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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는 투기가 많은 간악한 여자로서 전실 소생인 세자 인종을 죽이고 자기의 소생인 경원대군을 임금으로 올려 앉히려고 온갖 모략을 썼다. 세자 인종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여 빈궁과 함께 동궁에서 지내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깊은 밤중에 동궁에 까닭 모를 불이 났다. 계모 문정왕후가 인종 부부를 죽이려고 음모한 끝에 살아 있는 쥐를 여러마리 잡아다가 그 꼬리에 기름을 묻힌 솜 심지 를 달고 밤중에 불을 붙여서 동궁으로 풀어 넣은 것이다. 그와 빈궁이 잠들어 있는데 주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번져 일어나 보니 동궁전이 불에 타고 있었다. 잠을 자던 인종은 화재에 놀라서 잠을 깨기는 하였으나 몸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불에 타 죽으려고 몸을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빈궁을 깨워 먼저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용히 앉아서 타 죽겠다고 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타 죽을 터이니, 빈궁이나 어서 몸을 피하시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불을 누가 지른 것인지 알았기때문이다. 인종은 이렇게 빈궁에게 권하였으나 빈궁도 듣지 않고 남편인 인종과 생사를 같이할 결심으로 『세자마마께서 귀하신 몸을 피하셔야지 소첩만 살면 무엇합니까? 』 하고 울면서 세자를 끌어 내려고 하였다. 『그 전에도 어머님께서 나를 죽이려고 하셨을 때, 내 몸을 피한 것은 부모님께 불미한 소문이 미칠까 하여 내가 살았던 것으로 조금도 내 목숨이 아까와서 그랬던 것은 아니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밤중이니 내가 타 죽더라도 어머님께 아무런 불미한 지목도 가지 않을 게 아니오? 어마마마의 마음을 편하게 하여 드리고 왕실의 내분을 없게만 한다면 이 또한 효도이고 세자로서 마땅히 할 일이 아니겠소? 』하고 꼼짝 아니하였다. 문정왕후가 이미 몇 번에 걸쳐 그를 죽이려 했는데 그때마다 요행히도 그는 죽음을 면하곤 했다. 비록 계모이긴 하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자신을 그토록 죽이려고 하니 자식된 도리로 죽어주는 것이 효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조용히 불에 타 죽겠다고 작정한것이다. 세자의 말을 들은 빈궁도 자신 혼자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온통 불이 동궁 건물을 에워 쌓고 활활 타오르고 있을 무렵, 동궁에 배치되었던 궁인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인종 부부를 구하려고 야단 법석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졸지에 화형을 당할 지경에 처했는데, 마침내 중종이 와서 황급한 지경에 이른 위험함을 보고 우는 음성으로 다급히 세자를 불렀다. 『백돌아, 백돌아, 어서 뛰어 나오너라! 백돌아!』 백돌이란 인종의 어렸을 때의 兒名으로 중종 임금이 하도 급한 바람에 세자의 체면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어렸을 때의 이름을 불러 대었던 것이다. 세자를 애타게 부르는 중종의 목소리였다. 인종은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이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겐 효행이 되나 부왕에겐 불효이자 불충이라고 말하면서 빈궁과 함께 불길을 헤쳐나왔다고 한다.
1. 12대 임금 :인종(31세 사망)
(1515-1545. 재위 기간 1544년 11월-1545년 7월. 윤정월 포함해 9개월간)
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짧은 치세를 남긴 왕이다. 8개월 보름 남짓 왕위에 머물러 있다가 원인 모를 병으로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더니 후사도 하나 남겨놓지 않고 훌쩍세상을 떠나버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를 성군이라 일컬었다.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성품, 금욕적인 생활 등이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인종은 1515년 중종과 장경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호, 자는 천윤이다. 생모 장경왕후 윤씨가 그를 낳고 7일 만에 죽었기 때문에 그는 중종의 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라야했다. 1520년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어 무려 25년간이나 세자로 머물러 있다가 1544년 중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2.인종의 가계 / 부인:2명, 자녀:없음
중종의 두번째 부인 장경왕후의 장남으로 인성왕후 박씨와 귀인 정씨가 인종의 부인이며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1515-1545) 재위 기간은 1544.11-1545년 7월로 윤정월 포함하여 9개월이었다.
