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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별집 제25권 / 구묘문(丘墓文)
판중추부사 허공(許公) 신도비(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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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휘는 휘(徽)이고 자는 휘지(徽之)이며, 성은 허씨(許氏)이니 그 세계(世系)가 공암 촌주(孔巖村主)로부터 나왔다. 보첩(譜牒)에서 상고해 보면, 고려 때부터 무릇 귀족들은 내외(內外)로 공암을 본관으로 한 자가 많다. 세기(世紀)에 의거하건대, 공에 이르기까지가 대개 23세이다.
성화(成化) 연간에 상국(相國) 문정공(文貞公) 침(琛)이 있었는데 공의 5세조이다. 문정공의 4세에 지중추부사 진(晉)이 있었다. 아들이 없어 형제의 아들 중에서 고르게 되었는데 공이 가장 어질었으므로 드디어 공을 아들로 삼았다.
공은 첫 벼슬을 우리 선조 40년(1607)에 하였다. 9년 뒤에 양천 현령(陽川縣令)이 되었는데, 그해에 중추공(中樞公)이 세상을 떠났다. 삼년상을 마치고 나니 바야흐로 광해군의 정치가 혼란할 때였는데 사대부들 중에 몸을 고결하게 지니는 자들은 벼슬을 버리고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공도 드디어 다시 벼슬을 하려 하지 않고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았다.
인조 때에 와서 어떤 사람이 공을 추천하여 안성 군수(安城郡守)가 되었다. 뒤에 예천 군수(醴泉郡守)와 이천 도호부사(利川都護府使)가 되었다. 대령(大嶺)의 안팎은 물산이 풍부하고 인민들이 장사치들과 뒤섞여 말단의 영리를 추구하였으므로 그 세속에 사나운 큰 도적들이 많았다. 이천과 예천은 그중 더욱 심한 고을로 이름이 났다. 공이 법령을 세워 간교한 도적들을 잡아내서 그 괴수는 베고 나머지는 석방하여 본업으로 돌려보내 양민을 만들었다. 상이 훌륭하게 여겨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을해년(1635, 인조13)에 들어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병자년(1636)에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가니, 요직에 있는 자가 논란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상이 듣지 않고 광주목(廣州牧)으로 옮겼다.
이전 해에 노장(虜將 청 태종)이 위호(位號)를 참칭하고 사신을 보내왔는데 조정에서 이를 물리쳤다. 저들이 처음에는 ‘비록 예의(禮義)를 지키는 나라일지라도 무력으로 위협하면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여기다가, 물리침을 당하게 되자 매우 부끄러워하였고, 도리어 구금당할까 봐 스스로 의심하여 즉시 서둘러 떠났다. 길거리의 소년들까지 모여서 깨진 기왓조각과 돌멩이를 던지며 그들을 쫓았다. 이에 큰소리치는 자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적(賊)을 치고 싶어 한다.”
하였다. 공은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오랑캐가 바야흐로 강성한데 우리가 재앙을 불러들이고 있다. 한 해를 넘기지 않아서 큰 침공이 있을 것이다. 남한산성은 왕성(王城)의 방패막이이니, 저축을 힘쓰고 기계(器械)를 수리하며 남성(南城)의 보루(堡樓)를 증축하여 적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
하였다. 겨울에 오랑캐가 과연 대거 쳐들어왔다. 상이 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는데, 산성이 40여 일이나 포위를 당하였으나 군사들이 주린 빛이 없었고 저축이 여유가 있었다. 상이 더욱 가상히 여겨 특별히 자헌대부로 품계를 올려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승진시켰다.
무인년(1638, 인조16)에 들어와 지충추부사가 되었다가 드디어 형조 판서에 제배되었다. 상이 매우 신임하고 물품을 많이 하사하였으며, 항상 ‘포위되었던 성중(城中)의 주인(主人)’이라 불렀다.
