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정거장
장 수 철
하얀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었읍니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낮은 산 밑에 자리잡고 있는 정거장은 그 하얀 보슬비를 맞으며 그림처럼 조용하기만 하였읍니다.
급행열차는 그대로 획획 지나가고, 어쩌다가 정거하는 완행차조차도 내리고 타는 손님은 두셋뿐, 붐비는 일도 없었읍니다.
멀리 바라보면 꼭 장난감 같은 시골 정거장이었읍니다. 그러나 정거장은 깨끗하게 단장되고, 꽃으로 가꾸어져서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왔읍니다.
꽃을 좋아하는 역장 아저씨가 틈만 있으면 역 구내는 말할 것도 없이 정거장 안팎에 예쁜 꽃밭을 만들어놓기 때문입니다.
꽃 정거장·
그렇습니다. 역장 아저씨는 꽃 정거장이라고 불릴 만큼 정거장을 온갖 예쁜 꽃으로 장식해보겠다는 것이 꿈이었읍니다.
그러한 마음을 몇 해 전 사랑하던 아들이 멀리 월남 전선에서 베트콩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뒤부터 생긴 일입니다.
전사한 아들은 유달리 꽃을 좋아하여 월남 전선에서도 신기한 꽃을 발견하면 꼭 봉투에 넣어서 역장인 아버지에게 보내오곤 했던 것입니다
그날도 역장 아저씨는 하얀 보슬비를 맞으면서도 꽃밭을 두루 돌아보고 있었읍니다. 꽃 하나하나를 돌아보면서 아들의 모습처럼 생각하며 사랑의 마음을 쏟아주는 것이었읍니다.
한 아이가 역장실 문을 슬며시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읍니다.
---응, 또 꽃밭에 가셨구나.
이렇게 생각한 그 아이는 빵긋 웃더니 문을 닫고서 얼굴을 홱 돌렸읍니다.
역장 아저씨의 모습이 금방 눈에 띄었읍니다. 역장 아저씨는 플랫폼 맨 끝의 꽃밭에서 허리를 약간 구부리고 벌레를 잡아주고 있었읍니다.
그 아이는 역장 아저씨의 모습을 찾아내자 그곳으로 쏜살같이 달려갔읍니다.
“아저씨.”
바로 뒤 가까이 달려가서 그 아이는 이렇게 불렀읍니다.
“응, 민우냐?”
역장 아저씨는 처음에 퍽으나 놀란 듯하였으나 민우라는 것을 알자 금세 웃는 얼굴로 변하면서 허리를 펴는 것이었읍니다
“네------ 이렇게 비가 오는데 벌레를 잡고 계셔요?”
민우라고 불리는 아이는 가까이 와서 다정스럽게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마치 아버지를 대하듯이.
“응, 응------인젠 다 잡았다. 내 방에 가서 우리 얘기나 또 할까?”
역장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자 벌써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읍니다. 민우는 그 옆에 서서 따라가면셔 마음이 기뻤읍니다.
역장 아저씨가 저를 언제나 친아들처럼 따스하게 대해주는 것이 눈물겹도록 고마왔던 것입니다. 민우로서는 무리도 아니었읍니다.
아버지는 먼 지방 공사터에 일하러 떠난 지 일년이나 되었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남의 밭에 나가 김을 매주고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이 지내고 있는 형편이어서 따스한 부모님의 사랑에 굶주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영석이한테서는 편지라도 있니? 내 기억으로는 그 애가 서울로 떠난 지도 일년이 된 것 같은데?”
역장 아저씨는 플랫폼을 걷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민우를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말을 꺼냈읍니다.
그순간 민우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역장 아저씨를 쳐다보았읍니다. 자기는 그만 깜박 잊고 있었는데 역장 아저씨가 오히려 영석이를 기억하고 있다는 데 놀랐던 것입니다.
“정말 벌써 그렇게 됐네요.”
민우는 이렇게 대답하였으나 마음은 멀리 영석이에게로 달려가 있었읍니다.
