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사랑합니다. 당신의 세월 /지게를 업고 사신 아버지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살아온 삶 되돌아보니 남긴 것도 없는데
어느덧 내 나이 8 순을 넘기면서 지나간 세월이 그렇게도 그립다.
온통 삶 자체가 그 옛날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간절히 생각나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불효지심에 마음이 한없이 아프며 부모님이 그립다.
요새 자주 회자되는 말에 “세상은 온통 어머니만 있고 아버지는 없다”는 이야기만 있어서 인지
아버지가 그렇게 그립다.
아버지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합병한 다음 해인 1911년에 태어나셨기에 일제 하에서 젊음을
고스란히 바치고 사신 셈이다.
아버지가 태어나신 곳은 오지 중에 오지인 두메 산골 숯 골 이라는 산 속 마을이시다. 1967년
1월 아버지 연세가 56 세셨을 때 전기가 들어온 곳이라면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된다.
내가 아버지를 기억하며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아버지는 등에 지게를 업고 사신 모습이 가장
머리에 남는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세에 동갑
이신 어머니와 결혼하시고 14년 정도 큰 댁에 사시다가 아버지 연세 30세 전후해서 분가 하신
것 같다.
그 사이 3 녀 3 남 6 남매를 낳으셨는데 두 살도 채 안 되어 4 남매를 잃고 달랑 두 남매만 데리고
분가 하셨다. 그때 내 나이가 네 다섯 살 때 분가 하신 집의 형상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동네는 한 30 여 가구가 모여 사는 동네였는데 아버지가 분가 했던 집은 주인이 만주로 가시면서
버려두고 가신 빈집이었는데 그거라도 분가하여 부모님이 새로 시작할 수 있었으니 반가운 심정
으로 분가 하셨던 듯싶다.
그 집에 대한 기억은 이렇다. 집은 거의 쓰러져 가는 집이었기에 집이 기울어 문이 제대로 닫히지도
않았고 방바닥은 큰 방만 종이로 발랐고 작은 방은 멍석이 깔려 있었다. 문은 대나무 얇게 쪼개서
가로 세로로 엮어 만든 문이었기에 약하기 이를 데 없었고, 겨울이면 혹한을 견디지 못하여 방안에
떠다 놓은 물이 얼어붙어 있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겨진다.
그래서였던가 보다. 아버지는 그 집으로 이사 오신 후로 날만 세면 지게를 업고(짊어지고) 집을
나섰던 기억 뿐인데 가난을 벗어나는 수단으로 그럴 수밖에 없으셨나 보다.
참으로 배고프던 시절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아버지가 지게를 업고 나가시면 조르르 따라
나섰다. 아버지를 따라 가면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인데, 아버지는 힘든 일을 하시러 험한 산속으로
가시는데 거기를 따라갔으니 그게 아버지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 불효를 저질렀나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는 당시 출성 산이라는 산이 벌목을 하여 민둥 산이 되었는데 매일 산에 오르셔 등걸을 캐서
장작을 만들어 파시려고 그러셨던 거다. 그런 힘든 일을 하시러 가신 아버지는 우선 칡 뿌리부터
캐서 나에게 줘 먹게 하시고 틈틈히 머루 다래도 따 주시면 먹고 했다. 심지어 소나무 새가지는
꺾어서 겉을 벗겨 먹게도 하셨다. 기다리는 틈틈이 냇물에서 가재를 잡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장작을 만들어 집에서 20 리 밖에 있는 대야 장에 가셔 팔아 살림을 늘리시는 일이 부모님의
분가 후 하시던 모습이다. 그 사이 어머니는 작은 밭을 가꾸어 식량을 마련하시고 아침부터 밤까지
논 밭에서 사시고 집에 돌아오셔서는 벼를 찌어 보리를 빻아 저녁 식사를 마련하시던 일상이 눈에
선하다. 그런 삶을 사셨기에 몇 년 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남매는 그 누추한 집을 떠나 새로
마련하신 새 집으로 이사하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지게를 업고 사셨다. 오늘은 아버지의 지게에 땔감이 있었고, 또 오늘은 아버지의
지게에 거름을 하려고 베어오신 풀이 있었고, 또 오늘은 아버지의 지게에 추수해 오신 벼가 가득했고,
또 오늘은 수박이 가득 쌓여 오시기도 하셨다. 그렇게 날만 세면 아버지의 지게에 무엇인가 가득하
셨기에, 처음 분가 해서 나오실 때 300평이었던 논이 800평이 되었고 나중에는 1500평 까지 늘어나
있었고, 그 논에 벼 이삭이 익을 때면 참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의 어깨는 얼마 만한 아픔이 쌓여갔을까 가슴이 아프다.
부모님과 함께 처음 얼마간 그 쓰러지는 집에서 살 때의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슬픈 기억이 있다.
