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를 쓰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모든 국민이 알고 있다.
필자는 6년째 이순신관련 축제담당자들에게 전화를 하여 “한산대첩(해전)이나 명량대첩(해전)에 참전한 제장들의 묘가 어디 있고, 후손이 누구인지, 또 두세 명의 장군들이라도 혹시 알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해오고 있다. 대개 “잘 모른다”는 답을 듣기 일쑤다.
명량대첩축제 재단의 관계자가 명량해전에 참전한 두세 사람의 호남출신 장군이름도 모르면서 어떻게 축제의 아이템을 구성하는지 의문이다.
명량해전 학술회의를 10년 가까이 8회나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명량대첩에 참전한 제장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없고, 광복이후 70년간 어떤 기관이나 연구자의 논문도 하나 없다.
작년에 500억 가까이 들인 남해 이순신순국공원을 준공했는데, 노량해전 참전자는 새기질 못했다. 참전자 연구, 즉 인물연구가 없었으니까 못 새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곳은 노량해전이지만, 노량해전 직전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관심 밖이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 바로 직전 순천왜교성전투를 두 달간 치렀다. 그 마지막 날의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죽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는 국민들도, 남해지역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다. 수많은 호남사람들이 참전하고 지원한 무술년 해전, 특히 노량해전에 참전한 휘하 장군들(인물)에 대한 연구논문도 하나 없다.
한산대첩축제가 8월 10일부터 14일까지 5일간, 명량대첩축제가 9월 7일부터 10일까지 3일 동안 진행된다.
하지만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연구와 추적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서 일부의 휘하 장수들에 대한 연구가 있었지만, 난중일기 전체 인물을 연구한 자료는 아직 없다.
그래서 필자는 그것을 진행하고 있고, 자료가 축적된 것도 좀 있다. 특히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후손을 추적하여 찾은 것이 60여 분이다. 그러나 단 여섯 문중만 선조 할아버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고, 나머지 대다수는 별로 관심도 없고 잘 모르고 있었다.
이 뿐 아니라 수십 년째 치러온 통영 한산대첩축제와 여수 거북선축제, 진도와 해남의 명량대첩축제는 이순신과 함께한 제장들의 후손을 한 번도 초대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이다.
6년째 이어오고 있는 일이지만, 필자는 며칠 전 전남도청에 있는 명량대첩축제 재단에 전화를 걸어 “이순신과 함께 싸운 제장들 후손들도 초대 좀 해주시라”고 또 요청을 했다. 재단 측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후손들을 초대하고 있으며, 진린과 최희량 장군 후손들을 초대하여 도지사가 식사를 함께하고 있는데요”라고 답변을 했다. 어이가 없었다. 진린과 최희량 장군은 명량해전에 참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기초적인 사실 하나도 모르면서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명량해전과 관련하여 순천부사 권준(權俊)은 난중일기 등의 기록에 가장 많은 300여회나 등장한다. 명량해전 때는 조방장으로서 전선 한 척을 지휘했다. 전라좌수영에서 1차 출동할 때 외에는 전 해전에 참전한 영웅이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에 있고 후손들은 경북 구미시 선산읍에 살고 있다. 이 후손들을 불과 3년 전에 필자가 찾았다.
