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학년 때였는데 처음으로 친한 친구가 생겼다. 전학생이었는데 선생님이 나하고 짝을 시켰다. 전학해 온 아이가 새로운 환 경에 적응할 동안 마음이 순한 아이하고 짝을 지키는 게 선생님의 공통된 버릇이었다. 나는 반에서 존재 없는 아이여서 아무 일에도 뽑힌적이 없건만 그런 일엔 단골로 뽑혔다. 나는 속으로 모욕감을 느꼈지만 드러내 놓고 싫은 눈치도 못했다. 나는 내 가 착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바라는 유일한 기대를 배반할 용기가 없어 그런 척할 수밖 에 없었다. 그 애는 성만 일본식으로 갈고 이름은 복순이라는 촌스러운 본명 그대로였다. 생긴 것도 촌스럽고 의복도 남루한 편 이었다. 그 애하고 짝이 된 첫 시간에 배운 국어가 도서관에 대한 거였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출해서 읽고 반납하는 과정이 자세히 나오는데 선생님은 너희들도 실제로 도서관을 한 번 이용해 보면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도서관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 다. 그런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근면해서 성공한 이야기가 나오면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고 했고, 정직에 대해서 나오면 정직이야 말로 가장 가치 있는 도덕이라고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가 보다 들어 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 촌스러운 복순이가 다음 일요일 날 같이 도서관에 가보자고 나를 꼬였다. 선생님이 가르쳐 준 공립도서관의 위치 를 잘 들어 두었는데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국어책에 나온 대로 거기서 보고 싶은 책을 실컷 빌려보면 얼마나 신나겠느 냐는 것이었다. 그 애는 책 보는 재미에 대해 나보다 뭔가를 더 알고 있었다. 그 애에 비해 나는 처녀지와 다름이 없었다. 선생님 이 가르쳐 준 도서관은 지금의 롯데 백화점 자리였다. 그때 그 도서관을 우리는 공립도서관이라고도 했고 총독부 도서관이라 고도 했다. 해방되고 나서 국립도서관이 된 바로 그 건물이었다. 일요일 날 같이 가기로 하고 먼저 그 애 집을 알아 놓기로 했다.
도서관가는 게 학교 숙제라고 했더니 단박 엄마의 허락이 떨어졌다. 공일날 아침, 그 애네 집에서부터 도서관까지의 길은 나 에겐 멀고도 낯설었다. 그 애도 처음이어서 겁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길을 물어 간신히 당도한 곳은 아이들이 만만하게 이 용할 수 있게 생긴 건물이 아니었다. 붉은 벽돌 건물엔 권위주의적인 정적이 감돌고 있었고 감히 어디로 어떻게 들어가 책을 빌 리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안에 충충하게 고여있는 어둡고 서늘한 정적을 훔쳐보는 것조차 두려워서 가슴을 졸이며 열려 있는 문을 이 문 저 문 조심스럽게 엿보고 다니는데 정복을 입은 수위가 달려왔다. 나는 나쁜 짓 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내 동무는 또박또박 교과서에서 배운 도서관 이용법을 직접 해 보려고 왔노라고 말했다. 당장 몰아 낼 듯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온 수위였지만 내 동무의 똑똑함에는 감동을 한 듯했다. "허, 고것들 참." 하면서 이 도서관에는 아이들 열람실이 없으니 딴 도서관엘 가보라고 했다.
수위 아저씨가 가르쳐 준 딴 도서관은 거기서 가까웠다. 지금의 조선호텔 정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부립(府立)도서관이었다. 해방 후엔 서울대 치대도 됐다가 여러 번 용도가 바뀌었지만 그때는 총독부도서관 다음으로 큰 도서관이었다. 그 도서관 역시 우리 같은 촌뜨기가 만만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게 당당하게 음침한 분위기의 건물이었지만 아이들 열람실은 본관에 서 따로 떨어진 단층의 학교 교실만한 별관이었다. 들어가는데 아무런 수속 절차가 필요 없었고 아저씨 한 사람이 선생님처럼 앞의 책상에 앉아 있고 아저씨 뒷면 벽이 온통 책장이었는데 아무나 자유롭게 꺼내다 볼 수 있는 개가식이었다. 교과서에 배 운 것 같은 열람을 위한 수속 절차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제 집 서가의 책처럼 마음대로 꺼내다 보고 재미없으면 갖다 꽂고 딴 책을 가져오기를 아무리 자주 되풀이해도 그만이었다. 실제로 읽지는 않고 그렇게 촐싹거리기만 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저씨는 어린이들을 향해 앉아 있을 뿐 이래라저래라 말이 없었다. 그 또한 온종일 책을 일고 있었다.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꿔 본 별천지였다.
그날 처음 빌려 본 책이 『아아,무정』 이라는 제목으로 아동용으로 쉽게 간추려진 『레미제라블』이었다. 물론 일본말이었고 삽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 읽는 재미에다 황홀감을 더해 주었다. 간추려졌다 고는 하지만 상당한 두께의 책이어서 도서관을 닫을 시간까지 속독을 했는데도 다 읽지 못했다. 대출은 허락되지 않았다. 못다 읽는 책을 그냥 놓고 와야 하는 심정은 내 혼을 거기다 반 넘게 남겨 놓고 오는 것과 같았다. 숙부 네 다락방에서 만화책을 빼앗겼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그것과는 댈 것도 아니게 허전했다. 미칠 것 같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내 동무가 읽은 건 소공녀였고 끝까지 다 읽었다고 했다. 우리는 몹시 흥분해서 서로가 읽은 책 애기를 주고받았고 다음 공일에도 또 가자고 약속했다.
엄마는 내가 공일날마다 도서관에 가는 것을 덮어놓고 기특해 했고 오빠는 내가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동화책을 읽으러 간다는 걸 알았지만 도서관에 비치된 책에 대해 신뢰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말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 공일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씩 읽는 건 내 어린 날의 찬란한 빛이 되 었고, 복순이와 나는 더욱 단짝이 되었다.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에서
크크크 오늘 생일이라고 영풍문고에서 좋은 글 하나 보내줬는데 이런 내용이네요...책을 읽으라고... 책 많이 읽으면 좋지만..... 그래도 많이 읽어야 겠죠 크크크
우리모두 오늘부터 책을 읽으시길 바라며...담에 또 뵙겠습니다.
크크크 글구 저 닉네임 바꿨습니다....해바라기로요....이름 좋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