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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 안드레아
2010년12월6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 5,17-26)
And some men brought on a stretcher a man
who was paralyzed;
they went up on the roof
and lowered him on the stretcher through the tiles
into the middle in front of Jesus.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As for you, your sins are forgiven.”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메마르고 황폐해진 이스라엘에 하느님께서 오시어 구원해 주신다고 외친다. 그날에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영광을 볼 것이며, 사람들 머리 위에 끝없는 즐거움이 넘치고,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들것에 들린 채 당신 앞에 실려 온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다. 중풍 병자의 믿음뿐 아니라 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의 믿음을 보시고 개인도 살리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넘치는 말씀입니다. 즉각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이의를 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로서는 당연한 의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답하십니다.
☆☆☆ 오늘 복음에서, 들것에 실려 왔던 중풍 병자가 우뚝 일어섭니다. 그러고는 두리번거리며 걷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탄성도 지르지 못합니다. 순간적인 적막 속에 사람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봅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때의 분위기를 쉽게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분명 그 자리는 기적의 자리였고, 감동의 자리였습니다.
옛말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중풍에 걸려 신음하고 있던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지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주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자신의 병이 낫기를 희망하며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주님을 뵙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때가 왔습니다. 주님께서 그들 가까이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주저하지 않고 중풍 병자 친구를 들것에 싣고 주님께 데리고 갑니다. 사람이 많아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친구의 일이라면, 그리고 주님을 만나 뵈려는 열망으로 지붕에 올라가 천장을 뚫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중풍 병자와 친구들은 주님을 뵙는 일에 한마음 한뜻이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한마음 한뜻이 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칭찬까지 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 구하면, 무엇이든지 주님께서는 다 들어주십니다. 개인은 공동체의 한 구성원일 뿐이지만, 각 개인이 서로 마음을 모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물론 “죄를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죄가 용서되었는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것은 아무나 말할 수 없습니다. 결과가 즉각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나 ‘말할 수 없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중풍 병자가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천상 능력’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분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인색해지면’ 내면 세계는 굳어집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기적을 보고서도 마음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만큼 굳어 있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몸이 굳어지는 현상’을 불인(不仁)이라고 합니다. 어질지 못하면 마비된다는 암시입니다.
중풍은 무서운 병입니다. 나이 들수록 더욱 두려워지는 병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중풍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오늘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 병자의 이웃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환자를 데려갈 수 없자, 지붕을 벗겨 내고 줄에 매달아 그분 앞에 내려 보냈습니다. 대단한 열성입니다. 우리네 가옥 구조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가능했습니다. 우기와 건기가 뚜렷했기에 비가 없는 건기에는 지붕에 거적을 덮어 두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러한 용기와 적극성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병을 낫게 하시면서 죄를 용서한다고 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중풍과 같은 무서운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참에 그들의 잘못된 생각까지 고쳐 주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죄의 결과가 중풍이라 믿어 왔기에 그 원인인 죄를 용서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일어나 가라 - 강헌철 신부- 간혹 신자들이 찾아와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 무척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왜 그러는지 물으면 신부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단다. 고해성사는 우리의 부족함이나 죄를 고백하고 그에 합당한 보속을 함으로써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보속을 담보로 용서해 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 일어섬> -양승국신부- 과로와 고혈압이 겹쳐 그만 쓰러져버린 한 형제를 안타깝게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 조심했었어야 됐는데, 하고 후회막심이었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하루 이틀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몸 전체의 4분의 3정도가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퇴원 후에는 꼼짝없이 방안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워낙 자존심이 세고, 의지가 강한 분이었기에 즉시 재활 치료에 들어갔습니다. 잘 나가던 시절, 홍길동 이상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던 분이었는데, 이제 자기 힘으로 홀로 서기도 힘듭니다. 한 발자국 발걸음 옮기는데 5분은 걸립니다. 마침 제가 댁을 찾았을 때도 안간힘을 다 쓰며 걷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혼자 힘으로 걸어서 침실로 돌아오던 그 형제 입장에서 큰 난관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높이 5cm 남짓한 문턱이었습니다. 그걸 넘어서기가 그렇게 힘들어서 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크게 깨달았습니다. 정상인 입장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장애우들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큰 장벽들이 많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뒤로는 어디를 가나 장애우 입장에서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게 되었는데,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장애우에 대한 배려가 너무나 소홀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환자의 경우는 상황이 더욱 심각했습니다. 