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면 흉터가 간지럽습니다. 제왕 절개 흉터 자국 이야기입니다. 장마철이 온 김에 아기 낳던 날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한국 남성들에게 군대 경험담이 있다면 여성들에게는 출산 경험담이 있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출산의 과정에는 어려움과 극복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아기를 임신한 여성들은 모두 출산을 하지만 그 과정이 완전히 동일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약의 효과나 아기의 상태, 산모의 상태가 모두 출산 타이밍에 어떻게 조합되는지는 세부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회사에서 군대 이야기를 늘어놓던 선임들을 흰 눈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만, 이번 딱 한 번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출산이 임박한 산모들은 한 가지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바로, ‘자연분만이냐 제왕절개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느냐 죽느냐만큼 산모들에게는 핵심 의사결정 사항입니다. 각각의 방식이 가진 장단점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빠른 회복을 위해 진통의 고통을 참을 것인지, 아니면 안정적인 분만 후 자신의 회복력을 믿을 것인지의 갈림길 사이에서 산모는 고통의 총량을 시뮬레이션하고 비교해 보며 출산 방식을 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선배 산모들의 후기를 참고하기도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세상에 똑같은 출산은 없기에 (그리고 결국 내 몸과 아기에게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무언가를 믿고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피하고 싶지만 결국 아기를 낳아야 끝나는 것이니까요.
주치의의 의견도 큰 영향을 줍니다. 제가 다니던 분만 병원은 산모와 태아의 상태를 점수로 환산해서 자연분만 성공 확률을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80%였습니다. 그런데 태아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자라고 있어서 출산 예정일보다 일찍 유도 분만을 시도하는 방안을 주치의 선생님께 제안받았습니다.
80% 라면 ‘자연분만,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은 제왕절개를 선택해 수술 날짜를 미리 잡는 것이 좀 더 대세인 것 같았지만, 저의 경우에는 자연 분만을 아예 시도도 안 해보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소 몸이 힘들고, 또 진통을 겪다가 결국 제왕을 하는 최악의 상황에 갈 수도 있지만 도전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도 분만을 시도하는 날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멋진 점심 식사를 하고 병원의 분만실로 남편과 걸어들어가던 장면이 생생합니다. 그날 엄마가 병원에 배웅을 하러 오셨습니다. 당시에는 엄마를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나고 생각해 보니 앞으로 며칠간 매우 고생할 딸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셨음을 짐작하니, 그날 본 엄마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결론적으로 입원하여 촉진제를 맞았던 저는, 촉진제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밤새 깊게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 제왕절개로 아기를 출산했습니다. 밤새 딱딱한 병원 침대에 누워 긴 밤을 보냈지만 또 자연분만을 위해 노력을 다했다는 점에서 후회 없는 출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상처 자국이 아물고 몸 상태를 회복하는 며칠 동안 배가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진통제로 버텼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재미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남편이 자꾸 웃기는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웃다가 배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있는 동안은 재미있는 것은 마음속으로만 생각하자고 협정을 맺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암살 금지 협정’이라고 불렀습니다. 남편도 좁은 보호자용 침대(거의 의자나 다름없는)에서 며칠을 구겨져 자면서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잠시 재미있는 생각을 하며 힘듦을 이겨내야 하는데 상처로 힘들어하는 제가 옆에 있으니 말도 못 하고 고단했을 시간을 되짚어보면 안쓰러운 생각이 듭니다.
많은 고민, 혼란, 아픔을 겪었지만 배를 갈라 꺼낸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모든 것이 다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몇 달 동안 함께 있던 아기가 너구나! 드디어 만났구나, 환영한다, 우리 함께 행복하자꾸나’하는 마음, 뭔가 따뜻한 것이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낳기 전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기쁘게 다가왔습니다.
어렸을 때 만화를 보면서 사연이 있어 보이는 캐릭터들은 큰 흉터가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저도 흉터가 생기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었는데 저도 이제 10센티미터가 넘는 흉터를 몸에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
장황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출산 후 몇 달 만에 흉터가 가끔 간지러운 것 이외에는 출산을 떠올리는 일이 없다니, 인간의 회복력이 참 대단합니다. 큰 상처를 입었던 일도 잘 소독하고 약 바르고 푹 쉬면 나아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상처 입을 것 같은 상황을 피하고,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은 당연히 수반되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생기곤 합니다. 그렇게 큰 상처를 입었을 때 ‘어떻게 치유할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내 안의 회복력을 체험하고 나니, 몸의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아물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통의 근원지를 꼼꼼히 살펴보며, 상처를 대가로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지, 좀 더 노련해진 것인지, 새로운 것을 얻었는지 생각합니다.
오래된 상처가 있으신지요. 아직도 고통이 느껴지십니까. 생생한 상처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 살펴보면 흉터 자국으로 변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내 안에 회복해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픈 상처를 가끔 간지러울 뿐인 극복의 경험담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이후의 나는 좀 더 마음에 드는 내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피하고 싶지만 결국 아기를 낳아야 끝나는 것.. 저도 첫 아이때 밤새 진통하면서 절실히 되뇌였던 말이네요ㅎㅎ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상처들은 이제 가끔 간지러울 뿐인 경험의 극복담이 되었습니다😊
밤새 겪었던 진통의 고통과 제왕 절개후의 고통, 그리고 많은 수술 흉터 자국의 가려움~~ㅎㅎㅎ
결국에는 많은 아픈 상처들이 가끔 간지러울 뿐이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앞으로 만날 상처들도 잘 극복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