담는 바구니를 시렁에 올리는데 사용하는 잠연, 누에를 담는 조릿대인 단족, 말의 눈처럼 짜서 만든 누에 담는 그릇인 마두족, 누에고치를 담는 옹기인 견웅 등이 있다. 누에가 먹는 뽕잎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재배하고 있는 뽕나무는 키가 작다. 그러나 옛날의 뽕나무는 상주은척면의 뽕나무처럼 키가 크다. 키 큰 뽕나무의 잎을 따려면 다른 장비가 필요하다. 특히 여자가 뽀잎을 따려면 안전한 장비가 필요했다. 상궤는 바로 뽀잎 따는 데 필요한 도구다.
2) 실 뽑기 작업 누에가 뽕잎을 먹고 고치를 만들면 실을 뽑는 작업 즉 소사과정이 남아 있다. 소사에도 적지 않은 단계가 있고, 그렇기에 장비도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우선 고치를 켜기 위한 기계가 있어야 한다. 소사 기계 중 하나는 소거다. 같은 소거일지라도 남쪽과 북쪽간에 차이가 있었다. 북소거가 남소거보다 약간 복잡하다. 실을 뽑기 위해서는 고치를 솥에 삶아야 한다. 이때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온수 담을 동이도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실을 뽑아야 한다. 사확과 낙거는 실 감는 기구다. 실을 감은 다음에는 다시 실을 당기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작업에는 날줄인 세로줄을 만드는 기구인 경가와 씨줄인 가로줄을 만드는 기구인 위거가 갖춰져 있어야만 한다. 이런 과정을 마치면 베 짜는 작업에 들어간다. 직기에는 북이 필요하다.북은 씨줄에 필요한 도구다. 실을 뽑은 뒤에는 다듬이로 두드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솜을 타야 한다. 솜 타는 기계는 서거다. 다듬이질은 여자가 맡고 있는 반면 솜 타는 일은 남자가 맡고 있다. 이 일은 힘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솜 타는 일은 곧 비단을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흔히 아주 세밀한 것을 綿, 거친 것을 絮라고 한다.
3) 상수리나무, 떡갈나무와 양잠 한 생명체의 식성은 늘 변한다. 어떤 생명체든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 가지만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살아 있는 동안 한 가지만 먹는다면 어떻게 될까? 언제까지나 먹을 대상이 있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 순간 죽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게 없으니, 어떤 생명체든 스스로 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항상 똑같은 것을 먹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먹는 대상도 달라진다. 누에가 뽕잎을 먹는 것은 그게 가장 자신에게 알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누에가 뽕잎을 먹을 수는 없다. 뽕나무가 없는 지역이거나 뽕잎이 있다가 없이지면 다른 것을 먹어야 한다. 특히 꼭 먹어야 할 시점에 먹을 대상이 엇다면 죽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생명체는 결코 죽음을 마냔 기다리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 어떤 생명체도 그럴 만큼 어리석지 않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먹을 것이 없으면 다른 지역으로 옮긴다. 이것이 최근에 등장하는 벌레의 ‘습격사건’이다. 때맞춰 먹을 것을 찾지 못한 생명체는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옮겨 먹을 것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한 쪽에서는 습격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생태계의 반란이자 인류 위기의 신호탄이다. 최근의 기후 변화는 이런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그런데 우리를 한층 더 갑갑하게 하는 일은 이런 현상이 결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누에도 상황에 따라 먹는 대상이 다르다. 대부분의 누에는 집뽕나무 혹은 산뽕나무 잎을 먹는다. 하지만 뽕잎 외에 다른 종류의 나뭇잎을 먹는 누에도 있다. 과연 누에는 뽕잎 외에 다른 어떤 나무의 잎을 먹을까? 현재 누에가 뽕잎 외에 먹는 나뭇잎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참나뭇과이다. 참나뭇과에는 여러 종류의 나무가 있지만 흔히 사람들이 참나무로 부르는 나무는 대략 여섯 가지, 즉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 등이다. 이중에서 누에가 즐겨 먹는 나무는 상수리나무와 떡갈나무다. 이러한 나무를 먹는 누에를 흔히 野蠶 혹은 山蠶이라 부른다. 야잠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집뽕나무 잎을 먹는 家蠶의 상대어다. 야잠은 여섯 종류의 참나무 잎 외에도 참죽나무 잎과 가죽나무 잎을 먹는다.
