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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자는 항상 구주의 경고에 유의하여 무조건 순종함
만일 그대가 그대의 정신을 더러운 대상 위에, 머무르도록 허용함으로써 쓸데없는 상상에 탐닉(耽溺:즐겨 빠져버림)한다면, 마치 그대의 생각을 행동화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어느 정도 죄를 범한 것이다. 행동화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회가 없다는 것뿐이다. 밤낮 공상하고 망상을 하는 것은 불량한 것이며, 심히 위험한 습성이다. 일단 자리가 잡히면 그 다음에, 이러한 습관을 깨뜨리고 순결하고, 거룩하고, 고상한 주제로 생각을 돌리기란 불가능하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다스려서, 그대의 영혼이 헛되고 음란한 생각으로, 더러워지지 아니하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그대의 눈, 귀, 그리고 그대의 모든 감각을 지키는, 충실한 파수병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은혜의 능력만이, 이 매우 바람직한 사업을 성취할 수가 있다.(CCh 108.6) 수고하는 자가 되는 일, 자아부정의 노력을 요구하는 선행을, 인내로 계속하는 일은 하늘이 미소를 보내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충실한 일은 열렬하고 가장 거룩하다고 생각되는, 최상의 예배보다도 더 가납[흠향]된다.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것이다. 기도와 권고와 도움말은, 빈번히 나무에 매다는 값싼 열매이다. 그러나 선행 즉, 곤핍한 자나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은, 좋은 나무에서 저절로 자라는 참된 열매이다.(2T 24.4) 그대가 돈을 사랑하는 덫에, 걸려 있음을 나는 보았다. 선한 일의 기회를 제공하고, 곤핍한 자에게 복을 주며, 하나님의 사업을 전진시키는 일 외에는, 돈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약간 지닌 그것이, 그대에게 덫이 된다.
그대가 지혜롭고 충실한 청지기와 같이, 그대의 주인을 섬기는 데에 그 돈을 쓰지 않으면, 그것은 수전노(守錢奴:재물만 모으고 선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돈의 노예)가 되게 할 뿐이다. 그대는 편협(偏狹:한쪽으로 기울어져 너그럽지 아니)하고 인색(吝嗇:마음이 좁고 재물을 지나치게 아끼게)하다. 그대는 고상하고 너그러운 정신을 함양(涵養:성품능력을 수양)해야 하며, 그대의 마음을 세상에 두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재리(財利:재물에 대한 욕심)의 유혹은 그대의 영혼을 부패시켜서, 결국 선(善-이타적 사랑)이 악(惡-이기적 욕심)에 의해, 정복당하게 될 것이다. 이기심과 돈을 사랑함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2T 227.2) 사람이 거룩하고 자비로운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지었을 때, 눈물과 영혼의 비통함 가운데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의 잘못들을 고백하는 것만큼 고상한 길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자복하고 회개함]을, 그에게서 요구하신다. 그분께서는 상한심령과 통회하는 영 외에는, 아무것도 가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거만(倨慢:교만)하고 자만(自慢:스스로 자랑)하는 왕과 그의 신하들은,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이 경고에 유의하여 회개하려 하지 않았다. 이 은혜로운 기회가 그들의 마지막 기회였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들이 그분의 음성을 듣기를 거절하면, 그들에게 두려운 보응을 내리시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들은 듣기를 거절했고,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그분의 심판을 선언하셨다. 그분은 전능자에 맞서서 자신을 거만하게 높여 왔던, 그 사람에게 특별한 진노를 내리셨다.(4T 178.3)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그에게 ‘다윗’의 위(位:왕의 자리)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요, 그 시체는 버림을 입어서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또 내가 그와 그 자손과 신하들을, 그들의 죄악을 인하여 벌할 것이라. 내가 일찍 그들과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사람에게 선포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한 그 모든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다 하라”(렘36:30,31).(4T 179.1)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먼저 경고하심 없이, 그의 백성에게 심판을 보내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들을 순종으로 돌이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하시며, 그들에게 회개할 충분한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심판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지 않으신다. 사람의 진노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자유를 박탈(剝奪:지위와 권리를 탈취)함으로써, 그의 활동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하나님은 감옥의 벽을 뚫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실 수 있었고, 심지어 그들의 박해자들이 그들의 영향을 제한하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 수단[방법 역이용]을 통해서, 그분의 종들의 유용성(有用性:쓸모있으며 유용한 특성)을 증가시킬 수 있으시다.(4T 179.3)