경진년(1640)에는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가 나가서 강도 유수(江都留守)가 되었으며, 다시 들어와 판윤이 된 것이 두 번이었고 중추부(中樞府)에 있었던 것이 두 번이었다. 정해년(1647)에는 나이가 많은 원로라는 이유로 숭정대부에 올라 판중추부사가 되었는데, 이때에 공의 나이가 이미 여든이었다. 아들 계(啓)는 일찍이 경기 관찰사를 지내고 지금 병조 참판으로 있고, 손자 환(瑍)과 정(珽)과 순(珣)은 모두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정은 잇달아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에 공조 판서가 되었고 한 해 만에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하니, 다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2년째 되던 가을에, 죽기 전에 말미를 얻어 선인(先人)의 묘소를 살펴 보수하게 해 달라고 청하니, 상이 어질게 여겨 묘소에 올릴 제물상(祭物床)을 갖추어 주도록 하며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다음 해 2월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85세였다.
부인은 상당 한씨(上黨韓氏)인데 감찰 아무의 따님이다. 2년 전에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모두 장단(長湍) 오동(鰲洞)의 가족묘지에 장사하였다.
공은 나이가 많아지고 벼슬이 높아질수록 더욱 공손하고 삼갔으며, 비록 친척이나 어린아이들일지라도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고는 만나지 않았다. 녹봉이 넉넉한 뒤에는 반드시 가난한 종족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검소함을 좋아하여 거처와 의복이 한미한 선비와 같았다. 늘 탄식하기를,
“내가 나라의 큰 은혜를 받았다. 공로도 없이 아비와 아들이 모두 경(卿)의 반열에 이르렀으니, 한결같은 마음으로 전하께 보답할 뿐이고 다른 소원은 없다.”
하였다. 매우 성대한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항상 하였다. 훌륭하다. 공은 몸가짐이 간정(簡靜)하고 겸손하였고, 신분이 높다고 해서 비천한 자들을 저버리지 않았다. 공은 이것으로 장수하였고 이것으로 신분이 높아졌고 이것으로 그 집안을 가르쳐 법도를 삼았다. 다스리던 고을의 백성들이 공을 신뢰하여 잊지 않고 추모하는 것도 또한 이것 때문이라 하겠다.
명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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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집 제24권 / 기(記)
강화부(江華府) 남문(南門)의 선원선생순의비기(仙源先生殉義碑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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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곳은 강화부 성 남문으로, 고(故) 우의정 문충공(文忠公) 선원 김 선생이 순의(殉義)한 곳이다. 선생의 휘(諱)는 상용(尙容)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만력(萬曆) 18년인 경인년(1590, 선조23)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대의 임금을 차례로 섬기며 재상을 역임하였는데, 충후(忠厚)함과 정직함으로 사류(士類)의 추앙을 받았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 인조14)에 북방 오랑캐가 쳐들어와 상(上)이 강도(江都)로 행차하려 할 적에, 선생은 그 당시 이미 정승 자리에서 물러난 데다 늙고 병들었으므로, 상은 선생에게 종묘사직의 신주를 따라 먼저 가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장신(張紳)이 강화부 유수였는데, 검찰사(檢察使) 김경징(金慶徵)과 부사(副使) 이민구(李敏求)가 왕명을 받고 군무(軍務)를 담당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가(大駕)가 오랑캐의 선봉에 쫓겨 황급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적(賊)은 이에 남한산성 주위에 성책(城柵)을 둘러치고 안팎을 지키며 모든 길을 통제하였는데, 성에 접근하는 근왕병(勤王兵)들은 번번이 궤멸되고 말았다. 적은 또 군대를 나누어 강도를 엿보았는데, 장신과 김경징 등은 강도가 천혜의 요새임을 믿고 개의치 않았다. 김경징은 더욱 교만 방자하여 군무에 대해 간하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화를 내며 지레 꺾어 버리곤 하였다.