병세가 깊어질 대로 깊어진 그 환우는 걷기는커녕 자기 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 앞으로 이동되어 왔습니다. 연민의 예수님, 측은지심의 예수님, 해방자이신 예수님, 우리 모두의 자유와 구원만을 바라시는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중풍병자를 그냥 돌려보내실 수 없었습니다. 그 가련한 중풍병자를 향해 이렇게 외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인류학상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직립(直立)입니다. 자신의 두 발로 바로 서는 것입니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일어섬으로 자신의 생명을 발현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합니다. 생명은 바로 일어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는 오랜 세월 그냥 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는 살아있었지만 사실 죽어있었습니다. 목숨은 붙어있었지만 사실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중풍병자가 오늘 예수님의 자비로 인해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그는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0으로 건너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군요. 주변을 살펴보면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한 사람, 숨은 붙어있지만 정신이 다 빠져나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 스스로 일어서지 못해 늘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 그들에게 우리의 힘과 에너지를 보태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이웃들의 일어섬에 동참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삶의 본질은 일어섬입니다. 사실 참된 신앙이란 것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떨치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말의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불어, 독일어는 모두 '일어섬'을 뜻합니다.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거들랑 그 돌 끌어안고 일어서라. 나는 넘어짐으로 행복하였고 일어섬으로 더욱 행복하였노라.”(일어섬에 대하여 -손희락-)
고해 성사의 은총 - 정찬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현상적인 병뿐만 아니라, 그 근본 원인인 죄에까지
의아함과 신기함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죄의 용서와 치유의 은혜 -전삼용신부-
요즘 사제품을 준비하는 중국의 나이가 마흔이 된 신학생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중국과 홍콩, 미국에서 지금까지 의사로 활동하던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부족할 것 없는 분이 그것도 활동도 어려운 중국의 지하교회의 사제가 되려고 하는 이유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분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의사로서 8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치유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저는 사람의 영혼까지 치유할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의도를 알면서도 은근히, “심리치료나 정신과 치료도 있잖아요.”라고 떠 보았습니다. 그 분은 하나하나 정확히 발음을 해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치료는 한계가 있어요. 어느 정도까지는 치료가 가능할 수 있어도 인간의 영혼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영혼은 오직 하느님의 힘으로만 치유가 가능합니다.” 사실 사제들의 직무 중 하나는 의사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치유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정말 고해성사나 면담을 통해 상처받으신 분들이 치유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닙니다. 그 분은 사람의 육체만을 치유하다가 마음의 상처에 손을 댈 수 없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인간을 총체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중풍 걸린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그 사람을 내려놓고 치유를 청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닌 그를 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치유를 해 주시기로 결심합니다. 복음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위 사람들의 믿음으로 움직일 기력도 없는 한 사람을 주님께 이끌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집에 한 사람만 성당에 다니고 있지 않다면 다니는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고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습니다. 심판자가 하느님이시라면 용서할 권한을 지니신 분도 하느님이신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반감을 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하시며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하십니다. 즉,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는 오늘 복음에서 같은 것으로 나옵니다. 사실 당시엔 병은 하느님께 죄를 지어서 받는 벌로 생각하였기에 병이 치유되는 것은 죄가 용서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불어넣어 주시며,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특권인 ‘용서의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따라서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죄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어떤 조사 결과에서 고해성사는 다른 어떤 정신치료보다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발표한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사실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치유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고해성사에서 신부님의 한 마디로 자살할 직전의 사람도 살릴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믿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서 마지막으로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남편이 술과 도박으로 가사를 탕진하고 아내를 의심하고 생명에 위협이 갈 정도까지 구타하여 뱃속의 아이까지 유산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남편이 그렇게 된 것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여겨 고해성사를 보고 남편을 용서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어찌된 일인지 새 사람이 되어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고 술과 도박을 끊고 열심 한 신앙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 증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를 하나로 묶어서 행하셨고 사실 그 능력을 사제들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니 의사였던 사람이 더 완전한 의사가 되기 위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또 사제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조사에 따르면 병원에 가장 자주 가는 나라 1위로 개인당 일 년에 19회 병원을 찾는 한국 사람들로 나왔습니다. 평균 한 달에 한 번은 더 병원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치유를 받는 고해소에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육체적 건강에도 유익하지 않을까요?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간들에게 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또한 그런 은총을 잘 이용할 수 있도록 합시다. 새벽을 열며 거지 한 명이 부자의 집 담에 등을 비비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그 모습을 보고서는 “왜 제 집 담에 등을 비비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지요. 이에 거지는 “등이 가려워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 부자는 거지를 측은하게 여겨서 집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욕을 시켜주고 옷도 새것으로 갈아 입혀주었으며 먹을 것까지 주어서 보냈습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호강을 한 거지는 너무나 기뻐서 자기 친구 거지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지요. 빠다킹신부