많은 사람들이 현재[마지막 종말시대] 하나님께서 증언[예언의 말씀] 가운데 주신, 충실한 견책[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멸시[감히 무시]한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그 사악한 왕이 그렇게 했듯이, 기록된 견책과 경고의 말씀을 태워 버리는 지경(地境:마지막 경계지점)까지 나아갔다는 것이, 이상(異象:계시) 가운데서 내게 보여 진바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협[경고와 심판의 무서운 기별]들에 대하여 반대한다고 해서, 그것의 집행이 방해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분의 선택한 도구(道具:선지자와 종들의 예언)들을 통하여 말해진, 여호와의 말씀에 도전하고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그분의 노를 격동시킬 뿐이며 마침내 범죄자에게, 확실한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자주 죄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견책을, 전달하고자 선택하신 대리자들[선지자들]에 대한 분노(憤怒:시기질투의 분개한 화)가 불붙는다.[불타오른다]
항상 그러해 왔고,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한 것 때문에, ‘예레미야’를 박해하고 투옥시켰던 그런 동일한 정신이, 오늘날도 존재한다.(4T 180.1)
사람들은 되풀이해서 주어진 경고들에 유의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허영(虛榮:헛된 영화)에 아첨을 떨어 주고, 그들의 죄악을 강화시켜[죄악의 잔을 채워]주지만, 환난의 날에 그들을 도와주지 못할, 거짓선지자들을 좋아하게 된다. 하나님의 선택된 종들은,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고 주신 의무를, 신실히 수행하기 때문에 모욕, 등한(等閒:차별대우) 그리고 오전(誤傳:거짓 잘못된 전달)을 통하여 그들에게 닥치는 어떤 시련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용기와 인내로 대처(對處:성령의지로 준비)해야 한다.
그들은 옛날의 선지자들과 세상의 구주께서도, 세상을 위하여 학대와 박해를 견디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대로 기록된, 두루마리[구약성경]의 불태운 것으로 표명된 바, 바로 이런 반대에 맞닥뜨릴 것을, 예상[예언말씀성취의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4T 180.2) 우리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이익을 위해, 신앙을 희생[구속의 경륜을 외면]하는 죄에 빠져들고, 경건의 모양은 유지하면서도 마음은 오로지, 세속적인 사업에 바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보다 으뜸으로 생각해야 하고, 글자그대로 마음을 다해 순종해야 한다. 거룩한 산[‘시내산’의 십계명 선포]에서 두렵고도 엄숙하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 경(輕:가볍고 몰상식)하게 취급된다면, 그분의 영의 증언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겠는가? 인간에게 직접주신 주님의 계명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만큼 어두워진 마음들은 그분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교훈하시기 위하여 택하신 연약한 도구[선교자]를 통하여, 거의 아무런 유익도 받을 수 없다.(4T 252.3)
그대의 나이가 그대를 거룩한 명령을, 순종하는 것에서 면제해 주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노년에, 혹독한 시험을 당했다. 주님의 말씀은 이 늙은 노인에게, 무섭고 지나치게 보였으나, 그는 결코 그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았고, 순종하기를 주저[망설이거나 머뭇]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늙고 연약하므로 그의 생애의 기쁨이 되는, 그 아들을 희생할 수 없다고 간원할 수도 있었다. 그는 이 명령이 그의 아들에 대하여 하신약속과 상치(相馳:서로 어긋나게)된다고, 주께 상기[지난약속을 회상]시켜 드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순종은, 한 마디의 불평이나 비난도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그의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었다.(4T 253.1)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에게 본[모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원한 복리를 위태케 하는 죄를 책망하는, 단순한 시험을 묵묵히 견뎌 낼 자[인내하는 자]들이, 얼마나 적은가? 책망을 겸손하게 받고 그것을 통해 유익을 얻는 자[남은 무리]가, 얼마나 적은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봉사와 사랑을 요구하실 때, 우리는 즐겁게 반응(反應:항상 기쁨, 기도, 감사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주께 무한한 빚을 진[영멸의 죄인이 영원한 영생의 축복을 받은]자들이므로, 지극히 작은 그분의 요구도 주저하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 율법을 범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모든 도덕률[십계명의 자유율법]을 짓밟을 필요는 없다. 한 계명을 무시해도 우리는, 거룩한 계명을 범하는 자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계명을 진실히 지키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요구사항[영생을 보장하는 사랑의 율법순종]을 엄격히 준수하게 될 것이다.(4T 253.2)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범한대가를 지불하기 위하여, 그분 자신의 아들이 죽임을 당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렇다면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진리의 빛을 받은 후에, 감히 불순종의 길을 가고자 모험하는 자들을, 그분께서 어떻게 취급하실 것인가? 이 문제에 있어서 사람은[무조건적 순종 찬양으로] 편리나 궁핍을 내세울 권리가 없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이다. 시냇가에서 까마귀를 사자로 삼아,‘엘리야’를 먹이신 분께서는 그분께 충실한 자들이, 음식에 궁핍을 당하도록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4T 253.3)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거룩한 생활을 산다면, 세상에 진리를 증거 하노라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전파하되 그것을 대항[대적]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영[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편만[널리 꽉 차서 넘치게]한 도덕적 흑암[죄악세상] 속에서 무엇인가, 희망적인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영[사단마귀 귀신]은 이전[마지막 때 전]에 결코 없었던, 그런 범위[하나님께서 허용하신 마지막 궤계 끝]까지 편만해 있다.