4) 야잠에 대한 기록, ?상견도설? 야잠을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중국에서는 자료상 한나라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40년 한나라 元帝때다. 중국에는 집뽕나무로 키우는 양잠 외에 야잠에 관한 기록도 풍부하다. 19세기 중엽에 나온 劉祖憲의 ?橡繭圖說?(1827)은 야잠 중 상수리나무와 관련한 자료다. 이 자료의 특징은 책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림도 함께 들어 있다는 점이다. 상수리나무를 일컫는 한자는 ????????靑? 등 다양하다. 이처럼 상수리나무를 의미하는 단어가 많은 것은 지역에 따라 달리 불렀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한자는 때로는 참나뭇과의 다른 나무를 의미할 때도 있다. ?상견도설?에 따르면, 중국 최초의 사전인 ?이아?에서는 橡을 역으로, 산동과 관중에서는 곡으로, 귀주에서는 청강으로 불렀다. 곡과 청강은 때론 ?과 더불어 떡갈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아울러 ?이아?에 따르면 역을 저와 허로 부르기도 한다. 저는 모든 지역에서 불렀던 이름이고, 京洛과 徐州에서는 ?斗라 불렀다. 이처럼 상수리나무와 관련한 단어가 복잡한 것은 지역에 따라 이 나무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을 뿐 아니라 나무 분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상수리나무의 한자는 열매를 본뜬 글자다. ?이아?에서 역을 ?라고 부른 것도 이 나무의 열매를 강조한 것이다. 상수리나무를 橡으로 사용한 것은 고슴도치 털 같은 것이 열매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수리나무 잎을 누에에게 먹일 때는 시기가 중요하다. 누에를 비롯해서 어떤 생명체든 나름대로 식성이 있기 때문이다. 상수리나무 중에서도 누에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잎이 가느다란 細葉靑?이다. 청강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색깔이 푸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잎 가장자리에 엷은 홍색을 띤 것이다. 이 나무들은 모두 톱처럼 잎이 길었다. 잎이 큰 大葉靑? 혹은 잎이 두꺼운 厚皮靑?도 있었다. 또한 잎이 두터운 청강과 비슷한 胡利葉, 대엽을 가진 水靑?도 있었다. 상수리나무 잎으로 누에를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나무를 키우는 것이 우선이다. 농가의 수익은 결국 누에의 먹이를 얼마나 적절하게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상수리나무는 종자로 번식한다. 요즘에야 다양한 방법으로 종자를 번식시키지만 옛날에는 지금과 달랐다. 우선 종자를 구해야 한다. 상수리나무 종자는 어린 나무가 아니라 나이 많은 나무의 열매를 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열매는 나무에 달려 있는 것을 따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땅에 떨어진 열매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 열매를 주워 웅덩이에 넣는다. 웅덩이는 열매를 어느 정도 넣을 것인지에 따라 크기와 깊이를 조정한다. 열매를 웅덩이에 넣은 다음 흙으로 덮는다. 다음해 봄에 열매를 심기 위해서는 땅을 골라야 한다. 대개 나무는 척박한 땅을 싫어한다. 뽕나무도 척박한 곳을 싫어한다. 반면 상수리나무는 그렇지 않다. 상수리나무의 열매를 심기 위해서는 땅 색이 아주 누렇고, 흙이 아주 조밀한 곳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땅 색깔이 흑색이거나 습한 곳은 피한다. 바위산은 두말할 것도 없다. 상수리나무가 살기 좋은 땅을 고른 후 파종한다. 파종ㅎks 뒤 싹이 올라오면 다른 곳에 심어야 한다. 대개 하루에 한 사람이 상수리나무 묘목을 심을 수 있는 양은 300주 정도였으며, 10명이 10일에 3만 주를 심을 수 있는 셈이다. 아울러 상수리나무 한 그루는 누에 40頭를 먹일 수 있었다. 3만 주에서 얻을 수 있는 고치는 120만개였다. 상수리나무 묘목을 옮겨 심은 후에도 적지 않은 일이 남아 있다. 어떤 작물이든 가꾸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클 수 없기 때문이다. 묘목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는 뭐니뭐니해도 풀이다. 어린 묘목 주위에 풀이 무성하면 영양분을 모두 풀이 먹어 치워서 상수리나무의 성장이 아주 더디거나 심지어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김매기는 필수다. 김맨 상수리나무의 잎은 감미롭고, 소와 양도 아주 좋아한다. 나무든 사람이든 나이가 들면 거칠어진다. 상수리나무도 나이가 들수록 잎이 거칠어지고 기운도 떨어진다. 이런 나무의 잎은 누에가 잘 먹지 않거나 혹 먹더라도 실을 적게 만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무의 노화 현상을 방지하는 방법 중 하나가 가지치기다. 가지를 자르면 그곳에서 새 가지가 나온다. 이것이 식물의 특징이자 동물과 다른 점이다. 가지치기도 적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한 그루당 50~60가지가 적당하다. 가지치기에도 때가 있다. 무시로 베다간 큰일 난다. 7월에는 가지를 절대 베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이 시기에 나무가 가장 왕성하기 때문이다. 이때 농부들은 반드시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가시나무와 풀을 제거해야 한다. 아울러 나무의 성장을 위해 휴식년을 두어야 한다. 참나뭇과의 떡갈나무 잎도 누에의 먹이로 사용했다. 떡갈나무 양잠하는 것을 ?蠶이라 불렀다. 떡갈나무로 양잠하는 것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중국 강남의 역우에는 청말에 이르러서야 시작했다. 물론 작잠에 대한 기록은 후한시대의 것이다. 그러나 작잠은 桑蠶에 밀려 거의 발달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전에는 떡갈나무가 단지 뗄감이나 목재로만 인식됐다. 방법은 상수리나무와 거의 같았다.