공동체의 중요성 -조명연 신부-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 좋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꽃보다 아름다운 -김인숙 수녀- 뒤를 돌아보니 순조롭게 여행을 즐기던 윤봉 자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급체를 한 것이다. 나는 혈액순환을 돕는 손지압기를 건네주며 손에 넣고 계속 굴리라고 했다. 버스 안에 있던 모두가 자매의 얼굴로 집중되었다. 갈 길은 멀고 이를 어쩌나`…. 우리는 안 되겠다 싶어 자매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경험을 총동원했다.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하느님
중풍에 걸린 환자의 믿음
용서란 다른 이가 잘했다거나 옳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하유설 신부-
간절히 간절히 -박동진 신부-
- 김상균 신부- -손현기 신부- 좋은 이웃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양승국신부- <평범함의 은총, 평범함의 행복> 꼼짝 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벌써 꽤 오래 전 일이네요. 저를 검진하신 의사 선생님께서 ‘큰 일 났다’며 즉시 입원시켰습니다. 그리고 ‘절대안정’이란 팻말을 제 침대 머리맡에 붙여놓았습니다. 조금만 움직이려 하면 어느새 간호사 선생님들이 달려와서 혼냈습니다. 멀쩡하게 잘 돌아다니다가 꼼짝 없이 갇힌 신세가 되니 정말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제 발로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평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갇혀 있던 한 형제가 큰 외과수술을 받게 되어 외부 병원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도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일이 얼마나 복잡하던지 깜짝 놀랐습니다. 수감자 본인에게나, 따라붙은 사람들에게나 서로가 얼마나 부담스런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화장실 갈 때도 교도관들께서 따라붙어야 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요. 나중에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사람들의 호기심에 찬 시선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평범한 삶을 산다는 것, 누군가로부터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다는 것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산다는 것, 누군가로부터 도움 받지 않고 내 힘으로 산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정녕 큰 은총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의 삶은 참으로 기구한 것이었습니다. ‘평상에 누인 채로’란 표현을 통해서 중풍이 이미 많이 진전되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발병된 후, 한번 나아보겠다고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이제 병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이 악몽 같은 삶이 언제 끝나나, 민폐 끼치기가 죽기보다 싫은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토록 구차한 삶을 살아야 하나,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며 한탄하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습니다. 그러던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한 가지 희소식이 전해집니다. 예수님이란 분이 이 마을, 저 마을 전도를 다니는데, 그의 능력이 신통해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낫게 한다는 소식입니다. 우선 기뻤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병자를 그곳까지 어떻게 옮겨가는가 하는 과제가 큰 고민거리로 대두되었습니다. 병세가 어지간하면 누군가가 교대로 부축을 하면서 힘겹게나마 걸어서 갈 수 있을텐데, 병이 워낙 깊어질 대로 깊어져서 도무지 방법이 없었습니다. 휠체어도, 자가용도, 구급차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참으로 곤란했습니다. 가족들은 고민 끝에 아이디어를 하나 고안해냈습니다. 병자를 옮겨가기 위해 간이침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무막대를 달았습니다. 들것을 만들어서 환자 눕혔습니다. 축구시합 때 부상당한 선수들을 라인 밖으로 옮겨갈 때 사용하는 들것 모양이었습니다. 가족들은 교대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병자를 예수님이 계신 집 앞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도착해보니 더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 앞에서는 치유를 받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대전 엑스포 입장할 때 줄 섰던 것 보다 더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줄서서 기다리다가는 적어도 이박삼일은 기다려야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기력이 쇠한 병자에게 치명적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편법이지만 한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지붕으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지붕을 통해 병자를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방으로 내려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상천외한 일, 해도 해도 너무한 일, 도무지 예의가 아닌 일,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극진한 마음을 눈여겨보십니다.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팀플레이’를 높이 평가하십니다. 끝까지 병자를 포기하지 않은 가족들의 지극정성 앞에 탄복하십니다. 치유를 향한 그들의 적극성, 구원받고자하는 그들의 능동성,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 간절하고도 열렬한 마음 앞에 예수님의 마음 또한 움직입니다. 오늘 제 안에 들어있는 중풍병자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고칠 수 없는 심각한 마음의 질병을 바라봅니다. 제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형제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 새 삶을 살아보겠다는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자비, 연민의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대림시기의 독서와 복음 대림시기 1주간 월요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복음은 어떤 기준에 의하여 선택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하지만 딱히 어떤 선택의 기준을 찾을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마태오와 루가복음에서만 선택된 부분이 장(章)의 순서에 따르지 않고 임의로 봉독된다는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연중 제10주간부터 34주간 사이에 봉독된 적이 없는 대목을 택한 경우가 많다. 