“나 이런 시골에서 사는 게 싫어졌어. 서울에 갈 거야. 구두닦이든 신문팔이든 해서 돈을 벌고 싶어.”
또릿또릿하던 눈으로 이렇게 말하던 영석이의 얼굴이 머릿속에 분명하게 떠을
랐읍니다. 그리고 며철 후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떠나며 흔들던 때묻은 손이 자꾸만 아른거렸읍니다.
더우기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날도 하얀 보슬비가 속삭이듯 내리고 있었던 일입니다. 그 뽀얀 보슬비 가운데를 기차는 구슬픈 기적을 남기고 사라졌던 것이었읍니다.
2
한때 잊었던 영석이 생각이 떠오르자 민우는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 혼자 이런 시골 구석에 남아 있다는 것이 어쩐지 못나고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읍니다.
——아! 나도 서울에 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은 정거장에 나가서도 친절한 역장 아저씨 방에는 들르지 않고 출찰구의 울타리에 턱을 괴고 서서 지나가는 기차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읍니다.
이렇게 가만히 서 있어도 몸이 움직이는 것 같았읍니다. 지금 기차를 타고 서울로 달리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읍니다.
--빨리 저 기차를 타고 오라니깐------
저만치서 영석이가 손짓을 하며 자꾸만 재촉하는 것 같았읍니다. 그러자 가슴이 사납게 뛰놀았읍니다. 제정신이 아닐 정도였읍니다.
문득 보니까 화물차 하나가 서울 쪽을 향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옳지------
이렇게 생각한 순간, 민우는 벌써 쏜살같이 달려가 그 화물차에 올라타고 말 았읍니다.
--나도 서울에 가는 거야.
화물차가 점점 속력을 내기 시작하였을 때 민우는 마음속으로 힘있게 중얼거렸습니다.
민우의 머릿속에는 나도 서울에 간다는 생각밖엔 없었읍니다. 어머니가 오늘 몸이 편치 않아 밭에서 일찍 들어와 자리에 누워 있다는 생각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읍니다.
너무나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읍니다. 문득 정신 을 차리고 보니까 사방이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읍니다.
그러자 민우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읍니다.
--그 낯선 서울에 갔다가 어떡할 셈인가? 엄마가 편찮으신데 나까지 없으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사납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였읍니다.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까 더 견딜 수가 없었읍니다.
가슴이 뛰놀고 무서운 생각만 떠올랐읍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저만치서 눈물을 흘리며,
“민우야, 너까지 가버리면 어떡하냐? 어서 이리 오너라.”
하고 마구 손짓을 하는 것 같았읍니다.
---그렇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을까?
다음 순간 민우는 화물차에서 뛰어내릴 차비를 하고 있었읍니다. 다음 정거장까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방은 더욱 어두워가고 있었읍니다.
이렇게 불안한 마음, 회하는 마음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물차는 속력을 줄이기 시작하였읍니다.
느 조그만 마을 앞을 지나면 커브가 있기 때문이었읍니다.
--옳지, 이 기회에 뛰어내리자.
우는 이렇게 결심하자 때를 보아 뛰어내렸읍니다. 그러나 실제에는 아직도 상당한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민우는 십여 미터 밖까지 굴러떨어졌읍니다.
그 순간 민우는 앗! 하고 비명을 질렀읍니다. 발목이 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민우는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며 철로길을 따라 되돌아가기 시작하였읍니다.
발목이 지끈지끈 쑤셨읍니다. 걸으면서도 공연히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었읍니다.
벌써 하늘에는 파아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읍니다.
3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민우는 여전히 정거장에 놀러나가곤 하였읍니다. 정거장은 민우로서는 마음의 고향이며, 사랑의 고향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읍니다. 두세 살쯤 아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민우처럼 며칠째 연달아 정거장에 나오는 것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 여자아이는 역장실에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플랫폼 안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개찰구에 기대서서 역 구내 쪽만 살펴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져 애는 누굴까?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민우는 좀 떨어진 곳에서 그 여자아이를 주목하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날은 그 여자아이에 대한 궁금증을 더 참을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 여자아이 쪽으로 가서 되도록 상냥하게 말을 걸었읍니다.