2. 비단제국의 탄생
1) 차이나와 비단 기억은 단단하다. 한번 기억한 것은 쉽게 지울 수 없다. 한번 각인된 지식은 걷어내기가 무척 어렵다. 중국을 의미하는 ‘차이나’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을 처음 통일한 秦과 연결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억은 명말청초 예수교 선교사의 불확실한 주장 때문이다. 차이나외 진Tsin긔 음성학적 유사성에 착안한 그의 주장은 의심의 여지없이 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파고들었다. 중국을 의미하는 震旦?眞旦?支那 등은 오랫동안 중국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콘크리트 같은 기억을 깰 수 있는 것은 때론 공기로 쇠를 자르듯이 단단한 게 아니라 아주 가벼운 것일 수 있다. 중국을 의미하는 단어 차이나도 아주 간단한 상식으로 깨졌다. 차이나와 진나라를 연결시킨 것은 진이 중국을 다른 세계에 알렸다는 전제 혹은 강박관념이었다. 그만큼 진나라는 강력한 인상을 남긴 중국 최초의 제국이었다. 물론 진나라의 등장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이라는 의미 외에도 중국의 중요한 정치체제인 황제 지배 체제의 확립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진나라는 이전의 왕조와는 달랐다. 진 이전의 은?주는 씨족공동체에 기초한 邑制국가에 불과했다. 그에 반해 진이 세운 황제지배 체제는 청이 망할 때 까지 20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같은 정치체제는 유사 이래 중국 외에는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울러 진의 등장으로 춘주시대부터 생긴 군현제가 확립되었다. 이 제도 역시 이후의 중국 왕조들이 모방했다. 특히 진의 등장으로 중국은 만리장성을 경계로 농경지대를 확보해 영토의 고정화를 이루었다. 이처럼 이전 왕조와는 차원을 달리했던 진나라를 중국의 상징 국가로 인식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간혹 유명세가 진실을 은폐하곤 한다. 서양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중국을 인식했다. 그들은 중국을 ‘시나 Cina' '세레스 Seres' '토가스트 Taugast'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둘은 비단과 관계있는 단어다. 특히 시나를 진나라와 관계있는 용어로 생각한 것은 진나라 이전에 중국이 다른 지역과 교역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진나라 이전, 즉 기원전 221년 이전에도 중국은 오랜 역사가 있었고 많은 사람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살았다. 진나라가 등장하기 전 페르시아나 인도는 중국을 비단 생산과 관련 있는 ‘진Cin' 이나 ’지나Cina'로 불렀다. 기원전 1500년 경의 중국 비단이 지금의 아프카니스탄인 박트리아에서 발견됐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나라들의 자료를 통해 얻은 새로운 정보다. 기원전 4세기부터 인도나 페르시아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에 관한 정보를 접한 그리스인들은 중국을 비단 생산국으만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중국을 의미하는 ‘차이나’가 진나라를 음역한 게 아니라 비단에서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중국사 개설서에서는 여전히 이전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교역의 역사는 아득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은 그 시기를 중국문명이 탄생하던 시기로까지 소급시킨다. 중국 문명은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시대를 거쳐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문명이라는 것이 대체적으로 밝혀졌다. 半건조지지대의 황토라는 독특한 환경은 농경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고 이에 따라 기원전 2000년경부터 환경에 대응하는 독특한 고급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금자족의 농경사회가 고도의 문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것들끼리의 충돌과 그로 인한 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침입자들이 중국 문명에 영향을 미?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가정은 기원전 1400~1100년 사이에 은 왕조의 수도 안양에서 발굴된 말의 유골, 청동 무기와 장신구, 전차로 입증되었다. 