그는 성품이 조용하고 효심이 깊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3세 때부터 글을 읽을 정도로 총명하여 1522년 여덟 살의 나이로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차례씩 글을 읽었다. 게다가 철저한 금욕 생활을 추구했던 듯 동궁에 머물 당시에는 옷을 화려하게 입은 궁녀는모두 내쫓았으며,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다. 이는 그가 도학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어진 성품은 계모 문정왕후의 표독하고 사악한 성격을 방치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런데 문정왕후 윤씨는 성질이 고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여자였기 때문에 전실 부인의 아들인 인종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야사에 따르면 윤씨는 몇 번이나 인종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불을 지른 장본인이야 구태여 따져 보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종은 범인을 뻔히 알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고,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사건은 유야무야 없던 일로 처리되고 말았다.
이렇게 몇 차례 죽음의 위험을 겪어내면서 인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30세였다. 인종이 왕의 자리에 오른 뒤에 중국에서 사신이 왔다. 그때 인종은 경복궁으로 사신을 안내하고 부왕 중종이 거쳐하던 궁전을 소개하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부왕을 그리워 하는 모습을 본 그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명나라 사신은 『전하는 참으로 하늘이 낸 큰 효자이옵니다. 』 하고 칭찬하였다. 등극후 그간 자신이 익히고 배운 도학 사상을 현실 정치에 응용하려는의도에서 다시 사림들을 등용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계에 진출한 사람이 이언적, 유관 등 사림의 대학자들이었다.
인종 임금은 서른 살에 왕좌에 올랐으나 왕자가 없는 채 미처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재위9개월 만인 1545년 7월에 31세의 짧은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인종이 그렇게 빨리 죽은 것은 문정왕후 윤씨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한다. 인종은 계모이긴 하지만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인 문정왕후에게 효도를 다하기 위해 극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윤씨는 항상 인종을 원수 대하듯 했고, 문안인사차 들른 인종에게 자신과 아들 경원대군(명종)을 언제쯤 죽일 것이냐고 말할 정도로 막말을 해댔다고 한다. 그러나 인종은 그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효성이 부족함을 개탄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며 지냈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 심지어는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식을 두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인종이 앓아 누워 죽게 된 것도 문정왕후가 내놓은 독이 든 떡이 그 원인이라는 독살설이 야사에 전하고 있다. 어느 날 인종이 문안 인사차 대비전을 찾아갔는 데, 그날 따라 문정왕후는 평소와 다르게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인종을 반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에게 떡을 대접했다. 인종은 난생 처음 계모가 자신을 반기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 아무 의심 없이 그 떡을 먹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인종은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얼마 못 가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이 야사가 시사하는 것은 문정왕후의 인종에 대한 멸시와 시기가 얼마나극악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문정왕후의 극악스러움이 먹혀들었던 것은 인종이 너무나 유약하고 선하기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도 인종은 승하하기 이틀 전 인 6월29일에 기묘사화 때 피해를 입은 사림 세력들을 신원하여 조광조, 김식, 김정, 기준 등을 복권하고 현량과를 다시 설치하라는 교지를 내린다.
3.인종의 능(효릉)
능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으며, 그의 효행을 기리는 뜻으로 능호는 효릉이라 했다.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와 귀인 정씨 두 명의 부인을 두었다. 인성왕후 박씨는 금성부원군박용의 딸로 1514년에 태어났다. 1524년 11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으며 인종이 죽은 후에도 32년을 더 살다가 1577년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인종과 함께 효릉에 묻혔다. 귀인 정씨는 정유침의 딸이며, 정철의 큰 누이다. 소생은 없었으며 생몰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조선왕조 12대 임금인 인종(재위 1544∼1545년)은 연산군을 쫓아내고 즉위한 중종의 아들이다. 그가 조선의 임금 중 최초로 독살설에 휘말린 데는 후사를 둘러싼 궁중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다. 중종이 반정을 일으키기 전의 잠저(潛邸) 시절 첫 부인은 신씨였다. 신씨의 아버지는 연산군 시절의 우의정 신수근이었는데, 반정공신들은 그를 연산군의 처남이란 이유로 죽여버린다. 신수근을 죽여버린 반정공신들은 후환이 두려워 중종의 첫 부인 신씨를 내쫓고 새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한다. 그녀가 바로 인종의 어머니인 장경왕후 윤씨다. 그러나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 10년(1515)에 중종의 첫 아들 호(岵 인종)를 낳았으나 산후 조리에 실패해 25세에 죽어버렸다. 인종은 태어난 지 엿새 만에 어머니를 잃은 것이다.
중종은 2년 후인 1517년 새로운 여자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는데 그녀가 조선의 왕후 중 두고 두고 구설에 오르는 文貞王后 尹氏였다. 인종의 독살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여인이기도 하다.
