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아이스크림 장군 밴플리트
D데이는 12월2일이었고, H아워는 오전 6시였다. 12월 1일 자정을 기해 부산과 대구를 제외한 대전 이남의 모든 지역에 비상계엄령이 발효했다. 빨치산 퇴로를 막기 위해 출동했던 예비 3개 연대와 전투경찰 3개 연대도 정해진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막상 작전이 벌어지자 나는 초조함을 금할 수 없었다. 빨치산이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인쇄한 1000만 매의 귀순 유도 전단이 지리산 일대를 뒤덮었으나, 초기에 뚜렷하게 드러나는 성과는 없었다. 귀순자와 빨치산 주변 가족들을 수용하기 위해 남원과 광주에 수용소도 지었지만, 그곳을 채울 귀순자들은 좀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무렵에 밴플리트 사령관이 현지에 직접 내려왔다. 작전이 벌어진 D데이에서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나는 당시의 상황을 그에게 브리핑했다. 그러면서 말미에 “그러나 어쩐 일인지 성과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밴플리트 장군은 씩하고 웃으면서 “괜찮다. 좀 더 차분하게 기다려라. 그러다 보면 좋은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는 줄곧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는 역전(歷戰)의 미군 지휘관이었다. 그 역시 성과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했겠지만 그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격려할 뿐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밴플리트는 게릴라를 상대로 벌이는 작전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초기부터 성과를 도출해 낸다면 오히려 그 점이 이상했을 것이다. 게릴라를 상대로 벌이는 작전에서 최고 지휘관이 성과만 강조한다면 그 작전은 분명 시작부터 꼬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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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지프 본닛에 앉은 이)이 미국 종군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
그 밑에서 작전을 벌이는 지휘관이 성과에 집착한다면 먼저 ‘초토화’의 유혹에 이끌리기 쉽다. 당장의 성과는 그래서 금물(禁物)이라 해야 옳다.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몸체를 드러내지 않는 게릴라의 속성 때문이다. 성과에 집착하는 지휘부는 작전에 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장의 성과로 포장할 수 있는 초토화의 카드를 선택하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밴플리트는 그렇게 나로 하여금 ‘여유’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해 가시적인 성적을 거두는 데 급급해 한다면 대한민국 내부에 숨어 있는 빨치산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보다 장기적인 틀에서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빨치산을 다뤄야 했다.
군단장의 비행그러나 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내부의 단속도 필요했다. 전선에 서 있는 일선의 지휘관들과 예하의 장병들에게 이를 숙지시킨 뒤 철저하게 이행토록 해야 하는 문제였다. 여기에는 왕도(王道)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최고 지휘관이 먼저 나서서 모범을 보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현장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일선의 기동 부대 장병들은 모두 대공포판(對空布板)을 등에 매도록 했다. 빨간색과 흰색의 옷감으로 만든 표지물로 이를 장병들이 매고 작전을 벌이면 공중에서 진격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나는 하루에 두 번 세스나 경비행기를 타고 지리산 일대를 날아올라 대공포판을 보면서 아군의 작전 상황을 파악했다. 나는 미군으로부터 L-19 10대를 지원받아 이를 각 사단의 연대장 급 이상의 지휘관들이 활용토록 했다.