우리가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 지도소이다.”(시12:1) 라고 부르짖는 것도 당연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안이(安易:편하고 쉽게)한 것을 좋아하는 영혼들은, 전반적인 멸망에 삼키 운 바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실한 목사들이 없는 곳에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기울어진 잘못된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이 성실하지 못하면, 그분이 친히 양떼들[그리스도의 백성들]을 돌보는 책임을 지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양떼들을 결코 인간기구들에게만, 완전히 의존하게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교회를 순결하게 할 날은 급히 이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순결하고 진실한, 한 백성을 소유하실 것이다. 미구에 크게 키질[흔들림]하는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의 능력을 보다 더 잘 측정(測定:자세히 헤아려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그분의 손에 키[열쇠]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과, 그분께서 타작마당[구원받을 자들]을 철저히 정결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실 때가 가깝다는 징조들이 보인다.(5T 79.4)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그들의 거룩함이다. 위를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우리의 길을 재촉할 때, 모든 능력은 최선의 건강상태로 유지되고, 충실한 봉사를 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능력들은 한계점에 이르기까지, 발휘(發揮:성령의 도우심으로 완전히 펼쳐 휘두르게)되어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10:27). 사람은 스스로 이 일을 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인간은 어떤 부분을 담당해야 하는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 13).(8T 64.4)
[모든]천연계는 천연계를 위한, 하나님의 법칙들을 순종한다. 구름과 폭풍, 햇빛과 소나기, 이슬과 비,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감독을 받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한다. 하나님의 법칙에 순종하여 곡물의 싹은 땅을 뚫고 나와서,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마4:28) 이 된다. 열매는 처음에 꽃봉오리 속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역사하심을 거역하지 않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것을 적절한 시기를 따라 자라게 하신다.
마찬가지로 새들도 무한한 능력의 손으로 지도를 받아, 무궤도(無軌道:정해진 방향의 궤도가 없음)의 공중을 통과하여, 대륙 간의 긴 이동을 할 때, 하나님의 목적[우주의 다스리심의 사랑]을 이루어 나가신다.(8T 327.1) 만일 부자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면— 부[재물이 풍부]한 사람은 하나님의 청지기들이다. 만일 부자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겸손하고 경건한 생활을 계속할 것 같으면, 그는 성품의 변화를 통하여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그리스도의 완전하신 품성으로 변]해 진다.
그는 자기의 소유물이 다만 위탁(委託:그리스도께서 맡겨주시게)된 재물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도움이 필요한 자를 돕기 위하여, 신성한 위탁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음을 느낀다. 이 일은 재능으로 그 보상을 받게 되고, 재물들은 하나님의 보좌 곁에 쌓이게 된다. 그리하여 부자들은 자기에게 위탁된 주님의 재물을, 관리하는 충실한 청지기로서 영적인 성공을 거두는,[하늘의 축복을 허락받는] 생애를 누리게 될 것이다.(WM 19.3)
고난은 성품을 완성시키는 하나의 수단(手段:숭고하신 방법)임— 구주의 말씀에는 재난이나 사별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기별이 있다. 우리의 슬픔은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 시로다.”(애3:33) 하나님께서 시련과 고난을 허락하실 때,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히12:10)시기 위함이다. 만일 믿음으로 시련을 받아들이면, 아무리 감당하기에 괴롭고 어려운 시련처럼 보이는 것도, 축복임이 입증될 것이다.