파란은 문정왕후가 중종의 둘째 아들 환을 낳으면서 시작된다. 환은 세자 호보다 열아홉살이 어렸다. 따라서 세자 호가 살아 있는 한 문정왕후의 아들 환이 임금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 호가 세자로서 보위를 잇게 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자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들이 없는 것이었다. 세자의 계모 문정왕후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리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세자가 후사없이 죽는다면 문정왕후 소생인 환이 즉위하는 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정사인 『인종실록』은 인종이 부왕의 죽음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야사(野史)들은 어김없이 계모 문정왕후가 독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문정왕후에 의한 인종 독살설은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인종이 죽자마자 사화(士禍)가 재발했기 때문이다. 명종 즉위년에 발생한 을사사화(1545)가 그것이다. 조선 초·중기는 「훈구파」라는 구정치세력과 「사림파」라는 신정치세력의 정권을 둘러싼 각축이 심했다. 사화란 집권당인 훈구파가 야당인 사림파를 공격하는 정치 탄압을 말한다. 그런데 중종 때의 기묘사화 이후 거의 종결됐던 사화가 인종 사망 직후 다시 재연된 것이다. 인종이 승하하고 그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발생한 을사사화는 조선 사림파 사대부들로 하여금 문정왕후의 인종독살설을 사실로 믿게 했다.
그 배경에는 당시 대윤과 소윤이라 불리는 두 당파의 대립이 자리잡고 있다. 대윤과 소윤은 각각 임금의 외척이었다. 대윤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아우인 윤임이 영수였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윤원로 등이 영수였다. 중종이 살아 있을 때 대윤은 장경왕후 소생인 인종을 지지했고 소윤은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을 지지했다. 또한 대윤은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를 지지한 반면 소윤은 사림파에 적대적이었다. 중종의 뒤를 이어 인종이 즉위한 직후 대윤이 정권을 잡아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다.
인종은 시종일관 사림파를 옹호했던 군주였다. 그는 왕위에 있는 동안 부왕 중종 때 발생한 기묘사화의 피화자(被禍者)들을 신원(伸寃)할 생각이었다. 인종은 중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조광조·김정 등 기묘사화 피화자들을 신원하려 했으나 갑자기 병색이 짙어지자, 『조광조·김정 등의 복관과 현량과(賢良科) 복과는 선왕 때의 일이므로 서서히 하려 했는데 이제 내 병이 이와 같으니 조광조 등을 신원시켜주고 현량과도 복과하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면서 그들을 신원시켜 주었다.
이렇게 인종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사림파들의 신원을 생각할 정도로 이상적인 사림정치에 대한 열망을 지닌 군주였다. 또 인품이 인자하고 학문도 높아 사림파로서는 기대를 걸 만한 존재였다. 그랬으니 인종의 요절에 대한 사대부들의 분노와 좌절은 더 컸다.
인종이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인물이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이었던 점은 인종 독살설에 더욱 불을 댕겼다. 명종은 당시 12세의 미성년이었으므로 대왕대비 문정왕후나 왕대비 인성왕후(인종비) 중 한 명이 섭정을 해야 했는데, 명종이 인종의 동생이었으므로 『형수와 시숙이 한 자리에서 정사를 볼 수 없다』는 이언적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모후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자마자 사화가 뒤따랐던 것이다.
인종 승하 직후 발생한 을사사화와 함께 상법(喪法)에 어긋나게 치렀던 인종의 장례도 인종독살설에 설득력을 갖게 했다. 인종의 장례는 이른바 「갈장(渴葬:임시로 빨리 장사지내는 것)」으로 집행되었다. 이는 소윤의 주장 때문이었다.
소윤 이기는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빨리 장사지낼 것을 주장했다. 이는 훗날 사가(史家)들이 인종에게 박하게 하는 것으로 문정왕후에게 아부했다고 비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소윤의 윤원형, 이기 등은 인종의 국상중에도 웃는 낯을 보여서 의기 있는 선비인 교리 정황(丁煌)이 『이 역적놈들을 보니 더욱 원통하다』고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분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을사사화란 철퇴가 날아들어 대윤과 함께 사림파가 화를 입게 된다. 을사사화는 윤임, 유관 등 대윤과 앞으로 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한 문정왕후와 소윤의 음모였다. 갓 세상을 떠난 인종의 시신이 궐내에 남아 있는 상황에 사화가 발생했고, 인종의 지지세력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실들이 인종 독살설을 신빙성 있게 만든 것이었다.