굳이 대림시기에 봉독되는 복음의 내용을 말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일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이 가져오는 징표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병자와 소경치유, 죄사함 등의 기적과 억눌린 백성들에 대한 배려와 위로를 들 수 있다. 둘째는 메시아적 징표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로서 믿음과 불신을 대립시킴으로써 믿음이 하느님나라의 보장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셋째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대조하여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역할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 이상으로 메시아의 정체와 권위가 출중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림시기의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복음을 항상 독서에 연결시켜 묵상하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 봉독되는 독서가 거의 이사야예언서에서 발췌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사야예언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집필된 세 권의 예언서가 한데 묶여 있다. 제1이사야(1-39장)는 오직 하느님만이 절대자요 주님이시라는 주제를 가지고 하느님께 충실할 때 구원이 가능하며, 구원의 징조는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임마누엘이 되어 메시아가 되리라는 것을 예언한다. 임마누엘이 곧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제2이사야(40-55장)는 이스라엘 백성의 바빌론 귀양살이(BC 587-538)를 배경으로 그들에게 희망과 위로, 해방과 자유를 제시한다. 특히 유명한 네 번의 “야훼의 종의 노래”를 통하여 야훼의 종이 바로 백성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사할 고난과 죽음을 불사하는 메시아임을 밝혀준다. 이 또한 신약의 인자(人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고된 모습이다. 제3이사야(56-66장)는 이스라엘이 귀양살이를 끝내고 귀환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됨을 예언하면서 이로써 옛 것은 지나가고 새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을 선언한다. 이 또한 고난과 죽음을 불사한 신약의 메시아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와 세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서(이사 35,1-10)를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독서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친히 오시어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구원이 무엇인가? 구원은 말이 아니라 실재(實在)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며,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기뻐 뛰고,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며,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른다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 뿐만이 아니다. 그곳에 크고 정결한 길이 환하게 트여, 그 길이 ‘거룩한 길’이라 불린다고 했다. 자, 이제 복음을 보자.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복음 안에 성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임마누엘 하느님이 세상 안에 계시고 인간과 더불어 계시는데 중풍병자 하나 고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거룩한 길’을 세우는 데 있다. 거룩한 길이란 곧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예수의 반대자들에게는 중풍병자가 단지 치유되어 ‘일어나 걸어가는 것’(24절)에 만족해야 했다. 그들은 메시아의 도래와 현존의 표징을 읽을 수도 없었고, 그에 대한 믿음의 태도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자는, 비록 그 믿음이 주위의 도움을 받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육체의 병을 치유 받았음은 물론, 그 안에 죄사함을 통한 ‘정결하고 거룩한 길’을 닦고 그 길을 걸어가는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죄)을 하느님께서 치워주시고 다시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해주는 은총의 선물이 바로 고해성사다. 그러한 하느님의 마음을 읽기보다 단순히 자신의 죄만 생각하기에 고해성사가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지 못하기에 그 사랑의 성사인 고해성사가 억지로 해야 하는 의무로 다가오는 것은 아닌가 싶다. 오늘 복음에서도 치유를 받고자 하는 이들은 지붕까지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예수님 앞에 중풍 걸린 이를 내려놓는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우리도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뿐 아니라 “일어나 집으로 가라.”?는 말씀을 하신다. 함께하는 가족 품으로, 그래서 하느님께서 주신 행복한 삶의 자리로 돌려보내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하심은 우리를 다시금 행복의 자리로 돌려보내시는 사랑의 행위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하루 24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을까?’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의 영향과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여러분들이 보시는 새벽 묵상 글도 저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쓸 수 있도록 키보드가 있고, 저장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고, 글을 올릴 수 있는 인터넷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든 것을 제가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다 배워야 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이 모든 일을 혼자 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심지어 먹을 음식과 살 집과 입을 옷과 움직일 자전거 그리고 컴퓨터까지 이 모든 것들을 제가 다 만들어야 한다면 과연 가능할까요?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내게 있어 필요한 그 모든 것들을 만들어 주는 그 사람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모르는 그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감사해야할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야 합니다. 즉, 내가 할 수 있는 분야에 있어 최선을 다할 때, 내가 모르는 그 누군가를 위해 도움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사실 중풍에 걸린 이 환자가 한 일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를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온 남자 몇이 가장 큰 공을 세웠지요. 그들이 지붕의 기와를 벗겨 내고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하면서 그를 치유하신 이유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나의 능력과 재주로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다른 이들 때문에 내가 구원받을 수 있으며, 다른 이들 덕택에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줄여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받는 상처보다 어쩌면 내가 그들에게 받는 이익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 간단한 진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들은 매 순간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의 이웃을 통해서 받게 되는 기적인 것입니다.