거의 같은 시대에 서아시아?그리스?인도 등지에서 전차를 몰던 정복자들의 발명품이 중국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기존의 상식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특히 전차의 좁은 공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본체의 크기를 줄이고 동물의 뼈나 힘줄을 덧대어 강력하게 만든 합성궁과 도시 자체의 장방형 배열은 지울 수 없는 외래문화의 흔적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황하유역과 서아시아가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런 고대에 왕래가 있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부정하려 한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전역에는 눈 덮인 hrtks에서 떨어져 내린 물줄기가 다양한 오아시스를 만들어 농경과 목축이 동시에 가능한 환경을 조성했다. 실제로 어떻게 보면 황하 유역은 스키타이 민족을 비롯해 일찍히 서아시아 고대문명을 일으킨 이들에게는 오아시스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동쪽에 있던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스키타이의 철기문명이 서아시아에 출현한 시기와 전차등의 군사장비가 중국에 도달한 연대 사이에는 약 200년의 격차가 있어 자연스러운 문명의 東傳 현상을 뒷받침해준다.
2) 비단, 길을 만들다. 중국 문명의 혼합적 성격에서 드러나듯 중국에서 경제적 교역 행위의 기원은 매우 오래되었다. 이것 또한 비단과 관련이 있다. ?주역??계사?하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포희씨가 죽고 신농씨가 다스림에 한낮에 시장을 형성하여 천하의 인민을 도래하고 천하의 화물을 취집하여 서로 바꾸고 퇴장케 하니, 각자는 얻고자 한 바를 얻게 되었다.”
농업이 크게 일어남에 따라서 교역행위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런운 일이다. 더 이전에는 몰라도 상나라와 은나라 시대에는 확실히 상당한 규모의 교역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은허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황하 유역에서 생산하지 않은 산품이 많이 있는데, 예를 들면 옥기원료, 송록석, 귀감, 해패 등은 모두 먼 지역에서 나온 것으로 교역을 통해 들여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개껍질을 화폐로 삼은 것은 이 시기에 이미 물물교역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말한다. 중국이 고대 왕조의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아시아에서 스텝지대의 유목민에 대한 방어선이 구축되자, 국가와 상인들은 서로 협력하여 안정적인 교역로를 만들어 냈다. 잘 정비되고 치안이 유지되며 무거운 통행세가 부과되는 대상로가 중국과 로마를 연결했던 것이다. 대상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서방으로 가서 중국의 비단을 로마 제국의 시라아까지 운반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금속, 유리, 상당량의 화폐와 다양한 상품을 싣고 왔다. 거의 같은 시기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면서 홍해를 근거지로 삼아 활약하던 선장들이 인도양의 규칙적인 계절풍을 이용해 아덴 해협에서 대양을 횡단하여 남인도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벵골 만을 건너 인도의 동해안과 말레이를 연결하는 유사한 항해도 시도되었다. 크라 지협의 짧은 거리를 육로로 횡단하면 동남아 연안에서 활동하던 중국의 선발과 접촉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력기원이 시작되거 직전에는 말레이 반도를 가로지르는 지협구간만 제외하면, 해상교역로가 로마와 중국을 연결하게 되었다. 비단길이란 이름을 지은 이는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난트 폰리히트호펜 (1833~1905)이다. 카를스루에서 태어난 그는 1860~1872년 극동경제 사절단의 일원으로 스리랑카, 타이완, 필리핀, 일본 등지를 방문했다. 1868~1872년에는 중국과 티베트의 지질을 조사하기도 했다. 빈단길은 리히트호펜의 땀의 결실로 탄생했지만, 이 길은 결코 하나의 길이 아니다. 비단길은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천산북로와 남로가 있다. 후한의 반초(33~102)가 서역과의 교역을 위해 연 北道, 장건이 개척한 길을 中道라 한다. 북방의 초원로 남쪽에 위치한 동터키스턴 지방은 건조지대지만, 타림 강이 흘러내려 곳곳에 오아시스가 흩어져 있다. 이 오아시스 부근에는 예부터 아리아계통의 민족이 살면서 도시국가를 세워 동서 중개무역을 담당했다. 이들에 의해 중국의 비단은 서방으로 운반됐다. 한편 파미르고원의 서쪽 아무르 강과 시르 강변에도 많은 오아시스 국가들이 발달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길은 없다. 오늘날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지 않는 것처럼, 비단길도 영원할 수는 없다. 이제 비단길에는 중국의 비단이 사라지고 없다. 비단길에서 비단이 점차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10세기 말부터였다. 이 시기에 교역의 관심이 실크로드에서 바닷길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길이 하루아침ㄷ에 바뀌진 않았다. 장사꾼의 관심이 육지에서 바다로 바뀌었다고 해서 비간길로 비간이 유통되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바닷길 역시 수백년 동안 인돠 말레이시아의 상선들이 인도 동해안의 항구에서 중국 남부의 광주로 항해해왔다. 바닷길은 기원전 2세기부터 페트라, 즉 지금의 요르단 와디무사에 기지를 둔 그리스와 로마의 隊商들이 홍해 연안의 항구에서 인도를 향해 출범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길이 바로 뒷날 ‘스파이스 루트, 향료길’이다.