을사사화 2년 후에는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쓴 벽서가 나붙은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남은 사림파마저 주륙을 당했다. 이처럼 문정왕후의 섭정 기간은 사림파에게는 암흑의 나날이었고 그 어두운 세월을 횡행한 것은 『선왕(인종)이 독살당했다』라는 은밀한 소문이었다. 그리고 사림파는 문정왕후가 죽는 순간까지 분노를 삭이고 있어야 했다.
하서 김인후, 인종 임금을 그리워하다 - 장성 맥동마을, 필암서원
기묘사림 복권 주장한 인종의 스승이자, 문묘 배향 18인 유학자 중 유일한 호남선비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후지, 호는 하서(河西), 본관은 울산이다. 대한민국에서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의 선조다.
'래 소인(小人)으로서 죽어도 죄가 남을 자는 다 복직되고, 한때 잘못한 일은 있더라도 그 본심은 나라를 속이지 않은 자는 상은(上恩)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상은을 입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이 숭상하던 글도 모두 폐기하고 쓰지 않으니, 매우 온편하지 못합니다.'
1543년 7월 20일 부수찬(종6품) 김인후는 경연에서 중종임금에게 기묘사림들의 복권 문제를 거론한다. 그날 중종 임금은 승지 홍섬에게 다시 묻는다. 승지 홍섬(洪暹)에게 전교하기를, “김인후가 아뢴 전말을 잘 듣지 못하였는데, 과연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하니, 홍섬이 답하였다. “신도 미처 잘 듣지 못하였으므로 사관(史官)에게 물으니, 본심이 나라를 속이지 않았다는 것은 기묘년 사람(조광조·김식·김정·기준·윤자임·한충 등)을 가리킨 것이라 합니다.”
김인후는 7월 22일 경연에서 이틀 전에 한 이야기를 중종 임금에게 다시 자세하게 아뢰었다. “전에 조강(朝講)에서 신의 말소리가 작아서 분명히 아뢰지 못하였으므로 지극히 황공합니다. 기묘년 사람은 한때 한 일이 죄다 옳지는 못하나, 그 본심은 터럭만큼도 나라를 속인 것이 없는데도 마침내 무거운 죄를 입었습니다. 그 뒤에 죄 지은 사람 중에는 대역부도(大逆不道)하여 죽어도 죄가 남을 자라도 세월이 오래되어 혹 복직(復職)된 자가 있는데, 기묘년 사람은 오히려 상은(上恩)을 입지 못하니, 신은 홀로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뿐이 아니라, 그들이 한때 숭상하던 '소학', '향약(鄕約)'의 글도 모두 폐기하고 쓰지 않습니다.” (중략)
임금이 이르기를, “저들이 마음을 쓴 것이 그르지 않다 할지라도 장차 나라를 그르치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조정이 그 폐단을 바로 잡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소학', '향약'을 사람 때문에 폐기할 수는 없다”하였다. 이 날 경연에서 이언적도 나서서 기묘사림의 복권을 주장하며 김인후를 도왔으나 중종 임금은 화가 난 표정이었다. 직급도 낮은 신하가 자기가 내친 조광조 등을 다시 복권하라 건의하니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임금으로서는 못마땅한 일이었으리라.
이 일이 있은 후 1543년 12월에 김인후는 노부모 봉양을 이유로 전라도 옥과현감으로 내려온다. 하서 김인후(1510-1560). 호남 성리학의 선구자인 그는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해 정월 보름날에 아래 한시를 써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 났다.
높고 낮음은 땅의 형세요
이르고 늦음은 하늘의 때라
사람들 말이야 무슨 험 되랴
밝은 달은 본래 사심이 없도다.
高低隨地勢 早晩自天時
人言何足恤 明月本無私
그는 전라감사로 부임한 조광조의 삼촌인 조원기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고, 8세 때 봄에는 고봉 기대승의 삼촌인 기준을 만나 임금의 붓을 선물로 받기도 하였다. 10세 때 전라감사인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으며, 박상과 최산두, 그리고 송순에게도 글을 배웠다. 김인후는 소쇄원 주인이고 조광조의 문인인 양산보와도 친구이자 사돈이었다.
22살(1531년)에 성균관에 입학한 하서는 퇴계 이황과 교분이 두터웠고, 1540년(중종 35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 다음해에 호당에 뽑혀 이황, 나세찬, 임형수 등과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는 일)의 영광을 누렸다.