세상의 기쁨을 시들게 하는 혹독한 바람은[생로병고(사)- 전1;1 참조],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만일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구하도록, 인도해 준 슬픔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WM 20.1) 생애의 시련은 우리의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 것을 제거해 주는 하나님의 공작(工作:미리 준비하시게 된 작업들)이다. 그들을 자르고 깎고 조각하고 광을 내고, 윤을 내는 일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연마기[시련고통의 시험 등]에 갈리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돌은 하늘성전에서, 제자리를 채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나온다. 주님께서는 쓸모없는 물건들을 위하여, 그처럼 세밀하고 철저하게 노력하지 않으신다. 오직 그분의 귀중한 돌들만이, 궁전의 식양을 따라 빛나게 다듬어진다.(WM 20.2) 주님께서는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실 것이다. 신실한 자들은, 값진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또한 고귀한 교훈을 배우고, 값진 경험을 체득(體得: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과 같이, 생애에서 스스로 직접 체험)하게 될 것이다.(WM 20.3)
고통이나 재난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표(表:표적의 의도)가 아님—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 오니까?, 자기 오니까, 그 부모 오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 (요9:1-3).(WM 21.1)
죄는 현세[자기생애 기간]에서 처벌된다고,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믿고 있었다. 모든 어려움은 고통당하는 본인과 그 부모의, 어떤 잘못에 대한 형벌로 간주(看做:그렇다고 생각)되었다.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결과인 것만은 사실이나, 이 진리가 곡해(曲解:왜곡)되어 왔다. 죄와 죄의 모든 결과의 장본인인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질병과 죽음의 죄 때문에 당하는 독단적인 형벌로써,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생각 하게하였다.
그래서 큰 고통과 큰 재난에 빠진 자들에게, 다른 괴로움이 덮치게 될 때, 그들은 큰 죄인으로 간주되었다.(WM 21. 2) 하나님께서는 이런 잘못된 생각을 막기 위하여, 한 교훈을 창안해 주셨다. ‘욥’의 역사는 사단이‘욥’에게 고통을 주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실 목적으로 이를 권세로 눌러, 취소한 사실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하였다. 하나님에게서 책망을 받은 ‘욥’의 친구들이 범한, 같은 과오를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유대인’들이 다시 되풀이하였다.(WM 21.3)
죄와 고통의 관계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가졌던 신앙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과오(過誤:지나간 잘못의 오류)를 시정(是正:잘못을 고치게)하는 중에, 인간의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로써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 로라.”(요9:5)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그를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였으며, 그리하여 그 사람의 눈은 밝아졌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신기하게 여겨 그분에게 묻는 질문에, 항상 대답하신 것처럼 이 제자들의 질문에도, 실제적인 방법으로 대답하여 주셨다. 제자들은 누가 죄를 지었느냐 혹은, 안 지었느냐에 대하여 논의할 것이 아니고, 소경의 눈을 밝게 하시는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能力:창주의 사랑)과 은혜(恩惠:아가페사랑의 진수)를 깨달을 것이었다.(WM 21.4)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을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길을 깨닫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그들이 걸어갈, 곧은 길[영생의 길]과 그들을 흑암과 낙망[믿음순종 시련고통과 인내들]을 통하여, 인도할 빛을 발견할 것이다. ‘다윗’은 그를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지혜를 배우고, 지존자의 징계아래 겸손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참된 상태에 대한 선지자 ‘나단’의 충실한 묘사는, ‘다윗’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 죄를 버리게 했다. 그는 온유하게 충고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시19:7) 한다고 그는 부르짖는다.(RC 64.4) 회개하는 죄인들은 그들의 범법(犯法:죄를 범함)이 지적되고, 그들의 위험에 대한 경고가 주어질 때, 낙망(落望:소망을 잃었다고)할 필요가 없다. 그들을 위한 이와 같은 노력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그들을 구하기를 원하시는지 보여 준다.