3) 유럽 홍보대사, 비단 로마가 유럽을 대표하는 제국이라면 중국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제국이다. 동서양을 대표하는 제국 간의 만남이 다른 것도 아닌 비단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기록상으로 중국과 서양 간에 이뤄진 최초의 교역상품이 비단이었을 것이다. 로마인은 중국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중국인 역시 로마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로마인은 중국인을 비단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로마인은 중국인을 비단 만드는 사람을 의미하는 ‘세레스Seres'로, 중국은 비단을 만드는 나라, 즉 ’세리카Serica'로 불렀다. 로마인에게 중국과 중국인은 비단을 만드는 나라와 비단을 만드는 사람일 뿐이며,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세리카는 비단을 의미하는 ‘사’와 무관하지 않다. 허신의 ?설문해자?에 의하면 ‘사’는 가는 실을 의미한다. 이 글자는 실을 묶어놓은 모양을 본뜬 글자다. 누에가 실을 토해낸 것을 忽이라 한다. 사는 5홀이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실[絲]은 사가 둘이니 10홀이다. 사의 훈음은 ‘실 멱’ ‘다섯 홀 멱’이다. 로마인이 이렇게 중국을 이해한 시기는 기원전 1세기경이었다. 그러면 누가 중국에서 만든 비단을 서양에 전해줬을까? 또한 로마인에게 비단을 소개한 사람은 누구일까? 고대사회에서 중국의 비단을 외부로 전하는 일은 비단 자체가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상인들이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비단을 전달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해야만 한다. 과연 중국의 비단을 외부세계로 전달할 수 잇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중국과 인접한 곳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어야 한다. 바로 유목 민족이었다. 이들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 역사 자체가 유목 민족과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로는 중국이 유목 민족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유목 민족 역시 중국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중국 역사에서 이들 유목 민족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독일 출생의 미국 사회학자 비트포겔 (1896~1988)에 따르면 중국 대륙을 전형적인 한인 왕조가 다스린 시기는 1447년, 비한인 왕조가 다스린 시기는 1006년이다. 양자가 다스린 시기가 크게 차이나지 않으니, 어느 한쪽의 영향만을 강조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서양에 중국의 비단을 전한 유목민족은 흉노였다. 흉노는 중국 고대 역사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한나라 무제가 엄청난 국가 재정을 소비한 대가로 흉노를 중국 변경에서 몰아내기까지, 흉노는 언제나 중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진나라 황제가 쌓은 만리장성은 흉노가 중국에 어느 정도 위협적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흉노가 서양에 중국의 비단을 전달하기 전에 그들 스스로 그 비단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중국의 비단을 외부에 팔아넘기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것의 중요성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흉노는 어떻게 중국 비단의 가치를 알 수 있었을까? 그들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이 건재할 동안에는 중국을 위협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진나라가 망하자 서서히 중국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중국은 한 무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흉노의 거친 도전을 물리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힘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할까? 굴욕적인 외교는 힘이 없을 때 사용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조공은 중국과 중국 주변국 간의 주요한 외교 방식이었다. 유목민족은 힘으로 중국을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중국은 1년에 여러 차례 흉노에게 조공품을 바쳤다. 조공품에는 비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만큼 비단은 흉노의 마음을 달래기에 적합한 귀중품이었다. 중국이 보낸 비단은 흉노가 소비하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이에 흉노는 남는 비단을 서쪽의 다른 유목 민족과 물물교환으로 거래했다.