선생은 분개하여 “성상께서 머무시는 곳이 포위된 지 여러 날이 되었다. 그런데 정세규(鄭世䂓)는 패하여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있으니, 호서에서 군무를 주관할 사람이 없다. 부사가 급히 가서 흩어진 병졸을 수습하고 의병을 규합하며, 후방에 있는 호남의 군대를 독려하여 위험에 처한 임금께 달려가야 한다. 조금도 시기를 늦춰서는 안 된다.”라고 이르고, 또 “남한산성의 소식이 끊겼으니, 한시바삐 목숨을 바칠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성상의 안부를 살펴 오게 해야 한다. 열 번 가면 한 번은 반드시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신하의 의리상 어찌 차마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김경징 등은 서로 함께 비방하며 “이 일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피란 중의 대신(大臣)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하고는, 한 가지도 따라 시행하는 것이 없었다.
어떤 자가 선생에게 “일이 이미 글렀습니다. 어찌 비상시를 대비하여 배를 준비하지 않으십니까?” 하자, 선생은 탄식하기를, “주상은 포위되어 안위(安危)를 알 수 없고 종묘사직과 원손(元孫)은 모두 이곳에 있으니, 만에 하나 불행한 사태가 생기게 되면 죽음이 있을 뿐, 내 어디에서 구차히 목숨을 부지하겠는가.” 하였다.
며칠 뒤에 적군이 강도로 대거 몰려온다는 보고가 있었으나, 장신과 김경징은 믿지 않고 “참 겁쟁이로구나. 강물에 얼음덩이가 떠다니는데 적이 어찌 날아서 건너겠느냐.” 하였다. 이튿날 동틀 무렵 적이 과연 갑곶(甲串)으로 강을 건너오자, 아군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궤멸하고 말았다. 김경징 등은 일시에 배를 빼앗아 타고 도망갔다. 적이 마침내 평탄하게 성 밑에 이르자, 선생은 가족들에게 이별을 고한 다음 성문 누각에 올라 화약을 쌓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서 옷을 벗어 종에게 건네고, 좌우에 있는 자들을 물리쳐 멀리 가라 하고는 불을 놓아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당시에 열세 살 난 손자 수전(壽全)이 곁에 있었는데, 선생이 종에게 데리고 돌아가라고 명하였으나 옷깃을 잡고 울며 떠나지 않고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 어디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하였다. 종도 떠나지 않고 함께 죽었다. 별좌(別坐) 권순장(權順長)과 진사 김익겸(金益兼)은 이 일에 앞서 뜻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성문을 나누어 살피며 관군과 협력하여 목숨을 바쳐 지킬 각오를 하였는데, 이때에 마침내 선생과 함께 죽었으니, 때는 정축년(1637, 인조15) 정월 2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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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문집 제8권 / 대책(對策)
지리책(地理策) 건륭(乾隆) 기유년(1789) 윤(閏) 5월에 임금이 내각(內閣)에서 직접 시험을 보인바, 어비(御批)에 수위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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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생각하건대, 경기(京畿) 내의 병곤(兵閫) 제도는, 지금의 제도를 고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신은 가만히 관찰하건대, 당(唐)ㆍ송(宋) 시대에는 재상들이 흔히 절도사(節度使)의 직책을 겸임하여, 혹은 육부 상서(六部尙書)로서 제로(諸路)의 사상(使相 당ㆍ송 시대에 절도사의 별칭)을 겸임하기도 하고, 혹은 내한 학사(內翰學士)로서 제주(諸州)의 수신(守臣)을 겸임하기도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수어사(守禦使)나 총융사(摠戎使)가 어찌 당ㆍ송 시대의 사상이나 수신과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논하는 이들이, 병곤이 왕성(王城) 안에 있는 것도 부당하고, 재상이 외번(外藩)의 직책을 겸임하는 것도 부당하다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총융사는 마땅히 강도(江都)에 소속되어야 한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수어사는 마땅히 광주(廣州)로 나가야 한다고도 하여, 발언(發言)들은 조정에 분분하지만 결국 이익된 것도 손해된 것도 없으므로 신은 감히 그 사이에 나서서 거들 수 없습니다. 