치유의 손길을 내밀고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영적 치유는 오늘날 사제들을
통해 고해 성사의 은총으로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쉬는 교우들이 교회로 돌아오길 꺼려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고해 성사의
부담’을 꼽고 있습니다. 물론,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고해 성사는 자신의
죄를 숨김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때론 불편하고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고해사제와 인간적 관계가 깊은 경우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통회하오니…”라는 장막 뒤에 숨고 싶은 유혹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 너머에 현존하는 ‘사랑과 화해의 성사’가 주는 깊은
은총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죄와 죄의 고백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오래전에 1박 2일 청년 피정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성체를 모셔야겠다는 열망이
하도 커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지도신부 면전에서 저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대해
영적 상담 겸 고해 성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사 내내 사시나무 떨 듯
떨었는데, 고해가 다 끝난 후 신부님께서 “○○야, 용기를 내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앞으로도 죄 뒤에 숨지 말고 빛의 자녀로 살아가자”라는 말씀을
해주시자, 정말 가슴이 그렇게 벅차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가라”는 말씀은 지금도 제 마음속에 깊이 새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통해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는 것을 보고
두 부류의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소개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 두려워하며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고 합니다.
疑訝함과 神奇함.
그런데 우리가 잘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에게 의심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기만 하면
용서하시고 치유를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의아해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과연 하느님이시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기적이 아니라
그 말씀과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소박한 대중은 예수님께서 하신 신기한 일을 보고
놀라워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합니다.
일반 대중은 예수님이 하신 신기한 일을 보는데
지도층은 왜 일보다도 예수님을 볼까요?
오래 전 이야기인데
상고 출신이신 분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 제가 아는 한 분은
상고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그분이 대통령이 되자 대단히 아니꼽게 여기셨습니다.
제가 아는 그분은 서울 대학 출신이었습니다.
이념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기에
이념과 가치관에 따라 대통령이 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제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학력 때문에 대통령을 거부하고
대통령을 거부하기에 대통령이 하는 것은
무조건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 당시 지도층에 있었던 사람들도
예수님께 대해 이런 아니꼬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아니꼬움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에게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소박한 대중은 예수님께서 하신 신기한 일을 봅니다.
예수님께 대한 아니꼬움이 없기에
神奇한 일은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임을 의심 없이 믿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이 놀라운 일들을 통해 오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가 노래하듯
사막과 같은 이런 이들 안에서 하느님은 꽃 피고
이런 이들에게 “그분께서 오시어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거지 부부는 자기들도 이러한 호강을 받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 집에 가서 둘이 나란히 담에 등을 비비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자기 담에 등을 비비는 거지 부부를 본 부자는 또 물었지요.
“아니, 당신들은 제 집 담에 왜 나란히 서서 등을 비빕니까?”
이에 남편 거지가 “등이 가려워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했지요. 이 말을 듣자마자 부자는 갑자기 안색이 나빠지더니, 집 안으로 들어가서 몽둥이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이 부부를 때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 부부는 대접해 주기는커녕 몽둥이찜질을 하는 부자에게 억울하다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말합니다.
“저번 거지는 혼자였으니 등이 가려우면 담에 비빌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는 둘이 아니냐? 그것도 가장 가까운 부부. 그러니 등이 가려우면 서로 긁어주면 될 것을 뭣 때문에 남의 집 담에다 등을 비비느냐?”