3. 뽕나무와 동아시아 3국의 운명
가치는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똑같아야 할 생명의 가치도, 나무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아주 값비싼 것도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은 게 많다. 나무의 가치는 결국 인간의 인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잠상농업이 중요했던 시절에는 뽕나무는 더없이 귀한 존재였다. 그러나 옷감의 변화에 따라 잠상농업은 쇠퇴했고, 잠상농업이 쇠퇴하자 뽕나무도 점차 사라졌다. 뽕나무가 사라진 뒤에는 다른 작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다. 아니 생명체의 가치는 언젠가 다시 드러나게 마련이다. 잠상농업이 쇠퇴한 지 대략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잠상이 다시 뜨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식물의 가치를 생명으로 바라볼 것을 주장하더라도, 식물을 생명으로 바라볼 때만이 진정 인간이 식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더라도, 인간은 좀처럼 식물을 그런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인간은 식물을 병을 낫게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최근에는 잠상이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의학의 발달로 잠상의 약효가 증명됐기 때문이다. 이제 잠상의 가치가 옷의 원료에서 생명을 연장시키는 원료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잠상이 인간의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밝혀졌다. 단지 최근에는 현대병의 치료제로 활용하고 있다는 게 다를 뿐이다. 잠상이 건강에 얼마나 좋은지를 구체적으로 밝힌 권위 있는 자료는 ?본초강목?이다. 중국 명나라 이시진이 편찬한 이 자료는 전통시대 약학의 최고서다. 여기에 잠상의 약효에 대해 자세가헤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잠상의 약효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할 생각이 없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인간이 식물을 약효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식물이 약효보다 다른 의미를 갖고 있기 깨문이다. 더욱이 내가 애기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주 쉽게 잠상이 지닌 약효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현재 당뇨를 앓고 계신다. 그래서 어머니의 당뇨를 걱정하는 자식들이 누에로 만든 약을 사서 드시게 했다. 이처럼 최근에는 잠상이 당뇨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잠상농업이 성행 중이다. 그만큼 잠상 관련 제품이 많이 팔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때문에 뽕나무가 수난을 겪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잠상을 옷에서 약의 가치로 인식하는 것은 어찌 보면 옛날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과거와 아주 다른 점이 있다. 옛날에 나무를 약으로 인식한 것은 고작해야 한약 재료 정도에 불과했다. 혹은 민간에서 자신 혹은 가족의 건강에 일정하게 활?했을 뿐이다. 이 단계에서 잠상을 약으로 사용했더라도 그 가치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잠상이 지니고 있는 약의 가치는 과거 잠상이 제공한 옷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부가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잠상의 부가가치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잠상농업의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만 창출할 수 있다. 잠상농업의 역사가 없는 나라는 아무리 선진국일지라도 이 분야에서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잠상농업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물론 이러한 행운도 현대과학에 힘입어 발전시킬 때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1) 동아시아 3국의 잠상기술 경쟁 전쟁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됐다. 