신은 듣건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 안에 저축된 곡식이 1만 섬에 불과하여 5일의 군량도 되지 못하였으므로 그 뒤에 섬 수를 늘려서 15만 섬까지 되었다 하는데, 지금은 다시 해마다 감축되고 달마다 축소되어 4~5만 섬에 불과한가 하면, 그 중 절반 가량은 언제나 민간(民間)에 나누어 방출되어 있기 때문에 성안에 저축된 실제 수량은 2만 섬에 불과합니다. 군량 저축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성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다시 섬 수를 증가시킨다면, 광주(廣州)의 오랜 폐단 중에 그 곡식 담당이 가장 큰 문제이니, 여기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더 괴롭힐 수는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관찰하건대, 남한산성 동문(東門)의 수구(水口) 밖에는 산이 겹겹으로 둘러싸여 물이 30리쯤 흘러서야 비로소 큰 시내로 들어가고, 그 시냇물은 10여 리쯤 흘러서야 큰 강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에는, 군량을 강 연안 여러 고을에다 분담시키는 한편, 수구(水口)의 물이 시내로 들어가는 곳에다 별도로 창고 하나를 설치해 놓고 군량을 배로 운반하여 출납(出納)하도록 한다면, 광주의 백성들만 일방적으로 고생하는 염려가 없을 것이요, 군량도 빨리 떨어지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 수구는 비할 데 없이 험하고 좁으므로 두어 성가퀴로써 가로막아버리면 한 사람이 그곳을 지켜낼 수 있고, 험난한 산길이 여기저기 연결되어 있으므로 군량을 운반하는 데도 적(敵)이 겁탈해 가거나 뒤를 차단해 버리는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강도(江都)를 관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교동(喬桐)의 지원에 힘입고 있기 때문인데, 언젠가는 교동을 강도에 통합하기도 하였고, 언젠가는 교동을 따로 두기도 하여 의론들이 여러 갈래였고 배치를 누차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교동을 다시 두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아무튼 신이 듣건대, 강화도(江華島)가 험고(險固)한 것은 전적으로 삼면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우뚝 서 있고 한쪽은 진창으로 되어 있어, 아무리 배가 있어도 육지에 올라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진창에 죄다 전석(磚石)을 깔아 놓아서 아무리 천군만마(千軍萬馬)라도 마음대로 한꺼번에 치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진정 이와 같이 한다면 해중(海中)의 다른 외딴섬들도 죄다 보장(保障)의 땅이 될 만한 터인데, 무엇 때문에 강화도를 취택하였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전석을 빨리 철거해 버리고 언제나 파자(笆子 대나무로 발처럼 엮은 물건)를 깔고서 통행하여야만 혹시 뜻하지 아니한 변란을 당하더라도 천연의 험지(險地)를 비로소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울릉도(鬱陵島)와 손죽도(損竹島) 등을 빈 섬으로 방치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봅니다. 울릉도는 옛날 우산국(于山國)으로 신라 지증왕(智證王)이 정복하였던 곳입니다. 화살대나 담비가죽과 기이한 나무나 진귀한 식품 등의 생산이 제주도보다 많고 또 수로(水路)가 일본과 가까이 인접해 있으므로, 만일 교활한 왜인들이 몰래 와서 울릉도를 먼저 점거해 버린다면 이는 국가의 큰 걱정거리입니다. 지금이라도 마땅히 백성들을 모집하여 울릉도로 들어가서 살도록 하는 한편, 진보(鎭堡)의 설치도 지연시킬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당시에 울릉도를 빈 채로 방치해 둔 것은 일본과 약속한 데서 나온 것이므로 약속을 위반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런 말은 너무나 고지식할 뿐, 국가를 위하는 계책이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손죽도는 조그마한 섬인데다가 우려할 만한 문제거리도 없으니, 비록 방치해두더라도 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폐사군(廢四郡)을 다시 두는 것에 있어서는, 신의 생각으로는 국가의 대계(大計)가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압록강이 서쪽으로, 국토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기 때문에 천연의 요새라고 