당시 모든 부모님들이 문맹이셨다. 해방 된 후 야간 간이 학교를 열어 한글을 가르치셨다. 어머니도
한글을 배우시러 가셨는데 자다 깬 내가 일어나 어머니를 찾으며 울다가 멍석에 발뒤꿈치를 비비는
바람에 피가 나서 우니 어머니가 뛰어 오시면서 한글 배움을 멈추셨다니 지금도 그 생각하면 어머니에
대한 죄의 마음이 가슴을 찢는 아픔이다.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새집에서 다녔으니 전 집에서 사오 년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초라하게 사시다가 새집을 지어 이사하셨을 때 부모님은 얼마나 자랑스러웠고 기뻤을까 생각하면,
내가 서울에 와 몇 차례 전세 집을 옮겨살다가 새집으로 이사했을 때 그 기쁨 보다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게를 업고 사시는 것을 멈추지 안 하셨고 어머님 또한 날이 밝기 전 들판에 나가
잠시도 쉼 없이 사셨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일하셔 점차 논 밭을 늘려 가셨고 어머니는 논 밭 일 말고도
삯 바느질로 밤새워 일하시던 모습, 보따리 장사하신다고 머리에 광주리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
시며 일하시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렇게 부모님은 쉼 없는 일만 하시며 사셨다.
그토록 논 밭도 늘리시며 살았지만 가난은 그림자처럼 우리 부모님을 떠나지 않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삶을 회상하면 검정 핫바지에 하얀 무명 저고리 차림으로 고무신 신고 점심도 굶다시피 하면서
산 기억뿐이다. 그 결과 가정 형편의 어려움으로 인해 중학교에 갈 때 1년 쉬었고 대학에 갈 때도 또 1년을
쉬었다.
중학교 3년을 다니면서 하루에 80 리 길을 걸어서 다녔는데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날에는 우산도 쓸
수가 없어서 찢어지는 것은 면할 수 있는 삿갓을 쓰고 심지어 책도 가져가지 않고 몸만 학교에 가는 날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지각, 조퇴, 결석 한 번 하지 않고 개근 하였다.
그러던 중 3학년 늦가을 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비를 흡족 맞고 추위에 벌벌 떨고 집에 오니 어머님이
무심코 하신 말씀
‘옷을 벗어서 들고 오지 그 비 다 맞고 왔느냐’는 한마디 말씀이 저를 3년 간 그처럼 힘들게 다닌 응어리가
폭발하여 통곡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다음 날로 학교 근처에 집을 새로 사서 고등학교를 다니게 하셨다.
세상에 참았어야지 내가 힘들게 다닐 때 가슴에 아픔은 나보다 부모님이 더 하면 더 했지 못할 리 없거늘
그렇게 대성통 곡하니 부모님 마음이 오죽 하셨을까 지금 생각하면 그 죄스러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부모님 그처럼 열심히 사시면서 조금씩 살림 늘리시며 사시는 재미로 사셨을 텐데, 그로 인한 빚이 쌓여
결국 부모님을 더욱 어려운 환경으로 살게 하였다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그 후 대학에도 못 가고 절망에 살다가 부모님께 지어서는 안 될 불효를 또 겪게 하였고 운명적인 외출이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대학은 마쳤지만, 이런 저런 사정이 겹쳐 부모님의 피땀으로 지으신 두
번째 살던 집마저 팔아넘기고 남의 헌 집을 뜯어다 집을 지어 살기 시작한 집이 세 번째 집이었다.
그 모든 아픔을 부모님은 못난 이 불효 자식 하나를 위해 다 바치고 사셨으니 그처럼 몸이 가루가 되시도록
열심히 사셨지만 편한 삶 한 번 사시지 못하고 아버님은 노후에 치매로 7년 고생하시다가 69세로 1980년
영면하셨고, 어머님은 2004년 94세로 아버님 곁으로 가셨다.
이제 와서 지난 날 삶 되돌아보며 생각하니 불효지심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어떻게 사신 부모님이셨는데
하나 밖에 없는 자식에게 효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시고 가셨는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제 나도 늙었다.
‘어버이 살아 실 제 섬길 일 다 하여라. 돌아가신 후 애달프다 어이 하리’ 한 없는 죄스러움에 눈물만 앞을
가린다.
얼마 전에 그 고향을 가 보았다. 차를 가지고 갔는데 가도 가도 고향 동네가 나오지 안 했다. 얼마를 지나
차를 멈추고 물었다. ‘숯 골을 가려는데 가도 가도 나오지 안 하네요’ 하였더니 ‘아이고 한 참을 지나쳐
오셨네요. 되돌아 가셔야 해요’ 하지 않는가!
세상에 내가 살던 내 고향도 잃을 정도로 변한 나의 고향. 그곳에 계셔야 할 부모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버지는 등에 지게를 업으시고 지게는 아버지를 안고’ 사시던 그 추억만이 내 가슴을 후빈다.
그처럼 어깨에 피가 맺히도록 사시며 장만하셨던 부모님과 함께 사셨던 집 우리 집 셋은 지금 다 없어졌다.
하필 우리가 살던 두 집이 있던 자리에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뚫리며 없어졌다.
그런데도 늙을수록 내가 살던 나의 고향 그 집들이 그립다. 부모님과 함께 한 이불 덮고 살았던 그 추억의
집이 그립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한 번만 우리 다시 모여 같이 살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 보고 싶은 부모님!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흑인 영가를 불러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