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앓이
김영화
여름은 꼬리를 감추고 가을바람 써늘히 불어온다. 가슴속에 서걱거리는 갈대 소리, 문득 서글픔이 물밀듯 밀려온다. 명치끝에서 주먹만 한 통증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가을 앓이가 똑똑 노크한다. 하마, 불청객이 찾아올세라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한다.
낭만으로 여겼던 가을 앓이가 이제는 싫다. 그 느낌 아니까. 슬픔도 고독도 감당하기 버겁다. 이 나이에 하루라도 즐겁게 보내자는 게 나의 지론이다. 삶이란 찾아 나서는 자의 것이라 하지 않았든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 좋은 날, 집에 있으면 나만 손해지. 따뜻한 햇살 온몸으로 받으며 깊어 가는 가을의 정취를 맞으리라.
얼마 전, 헌 자전거를 처분하고, 전기 자전거를 새 식구로 맞이했다. 수동으로 갈 수 있고 자동으로도 갈 수도 있다. 힘들게 오르던 오르막도 장거리 길도 수월하게 갈 수 있어 여간 편리한 게 아니다. 오토바이가 부럽지 않다. 그래, 오늘은 너와 함께 하는 거다. 물결 따라 흘러가자. 천(川)을 지나고 강을 넘어 푸른 바다 넘실대는 바다로 가자.
첫사랑을 만나는 소녀처럼 설렌다. 가을 가을한 날씨가 쾌청하다. 페달을 힘껏 밟으며 속도를 올린다. 대지와 맞닿은 바퀴에 불꽃이 튄다. 쌕쌕 스치는 바람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스쳐가는 풍경이 고향의 정겨움으로 다가온다. 형형색색의 국화꽃이 미소 짓고 물속에서 숭어가 펄쩍 뛰어오르며 반긴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도시에서 살던 한 소년이 시골로 전학을 왔다. 유난히 뽀얀 얼굴엔 귀티가 흘렀고, 잘 생긴 얼굴은 왕자님 같았다. 새까맣고 꼬질꼬질한 시골 머시마들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얼굴에서 빛이 났고 교실 안이 환했다. 나는 그 아이가 입었던 짙은 보라색 반바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소년은 공부를 뛰어나게 잘했다. 반장인 창민 이를 제치고 2학기엔 우리 반의 반장이 되었다. 그리고 소원대로 내 짝지가 되었다. 나는 다른 여자 아이들의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이었다. 학교 가는 날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복도를 뛰어 다니며 곧잘 장난을 쳤다. 내가 쓴 동시를 그 아이에게 주면서 더욱 친하게 지냈다.
4학년에 올라가면서, 반이 갈렸다. 남자와 여자는 합반이 될 수 없었다. 학교의 방침이 그랬다. 1반에서 3반까지는 남학생반이고, 4반에서 6반까지는 여자 반이었다. 처음으로 성별의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부끄러워 말 한마디 못 하고 스쳐 지나갔다. 소년은 6학년이 되어서 전교 회장이 되었고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학교의 자랑이 되었다. 그럴수록 소년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어린 시절의 첫사랑을 생각한다. 맑은 봄날의 햇살 같은 순진무구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이기에 더욱 그립다.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짝사랑으로 끝이 났다.
어느새 광안리에 도착했다. 편의점에서 커피와 라면을 샀다. 바다 바람을 맞으며 우아하게 점심 식사를 한다. 고급 레스토랑과 카페가 부럽지 않다. 가로수의 가을이 진다.
그 아이는 나를 기억이라도 하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