혼자는 못해도 서로 도우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부부 안에서도 함께 하지 못하고 서로 잘 났다고 따로따로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요?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는 함께 하는 우리들 안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한 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면서 말씀하시지요.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가 혼자서 걸어왔을까요? 아니면 큰 소리로 고쳐달라고 외쳤을까요? 아닙니다. 이 중풍병자가 스스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바로 남자 몇이 이 중풍병자를 평상에 누인 채, 지붕의 기와를 벗겨서 내렸지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남자 몇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셨고, 중풍병자의 병을 치유하십니다.
나의 죄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나만의 선행을 통해서? 나만의 믿음을 통해서? 아닙니다. 함께하는 마음 안에서 용서받고 구원될 수 있음을 오늘의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제는 나는 과연 함께하고 있는지, 아니면 혼자서만 모든 일을 다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를 떠올려보세요. 함께하는 곳에 주님께서도 함께 하십니다.
혼자하려 하지 말고, 함께 하세요.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급격한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생기고, 고통에 못 이겨 절망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 한 사람이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치유의 은총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병의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병자 혼자의 믿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점을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표현하고 있지요.
즉, 친구들이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병자를 내려 보낸
행동 때문에 죄의 용서를 받고 병도 치유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내 형제의 아픔을 그저 남의 아픔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
적극적인 행동으로 중풍병자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다른 사람이 있기에
나 역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나는 내 친구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을까요?
성하 씨는 가지고 온 침으로 자매의 열 손가락을 땄다. 검은 피가 꽤 나왔다. 형석 씨는 자매의 어깨에서부터 안마를 시작했다. 혜영 씨는 미니포트에서 뜨거운 물을 따라 먹이고, 미해 씨는 젖은 수건을 자매의 이마에 얹어놓았다. 그때마다 윤봉 자매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신뢰하고 맡겼다. 갑자기 돌팔이 의사로 변신한 동행들과 녹초가 되어 의자에 늘어진 윤봉 자매. 그러나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다음 날 윤봉 자매는 정말 신기하게 다 나았다고 간증처럼 고백했다.
오늘 복음에서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다 놓으려고 애를 쓴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참으로 꽃보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터키의 자연과 경치, 경이로운 유적, 홍차, 발리댄스`….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동행한 사람들과의 나눔이었다.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영광과 행복을 주실 것을 예언하도록 하심으로써 그들을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신다. 하느님 백성이 지나가야 할 메마른 땅과 사막은 꽃들이 만발한 기쁘고 복된 낙원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황무지도 레바논이나 가르멜, 사론처럼 비옥하고 아름다운 옥토가 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므로 축 늘어진 두 팔과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꼿이 세워라.
삶의 의미와 목적을 잃고 살아갈 힘조차 잃어버렸지만, 하느님께서 오시어 새로운 삶의 의미와 보람을 주시고, 능력을 주신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억압했던 원수들에게 공의로운 보복을 하시고, 당신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2테살 1,6-7 참조).
그 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며, 절름발이와 벙어리도 완전히 치유될 것이다. 육적으로 치유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완전히 치유됨으로써 전인격적으로 구원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찬미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며, 불볕의 땅이 늪이 되고 승냥이의 소굴이 기름진 초지가 됨으로써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불모지가 낙원으로 변한 그 곳에 하느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길이 트이게 되리라. 그 길은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 자녀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지나가지 못하고, 오직 주님께서 몸값을 지불하고 구원하신 의롭고 정결한 이들만이 지나갈 것이다.
이 길을 걷는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느님 백성의 목적지인 시온에 도착하리라. 그곳에는 하느님 백성이 갈망하는 참된 행복과 안식이 있으며 사라지지 않는 기쁨이 있다. 그곳에서 그들은 항상 기쁨과 즐거움에 넘치고, 슬픔과 탄식은 멀리 사라질 것이다.
바빌론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이 약속으로부터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하느님의 도성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굳게 믿었다. 그 도성에는 그들이 꿈꾸던 참된 행복과 평화, 안식이 있음을 생각하며,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현실의 고난을 이겨내며 살았다.
