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심사
이 사찰은 1888년 창건되었으나 묘심사가 아닌 대성사란 사명으로 불렸다. 원래 대처승 사찰이었으나 1960년대 어느날 묘심사란 사명으로 재창건 된 이후 오늘에 이른다.
묘심사는 원래 이곳이 아닌 서구 토성동에 있던 사찰로서 1912년 임제종 포교당으로 개창된 사찰이다. 전해오는 문헌에 따라 현재의 보수동, 부민동, 초량 등으로 그 위치를 옮기고 있음이 보이지만 토성동이 마지막 정착지임을 알 수 있다.
묘심사는 일본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개창된 탓에 오랜 세월 일본 스님에 의해 사격이 운영 유지되다가 해방 이후 우여곡절 끝에 한 기독교인에 팔리는 비극을 맞게 됐다. 이를 보다 못한 몇몇 신도들에 의해 묘심사의 성보가 대성사 즉 현재의 묘심사로 옮겨지게 된 것이 1960년대 무렵이었으니 절명의 순간을 슬기롭게 대처한 신도들의 혜안이 돋보이는 대목이라 하겠다.
당시 신도들은 서구 토성동에 있던 절에서 관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 그리고 범종과 종각 등 많은 성보를 가지고 왔는데 이렇게 묘심사가 그 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부처님 도량을 지키고자 한 신도들의 큰 원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