임진왜란 1년 전부터 이순신을 도와 판옥선을 건조하고 군량마련에 대단한 공을 세운 흥양(현 고흥)현감 배흥립(裵興立)은 난중일기에 100회 이상 등장하는데, 전 해전에 참전하였으며 명량해전에서는 조방장으로 참전하였고, 판옥선 1척을 지휘하였다. 원래 한성출신이나 후손들은 경북 김천시에 살고 있다. 필자는 3년 전에 김천시에 있는 이 분의 묘소를 답사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여수 돌산도에 있는 방답첨사를 지내고, 노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로 참전하여 개선장군이 된 무의공(武毅公) 입부 이순신(李純信) 장군도 있다. 묘소는 경기도 광명에 있다. 전라좌수영에 대한 연구를 여수지역에서 수십 년을 했지만, 묘소를 찾거나 후손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1년이나 2년마다 순환 보직하는 공무원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전 기간에 걸쳐 모든 해전에 참전한 분 중 한 사람이 ‘호남의 영웅’인 송여종(宋汝悰) 장군이다. 이 분은 초기의 해전에 많은 공적을 세웠고, 특히 부산포해전(왜선 100척을 깨트림)에서 승전보고서인 장계문을 선조에게 주달하도록 이순신 장군이 발탁, 추천한 분이다. 그 직후 녹도만호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고, 명량해전에 참전한 뒤 무술년에 벌어진 절이도해전에서 1등의 공훈을 세운 영웅이다. 묘소는 정읍과 가까운 김제에 있고 후손들은 정읍과 전주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3년 전 그 후손을 찾을 때, 3일 동안 5분에게 전화를 20통이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호남사람들과 정읍사람들이 외면한 이런 영웅들을 필자는 왜 찾았을까? 위에 열거한 4분 중에 배흥립을 뺀 세 분은 가세가 기울어 400년이나 사당도 없이 지역사회에서 잊혀져 버렸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시기 전 해전에 참전한 분들 중에 고흥출신으로는 군관 송희립(宋希立), 김붕만(金鵬萬) 등이 있다. 순천출신으로는 정사준(鄭思竣)과 정사립(鄭思立) 형제, 귀선돌격장인 이기남(李奇男)과 이언량(李彦良) 장군 등이 전 해전에 참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명량해전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운 거제현령 안위(100회 이상 등장, 절이도해전부터 노량해전 때까지는 전라우수사) 장군 역시 호남의 영웅이다. 안 장군의 묘소는 김제에 있고, 후손도 근처에 살고 있다.
필자가 난중일기 등의 자료를 분석해본 결과, 난중일기에 가장 많은 150여명 가까이 등장하는 곳이 고흥이고, 순천과 여수지역이 130여명 가까이 등장해 다음을 잇고 있다. 서울(한성)이 100여명, 광양과 보성, 장흥과 해남, 나주와 영광, 강진과 함평, 전주 등 각 지역이 적게는 10여명에서 많게는 30여명 가까이 등장한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의 가족과 관련된 종이 대략 50여명 등장하는데, 장계문인 임진장초에 공적사항이 실린 100여명 가까이 되는 종은 호남출신이다. 호남의 이름없는 백성(민초)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중요인물 중 상당수가 호남절의록에는 빠져있다는 것이다. 호남절의록은 정유재란이 끝난 뒤 200년이 지난 시점에 만들어졌기에 오류가 상당히 있다. 또 1800년대 이후 만들어진 각 문중의 문집이나 사실기 등도 검토해보면 오류가 상당히 많다.
이유는 각 시군읍지(市郡邑誌), 도지(道誌), 또는 각 문중에서 문집을 만들 때 난중일기 등장인물 분석은 안하고 호남절의록과 호남삼강록 등이나 기존의 읍지나 문중자료 등을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고흥의 정걸(丁乞)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멘토인 분이다. 이순신 장군보다 31세가 많은 분이고 20여년 이전에 벌써 수사와 병사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장군의 조방장을 하시다가 충청수사가 되어서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에 화살을 제공하여 승첩에 일조를 하신 분이다. 이 분의 손자까지 3대가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것을 필자가 3년 전에 확인하였고, 이를 후손들에게 알려줬다. 손자 정홍록은 무술년인 1598년에 노량해전까지 참전한 것으로 파악이 된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낙안군수를 하였는데, 사직하고 고향에가서 부조(父祖)의 제사를 받들었다. 하지만 호남절의록에는 흥덕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오류라고 생각한다.
3대가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유일한 가문이고, 호남의 영웅집안임에도 불구하고 정걸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따로 없다. 현재의 문재인 정부가 현창사업을 하면 굉장히 좋을 것 같다.
통영의 한산대첩축제, 여수의 거북선축제, 전남의 명량대첩축제 기념사업회에서는 이러한 진정한 영웅들의 후손들에 대해서 초대를 한 번도 안했다. 도대체 어디에 대첩이 있었다는 말인가?
강화도 앞인가 속초앞바다인가? 링컨 대통령 처남이나 스탈린의 처남이 와서 싸웠다는 말인가?
그런데 명량대첩에 참전하지도 않은 진린 장군과 최희량 장군 후손들은 도지사가 같이 밥먹고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아주 잘못된 행정이다. 호남사람들에 의한 호남역사지우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축제를 주관하는 시민단체와 각 지자체의 각성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