종살이의 고통과 모멸감은 그들로 하여금 두 팔이 축 늘어지고 두 다리가 휘청거리게 했지만 하느님의 약속은 그들의 팔다리에 강한 힘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공정하게 갚아주시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하느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종살이의 고통과 시련을 이겨냈던 것이다.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고, 고통을 참아 견딜 수 있으며, 삶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다.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실의와 절망에 빠지지 않으며, 설사 실의와 절망에 빠진다할지라도 쉽게 벗어날 수 있다. 믿음과 희망으로부터 우리는 위로를 받고 힘을 얻으며, 용기와 격려를 받는다.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거나 원수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모두 다 갚아주실 것임을 믿음으로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그 천대받는 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이사 49,13) 하느님이시다. “어미가 자식을 달래듯이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는”(이사 66,13) 하느님이시다. 비록 당신 백성이 당신을 거스르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나는 높고 거룩한 보좌에 앉아 있으면서도 얻어맞아 용기를 잃은 사람들과 함께 살며 잃은 용기를 되살려주고,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해주리라.”(이사 57,15) 하고 용기를 주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처럼 좋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이윤벽 신부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말씀은 중풍에 걸린 환자의 믿음을 보시고 치료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대림시기입니다. 이 대림시기에 생각나는 단어가 있는데 ‘마라나타’입니다. 마라나타는 코린토일서 16장 22절에서 바오로 사도가 사용했는데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용했던 히브리말을 희랍어로 번역했을 때 글자 그대로 소리나는대로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띄어쓰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 내용이 달라지는데 “마라 나타” 하면 “우리 주님 오셨도다.”라는 환호의 외침으로 3자 입장에서 지켜보는 소극적인 의미가 됩니다.
하지만 “마라나 타”하면 “우리의 주님 오소서!” 라는 의미의 간절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면으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꼭 오셔야한다는 것입니다.
저희들 시장사목에는 각 시장별로 기도모임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자매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자매님은 몇 년 전 보증을 잘못 선 까닭에 매일같이 심한 빚 독촉을 받고 있습니다. 그 마음 고생에 하루하루가 너무나 힘이 든다고 합니다. 이 자매님에게 하느님은 ‘마라 나타’ “주님 오셨도다.” 의 소극적인 외침이 아니라 ‘마라나 타’ “제발 주님 제 삶에 오소서!”라는 절박한 기도의 대상인 것입니다.
이 자매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이 있는데 돈을 갚아야하는 사람이 우리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본당에서 열심히 하는 신자인데 기도드리러 가는 자매님을 보고 꾸짖으며 하는 말이 하느님이 돈을 벌어주느냐는 겁니다. 그럼 오늘 성서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복음의 중풍 환자는 너무나 적극적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지붕에 올라 기와까지 벗겨낼 정도니까 말입니다. 그에 비해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존재는 그들의 삶에 중요한 의미가 아니고 머리로써 판단하고 수군거리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봅시다. 나에게 하느님의 존재는 얼마만큼 절박하고 중요한가를 말입니다...........◆
왜 예수님은 치유하실 때 먼저 용서부터 하셨을까? 용서란 그 자체로 기적을 이루는 것일까? 사실 용서는 정서적·영적·육체적 기적을 불러일으킨다. 캐럴린 메이스는 워크샵 중에 일어난 일을 들려준다. 한 참석자가 용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거부반응을 보이며 그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내의 반대에도 친척에게 돈을 빌려주고 집을 담보로 보증까지 서주었는데 그 친척이 도망을 가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었던 분이다. 게다가 건강과 직장까지 잃게 되자 더더욱 그 친척을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란 다른 이가 잘했다거나 옳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캐럴린은 용서란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려는 새로운 인식이라고 말한다. 그 상처가 나를 지배하지 않고 상처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상처 안에 숨겨진 선물을 찾는 것이다. 아무리 큰 상처라 하더라도 그 안에 숨겨진 선물이 있다. 적어도 같은 상처를 입은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되지 않은가? 우리가 한 가지라도 숨은 선물을 찾게 된다면 새롭게 나아갈 수 있다. 받은 상처를 계속 붙들고 있으면 나 자신이 피해자가 된다.
그날 그 남자는 강의를 듣고 더이상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석 달 후에 인생이 변하고 그 친척을 완전히 용서했으며 건강도 찾고 일자리도 얻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이번 대림절엔 내가 용서할 이는 누구인지, 혹 나부터 용서해야 하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용서가 힘들다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그 힘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 은총을 하느님께 구하자.