그러나 전쟁방식은 시대마다 달랐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전통시대의 전쟁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지금은 한계 없는 무한 전쟁시대다. 전통시대의 전쟁에는 소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소리조차 없다. 전쟁에 소리조차 없으니 어디서 전쟁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른다. 일상이 전쟁인 전쟁을 실감하기조차 어렵다. 오히려 전쟁에 둔감하다. 전쟁에 둔감한 사이 인생이 자신도 모르게 바뀐다. 전쟁 중에서도 가장 소름끼치는 전쟁은 ‘종자전쟁’이다. 종자가 없으면 생명체의 삶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종자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를 실감할 수 없다. 지구상에는 대략 1,250만 종의 생명체가 있다. 그런데 이 중 해마다 2만5천 종씩, 한반도에서는 500종씩 사라진다. 1800년도 미국에서는 7,100 종의 사과가 있었지만 지금은 6,800종 이상이 사라졌다. 이처럼 지구상의 종자는 아주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공룡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듯이 인간도 언제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노르웨이 정부는 지구 최후의 날이 올 때를 대비해서 종자 저장소를 만들었다. 공식 명칭은 ‘스발바르 국제종자 저장고 (Svalbard International Seed Vault)'이다. 이 저장고는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거나 기후 이변으로 남극의 빙하가 모두 녹아내리는 등 혹독한 재앙이 지구에 닥쳐도 종자들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곳에 저장한 종자는 300만 종이다. 종자는 섭씨 영하 10~20도 사이에서 저장된다. 이 온도가 종자 보관에 가장 좋기 때문이다. 현재 종자 산업 경쟁은 반도체보다 치열하다. 각국에서는 종자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다. 우리나라는 식물유전 자원을 15만점 보유하고 있다. 세계 6위다. 그러나 화훼시장에서 장미, 국화의 국산품 품종 보급률은 고작 1퍼센트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딸기 품종의 85퍼센트 가량도 일본 품종이다. 현재 채소를 포함한 국내 종자 시장의 대외 로얄티는 200억 원 규모다. 미국, 유럽 등 종자 기술 선진국에서는 종자 채집과 신품종 개발 수준을 넘어 첨단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해 식물 추출물에서 신약, 신물질을 개발하는 ‘2차 종자 전쟁’이 시작되었다. 식물과 미생물을 포함한 세계 유전자원 시장이 연간 9,000조 규모이기 때문이다. 종자 산업은 자본과 시장이 승부처다. 1개의 과수품종을 개발하는 데 20년의 연구가 필요할 뿐 아니라 3000개의 발아 성장을 통한 특성 연구 결과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도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종자 산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종자 개발 중 뽕나무도 매우 중요한 품목이다. 특히 뽕나무는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뽕나무는 다른 나라에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면서 부가가치가 아주 높다. 선진국들이 뽕나무에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뽕나무의 유전자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3국은 뽕나무 재배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뽕나무 관련 산업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이익을 줄 수 있다. 3국은 벌써 뽕나무와 관련해서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뽕나무가 한국의 미래 산업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애국하는 길이다. 현재 뽕나무 관련 산업에서 중국은 유전자 지도를 만들 만큼 이 분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뽕나무 잎을 이용한 각종 산업은 중국이 선도하고 있다. 중국은 다른 국가보다 뽕나무 자원을 아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중국이 관심을 덜 갖고 있는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내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 분야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두 나라에 비하면 열세다. 나는 한국 잠상 산업의 미래를 확인하기 위해 수원에 가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특히 야잠과 관련한 산업은 매우 희망적이었지만 여전히 재정 지원이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았다.