부르는데, 이 폐사군 중간에는 압록강이 띠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이래로 압록강 연안에 살고 있던 여러 오랑캐 종족들이 손쉽게 건너와서, 어떤 자는 나무 위에 집을 얽고 거주하여 해를 경과하기도 하고, 어떤 자는 땅에 굴을 파고 거처하여 계절을 넘기기도 하면서, 산삼(山蔘)을 캐어 나물로 만들기도 하고 사슴을 잡아 안주로 만들기도 하며, 심지어는 활과 창을 메고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접전(接戰)을 벌이므로, 조그마한 진(鎭)이나 잔약한 보(堡)로서는 감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데도, 수신(守臣)이나 도신(道臣) 등은 그런 사실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으니, 앞으로 닥쳐올 걱정거리가 지금보다 더 클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빨리 조정에 하문하여 지금이라도 폐사군을 다시 두어서 조종(祖宗)이 물려준 강토를 공고히 하는 한편, 정장(亭障 국경 요새지에 있는 방어 초소)에 감도는 나쁜 기운을 쓸어버리는 일도 지연시킬 수 없다고 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어(魚)ㆍ염(鹽)에서 나오는 이익들을 하민(下民)들에게 전속시키고 있는데, 이른바 균역법(均役法)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도 중국의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 등 해안 지방에 비교하면, 지극히 가볍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생업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물건이 식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것은 현령(縣令)들이 징수하는 세금이 국가의 공공 세금보다 갑절이나 되고, 아전(衙前)이나 장교(將校)들의 위엄이 관청의 공문첩보다 더 높기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안렴사(按廉使)의 절목(節目) 중에 이 조목을 거듭 강조하여, 어장(漁庄)이나 염분(鹽盆)을 가지고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관리들의 침해에 시달리지 않도록 한다면, 어염업(魚鹽業)에 종사할 사람들이 많아져 국중에 어물(魚物)이나 소금 따위가 흔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금(金)이나 은(銀) 등의 행정에 있어서는, 신이 신라의 옛 역사를 읽어본바, 해마다 바치는 황금의 수량이 적지 않았으니, 금을 캐는 광산(鑛山)이 옛날부터 있었던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강계(江界)의 은파동(銀坡洞)에서만 은을 제련하도록 허가해 주고, 각 도(道)의 모든 산에는 일체 대장간을 금지시키고 있으니, 신은 이것이 무슨 법인지 모르겠습니다. 금이나 은 따위를 사용할 때에 이르러서는, 한번 연경(燕京)으로 가는 사신이 수만 냥의 은을 가져가고, 상서(象胥 통역관(通譯官)의 옛이름)가 몰래 가져가는 것도 몇천 냥이 되는 줄 모르는데, 연경에서 무역해 온 것은 능단(綾緞)ㆍ금수(錦繡) 등 쉽사리 낡아버릴 물품에 불과합니다. 대저 금이나 은 따위는 예나 지금이나 녹슬지 않지만, 능단 따위는 세월이 지나면 티끌처럼 낡아버리므로, 결국 우리나라의 은화(銀貨)는 전부 수출되어 버리는 반면에 중국의 능단 따위는 한없이 생산될 터이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연경 시장에서는 은 가격을 모두 육해법(六解法)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지금부터는 국내에서도 모두 이 육해법을 사용하여 시행한다면, 통역관(通譯官)들이 우리나라에서 은(銀)을 사서 중국으로 수출한들 본전도 건지지 못할 터이므로, 자연 과외(科外)의 은은 반드시 가져가지 아니하여, 국내의 은화(銀貨)가 어느 정도 넉넉해질 것입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마르티노 마르티니 신부의 기록에 따라 정묘호란은 조선군 70만이 동원되어 명나라와의 협동작전으로 강력한 조선의 북방 후금 기병대 50만을 싸워 힘겹게 이긴 전쟁입니다. 이후 병자호란은 후금이 정묘호란의 실패를 거울삼아 전격전을 구사해 곧바로 달려 한양으로 진입하는 모험이 성공하고 결국 임금은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가고, 비빈이하 왕족은 강화도로 도피하여 장기 항전을 준비하나. 술에 대취한 김경징의 실수로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족이 잡히는 바람에 인조는 항복하게 됩니다. 변조된 실록의 기록들은 기타 사료를 면밀히 검토하면 충분히 그 간교함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