‘지성이면 감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어쩌다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함없는 사실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간절하다’는 것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외국어에서 ‘간절함’(영어의 supplicate, 프랑스어의 supplier)은 ‘바닥’(sub)에 완전히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린’(plier) 모습입니다. 마치 깨끗한 물을 떠놓고 두 손을 싹싹 빌어 소원을 비는 모습과 다를 바 없고, 동냥하는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고 손을 내밀어 그 간절함을 표시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중풍병자뿐만 아니라 그를 쭉 지켜보던 이웃들의 간절한 마음이 드디어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님 앞에 그를 보여 줍니다. 이 간절한 마음은 하늘에 닿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라고 할 때의 ‘섭’(攝)이라는 말처럼, 하느님은 귀를 쫑긋 세우시고, 그것도 부족해서 손까지 귀에다 대고 들으시는 분이기에, 온전히 바닥에 굽히고 간절히 청하는 이의 기도를 굽어 들으십니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표현을 쓰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든, 간절한 이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의 답변은 오로지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거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중차대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간절한 이의 소원과 그것에 화답하는 이 사이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일상 안에서 ‘간절히 청하오니’라고 기도하는 그 ‘간절함’이 진정한 것이라면, 굽어 살피시는 분의 답변은 어쩌면 여러 다른 표현으로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시절에 유다인들은 중풍이라는 병은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중풍에 걸린 사람은 하느님께 큰 죄를 지어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된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중풍에 걸린 것도 불행한데 사람들에게 이런 오해를 받고 죄인 취급당하는 것은 더욱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는 자신의 가정으로부터, 이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했습니다. 자신은 병자이면서 죄인이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 늘 부끄러워하면서 외롭게 지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뎌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보면 그 중풍병자는 치유되고 나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중풍을 치유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럼으로써 그가 더 이상 죄인 취급당하지 않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신의 집으로, 사회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도 모두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우리는 오늘 참으로 신기한 일을 보았다’하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곧 치유된 중풍병자와 그 광경을 지켜 본 사람들 모두 하느님을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여전히 불만에 차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건 아마도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 질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찬양하도록 늘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했을 때 불만을 갖는 것은 그들에게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 사실보다 자신들의 위치가 더 중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중풍에 걸린 환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누구보다 기쁜 사람이 되었지만 그 일을 질투하는 이들은 겉은 성한 사람이지만 영혼에는 중풍이 찾아들어 점점 더 굳어져 갔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살아가면서, 특별히 신앙생활하면서 어떤 사람을 질투하여 그 사람의 좋은 일까지도 비난하고 방해한 적은 없는지 반성해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처럼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쌍심지를 켜고 반대한 적은 없었는지 나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내 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좋은 일, 옳은 일을 행하였다면 그 일만큼은 인정해 주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왔고 올 때는
평상에 누워서 왔던 병자가 갈 때는 일어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복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바리사이와 율법교사들이 나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마땅해 한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 그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었지만 지붕의 구멍을 뚫어서까지 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다.
믿음은 아니더라도 예수님께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일을 보고 놀라 하느님을 찬양한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말하기를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아마 병자를 데리고 왔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찬양하였을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과 관련해서 하느님의 일을 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 중에는 고해성사를 어려워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고해성사 때문에 신앙생활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부끄럽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제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야 한다는 인간적인 마음이 가득 차 있다.
하느님의 일을 너무 인간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신기한 일, 기쁘고 감사한 일이고
지금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모든 일들 하나하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더나아가 오늘 독서 말씀처럼, 광야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 냇물이 흐르고 눈먼 이가 보고,
귀먹은 이가 듣고,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는, 다시 말하면, 우리 일상의 모든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보고 기뻐 감사하면서 하느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의 정화가 필요하다.
하느님의 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을 정화해야 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게 될 것이다.”
(마태5,8)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보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강영구 신부-
당신은 당신이 곤경에 빠졌을 때 도움의 손을 내밀어줄 이웃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도움의 손을 내밀기는커녕 당신이 당하는 고통을 고소하게 여기면서
더 깊은 구렁으로 밀어 넣으려는 이웃들로 둘러싸여 있다면 당신은 불행합니다.
평소에 당신이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준다면,
당신도 당신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좋은 이웃들을 가지게 됩니다.
당신이 이웃의 고통과 불행을 외면하면,
당신이 곤경과 시련에 빠졌을 때 이웃들도 당신을 외면합니다.
중풍에 걸려 꼼짝도 못하고 자리에 누워 지내는 환자이지만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이웃이 곁에 있기에 그는 외롭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환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이웃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중풍병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좋은 이웃들의 믿음 덕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새 삶을 시작합니다.
당신의 오늘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박상대신부-