아울러 부지런히 현장을 찾아다녔다. 나는 남원의 사령부에만 머물지 않고 각 사단의 연대, 필요에 따라서는 대대 등을 다녔다. 그런 예하의 각 부대를 방문할 때면 나는 늘 “투항과 귀순이 먼저이고, 대민 피해는 발생치 않도록 철저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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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일대 토벌 작전으로 귀순하거나 붙잡힌 빨치산들이 재판을 받는 모습./라이프
내가 늘 찾던 곳이 또 있다. 포로 수용소였다. 투항하거나 귀순한 빨치산, 아니면 아군 토벌대에게 잡혀 내려온 빨치산들이 있는 곳이었다. 붙잡히거나 귀순을 위해 내려 온 빨치산들을 나는 유심히 살폈다. 부상의 정도, 심문을 통해 나온 내용 등도 세심하게 살피면서 작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아군의 무리한 측면이 없었는지 등을 관찰했다.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나아가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 그 뒤의 미군 최고 지도부 등은 모든 작전이 벌어질 때마다 한국군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또한 일종의 아주 냉정한 ‘시험대’라고 봐도 좋았다. 더구나 당시 작전은 미군에게 전쟁 발발 뒤 처음 벌어지는 한국군 군단 병력의 기동, 수색, 대민작전 임무 수행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의 책임을 맡은 지휘관이어서 그 무게감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주어진 시험을 잘 치러야 다음 단계로의 도약이 가능한 법이다. 물론 그 다음에도 다른 시험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우선은 당면한 시험을 훌륭히 치러야 다음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 나는 1951년 막바지의 가을에 펼쳐진 그 빨치산 토벌 작전이 대한민국 군대의 질적인 성장을 위해 아주 필요한 과정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밴플리트 사령관이 내게 준 임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공을 거두도록 노력을 거듭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무리하게 지리산 상공을 비행했다. 오전에는 그나마 괜찮았다. 지리산 상공은 매일 오전에는 바람이 잤다. 그러나 오후에는 바람이 거셌다. 몸체가 무겁지 않은 세스나 경비행기는 그런 바람 앞에 무력해 에어포켓 현상으로 곤두박질쳐야 했다.
수험생의 심정그럴 때마다 나는 머리를 비행기 천장에 부딪히거나 심한 구역질에 시달려야 했다. 눈물도 나고, 콧물도 흘리면서 비행기 안은 금세 더렵혀지고는 했으나 나는 매일 비행을 감행했다. 토벌대 사령관의 비행기가 뜨면 사단장, 연대장의 비행기도 떠야 했다. 작전은 그래서 정해진 틀에 따라 착착 펼쳐졌다. 최고 지휘관이 각 예하부대를 찾아다니자 군대의 군기(軍紀)도 엄정함을 유지했다. 따라서 대민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지리산 일대의 산악 지역에 총성이 잦아지고 있었다. 2기 작전을 마무리했던 1952년 1월 12일 내게 진급 소식이 전해졌다. 별 둘에서 별 셋의 중장을 달아준다는 소식이었다. 사령부로 그 소식이 전해지면서 먼저 금속제 계급장을 현장에 파견 와 있던 경찰 간부들이 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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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나선 '백 야전사령부'의 백선엽 장군(지휘봉을 잡은 이)이 상황판을 보며 작전을 설명하는 모습.
어깨 견장에 다는 계급장은 군 참모들이 현지의 누군가에 부탁해 수를 놓아 가져왔다. 나와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해군 손원일 제독의 동시 승진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군대에서 별 셋의 중장에 오른 사람은 미국에 유학 중이던 정일권 장군을 포함해 모두 넷으로 늘었다.
기쁨만 앞서지는 않았다. 밴플리트 장군의 강력한 지원이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는 내 역량을 믿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그러나 그로부터는 다시 미군의 ‘시험’이 펼쳐질 예정이었다. 그런 지속적인 테스트를 잘 이겨야 한국군은 미군의 도움을 이끌어 내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복을 입은 내가 왜 군공(軍功)에 관심이 없을까. 그러나 나는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내 자신을 잘 알았다. 나는 전쟁이 없었다면, 그래서 미군이 이 땅에 오르지 않았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계급을 달지 못했을 것이다. 숫기가 부족했고, 남과의 교제에도 서툴다. 정무적인 판단에 익숙지 않아 나는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상황에 잘 어울리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남과 무엇인가를 나누기 좋아했던 밴플리트가 한국 전선에 부임했고, 마침 그는 나를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그 덕분에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도 매우 성공적으로 치렀다. 매사에 부지런했던 밴플리트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또 무엇인가를 기획하고 실천할 태세였다. 내게는 그런 밴플리트가 냉정한 ‘시험관’으로 보였다.
지리산 작전은 1~3기로 나눠 벌어졌다. 초기에는 성과가 별로였으나 2, 3기 작전에 들어서면서 빨치산은 거의 소멸했다. 작전이 마무리를 향해 가던 1952년 2월 초였다. 밴플리트의 작전 참모 마제트 대령이 찾아왔다. “올드 맨(Old man; 마제트가 자신의 상관인 밴플리트를 지칭하는 말)의 다른 구상이 하나 있다”고 했다. 시험을 치러야 하는 수험생, 나는 그런 기분으로 마제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