하서 김인후는 일찍이 시강원 설서(정7품)가 되어 인종(1515-1545)을 가르치던 스승이었다. 세자 시절 인종은 하서를 극진히 사랑하여 묵죽도를 그려주고 새로 간행된 '주자대전'을 주었으며 술도 같이 마시었다. 인종이 그린 묵죽도는 지금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묵죽도에는 다음과 같은 하서의 시가 적혀 있다.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이리 정미(精微) 하니
바위를 친구 삼은 정갈한 뜻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비로소 성스런 혼이 조화를 기다리심을 보았나이다.
온 천지가 어찌 어김이 있겠습니까.
根枝節葉盡精微 근지절엽진정미
石友精神在範圍 석우정신재범위
視覺聖神俟造化 시각성신사조화
一團天地不能違 일단천지불능위
1544년 11월에 중종임금이 승하하고 인종임금이 즉위하였다. 김인후는 인종을 곁에서 모시면서 지키고자 하였다. 그는 문정왕후가 임금의 약 처방까지 한다는 데 불안 해 하였다. 또한 임금과 한 궁궐에 있는 것도 미심쩍었다. 그래서 자신이 의원의 처방에 동참하겠다고 하고 임금의 거처를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효종임금은 ‘역(逆)이지만 충(忠)이다’ 라고 하였다. 비록 계모이지만 어마마마인 문정왕후를 의심한 것은 역적질에 해당되지만 임금을 위하여 한 행동은 충절이라는 의미이다.
인종 임금이 돌아가시고 명종이 즉위하자 하서 김인후는 옥과현감을 끝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36세의 나이에 아예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 이후 명종이 벼슬을 여러 번 하사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명종이후의 관작은 기재하지 말라고 유언까지 한다. 하서는 인종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가 쓴 ‘그리운 사람(有所思)’이란 시를 읽어보자.
임의 나이는 서른이 되어 가고
내 나이는 서른여섯이 되는데
새 즐거움 반도 못 누렸건만
한 번의 이별은 활줄 떠난 활 같네.
내 마음 돌이라서 굴러갈 수도 없는데.
세상 일은 동으로 흘러가는 물 같아.
한창때 해로할 임 잃어버리고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마저 희었네.
묻혀 살면서 봄가을이 몇 번이던가.
오늘까지 아직도 죽지 못했소.
하서는 인종의 기일인 매년 칠월이면 장성 백화정 집 앞의 난산에 가서 종일토록 통곡하였다. 제자인 송강 정철이 그 모습을 시로 남기었는데 그 편액이 필암서원에 있다.
동방에는 출처 잘 한 이 없더니
홀로 담재옹(하서의 다른 호)만 그러하였네.
해마다 칠월이라 그날이 되면
통곡소리 온 산에 가득하였네.
東方無出處 獨有湛齋翁
年年七月日 痛哭萬山中
김인후는 문묘에 배향된 정몽주, 조광조 18명의 유학자 가운데 유일한 호남의 선비이다. 장성군 필암서원과 황룡면 맥동마을에는 그에 대한 흔적이 많다. 백화정, 난산, 어사리(인종이 하사한 배의 씨가 자란 배나무), 그리고 묘소에는 도학과 절의와 문장 이야기가 진하게 남아 있다.
첫댓글 지금 서울 태릉에 잠들어 있는 문정왕후 윤씨에 대해 관심이 있어 읽어 보았습니다.
문정왕후가 사관들에 의해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누가 쓴 글인지는 모르지만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표독하고", "사악하고", "극악하고"... 등
참 모질게도 표현했네요. (글쓴이를 알고 싶지만 모르겠지요)
또 "호남선비"는 왜 또 강조를 하는지..
여하간 제가 조선왕조에 관심이 많아서 그렇고요
다음 글도 한번 보는게 어떨까 싶습니다.
참고로 명종도 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하여 중종의 다른 비의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아들이 선조가 되지요.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3092
順懷世子는 조선 제13대 임금인 명종 이환(李桓)과인순왕후의 첫째 아들로 이름은 부(暊), 초명은 곤령(崐齡).이다. 7세 때인 1557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561년 윤원형의 인척인 전 참봉 황대임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여 책빈례(冊嬪禮)까지 마쳤으나 그녀에게 복병이 있다는 이유로 양제(良娣)로 강등시키고 다시 윤옥(尹玉)의 딸 공회빈(恭懷嬪) 윤씨(尹氏)와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가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된 1563년 중병에 걸렸고, 명종은 대사면을 하라는 명까지 내렸으나, 바로 그 날 13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경역내에 위치한 순창원(順昌園)으로 부인인 공회빈(恭懷嬪) 윤씨(尹氏)와 함께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