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칭 세시봉 세대다. 문화가 빈약했던 시절, 송창식, 양희은, 윤형주, 트윈플리오를 종교처럼 추앙했다. 거기에 겉멋이 들어 통기타를 독습하여 노래방 출현 이전 1970, 80년대 친목 모임 뒷풀이 싱얼롱(Sing Along) 자리를 주도하기도 했다.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그 꽃", 그 낙화를 보면 ‘나를 버리고 떠나시는 님’이 차마 나를 떠나지 못할 것이란 가사. 이 노래를 듣고 어이 아니 선운사 동백꽃을 외면하겠는가? 다들 아시겠지만, 이를테면 피어있는 짧은 시간에는 그토록 우아하고 고혹적인 목련꽃은 낙화하여 바닥에 스러지면 그 모냥새가 몹시 지저분하다. 늙어 퇴락한 기생의 모습이다. 반면 동백꽃은 선홍빛 꽃잎이 하나도 다치지 않은 채로, 심지어 초록빛 꽃받침까지 함께 고스란히 알뜰하게 낙화한다. 이런 동백꽃을 누가 저려 밟을 수 있을까? 동백은 두 번 핀다. 가지 위에서 한 번, 땅 위에서 또 한 번.
세시봉 광신도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1981년 겨울방학을 틈탔다. 버스를 몇 번 갈아 타가며 전북 고창 천년 고찰을 향해 종점에서 내려 허위허위 길을 걸었다. 시인 서정주 그분의 절창 중 하나인 <선운사 동구>가 생각났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시인이 들린 그 막걸릿집이 어디쯤인지, 혹시 아직도 흔적이나마 남아있는지, 그 여인이 살았으면 지금 나이가 몇일지, 생존해 계시다면 혹여 육자배기 한 소절이라도 들을 수 있을지, 거머리떼 같은 언론사 기자들에게 휘둘리지는 않았는지, 미처 모르고 지나치지는 않았는지, 이런 저런 사념에 젖어 잦다란 개울을 따라가는 진입로 아래 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갔다. 드뎌 사찰 모습이 드러났다.
여타 명찰과는 달리 평지에 수더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내 목적은 부처님 도량을 보자는 게 아니고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그 꽃”, 떠날 님의 발목마저 붙잡는 동백의 자태였다. 본당과 요사채들, 이런 저런 부속 건물들을 둘러보아도 동백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마당에서 마주친 한 스님께 여쭈었다. ‘동백이 어디에?’ 절터 뒤쪽을 돌아 가보라 했다. 동백으로 짐작되는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진홍빛 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동백나무 모습을 잘못 알아차린 것인지, 또 다른 장소에 허벌나게 만개한 동백숲이 있는지 헷갈려 하며 아까 그 스님을 만나 다시 여쭈었다.
“아, 여긴 동백((冬柏: 겨울 동, 춘백 백)이 아녀. 춘백(春栢: 봄 춘, 춘백 백)이여!”
아쉽고 분한 마음에 춘백나무 한 가지를 꺾었다. 어깨에 메고 간 기타집 속에 우겨 넣었다. 집으로 돌아와 꽃병에 가지를 꽂았으나 꽃은 끝내 피지 않았다. 내 평생이 시행착오의 줄줄이 사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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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 송창식과 시인 서정주의 또 다른 인연 하나.
어느 날 문득 송창식이 서정주의 <푸르른 날>에 혹하여 시인의 허락을 받으러 갔다 한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저기 저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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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선생님의 시에 곡을 붙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자네를 잘 몰라. 일단 곡을 부쳐 와보게. 그때 판단합세.”
얼마 후, 곡을 부쳐간 송의 노래를 들은 서는, 크게 기뻐하며 집에 있는 술병을 모두 풀면서 흔쾌히 허락을 하였다 한다. 한 시대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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