2) 희망의 뽕나무 현재 한국의 농촌은 아사 직전이다. 농촌의 위기는 곡물을 비롯한 각종 산업의 위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농민들은 농촌을 살리기 위해 각종 대책을 스스로 찾기도 하고, 때론 정부에 요구하기도 한다. 정부도 농촌을 살리기 위해 각종 정책 마련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농촌의 위기와 관련해서 농민은 물론 농촌과 농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게 있다. 그건 바로 농업의 위기 보다 훨씬 심각한 위기가 농촌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은 농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농촌에서 살았다고 해서 농촌의 미래를 아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이들이 농촌에 미래와 희망을 걸지 않는다. 농촌에서 먹고살 만한산업을 만들 수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꿈을 발견하지 않는 것은 농촌 자체에 꿈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발견하려는 꿈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딘들 꿈이 없겠는가? 하루에도 수백 명씩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에도 꿈이 있다. 그런데도 세계 무역 규모 13위인 한국의 농촌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농촌의 꿈과 희망을 이곳에서 생산한 각종 제품을 판매한 수익에서 찾는다면, 농촌은 영원히 꿈과 희망의 터전일 수 없다. 왜냐하면 농촌에서 사는 사람들이 생산한 제품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다른 산업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농촌 출신이거나 도시인 중 농촌에 들어와서 괜찮은 아이템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성공한 이들의 경우를 더해도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다. 그렇다고 농촌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이 많은 분들에게 그런 산업에 뛰어들게 할 수도 없다. 때론 희망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농촌의 희망은 가장 농촌적일 때 이룰 수 있다. 과연 무엇이 가장 농촌적인가? 가장 농촌적인 현상은 땅이 살아 있을 때다.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올릴 때 땅을 생각한다. 그냥 땅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건강한 땅을, 살아 있는 땅을, 맨발로 그냥 뛰어다닐 수 있는 그런 땅을 상상한다. 그러나 한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농촌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농촌에는 살아 있는 땅이 없다. 대부분이 도시처럼 죽은 땅이다. 도시처럼 시멘트로 포장한 도로가 난무하다. 도시처럼 골목마다 차가 즐비하다. 한국의 농촌은 죽었다. 한국의 농촌이 죽은 것은 이곳의 땅이 죽었기 때문이다. 죽은 땅에는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없다.그래서 희망의 씨앗을 뿌리려면 무엇보다도 죽은 땅을 살려야만 한다. 어떻게 하면 죽은 땅을 살릴 수 있을까? 생태농업이 답이다. 그 동안 한국의 농촌은 반생태적이었다. 땅은 농약과 쓰레기로 뒤범벅 되어 있다. 한국의 농촌은 성한 곳이 없는 중환자다. 한국의 농촌은 사람 외에 다른 생명체가 온전히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생명체가 살기에 아주 척박한 곳이다. 그 많던 미꾸라지는 농약으로 사라진지 오래고, 미꾸라지가 살았던 도랑은 시멘트 포장으로 덮인 지 오래다. 논과 도랑에서 잡아먹던 추어탕은 양식 미꾸라지와 중국산 미꾸라지가 아니면 만들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놓인 농촌에서 어떻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러나 희망은 절망에서 잉태하는 법이다. 절망이 희망을 낳는 법이다. 생태 농촌을 만들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 농촌을 살아 있는 땅으로 만들려면 행복과 희망의 지점이 달라야 한다. 과거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발상부터 달라야 한다. 발상의 전환은 ‘가치의 발견’에서 출발한다. 농촌을 희망과 꿈의 터전으로 만들려면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고, 더불어 살지 않으면 죽는다는 각오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농촌에서 다른 사람보다 많은 돈을 벌겠다고, 농촌에서 거창한 사업을 펼치겠다고 덤비는 자들이 있는 한, 농촌의 땅은 살아날 수 없다.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사는 것만으로도, 그런 자세로 농사를 짓고 밥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 땅을 살릴 수 있다. 뽕나무는 살아 숨 쉬는 땅과 함께 하는 나무다. 농촌에 뽕나무가 많다면 그곳은 청정지역이다. 그러나 다른 과수나무들이 많다면 그곳은 죽은 땅이다. 뽕나무에는 농약을 뿌리지 않지만, 과수나무에는 많은 농약을 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뽕나무는 생태농촌을 구분 짓는 잣대다. 상수원 주변에 과수 농사를 짓는다면 죽음을 부르지만, 뽕나무 농사를 지으면 행복을 부른다. 농촌 마을에 한 그루의 뽕나무가 자라는 한, 한국 농촌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한국의 도시 곳곳에 한 그루의 뽕나무가 자라는 한, 한국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
출처: 생명활동운화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