그들은 영생을 유업(遺業:천국의 영원한 영광)으로 얻기 위하여, 그분의 충고와 뜻을 따르기만 하면[영생복락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잘못을 범한 그분의 백성들이 거룩한 진리의 빛으로, 그들의 죄의 흉악성(凶惡性:창조주를 대적한 성질의 특성)을 볼 수 있도록, 그들의 죄악을 그들 앞에 제시(提示:확실하게 보여주시고 그 폐해를 열거)해 주신다. 그런 후에 그 죄를 영원히 버리는 것은, 그들의 의무(義務:피조물인 죄인의 책무)이다.(RC 64.5)
부조들의 시대, ‘다윗’의 시대, 선지자와 사도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하나님은 죄에서 구원하기에 강력[구속주의 능력과 사랑이 무한]하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내신 사실이, 기록된 거룩한 역사에서 허다한 경우들을 볼 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가르침을 받고자 갈급해야 하며, 엄밀한 심판의 조사를 견딜[조사심판의 그리스도] 품성을 완성하기 위하여 열성을 내야 한다.... (RC 64.6)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대표자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대표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죄인들의] 영혼들을 예수께 인도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갈보리의 어린양에게로 향할 수 있게 되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그분의 의로 옷 입히지 않으시고, 죄를 제거하셔서 그 자리에 그분 자신의 의를 전가(轉嫁:영광으로 대신 옷 입혀 구원)시키신다. 그대의 죄가 정결해 지면 그리스도의 의가 그대 앞에 행하며, 주의 영광이 그대를 호위한다. 그럴 때에 그대의 감화가, 그리스도의 편에 있음을 결정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중심이 되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게 될 것이며, 그대는 거룩한 진리를 위탁받은 자임을 느낄 것이다.(RC 213.3)
사람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영생의 보화를 얻든지 혹은 하나님과 그의 의를, 첫째 일로 삼기를 등한시 한 까닭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든지, 모든 영혼이 결정해야 할 [절체절명의 긴급한] 문제이다.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자처하나, 그분을 섬기지 아니하고 [죄악세상과] 자신들만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을 슬픔으로 바라보신다.
그들은 분산(分散:나누어지지 않고 흩어지게)되지 않은 애정으로, 그분을 섬기는 충실한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풍성한 상급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간절하고 절박하신] 예수님의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실체(實體:주님의 재림으로 긴박한 지구 종말과, 하늘나라의 실제상황)에 관하여 좀처럼 생각지 않는다. 그분은 충실히 순종하는 추종자들이 되기 위하여, 지불할 대가를 배우도록 명하시며,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두 마음으로] 섬기지 못 하”(마6:24)리라고 말씀하셨다.(TMK 321.4)
주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시며 또한, [마지막으로 주신] 셋째천사의 기별인 진리의 깃발 아래로 한 걸음, 한 걸음씩 인도하실 것이다...이 마지막 날에 있어서 우리는, 과거시대의 지혜와 경험의 혜택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 곧 성도와 순교자(殉敎者:주의 사업을 위해 먼저 잠)들은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을 위한 그들의 경험과 불타는 열정에 관한 지식은 생생한 말씀으로써, 이 세상에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든지 성령의 바람으로] 전달되고 있다....
전달되어 온 이 책임은 이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자들을 비추는 하나님의 진리로써, 또한 그들에게 환하게 비출 빛으로써, 충실한 증인들에 의해 모아지고 있으며, 그들이 이 빛의 진가(眞價:참되고 진실하신 영원한 가치)를 인정할수록, 그들은 더 큰 빛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서 계속해서] 전진할 것이다....(TMK 347.3)
위급한 때에 ‘느헤미야’가 기도한 것처럼 기도하는 것은, 다른 형태로 기도하기가 불가능한 환경 아래서, 그리스도인이 구사(驅使:자유자재로 사용) 할 수 있는 기지(機智:슬기로운 지혜)이다.
곤란에 싸여 거의 압도된 생애의 분주한 걸음 중에서도, 일꾼들은 하나님의 지도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탄원할 수 있다. 해로[바다 위]와 육로[육지 길]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어떤 큰 위험을 당했을 때에, 이와 같이 자신들을 하늘의 보호에 의탁(依託:믿음으로 의지) 할 수 있다.
돌연(突然:뜻 밖에 일어난 이상)한 곤란이나 위험을 당했을 때에, 그분의 충실한 신자들이 그분을 부를 때에, 언제든지 저희를 도우러 오시겠다고 친히 약속하신, 하나님께 마음으로 도움을 부르짖을 수 있다.
어떤 환경이나 어떤 상태 아래서도 슬픔이나 근심이나, 맹렬(猛烈:사납고 위급)히 엄습(掩襲:불시에 습격)해 오는 시험으로 억눌린 영혼이,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능력 안에서, 확신과 지지(支持:기대하고 믿는 의지)와 구조(救助:생명의 구함을 받는 조치)를 찾을 수 있다.(Pr 1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