“너,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거니?”
“응, 응------오빠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처음에 그 여자아이는 좀 놀란 듯하였으나 뜻밖에도 명랑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읍니다.
“오빠? 오빠가 누군데?”
“영석이라고------작년 이맘때 서울에 갔어.”
“뭐 영석이라구? 그럼 너 영옥이니?”
민우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이렇게 되물었읍니다.
“응, 나 그때 앓고 있어서 정거장에도 못 나갔지 뭐야. 근데 너 우리 오빠 아니?”
“알구말구, 친구였단 말야.”
“혹 민우 아니니?”
이번에는 영옥이가 그 까만 눈을 휘둥그렇게 뜨면서 이렇게 물었읍니다.
“응, 바로 그 민우가 나야.”
“그래, 오빠 편지에도 네 얘기 써 있던데, 볼래?”
영옥이는 반가와서 빵긋 웃으며 바지주머니 속에서 편지 한장을 꺼내주었읍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었읍니다.
〈영옥아, 벌써 서울에 온 지도 일 년이 되었어. 꿈을 담뿍 안고 서울에 온 나는 그 동안 고생도 지독하게 겪었지만 배운 것도 많았어. 고향이 제일 좋다는 것, 그리고 시골에서도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 말이야.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어. 지금 하던 일을 깨끗이 정리하는 대로 곧 돌아갈 거야. 내가 떠날 때 배웅해주었던 민우와도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설레인다. 그럼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안녕.
오빠로부터.〉
“흠------그래서 요새 매일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민우는 편지를 돌려주면서 역시 반가와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응.”
“오늘부턴 나하고 같이 기다리자. 오늘 저녁차로라도 올지 누가 알아?”
“응.”
영옥이는 빵끗 웃으면서 고개를 귀엽게 끄덕였읍니다.
그날부터 민우와 영옥이는 다정하게 영석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읍니다. 둘이 함께 역장실에 들어가 놀기도 하였읍니다.
역장 아저씨의 뒤를 따라 꽃밭도 돌아보곤 하였읍니다. 그래서 기다리는 데도 따분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영석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읍니다. 영옥이의 얼굴은 점점 그늘이 지기 시작하였읍니다.
늦게까지 기다리다가 실망을 해서 집으로 혼자 돌아가는 영옥이의 뒷모습을 보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읍니다.
“온다고 했으니까 꼭 올 거야. 아마 뒷정리가 다 안된 모양이지.”
민우는 영옥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친오빠와 같은 마음으로 위로해주곤 하였읍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읍니다. 민우와 영옥이는 역장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놀고 있었읍니다.
“오늘도 안 올 모양이지 ?”
문득 영옥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민우를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응, 응…‘
민우는 당황한 듯이 이렇게 얼버무렸읍니다. 마치 영석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나 되는 것처럼------.
“온다고 했으니까 틀림없이 오겠지.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보렴.”
영옥이의 모습이 측은했던지 역장 아저씨는 이렇게 인자하게 위로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읍니다.
역장 아저씨는 동정하는 눈으로 민우와 영옥이를 번갈아보고는 아무 말없이 밖으로 나왔읍니다.
빗발이 좀 굵어지기 시작하고 있었읍니다. 그래도 역장 아저씨는 그냥 걸어갔읍니다. 구내의 꽃밭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장 아저씨는 플랫폼을 가로질러 꽃밭으로 가면서 한 손으로 얼굴의 비를 닦았읍니다.
사실은 빗물이 아니었읍니다. 문득 전사해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아들 생각이 간절하게 떠올라서 눈물이 뚝 떨어졌던 것이었읍니다.
비에 젖고 있는 시골 정거장은 그림처럼 조용하기만 하였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